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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꼭 회자되는 역사의 명장면이 있다. 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의 ‘무릎 꿇기’가 그것이다. 초겨울 비가 온 폴란드 땅을 적시던 그날,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는 한동안 입을 떼지도,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눈감고 두 손을 다잡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감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만행에 대한 사과가 있으리라고는 모두 예측했으나, 이 정도로 극단적인 사죄는 기대조차 않았던 것이다. 현장의 기자들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브란트가 무거운 일정들을 버티지 못해 쓰러진 거라 오해할 정도였다.

 

나치의 악행에 브란트가 책임져야 한다고 단언하는 이 또한 없었다. 브란트는 히틀러의 독재에 맞서다 노르웨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그곳에서도 저항운동 기관지의 기자로서 치열한 청춘을 보냈다. 뒷날 정적들에게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조국에 총을 쏜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참배를 마친 브란트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질문들이 쏟아졌다. 브란트의 대답은 간단했다.

 

“사람이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일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사실 브란트 수상이 무릎을 꿇은 추모비는 폴란드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움직이기엔 뭔가 어색한 곳이었다. 추모비가 기리는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폴란드 내의 유대인이 이끈 것이었다.

 

게토 이주에 이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될 위기에까지 몰린 유대인들은 대규모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투쟁은 한 달 동안 이어졌고, 나치는 게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고 초토화시켰다. 당연히 희생자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15,000여 명이 살해당했다. 비록 1년 뒤 폴란드인의 바르샤바 봉기의 마중물이 되고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인도 많았다지만, 나치의 편에 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폴란드인 또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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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트의 사죄에 끝까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브란트는 독일의 분단이 냉전체제가 낳은 비극이라 생각했다. 즉, 동·서유럽의 화해와 평화 없이 하나의 독일은 요원한 꿈이었다. 브란트는 ‘동방정책’의 깃발을 내걸고 동유럽을 향해 화해의 손을 내밀려 했다. 브란트의 추모비 참배 직후에는 서독과 폴란드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 조인이 예정돼있었다. 과거사 배상과 국경을 둘러싼 갈등 역시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쇼하고 있다”는 비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서독의 여론은 더 냉담했다. 당시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독 국민의 48%는 브란트의 무릎 꿇기를 과도한 굴욕외교로 평가했다. 패전 이후 독일인의 비틀린 피해 의식과 냉전 논리에 편승한 보수 야당은 브란트의 사죄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브란트의 ‘쇼’는 역사를 바꿨다. 진정성을 담은 브란트의 쇼는 다른 동유럽 공산국가의 마음까지 열었고, 브란트는 생전에 하나 된 독일에서 ‘통일의 아버지’라는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무릎을 꿇은 이는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이는 독일 국민 모두였다”는 평이 나온 이유다.

 

이렇듯 진솔한 쇼는 사람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켜 변화를 이끄는 힘이 있다. 윤리가 어떻고 도덕이 이러하며 당위가 저러하다고 애써 목청 높여봤자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기 일쑤다. 하지만 쇼는 다르다. 그것에 빠져든 이들 모두의 마음을 동시에 흔들고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는 잘 정제된 쇼가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지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다. 전쟁 가해국을 증오하던 사람들, 낡은 사고에 갇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던 사람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던 사람들 모두를 위로하고 달래고 격려하며 역사적 변화의 참여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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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깜짝 회동은 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트럼프와 김정은 옆에 끼어서 사진 찍은 것 말고 얻은 게 뭐냐고 묻기도 한다. 그들의 비난을 아예 부정할 생각은 없다. 보여주기식 쇼, 맞다. 그럼에도 나는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쇼’에 거듭 찬사의 박수를 보냈다. 세 정상의 만남을 보며 머릿속에서 한반도의 과거와 미래가 엇갈려 스치는 듯했다.

 

브란트의 사죄를 보면서 유럽 시민들은 적대와 폭력이 수놓던 어제를 되새기며 거기서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였는지 치를 떨며 곱씹었을 테고, 유럽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내일을 꿈꾸며 감격스러워했으리라. 관중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두 눈으로 보고 느끼며 변화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고, 이 믿음은 이심전심 퍼져나가 결국은 증오의 장벽을 허물었다. 바로 그처럼, 판문점에서의 만남은 내게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되새기는 한편 언젠가는 밝아올 미래를 낙관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앞으로 많은 난관이 닥치리라는 것은 안다.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안에 이뤄지지 않을 공산이 크고, 한반도 평화 무드는 트럼프의 재선 전략 중 하나로 그칠 수도 있다. 최악의 독재정권을 어떻게 순순히 신뢰할 수 있냐는 의구심 또한 확실히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나 하노이 회담 결렬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쇼’를 지켜보며 “역시 저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환멸과 냉소에 빠져있던 이들에게 “그래도 혹시나?” 하고 돌아볼 기회가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판문점 이벤트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판문점 회동으로 또 다시 핵전쟁의 카운트다운을 단 몇 년이라도 늦출 수 있었다는 것이다. 쇼의 힘이다.

 

 

“쇼는 계속되어야 해! 난 이를 악물고 맞설 거야. 난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야. 쇼를 위해서!”

 

- Queen, ‘The Show Must Go On’ 가사 중 - 

 

 

앞으로도 문재인 대통령이 험난한 현실에 무릎 꿇지 않고 당당히 맞설 의지를 가득 담아 쇼를 멈추지 않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관객을 감동시켜 역사의 장으로 이끌 수 있기를 바란다. 끝끝내 자신의 쇼를 새 역사의 상징으로 연출해낸 빌리 브란트처럼.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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