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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자를 안 쓰는 유일한 기공

 

노가다판엔 기공과 잡부가 어지럽게 섞여 작업한다. 딱 보면 안다. 누가 기공인지, 누가 잡부인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구분법이 있다. 바로 줄자. 현장에서 줄자를 차고 다닌다는 건 수치를 재는 사람이라는 얘기고, 그건 바꿔 말하면 설계도면을 볼 줄 알거나, 그에 준하게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 허리춤에 줄자를 차고 있으면 열에 여덟아홉은 기공이다. 이건 거의 모든 공정에 해당하는 구분법이다. 딱 한 공정, 미장을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아는 한 미장공은 줄자를 안 쓰는 거의 유일한 기공이다. 줄자뿐 아니라 수치를 재거나 계산하는 어떠한 연장도 쓰지 않는다. 오직 직감에 의존한다. 이번 편, 미장공이다.

 

인력소에 다닐 때, 미장 데모도(조수라는 뜻으로 일본어 てもと[데모또]에서 파생)로 자주 갔다. 처음에는 다른 인부들이 꺼려해서 떠밀리듯 갔다. 막상 가 보니 적성(?)에 잘 맞았다. 해서, 두어 번 군말 없이 다녀왔다. 그 다음부터 미장 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으레 나를 보냈다. 나야 땡큐였다.

 

남들은 미장 데모도가 힘들다고 하는데 난 좋았다. 일당도 만 원 더 주는 데다가 재미도 있었다.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시멘트 몇 포대와 물 몇 통 날라주는 게 전부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장공이 작업하는 어딘가에 끼어들 여지가 없단 얘기다. 왜 그런지는 뒤에서 얘기하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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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 데모도가 아침에 하는 일은 세팅이다. 시멘트와 모래, 물, 그리고 그것들을 섞는 전동 믹서 드릴을 작업장으로 나르는 거다. 전동 믹서 드릴은 주방에서 쓰는 핸드형 믹서기의 큰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장공들은 그냥 ‘기계’라고 표현한다. 세팅이 끝나면 사모래를 만든다. 미장할 때 벽에 바르는 걸 현장에서는 사모래라 부른다. 시멘트와 모래, 물을 적정 비율로 섞어 놓은 거다.

 

만드는 순서는 다방 커피 탈 때와 같다. 다방 커피 탈 때도 입자가 굵은 커피, 설탕, 프림 순으로 넣고 섞는 것처럼, 사모래도 통에 모래 먼저 넣고 시멘트 한 포대를 넣은 후 물을 붓는다. 그러고 나서 물과 모래를 조금씩 더 넣어 가며 비율을 맞추는데, 이즈음 미장공이 등장한다. 사모래의 적정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미장공의 감이다. 사모래를 벽에 바를 때와 천장에 바를 때, 혹은 그날 날씨나 모래 입자 등등에 따라 비율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데모도가 모래와 시멘트 한 포대, 물을 적당히 넣어 섞고 있으면 쓱 다가와 눈으로 힐끗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질어. 모래 좀 더 넣어. 두어 삽만 더 넣으면 되겄다. 그려 그려. 됐네.”

 

숙연한 공기가 좋았던 거 같다. 사모래를 다 섞고 나면 미장공은 고데(사모래를 벽에 바를 때 쓰는 도구. 우리말로는 흙손이다. 일본어 こて[고테]에서 파생)와 고데판을 물로 정갈하게 닦는다. 물에 담가 휙휙 헹구는 게 아니다. 붓으로 구석구석 꼼꼼하게 닦아 낸다. 그러니 정갈하게 닦는다는 표현이 맞다. 준비를 마친 미장공이 양손에 고데와 고데판을 들고 서 있으면 뭐랄까, 영화 <300>의 전사 같은 비장함이 느껴진다. 한 손에 창,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적진에 뛰어가기 전의 딱 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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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데모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온전히 미장공 몫이다. 사모래를 두어 번 퍼서 고데판에 올려놓고, 고데로 조금씩 떠 벽에 바른다. 손으로 전달되는 질감에 의존해 벽을 평평하게 발라나가는 거다. 하나의 벽면을 모두 바르고 나면, 미장공은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말한다. 우선 붓을 물에 적셔 벽을 훑어낸다. 그 자리를 고데로 더욱 평평하게 다진다. 하나의 벽면을 완성하기까지 그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다.

 

얼핏 단순한 반복 작업 같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내 눈에는 대충 펴 바른 벽이나 수없이 다져 평평하게 완성한 벽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미장공은 이리 살펴보고 저리 살펴보면서 미세하게 어긋난 부분을 다지고 또 다진다. 난 그 시간이 좋았다. 벽 앞에 우두커니 선 미장공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간 말이다. ‘서억서억’ 하며 울려 퍼지는 소리도. 서서히 굳어가는 벽을 고데로 밀고 나갈 때 생기는 마찰음이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음,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그 분위기, 그런 공기가 좋았던 거 같다.

 

 

시간과 싸우는 사람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미장공에게,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지난 편에서 소개한 곰방꾼이 중력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미장공은 시간과 싸우는 사람이다. 시멘트는 시간이 지나면 굳어 버린다. 하나의 벽면을 펴 바르기 시작했으면, 그 벽면을 마무리할 때까지 꼼짝할 수 없다. 점심시간이 됐다고, 다른 기공들처럼 하던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연장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길어야 10분 남짓한 간식 시간에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작업 시작할 때처럼 모든 연장을 물로 정갈하게 닦아놓는다. 잠깐이지만, 그사이 연장에 묻은 시멘트가 굳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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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적신 붓으로 벽을 훑어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자꾸만 자꾸만 물을 발라, 시멘트 굳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거다. 말하자면 미장공은 물로 시간을 사서, 그 시간만큼 벽을 더욱 평평하게 다져나가는 거다.

 

그런 걸 보면 미장공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멘트나 모래가 아니라 물인 것 같다. 필요한 시간을 연장해 주는 재료니까.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한 벽을 보고 있으면, 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별것도 아닌 회색 시멘트 벽인데 말이다. 그 벽에 담긴 복잡다단한 함의가, 조금은 느껴져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