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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6년 유방에 의해 세워진 한나라는 서기 9년에 신나라에 의해 잠시 폐업하였지. 우리는 이를 '전한'이라 칭하고 있어. 이후 한나라의 후손인 광무제가 서기 25년에 후한으로 그 문을 다시 연 후, 서기 220년까지 역사를 이어가는데! 이 중 전한의 7대 황제 한무제 때 등장한 중국 역사학의 갓파더 사마천 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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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마천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준 한 전투현장으로 가보자고. 한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 정벌에 나선 장군 이릉은 적군에 완전히 포위되었어.

 

“이대로 싸우다가 죽느냐, 적에게 항복한 후 훗날을 도모하느냐가 문제로구나.”

 

이릉은 5천 명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흉노와 싸우고 있었고, 한무제의 측근인 이광리 장군은 대군을 이끌고도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하는 상황이었어. 이릉은 한마디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여론의 지지를 받을만한 상황이었어.

 

“그래! 나도 할 만큼 했다. 그리고 조파노 장군도 적에게 항복한 후, 탈출하여 다시 관직까지 받지 않았나!”

 

결국 이릉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지. 이 결정의 나비효과가 사마천의 남성성을 앗아갈 줄 누가 알았으랴!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나라의 태사령을 지냈던 인물이야(그도 훗날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되었고). 사마천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역사 조기 교육을 받게 되었어.

 

“아들아! 우리 집안은 역사학계에서 잔뼈가 굵은 집안이다. 그러나 역사서는 책상에 앉아서만 쓸 수 없다. 너도 이제 20살이 되었으니 문화유산 답사를 떠나도록 하거라!”

 

이리하여 청년 사마천도 한국의 유홍준 교수님처럼 길을 나섰고, 이런 현장답사는 관리가 되고 나서도 이어졌어. 현장경험이야말로 위대한 역사서인 사기의 밑거름이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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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에게 유언을 남기는 사마담(이미지 출처 - 링크)

 

사마천이 30대 중반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임종을 지키기 위해 급히 근무지에서 달려왔어.

 

“아들아! 황제께서 태산에 봉선의 의식을 올리셨다. 그런데 나는 직책이 낮다는 이유로 참석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령의 자리에 있기에 더욱 더 뼈아프다. 네가 이 아비의 이루지 못한 꿈을 반드시 이루어주기 바란다.”

 

아버지의 유언과 자신의 의지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사마천은 역사서 제작에 박차를 가했어. 그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처럼 절친 임안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고 해.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 수 없지 않은가? 대외활동을 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집안일도 신경 못 쓰고 오직 역사서 편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네.”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사마천이 40대 후반이 된 기원전 99년. 마침내 이릉의 항복이 일으킨 나비효과가 사마천을 덮치게 되었어.

 

“폐하! 흉노에 항복하고 포로가 되어 목숨을 부지한 이릉 장군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탈출하여 우리 한나라로 돌아온다고 해도 극형에 처해야 할 줄 아뢰오.”

 

“태사령 자네 생각은 어떤가? 괜히 내 눈치 보지 말고 역사적 관점에서 자네의 생각을 말해보게.”

 

“소신은 이릉 장군과 아무런 인연도 없기에 가감 없이 말씀드리겠나이다. 이릉 장군은 10배가 넘는 흉노군과 싸웠기에 패배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오히려 폐하의 측근인 이광리 장군의 실책이 크다고 사료되옵니다.”

 

“그래? 다른 신하들과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구나! 그럴 수 있지. 허나… 여봐라 사마천을 당장 하옥시켜라!”

 

“아니 이게 무슨? 이것은 명백한 팩트이옵니다!”

 

사태는 사마천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어. 흉노에 잡혀있던 이릉 장군이 흉노를 위해 일한다는 가짜뉴스가 한나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일가족은 참형을 면치 못하게 되었어.

 

“폐하! 이릉 장군을 변호하던 사마천도 극형으로 다스려야 할 줄 아뢰옵니다.”

 

사마천은 고대 중국부터 무려 3천여 년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어.

 

“이보게 무슨 방법이 없겠나? 나는 여기서 죽을 수가 없네. 아버님과의 약속을 떠나 내 필생의 숙원사업을 마쳐야 하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한나라에서 사형수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뿐. 우리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 없는 보석금을 내거나, 궁형을 택하는 것인데… 결정은 자네가 하게나.”

 

“궁형이라... 사기를 완성하는 일이 살아남아 평생 수치를 받는 일보다 가치가 있는지 하루만 생각해 보겠네.”

 

이 당시 궁형에 대한 사회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 위대한 성인 공자가 위나라의 영공이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된 자와 마차에 함께 오르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해.

 

“아니 궁형을 받은 자와 동석을 하다니! 이 나라는 안 되겠다.”

 

공자가 이 정도니 일반 대중들이 궁형을 당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훨씬 심했겠지? 사마천은 결국 궁형을 택했고 자유의 몸이 된 이후로 더욱 사기 편찬에 온 열정을 불태웠어. 마침내 위대한 역사서인 사기를 완성한 후, 그의 베프 임안에게 아래의 내용과 같은 편지를 보냈어.

 

드디어 대업을 마쳤네. 사기는 대략적으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네.

 

왕조의 사건을 시대순으로 기록한 본기 12권

 

도표나 연표로 역사를 설명해주는 표 10권

 

각종 제도를 다룬 서 8권

 

최고 권력자에 버금가는 인물들을 다룬 세가 30권

 

사회 각계에 걸친 주요한 인물들을 다른 열전 70권 등 총 130권으로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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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각 편의 마지막에 '태사공 왈'로 시작하는 자기 생각을 실었어. 사기 중 백이열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고, 필자가 오늘의 시대에 빗대어 아래와 같이 인용을 해보았어.

 

하늘의 도는 사사롭지 아니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과 함께 한다고 하는데,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독립투사는 바른 사람들인가? 그들의 후손들은 굶어 죽은 이도 허다하다. 극악무도한 친일파는 날마다 선량한 사람들의 등골을 뽑아먹고 간을 꺼내 먹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같은 민족을 짓밟았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