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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반환 22주년 전야

 

1997년 7월 1일 홍콩이 반환된 이래, 매년 7월 1일 불꽃놀이 행사가 열린다. 그런데 22년 만에 처음으로 취소됐다. 홍콩 행정부가 몰리긴 몰렸다고 생각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상, 불꽃놀이 취소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확실하게 밀리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계산된 제스쳐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체면을 구겼고, 중국 송환법 논의도 중단할테니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의미였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홍콩이 중국의 일부가 된 날'을 축하하는 걸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중국인들을 위한 이만한 정치선전의 장도 없었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대거 홍콩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이미 시민사회는 중국 송환법을 넘어, 

 

'캐리 람의 퇴진'

'6/12 경찰 폭력 사태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치'

 

를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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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에 이어 6월 30일에는 홍콩교육대 학생이 '캐리 람 퇴진, 구속자 석방, 중국 송환법 반대'를 외치며 투신했다. 집회 전날이었다. SNS가 들끓었다. '보복', '복수'라는 말이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처음 등장했다. 심상치 않았다. 

 

이튿날, 반환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홍콩 컨벤션 센터가 봉쇄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소한 7월 1일은 중국인 관광객에게는 홍콩 여행 대목이다.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홍콩의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홍콩에 방문했다(중국은 그간 홍콩 관련 보도를 거의 내보내지 않았다. 자국민의 홍콩 관광을 막으면 이상하게 보일 걸 우려했는지 홍콩 관광을 방치했다). 홍콩 컨벤션 센터의 반환기념비를 둘러보며 아편전쟁 이후 다시 굴기한 조국에 자긍심을 가진다. 이게 중국인들의 홍콩 여행 패턴이다.

 

패키지 여행은 홍콩 컨벤션 센터가 봉쇄됐다는 걸 알고 이미 다른 일정으로 돌렸지만 개별 여행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봉쇄된 컨벤션 센터를 방문했다가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보고서 우왕좌왕 하다 돌아갔다. 그들은 불꽃놀이 행사가 취소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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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홍콩이 현재 어떤 분위기인지도 모른 채 오성홍기를 들고 다녔고, 홍콩 시민들은 그 광경을 씁쓸하게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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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시위의 무대가 될 코즈웨이베이, 완차이, 애드머럴티 일대에선 집회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이 벌어지고 있었고, 침사추이에서는 ‘힘내라 홍콩’ 버스킹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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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렁’이라 알려진 노란 우비의 홍콩인이 투신한 곳으로 갔다. 보름이 흘러 규모가 줄어들어 있었다.

 

자리를 지키던 중년 여성이 '중국인 관광객들이 해꼬지를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인가 덩치 좋은 남성 한 명이 함께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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렁의 투신장소에는 홍콩 사람들이 가져다놓은 일종의 헌물들이 있었다. 중국의 서쪽, 서왕모가 산다는 쿤룬산 昆仑山 에서 채취한 설국과 히말라야 핑크솔트가 저세상으로 간 렁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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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장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서는 친중국 집회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 추산 5만이 모인 그 집회에는 가수 알란 탐과 1992년작 영화 연인 L’Amant 의 남자 주인공역을 맡았던 양가휘가 나와 홍콩 법치를 수호하고 중국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을 비난했다.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맞불집회를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거리엔 아직도 중국인 관광객이 그득한 채로 6월 30일은 저물어 갔다.

 

 

친중 선박시위

 

7월 1일 오전 8시, 간헐적으로 비가 오고 있었고, 반환기념식 행사는 약식으로 치러졌다. 

 

1시간 전부터 시위대는 홍콩 컨벤션 센터와 정부 청사를 점령하려고 했고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며 강경진압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이날 홍콩 당국이 시위진압 목적으로 약 5천 명의 경찰을 홍콩섬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고 보도했다. 홍콩 전역에 총 32,000명의 경찰이 있으니 전체의 16%가 동원된 셈이다.

 

당국은 안전을 위해 홍콩 지하철 완차이역(홍콩 컨벤션 센터 인근), 애드머럴티역(정부청사,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군 사령부 인근)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다행히 침사추이에서 홍콩 컨벤션 센터를 직접 연결(침사추이-완차이 구간)하는 스타 페리는 정지령에서 제외됐다. 침사추이에 머물고 있는 나는 페리를 타고 홍콩 컨벤션 센터까지 가는 게 가장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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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안에서 검정색으로 옷을 맞춰입은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족, 연인, 친구끼리. 연령도 다양했다.

 

완차이 스타 페리 터미널에서 내려 왼쪽으로 가면 행진이 시작되는 빅토리아 공원으로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강경파 시위대가 모여있는 홍콩 정부 청사로 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 길이 갈렸다.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들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이미 반환기념 행사가 끝난지라 컨벤션 센터로 가는 길은 열려있었다. 이미 행사가 끝난 탓인가 시위대도 크게 없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홍콩의 중국 반환을 상징하는 바우히니아 광장에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더웠다.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일단 풍경을 응시하자 웬 여행자가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준 뒤 몇 마디 나눴다. 베이징에서 놀러온 여행자였는데, 지나치게 밝았다. 홍콩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내 옆에는 역시 그늘에서 쉬고 있던 검정옷 커플이 있었다. 한국 기준으로 고등학교 1학년. 컨벤션 센터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겠냐며 무작정 추가 시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 커플은 텔레그램 단톡방의 멤버가 아니라 어디로 언제까지 모여야한다는 ‘긴급전달’로부터 약간 소외된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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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컨벤션 센터 쪽으로 바짝댄 화물선이 뱃고동을 울리고 있었다. 항구 쪽으로 나가보니 한 대가 아니었다. 여러 대의 배에는 하나 같이 거대한 플랜카드를 달려있었다.

 

‘법치수호’

‘경찰지지’

‘폭력반대’

‘조국회귀 22년, 영광의 홍콩’

 

친중국 선박이었다.

 

말도 안 되게 낡은 그 배에는 사람이 없었다. 망원렌즈로 확인해봤지만 조타실의 한 명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있었다. 서른 척 가량의 배가 고동을 울리며 홍콩 컨벤션 센터를 스쳐 코즈웨이베이의 요트 클럽 쪽에 집결했다. 저 위치면 빅토리아 공원 안에서야 안 보이겠지만 행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볼 수 있다. 일종의 위협 시위였다. 

 

 

오성홍기 하강식

 

스무 명 가량 되는 검정옷 무리가 갑자기 홍콩 컨벤션 센터에 난입했다. 곧장 국기 게양대로 가 열 명이 주위를 둘러싸더니, 남은 열 명이 오성홍기를 내려버렸다(홍콩의 국기게양대에는 오성홍기와 홍콩행정부기가 함께 걸리는데, 오성홍기가 홍콩 행정부기보다 높게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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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전격적'으로 벌어진 사건. 상황파악을 하고 다가갔을 때는 오성홍기는 내려온 상태였다. 그들은 오성홍기를 내던지고 홍콩 행정부기를 조기 상태로 만들고 도망갔다. 한 중국인 관광객이 국기가 떨어진 걸 보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와 회수했다.

 

나는 그 무리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얼른 쫒아가 기자임을 밝히며 동행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쪽도 외신기자가 따라붙는 건 처음인지 쉽게 허락했다. 혹시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이 노출되면 그것만 지워달라고 당부를 받았다.

 

인터뷰에 응한 웡은 고등학교 2학년이다. 그는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한국인은 이번 시위를 어떻게 보냐? 우리를 지지하냐? 수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 취재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너희와 같다고 답해줬다. 웡은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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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벤션 센터로 향하는 해안 도로입구에는 거대한 바리케이트가 있었다. 50m쯤 들어가니 자체 검문소를 겸한 보급센터가 있었다. 생수와 생리식염수 같은 가벼운 생필품과 공사장용 쇠파이프가 있던 그곳은 경찰이 움직이면 본대로 알리는 척후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입법회 공성전

 

검정옷 무리와 함께 홍콩 정부청사로 향했다. 현지에서는 홍콩 정부청사를 타마르 Tamar라고 부르는 정부청사엔 행정부와 입법회가 모여있다.

 

시위대는 이중 한국의 국회격인 입법회를 타격하기로 결의했다. 결의는 텔레그램 투표로 이루어졌다. 토론보다는 누군가 제안을 하면 바로 투표에 들어가는 방식이고, 구성원은 결과에 따라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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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청사 주변에는 2~3천 명의 시위대가 있었다.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으로, 노란색 공사용 헬멧, 수경, 공업용 마스크를 쓰고 양팔에는 비닐랩을 두르고 있었다. 빅토리아 공원의 평화행진단과는 장비부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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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랩, 수경, 공업용 마스크는 경찰이 분사하는 최루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는데, 경찰이 있건 없건 벗지 않았다. 사실 헬멧 하나만으로도 죽을 맛이었던 나는 저러다 실신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모금을 통해 구입한 생수, 생리식염수, 간단한 의료장비를 보관하는 별도의 공간이 20m마다 하나씩 있었고, 의료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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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입법회 안에 있던 경찰과 공방전이 벌어졌다. 경찰은 문틈으로 최루액을 분사했고, 시위대는 우산으로 막았다. 어렸을 때 우산싸움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산은 꽤 약하다. 살 두어 개 부러지면 바로 못 쓴다. 우산은 끝없이 앞으로 전달됐고 계속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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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셔터가 내려진 주차장으로 접근을 포기하고 유리로 된 의원출입구로 타격지점을 바꿨다. 공사장에서 가져온 쇠파이프로 내려쳤지만 이중강화유리 출입문은 흔들리기만 할 뿐 금도 가지 않았다.

 

시위대는 마트에서 쓰는 카트 안에 보도블럭 같은 무거운 걸 넣은 후 유리창을 향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200여 명 가량이 동원됐다. 쿵, 쿵, 쿵, 육중한 충돌음이 들렸다. 경찰은 간간히 문틈으로 최루액을 뿌렸고 그때마다 우산부대가 앞을 막았다.

 

한 시간 반의 공방 끝에 현관이 뚫렸다. 2열로 문을 지키던 경찰들은 막상 문이 뚫리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잠시 뚫린 현관 앞에서 기자들의 포토타임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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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경찰본부가 도보 5분 거리에 있었고, 5천 명의 경찰이 비상대기 중이라 했다. 시위대의 뒤를 치면 무방비가 되는데 경찰은 다 어디갔을까? 경찰을 감시하는 인원이 있긴 했지만, 케이블 타이로 고정시킨 바리케이트가 힘을 써봐야 얼마나 쓰겠는가. 정부청사 방어인원이 얼마길래 대응을 소극적으로 하는지, 경찰이 어떻게 배치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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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타 공중화단을 가로지르니 경찰병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의외로 병력이 적었다. 국기게양대가 있는, 시위대가 오성홍기를 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지점에 40명, 입법회 건물 후미에 있는(입법회 수비대 보충대로 보이는) 병력이 약 30명. 방금 뚫은 입법회 안쪽 병력이 약 40명이었다.

 

건물이 넓다보니 병력이 퍼져있는 건 당연했지만, 충돌이 가장 격화된 지점에서 100여 명 가량이 고군분투한다는 건 의외였다. 최루탄이나 고무총도 없었다. 장비라곤 곤봉과 방패가 전부였다. 

 

이상했지만, 슬슬 빅토리아 공원에서 오는 평화대행진 행렬이 합류할 시간이다. 그쪽 상황도 살펴봐야 했다.

 

 

56만

 

언론은 이날 시위에 56만 명이 참가했다고 했다. 

 

홍콩은 땅도 비좁고 온통 암반이라 집회를 위해 모일 공간이 없다. 시위의 시작점이 된 코즈웨이 베이의 빅토리아 공원도 광장 개념이 아니다. 산책로와 숲길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공터에서 모인다. 산책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진입로가 좁다.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긴 줄이 만들어지니 어지간히 느긋한 게 아니면 홍콩에서 큰 집회에 합류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사실상 홍콩에서는 10~20만이 넘어가면 한 군데 모일 수 없다. 그래서 행진이 중요하다.

 

경찰은 행진 대열을 통제했다. 빅토리아 공원에서 출발할 때엔 퀸즈웨이 Queensway 전체를 내주다, 애드머럴티 정부청사 앞에서 한쪽을 막았다. 왕복 6차선, 트램라인까지 10차선인 퀸즈웨이를 걷던 행렬이 갑자기 5차선을 걸어야 했다. 행진은 뒤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MTR 에드머럴티역 운행을 재개했다. 모일 때는 무척 불편하게 하고, 해산은 쉽게 하는 꼼수를 부렸다. 그럼에도 홍콩 사람들은 더위에도, 지체되는 행렬에도, 항의하는 사람 없이 행진을 이어갔다.

 

널찍한 공간이 아닌 도로를 따라 행진하는 수십 만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드론을 날려 꼬리를 잡아보고 싶었지만, 송수신 거리 한계에 맞닥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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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다들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캐리람 퇴진’

‘홍콩이여 궐기하라’

‘경찰폭력 독립조사단 설치’

 

한국인 그룹이 한글로 ‘한국인은 홍콩 시위를 지지한다’는 플랜카드를 만들어 들고 다니기도 했다. 언론에 보도된대로 일부 시위대는 타이완의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누구는 영국령 시절의 홍콩기를 들고 나왔는지만 극소수인데다 시민들도 호응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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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다보니 드론을 날리기 위해선 모든 짐을 풀어놔야했다. 홍콩의 치안이 이럴 땐 참 좋다. 장비가 든 배낭,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30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드론을 날렸다.

 

누군가 'DDANZI PRESS' 스티커가 붙은 헬멧과 카메라를 촬영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어서 당장 인터뷰를 했다. '엔드류'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한국인들이 홍콩시위를 어찌 생각하는지', '한국인은 자신들을 지지하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타마르에서 실력행사를 하는 친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용기가 없어 거기에 있지 못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고 대답했다.

 

홍콩인들은 폭력시위에 대해 강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1960년대 문화혁명 와중에 홍콩에서 있었던 무장폭동(우파 언론인 가족을 차에 태워서 불을 질러 태워죽이고, 도심에 크레모어를 설치) 이후로 생긴 반응이다. 2016년 몽콕에서 발생한 ‘어묵혁명’에도 시민사회는 이구동성으로 폭력시위를 비난했다. 그러던 것이 불과 3년 만에 많이 바뀌었다. 

 

이 대화를 구경하던 올해 일흔 둘의 깜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퍽킹 시진핑'을 입에 달고 있던 그는 '200만이나 모였음에도 시민의 요구가 이리 묵살되는데 우리가 뭘 선택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깜씨도 타마르에 힘을 보탤 순 없지만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국 언론보다 외신기자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홍콩섬을 대표하는 고층빌딩 IFC TWO빌딩이 한 눈에 들어오는 거리에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는 시위대가 가득하다. 계속 느끼지만 정말 낮설었다. 홍콩이 이럴 수 있다는 게.

 

 

입법원 점령

 

텔레그램을 통해 급보가 들어왔다.

 

'입법원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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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전 소식이 계속 업데이트 되고는 있었지만, 상황이 급변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밥 먹을려고 음식 시켜놓고 있던 차였는데 다시 일어나야 했다. 종일 장비 가방을 메고 다녀 골반이 아파왔지만 '시위대에 의한 입법원 점령'은 초유의 사태였다. 주문한 요리를 입에 쓸어넣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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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원 입구는 이미 아수라장. 대부분의 유리창이 깨진 상태였고, 수도가 터졌는지 현관 앞으로 물이 흘러들어왔다.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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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입법원 중앙홀은 낙서로 뒤덮혀있었다.

 

Hong Kong is Not China, not yet.

살인정권

견찰(犬察)

 

문을 부순 탓인지, 화재 경보기를 건드린 건지 계속 경보벨이 울렸지만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이 더 컸다. 사방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혼란은 지도부가 없는 시위의 성격에 기인한다. 일단 입법원을 점령하기로 결의하고 실제로 점령했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거다. 아니, 이들은 입법원을 점령할 거라고 생각 못했다. 입법원 문을 부수는 건 퍼포먼스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문이 부서졌다.

 

경찰은 별안간 철수했다. 분명히 5천 명이라던 경찰은 어디 숨었는지 모를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대치상황조차 만들지 않고 모두 숨어버렸다. 강경파 시위대는 입법원을 점령한 게 아니라 버려진 입법부에 들어온 건지도 몰랐다.

 

시위의 주력은 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소식을 전달받지만 기본적으로 학교 단위, 즉 반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움직인다. 자기들끼리는 누가 어느 학교 소속인지 대충 알고 있다. 1반 아이들이 사무실 문을 따고 들어가자 3반 아이들이 가세하고, 곧이어 옆학교 애들이 더 강하게 부수기 시작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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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는 인스턴트 커피병 하나까지 바닥에 집어던졌고, 기계실에서는 LCD 스크린을 하나하나 깨고 데스크탑을 집어던졌다. 

 

누가 처음 파괴를 시작했는지 모른다. 홍콩에서는 처음 파괴 열풍을 만든 그룹이 경찰의 프락치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광범위하고 별 의미없는 파괴가 일어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제할 권위있는 세력이 전무했다. 몇몇 민주파 의원들이 말렸지만 누굴 말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중국 기자들은 시위대의 파괴 행위를 열심히 증거로 남겼다. 이들의 체증을 인식하거나 제지하는 시위대는 없었다. 그 행동이 향후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할 지에 대해 예측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치명적이다. 

 

다수의 외신기자들은 착잡해했다. 네덜란드 기자는 '오늘로 이 운동이 끝날지도 모르겠다'는 말에 동조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순수하게 파괴 자체를 즐기는 걸 대체 뭐라고 써야할 지 모르겠다."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찰이 이 날 자리를 비워줬다'는 의혹은 제기할 수 있다. 문제는 증거없이 기사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다들 ‘일각의 주장에 의하면’이라고 단서를 붙여야만 했다.

 

함정에 빠져서, 자신들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파괴행위를 했던 이들은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그들은 고작 청소년이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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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겪었던 작은 소란은 이 날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입법원 점령자들의 대부분은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고등학생들은 국제고, 사립고, 일반고로 나눠졌고, 학교별로 파벌이 있었다.

 

국제고의 영국인 학생 해럴드는 커다란 종이에 캐리 람 퇴진을 비롯한 몇 가지 주장을 한자로 써서 들고 다녔다. 외국인이 한자 팻말을 들고 다녀서 이미 이걸 본인이 쓴 건지, 중국어를 아는 지에 대해서 인터뷰를 요청했던 친구였다. 그런 그가 상황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모든 걸 부셔버리면 우리는 정당성을 잃는다, 우리는 폭력을 쓰면 안된다."

 

이 발언은 주로 일반고 학생들에게서 격렬한 거부반응을 불러왔다. ‘영국인인 네가 뭘 안다고 우리 일에 간섭하냐’부터 시작해 급기야 때려눕힐 기세로 달려드는 학생도 있었다. 다행히 다른 시위대들이 막아서서 폭력까진 발생하지 않았다. 해럴드는 꽤 곤란해 하다 어찌됐든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며 악수를 청했고, 격한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던 학생 한 명이 'Fuck you'라고 외쳤다. 

 

이들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각자 달리 사고했다. 파괴를 일삼는 와중이었지만 입법원에 버려진 자신들을 극도로 불안해하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점거파와 철수파가 논쟁을 벌였다고 보도하는데, 사실 그 안에서 계획적으로 입법원을 점거해서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점거를 할 생각이었다면 입법원의 모든 설비를 자원화했어야 했다. 

 

상황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텔레그램에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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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터(경찰을 지칭하는 말)가 진압을 준비중이다."

 

이제 철수할지 버틸지 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시위대 중 한 명이 메가폰 잡고 철수를 권고했다 야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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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다른 이가 메가폰을 잡고 말했다. 

 

"지금 우리는 이 곳을 떠나야 하지만 우리가 패배한 건 아니다. 우리는 다시 이 자리에 설 거다. 반송중(중국송환법 반대) 이 말을 잊지말자. 반송중"

 

약간 떨리지만 단호한 어투였다(참고로 내가 광둥어를 알아들은 것은 아니고 옆에 있던 홍콩 기자한테 물어보고 정리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다. 입법원에서 나와 경찰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진압

 

그 사이 바리케이트는 더 두꺼워졌다. 지도를 보니 퀸즈로드 쪽으로 진압이 들어올 것 같진 않았다. 이쪽은 아직 시위대 본대라고 할 수 있는 인원이 남아있었으니 홍콩 컨벤션 센터 쪽에서 입법원으로 바로 치고 오지 않을까.

 

길목으로 가니 이미 다른 기자들도 그리 예측한 듯 삼각대를 걸어놓고 대기하는 중이었다. 자정을 기해 저 멀리 경찰차 불빛이 보였고, 경찰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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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은 방패, 2열 최루탄, 고무총, 3열부터는 곤봉을 든 체포조였다. 시위대는 경찰이 대열을 갖추자 바리케이트 안쪽에서 우산을 폈다. 멀리서 보면 장창병이 밀집대형을 구축한 것 같아 보였지만, 들고 있는 건 우산이었다.

 

경찰이 밀려들어와 바리케이트를 걷어내자 몇몇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일제히 투석전을 벌이기로 합의된 움직임은 아닌 듯 간헐적이었다. 경찰은 이내 최루탄을 발사했고, 고무탄 총으로 시위대를 겨냥했다.

 

군중들은 열 발의 최루탄에 흩어졌다. 누군가의 지휘 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면 물리력 앞에서 쉽게 와해된다. 전원 체포를 할 요량이 아니라면 쫒아갈 필요도 없을 만큼 시위대는 빨리 흩어졌다.

 

경찰은 입법원을 포위했다. 아마도 입법원 안의 저항을 예상한 것 같았지만, 시위대는 이미 입법원에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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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는 퍼시픽 플레이스 앞의 퀸즈로드에 잠시 집결했다.

 

경찰이 다가오자 어떤 이가 마이크를 잡고 이들의 귀가를 보장해 달라며 호소했다. 경찰은 체포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당 기간 머뭇머뭇했다.

 

12시 56분, 애드머럴티를 출발하는 마지막 전철이 출발했고, 거의 모든 시위대가 그 열차에 탑승했다. 교통카드인 옥토퍼스 카드를 사용하면 동선이 노출될까봐 시위대는 한동안 1회용 전철카드를 사용했다. MTR 당국은 애드머럴티역의 모든 개찰구를 개방했다. 시위대는 표를 구입하지 않아도 됐기에 신속하게 현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MTR이 시위자들에 대한 동조의 의미로 이런 것인지, 혹은 막차시간을 앞두고 전철표 구입 때문에 벌어진 대혼란 때문인지는 모른다.

 

나도 마지막 전철에 올라탔다. MTR췐완선엔 젊은 시위대들의 환호가 가득했다. 어쨌건 입법원을 점령한 건 그들에게 승리였다.

 

홍콩과기대에 다닌다는 '엔드류'와 이런 대화를 했다. 

 

"내일부터 모든 언론이 이 광경을 찍어서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쓸 거고 너희는 비난을 받을 거다. 괜찮은가?"

"어차피 우리는 독립언론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 독립언론을 믿지 않을 거다."

"상관없다. 나는 오늘이 자랑스럽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홍콩은 대량검거를 앞두고 있다. 행정장관 캐리 람은 새벽 4시 기자회견을 열고 입법원이 그리된 것에 깊은 슬픔과 분노를 표했다. 7월 4일 홍콩 당국은 파괴된 입법원을 언론에 공개했고 한국의 JTBC도 한국 최초라며 파괴된 입법원을 보여줬다.

 

홍콩 정부의 이후 전략은 단순해보인다. 온건파와 강경파를 분리할 것이고, 강경파라는 딱지가 두려운 일부 민주세력이 시위대를 비난하게 만들 거다. 강경파는 동지라 믿었던 온간파의 비난을 들으며 배신감에 휩싸이겠지. 한국은 이런 상황에서 여론의 향배에 따라 굽힐 부분은 굽히고, 한동안 숨어지내다 힘을 길러 반격의 기회를 잡으려 했고, 일본은 더 강경한 길을 찾아가다 끝끝내는 일망타진되었다.

 

홍콩의 시위대는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할까? 다행인 것은 시민사회가 아직까지는 이들에게 박하게 굴지 않는다.

 

현재 각계의 사람들이 에드머럴티역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힘이 완벽하게 홍콩 행정부로 넘어가진 않을 거라는 의미다. 홍콩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보편적 참정권이 보장된 나라를 상상하는 게 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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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요 홍콩 加油香港

 

 

 

추신 1:

이번 홍콩 취재는 트위터 아이디 @shaomifan, @neowindy_ian,  페이스북 리태림님이 금전적 도움을, 트잉여 박세찬님이 헬멧 렌탈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홍콩 여행책은 프렌즈 홍콩 마카오. 알죠?

 

 

추신 2:

영상으로 현장을 보고 싶은 분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시라.  

 

7월 1일 홍콩반환일 항의 집회 -1-

7월 1일 홍콩반환일 항의 집회 -2-

7월 1일 홍콩반환일 항의 집회 -3-

7월 1일 홍콩반환일 항의 집회 -마지막-

 

 

 

 

 

가이드북 깎는 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