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몽키 하우스 혹은 낙검자 수용소

 

몽키ㅎ우스.png

 

'몽키 하우스', '낙검자 수용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 모든 말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에 의해 세워진 '성병 관리소'를 가리킨다. '몽키 하우스'는 쇠창살에 매달려 있는 감금된 여성들이 동물원 우리에 갇힌 원숭이 같다 하여 붙은 것이고, '낙검자 수용소'는 검사에 떨어진 여성들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붙은 말이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말 그대로 이 시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이 시설을 직접 관리할 정도로 신경썼다.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관리를 정권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971년을 전후로 미군은 공식적으로 철수를 선언했고, 제7사단을 비롯해 공군 몇 부대가 한국을 떠났다. 북한은 60년대 말 70년대 초까지 수시로 도발을 했고, 국민들은 불안해했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정래혁은 워싱턴포스트에 미군철수에 반대하는 광고를 실었고,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은 '만약 미군이 철수한다면 내각은 총사퇴할 것이고 비무장지대를 무방비로 남겨둘 것'이라고 미국을 협박했다. 제7보병사단이 한국에서 나가려는 시도를 한다면 활주로에 드러누울 것이라고 주한미 대사였던 포터를 위협하기도 했다.

 

3선개헌.jpg

'3선개헌 음모분쇄 서울 대강연회'의 모습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의 3번째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박정희는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겨우겨우 대통령 자리를 지킨다.

 

박정희는 절박했다. 남아있는 미군들의 마음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그 절박함을 보여준 게 바로 '기지촌 정화위원회'였다. 기지촌을 관리해 미군들의 마음을 붙잡겠다는 뜻으로, 장/차관이 청와대에 모여 '기지촌 여성들을 직접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기지촌에 대한 미군의 불만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낙후된 기지촌 시설 / 흑백 인종차별 / 성병관리

 

박정희 정부는 우선 11억 5천만원을 들여 기지촌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발표했다(1972년 우리나라 1년 예산이 6천억 원이었다). 처음엔 기지촌 여성들에게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계획이었으나, 정부가 나서서 아파트를 지어준다면 사실상 ‘공창제’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기지촌 환경 개선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음은 기지촌 내에서의 흑백 인종차별. 사실 이건 미국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서 오는 문제이므로 미군 병사들끼리 해결해야 했다. 흑인 병사를 상대한 이들에게는 가지 않겠다는 백인 병사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 박정희 정부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통해 기지촌 여성들과 포주들을 교육(‘행정압박’이 맞다)했다.

 

“기지촌 내에서 흑인 차별이 3번 이상 적발되면, 해당 영업소는 아예 미군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박정희 정권은 미군들을 붙잡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

 

 

인권보다 중요했던 성병관리

 

마지막은 가장 민감했고, 가장 중요했던 성병관리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위해 국가가 가진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1972년 정부는 국가 보건 예산(4억 원)의 절반인 2억 원을 몽키 하우스에 배정한다. 1972년에만 전국에 11개의 성병 관리소를 신축하거나 개축했다. 파주에서만 한 번에 7,500여 명의 여성들을 검진했다고 하니 규모도 엄청났다.

 

기지촌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2회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다. 검진을 받아야 보건증에 확인도장을 받을 수 있었고, 이걸 소지해야 일을 할 수 있었다(성병 검진번호를 달고 다녀야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반대로 검진을 받지 않거나 도장이 없으면 경찰들에게 끌려갔다(수시 검문을 했다).

 

몽키하우스2.jpg

 

성병검사에서 떨어진 ‘낙검자’들은 그대로 몽키 하우스로 끌려가 3박 4일 치료를 받았다. 그 뒤 재검사를 받는데 만약 재검사에서도 불합격을 받으면 다시 3박 4일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심한 경우에는 몇 달씩 몽키 하우스에 갇혀있었다.

 

치료 과정에서 많은 이가 사망했다. 치료제로 쓴 페니실린 때문이었다. 초기 페니실린의 부작용도 문제였지만 투여한 용량이 큰 문제였다. 빠른 치료를 위해 개인의 신체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주사를 놨던 것이다. 그에 따라 페니실린 쇼크로 수많은 여성이 사망했다.

 

“일부 의사들이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 사고 발생으로 주사행위를 기피하고 있어 국가 성병 관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바, 면책해주실 것을 협조 요청한다.”

- 1978년 보건사회부가 법무부에 보낸 ‘페니실린 과민성 쇼크사고 처리에 대한 협조 요청’ 공문 중

 

박정희 정권은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병관리를 위해 여성들을 격리수용한 뒤 페니실린을 투여했다. 그 결과 사람이 죽었음에도 정부는 '성병관리'란 미명 하에 의사의 등을 떠밀었다. 책임은 국가가 질 테니 페니실린 주사제를 투여하라는 거였다.

 

03.jpg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1977년 8월 ‘전염병 예방법 시행규칙’ 전까지 박정희 정부는 '한미동맹의 강화와 국가 경제를 위해' 불법으로 여성들을 감금했고, 죽였다. (2012년 서울중앙지법 민사 22부는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977년 전염병 예방법 시행규칙 이전에 낙검자 수용소에 격리 수용된' 여성 57명에 대해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얼핏보면 국가가 자신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염병 예방법 시행규칙이 만들어진 이후 수용된 여성들에 대해서는 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들어가면 화장실만 갈 수 있었고, 유치장처럼 쇠창살이 있는 방에서 다섯 명씩 자야했다.”

- 1982년 동두천의 낙검자 수용소에 수용됐던 여성의 증언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 외화획득을 위해서, 적화통일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지촌 여성들을 희생시켰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 발전의 유산과 대한민국이 전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의 상당 부분은 여성들의 눈물 위에서 토대를 닦았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 정부도 기지촌 여성들의 역사를 포크레인으로 황급히 덮어버리려고만 하고 있다.

 

 

박정희의 퇴장과 전두환의 등장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jpg

 

1979년 10월 28일,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독재가 총알 몇 발로 끝났다. 권력은 진공상태가 됐고, 성급한 이들은 일찍 찾아온 ‘봄’을 즐겼다.

 

그러나 봄은 곧 사라졌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 모두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통치방식은 달랐다(알맹이는 비슷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포장지’는 달랐다). 둘의 차이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게 컬러 TV다.

 

박정희 정부는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컬러 TV를 막았다. 컬러 TV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1977년엔 컬러 TV를 12만 대나 수출하고 있었고, 1978년에는 50만대를 수출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짜놓고 있었다.

 

이 컬러 TV는 대부분 미국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1979년 미국이 컬러 TV 수입 물량을 30만대로 규제했고, 갑작스레 물량이 남았다. 자칫하다간 국가 경제가 휘청거릴 수도 있던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1980년 8월 2일, 전두환은 컬러 TV 국내시판을 허가한다.

 

전두환의 등장은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18년간 사회를 지배했던 엄숙주의에 약간 숨통이 트였다. 학생을 상징하던 검은색 교복과 빡빡머리는 두발 자유화, 교복 자유화 조치로 사라졌다. 결정적으로 통금이 사라졌다. 1945년 9월 7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하루 전 '군정 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거의 40년이 다 돼서 사라진 것이다.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이 모든 변화는 국민을 바보상자 속으로 기어 들어가게 만드는 디딤돌이었다.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

 

13182E10ADC59A2E15.jpg

 

전두환 시대를 관통하는 3S 정책이자 대표적인 우민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