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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이 나라고 역사란 말이야!"

 

“역사적으로 흘러가듯 가! 또 내가 역사 강의 해야겠냐?”

“태수야 세상이 논리대로 되니? 내가 역사야! 이 나라고!”

“이렇게 된 거 너 왕 한번 해라! 대한민국에서 우리보다 센 놈들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영화 ‘더킹’의 대사들이다. 2017년 3월 영화가 개봉됐을 때만 해도 비약이 심하다 생각했다. 요즘 검찰 돌아가는 걸 보니 현실적이란 걸 알겠다. 비현실적인 건 검사 역을 하는 두 남자 배우들의 외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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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달하고 싶은 곳', '권력 가장 가까이 있는 곳'에 있는 이들이 대한민국 검사고, 그 중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자가 검찰총장이다.

 

 

1. 언제부터 검찰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나?

 

검찰은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보다 더 막강한 힘을 휘두르며 입맛에 맞게 정권을 바꾸어왔다.

 

역대 검찰과 정권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명목상 폐지됐지만 사실상 존재하는 ‘검사동일체’의 원칙에 따라, 검찰의 입장으로 대표되는 역대 검찰총장이 정치적으로 부각되었던 일들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검찰은 1948년 창설됐다. 창설될 때부터 말단부터 총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검사에 대한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지금도 그러하다(검찰청법 제34조, 34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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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검찰총장은 권승렬이었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본 주오대를 졸업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특별검찰부 검찰관장을 역임하면서 반민특위에서 넘어온 수사자료를 기초로 기소여부를 결정하고 특별재판소에 송치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어떻게 되었는가? 알다시피 실패했다.

 

당시는 일제의 잔재가 여전했기 때문에 이 때만 해도 검찰의 권력은 경찰보다 높지 않았다. 

 

권승렬이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김익진이 제2대 검찰총장이 된다. 김익진은 법조2세대로 통한다. 구한말 ‘법관양성소’를 통해 배출된 법조인들을 법조 제1세대라고 하고, 1910-1920년대 식민지 법조인충원제도를 통해 배출된 법조인을 법조 2세대라고 하는데, 김익진은 2세대에 속한다. 

 

일제강점기에 판사로 법조계에 발을 들인 김익진은 해방 후 이북 지방에서 재야 변호사 활동했다. 이후에는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반민족행위자처벌 특별재판부 부장재판관과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 검찰총장이 된 건 김익진의 반공투쟁력을 높이 산 이승만에 의해서였다. 

 

김익진의 재임기간에 간첩 김수임 사건, 대한정치공작대 사건 등 유명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특히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에 대해선 이승만이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이를 무시해 정권에 찍혔다. 이후에 검찰이 국회 국정감사를 받는 것에 대해 ‘입법부가 어찌 검찰청을 국정감사 한단 말인가’라며 공개적으로 반대의견을 개진해 완전히 미운털이 박혔다. 때문에 국회로부터 파면건의를 받기도 했었다.

 

결국 김익진은 전쟁발발을 사흘 앞둔 1950년 6월 22일, 서울고등검찰청검사장으로 좌천당한다.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면 나쁜 선례가 된다'며 옷을 벗지 않고 서울고등검찰청검사장으로 재직한다. 

 

한국전쟁 발발 2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진다. 이승만 정부는 배후에 대통령제에 반대하고 내각제 개헌안에 찬성하는 야당의원들과 김익진이 포함되어 있다고 발표하였다.

 

정부는 부산에 있고, 국회에서는 정치파동이 일어난 때였다.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변경하려는 야당과 계속 대통령을 하겠다는 이승만 정권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기에 휘말린 김익진은 검사징계위원회에서 파면결의되었고, 이승만은 김익진에 대한 징계면직을 받아들였다. 

 

재판에 회부된 김익진은 1·2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대통령 및 정부시책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안녕질서를 해하였다며 ‘안녕질서에 대한 죄(구형법 제105조의2)’ 위반으로 면소판결(대법원 판결을 받을 당시 해당 법조가 삭제되어 판결 후 형이 폐지되었음)을 받았다. 

 

 

2. 박정희와 김기춘 그리고 검사들 

 

1960년 4.19 혁명으로 민주정권이 들어섰으나 검찰은 똑같았다. 여전히 친일매국노 법조인들이 검찰총장이 되어 승승장구하였다. 막장 같은 역사의 반복이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제11대 검찰총장 신직수를 꼽을 수 있다. 군인,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전무후무한 인물로, 박정희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무려 36세의 젊은 나이에 검찰총장에 올랐다. 1952년 군 법무관 장교로 임용한 후 1961년 12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는데, 군 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이 고등고시와 사법시험 기수가 생명인 검찰조직의 수장으로 만 7년이나 재직하였다는 것이다. 악은 생명력도 강하다. 

 

5.16 쿠데타 이후 검찰권력의 합법적인 강화작업이 시작된다. 1960년대부터 법무부 국장 겸 검사로 근무했던 이경호(유신정국에서 유정회 제3기 국회의원까지 역임)가 제3공화국 헌법제정 작업에 참여하여 '검사의 영장청구 독점' 조항을 헌법에 못 박는다. 개정이 쉽지 않은 헌법을 통해 완전히 검사의 이익과 권력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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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검사였던 김기춘은 역사상 대통령의 권한이 가장 큰 1972년 유신헌법 제정의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김기춘이 유신헌법의 골격과 초안을 거의 다 작성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독재정권은 소수의 검찰에 권력을 몰아준 뒤 검찰을 이용해 정권연장을 시도했고, 검찰은 자기 조직의 이익과 안위를 위해 정권에 적극적으로 부역해왔다. 

 

 

3. 1987년 이후 심해진 검찰의 정치개입

 

냉정히 평가하자면 검찰권력은 독재정권 때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강해진 건 1987년 민주화 이후다. 물론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헌법을 개정하면서 검사의 영장청구권 독점 조항을 두었고 그로 인해 강제수사권까지 독점하면서 점점 강해져왔지만, 독재정권 때는 정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독재정권 시절엔 중앙정보부라든가, 안기부, 검찰, 군대권력의 권한이 막강하기도 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 같은 조직이 크기를 줄이거나 권력을 상당부분 내려놓았다. 그에 반해 검찰엔 개혁이 없었고, 다른 기관의 권한까지 검찰로 넘어왔다. 민주화가 되면 될수록 검찰권력의 독주는 심해지는 상황에서 검찰은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검찰권력이 눈에 띄게 강화된 건 문민정부 시절이다.

 

YS정권의 첫 검찰총장은 박종철 총장이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베테랑 특수수사 검사로 꼽히는 박 총장은 1989년 노태우 정부 때 6대 대검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면서 5공 비리 수사를 맡았다. 노태우 정권에서도 기세등등했던 5공 실세였던 장세동·이학봉·차규헌 등 47명을 구속하며 강골로 이름을 알렸다. 과거사 청산과 개혁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들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박 총장 천하는 6개월로 끝이 난다.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가 시작되면서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다. 박희태 법무부장관을 비롯해 장관 4명과 김덕주 대법원장 등 최고위직 인사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고, 박 총장도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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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정권에서 임명되어 DJ정권까지 검찰총장을 지낸 김태정 총장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특수통으로 검찰 내에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와 대검 중수부 등 요직을 모두 거쳤다. 건국 이래 최대 국방비리로 회자되는 율곡비리를 비롯해 슬롯머신 사건,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등 굵직한 사정 수사를 지휘했다. 

 

YS는 김태정 총장을 임명하며 1997년 12월에 치러진 대선 정국관리를 맡겼다. 대선 직전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DJ의 비자금 의혹이 불거졌고, 여당 후보였던 이회창은 이를 검찰에 고발했다. 선거결과가 검찰 손에 넘어간 셈이었다.

 

김 총장은 IMF 경제위기라는 변수 때문이었는지 비자금 고발 사건 수사를 유보했다. 가까스로 대통령에 당선된 DJ는 김 총장을 유임시킨다. (김태정 총장은 법무부장관에 임명되기도 하였지만 15일 만에 사임하였다. 부인 ‘옷로비 사건’으로 최초의 특검 수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옷로비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앙드레김의 본명은 김봉남이라는 게 전부다)

 

후임으로 임명된 박순용 검찰총장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여론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았다. 검찰의 항명파동, 옷로비 사건, 당시 진형구 공안부장의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에 이어 2000년 4.13 총선 선거사범 편파수사 시비로 신승남 대검 차장과 함께 야당이 탄핵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박순용 총장은 이러한 야당에 반격을 가했다. 2001년 1월 박 총장은 안기부 예산 1157억 원이 1996년 총선과 1995년 지방선거 당시 신한국당과 민자당 관리 계좌로 빠져나가 185명의 개인계좌로 흘러갔다고 발표했다. 지난 정권의 정점이었던 YS와 아들, 이회창 신한국당 전 총재, 이원종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 거론되었다. 순식간에 정국은 쑥대밭이 되었지만, 어쨌든 박 총장은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박 총장 후임으로 신승남 총장이 임명되었지만 ‘이용호 게이트’에 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총장 취임 7개월 만에 옷을 벗었다. DJ정권 말에 검찰총장에 임명된 이명재 총장은 그 유명한 취임사와 함께 등장했다.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예고였을까?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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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게이트’와 ‘최규선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이권청탁에 연루된 DJ의 두 아들 홍업씨와 홍걸씨를 잇달아 구속하였다. 이후 2002년 서울지검강력부에서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데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4. 검찰과 정권, 설계자는 ‘검찰’

 

2003년 노무현 정부로 넘어오면서 검찰개혁이 화두가 되었다.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를 청하였고 이는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대한민국 검사들의 오만불손함을 전국민이 알게 되었다. 

 

송광수 총장은 참여정부의 검찰개혁안 중에서도 '중수부 폐지안'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첫 여성 법무부장관인 강금실 장관을 대놓고 무시하는 등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송광수 총장에 이어 총장에 오른 김종빈 총장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한 천정배 장관의 불구속수사지휘에 반발해 취임 6개월 만에 사표를 던졌다. 참여정부 마지막에 임명된 임채진 검찰총장은 이명박 정권에서도 유임되었다. 그러던 2009년,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검찰에 대한 민심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책임지고 사임하였다. 

 

이어 검찰총장에 오른 한상대 총장은 중수부 폐지를 비롯한 검찰 수사지휘권 축소를 골자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최재경 당시 중수부장을 비롯한 특수부 검사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불명예 퇴진하였다. 이를 두고 '검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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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에서 임명한 채동욱 검찰총장은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강행했다. 정권과 친한 보수언론은 ‘채동욱 혼외자 의혹’을 집중제기했고, 취임 5개월 만에 물러났다. 사실상 정권이 찍어내렸다. 왕비서실장 김기춘이 임명한 김진태 검찰총장에 이어 우병우 민정수석의 충신인 김수남 검찰총장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촛불혁명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다. 문재인 정부의 첫 검찰총장인 문무일 총장은 임기를 다하고 물러나며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비롯한 검찰개혁안에 대해 ‘민주주의 원리 위반’이라고 비명을 질렀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로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윤석열 총장은 취임 한 달 만에 조국 법무부장관에 반대한다며 대통령 독대를 요구하는가 하면,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조국 장관 일가에 대한 공격이 한창이다. 윤 총장은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300만 명의 시민을 대검찰청 앞마당까지 불러 모으는 업적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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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검찰권력을 키운 것은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선출권력인 대통령에게 ‘몰빵’된 검찰인사권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 검찰개혁이 계속적인 화두였지만, 어느 정권도 검찰의 인사권을 내려놓지 않았다.

 

검찰과 정부의 관계를 일방적인 관계로 파악하면 안된다. 검찰총장의 인사는 권력으로 대표되는 정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검찰은 대체적으로 자기 조직의 이익을 위해 살아왔다. 조직을 위해 정권과 동맹하고, 때로는 각을 세웠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사정수사를 하거나, 축소수사를 했다. 검찰의 이 능동성은 과도한 권한에서 나오고, 과도한 권한을 통제하는 게 검찰과 정권의 유착고리를 끊어내는 핵심이다. 

 

검찰개혁과 맞물린 인사권 논의가 나올 때마다 검찰출신 국회의원들이 많이 포진된 자유한국당에서는 '검찰인사권을 독립시켜 검찰총장에게 줘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조직의 이기주의만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검사들은 검찰총장에게 더욱, 충성할 테니까.

 

 

 

■ 참고자료 

 

김선택, “국회 입법권 회복과 형사사법제도 정상화를 위한 영장청구 검사독점 헌법조항 폐지론”, 고려법학(2017.09)

문준영, “헌정 초기의 정치와 사법: 검찰총장 김익진의 삶과 수난”, 자랑스런 검찰인상 제정 관련 연구용역 과제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 그 사건 그 검사 DB, 검찰보고서-

그 외 다수의 언론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