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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1909년 10월 26일, 항일의병장이자 사상가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하얼빈 의거를 성공시킵니다.  

 

사용된 권총은 벨기에 FN사가 제작한 "브라우닝 M1900"으로 이 총은 일본으로 넘겨져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었으나,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 총의 행방 및 복원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야기를 담은 프로젝트로 매주 연재 예정입니다.       

 

 

 

 

 

0.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의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상략)‘...1895(을미) 경성에 있던 일본공사 미우라는 군사를 몰아 대궐을 침범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했는데도, 일본 정부는 미우라를 처형도 하지 않고 석방했는데  내막은 반드시 명령하는 자가 있어서 그렇게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 나의 일로 말하면, 비록 개인 간의 살인죄라고 할지라도 미우라의 죄와 나의 죄가 어느 누가 무겁고 누가 가벼운가.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 아니냐.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내가 무슨 죄를 범했느냐.’ 라고 천번 만번 생각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은 뒤에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나는 과연  죄인이다. 어질고 약한 대한제국 인민이  죄로다.”

- 안중근 의사 옥중 자서전  발췌

 

안중근 의사의 냉철한 현실인식을 확인할  있는 글이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 공사는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자신은 무슨 죄일까?  둘의 차이는  가지였다.

 

힘없는 나라에 태어난 .”

 

안중근 의사를 말할  ‘테러리스트 말하는 이들이 있다. 혹은 살인자’,시대를 잘못 읽은 범죄자 폄훼하는 이들도 있고, 그가 마지막으로 재판장에게 ‘동양평화론 쓰기 위해  집행을 얼마간 늦춰달라는 부탁을  것을 보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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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모친이 안중근에게 건넨 편지 내용을 근거로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구걸한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안중근 의사의 모친인  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인인 사이토 타이켄 주지의 구설만 있을 뿐이다.

 

안중근 의사가 삶을 구걸했다면 재판이 끝난 뒤가 아니라 재판을 진행하는 와중에 하는  맞지않을까? 일본측이 '개인의 원한, 오해에 의한 살인'이라고 몰았을  이렇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사람이 모두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더구나 나는 개인으로 남을 죽인 범죄인이 아니다. 나는 의병참모중장으로서 소임을 띠고 하얼빈에 이르러 ‘전쟁을 일으켜습격한 뒤에 체포가 되어 이곳에  것이다.”

 

이번 거사는  개인을 위해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함이었다.”

 

삶을 구걸한  아니라 재판장을 통해 대한제국이 해야  말을 대신 했던 거다.

 

물론 대한제국 사정은 달랐다. 명목상의 왕이었던 순종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이 없는 자이다 (중략) 장춘단에서 이토의 추도식을 성대히 열도록 하라.”

 

순종의 칙명이었다. 실질적으로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허수아비 왕으로서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생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이기에 원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이는 면만 본다면) 순종은 정치적으로 무능력했다.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다 하더라도 당시 상황에선 어려웠을 거다. 다만 확실한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 이후 가장 먼저 준동했던  친일파였다는 점이다. 한일합병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친일파였다)

 

안중근은 국제정세를 어떻게 봤을까? 마지막 한탄에서 생각의 단초를 더듬어   있다.

 

나는 과연  죄인이다. 어질고 약한 대한제국 인민이  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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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약소국에 태어난 죄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야 했다. 안중근이란 개인이 울분을 이기지 못해 일으킨 단말마적인 비명이었을까? 안중근이 바라본 세계는 그가 남긴 <동양평화론>  나타나 있다.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환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상책임은 비록 어린아이 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우의(友誼) 끊어 스스로 방휼(蚌鷸) 형세를 만들어 어부(漁夫) 기리는 듯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론(議論) 한청 양국인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 형세이다.

- 안중근 <동양평화론>  발췌

 

안중근의 눈에 비친 세계는 인종들 간의 갈등과 전쟁시대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 : 서양이 동양을 지배함) 시기.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시쳇말로 ‘백인의 침공이다. 궁벽한 동양의 남자의 눈에 백인들이 신문물을 앞세워 동양을 침탈하는 것이 보였다. 서구제국주의가 침략한 식민지의 숫자가 얼마이던가? 동남아를 비롯해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던 중국마저도 위태로웠던 시절이다.

 

러일전쟁이 있기 전까지 한국은 러시아, 일본, 영국, 미국 등의 각축장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 제국주의의 발판이 주었고, 이후 한반도 식민지의 판돈이 됐지만, 아시아 각국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황인종이 백인종을 꺾은 전쟁이라며 기뻐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고 새로운 열강이  이후 일본은 아시아 약소민족들의 희망이 되었다.”

 

러일전쟁에 대한 쑨원(孫文) 평가다. 서구제국주의에 대한 지식인들의 위기의식은 상당부분 공유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침략은 시작되고 있었고, 눈앞에서 이걸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극복할  있는 방법은 있었을까? 안중근이 내놓은 방책을 보면,

 

『우리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고 조선청국과 정립(鼎立)하여 평화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백년의 대계를 그르칠 것을 감히 두려워한다. 이등박문의 정략은 이에 반하여 함부로 한국을 병합하는데 급급하여 다른 상황을 고려할 틈도 없이 동포를 살육하고 황제를 위박(威迫)하여  횡포가 이르지 않는 것이 없다. 그가 잡은바 방침을 고치지 않고 이대로 추이(推移)하면 우리 동양 3국은 다같이 쓰러지고 백색인종의 유린(蹂躪)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와 청국 양국이 일본을 향하여 다시 싸우려고 하는 형세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며, 미국 또한 일본의 발호(跋扈) 좋아하지 않는다. 점차 세계의 동정은 한국청국러시아의 약자에게 모이고 (이에 따라) 일본은 고립한 위치에  것은 지금부터 예상하여도 어렵지 않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일시 세력에 의지하여 우리 한국의 독립을 빼앗으려는 것은 천견(淺見)으로서 지자(智者) 치소(嗤笑) 초래하고  것이다.

- 안중근 <동양평화론>  발췌

 

안중근은 , ,  3국의 연합을 생각했다.  연합의 맹주로 일본을 선택한 거다. 서양의 침략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아시아 국가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로서 아시아 연합체의 중심이 되길 기대했. 이런 인식은 안중근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국적을 떠나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생각을  번쯤은 했었다.

 

현재의 세계적 정세는 동양과 서양의 대립 상황인데 서양문화의 기반은 이욕과 강권(무력) 기반하는 '패도문화' 반면 일본과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문화의 기반은 도덕과 인의에 기반하는 '왕도문화'이다.(중략) 이러한 왕도문화를 발양할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민족들의 대연합,  대아시아주의가 실현되어야 하며 현재 강권적 패도문화로부터 이탈해 나와 동양의 인의 도덕에 접근하고 있는 소련과의 연합도 모색해야 한다.”

- 쑨원의 ‘대아시아주의강연 발언  발췌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 역시 일본과의 연합, 아시아 민족들의 대연합을 주창했다. 이때가 1924 11월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쓰고 나서 15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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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에서 쑨원은 일본 정부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질문에 대한 답은 15  안중근 의사가 먼저 내놓았다.

 

『실제 한국 인민은 러일전쟁 이전까지 호개(好個) 친우로 일본을 좋아했고 한국의 행복을 믿고 있었다. 우리들은 결코 배일사상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러시아를 대신하여 한국을 탈취해버리자고 주장하고  결과 한국에 이를 그대로 채용하게 되었다. 금일 내가 이와 같이 몸을 그르치게  것도 모두 이등박문의 행위에 기인한다. 러일전쟁까지는 이천여  동포가 종민(從民)임을 기뻐하였다.

- 피고 안응칠의 8 신문조서(1909 12 20)  발췌

 

안중근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약속한대로 보호정책을 제대로 시행한다면, 한국은 외세의 침탈 없이 제대로 국력을 기르고, 근대화로 나아갈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애초부터 한국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막차에 올라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중근이 총을 뽑아든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서구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함께 싸워야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려고 덤벼들었다는 거다. 동양평화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 일본에 대한 배신감으로 반일 활동에 나섰고, 이토 히로부미 처단까지 이어졌다.

 

 

 

1.

안중근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14 1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 건립됐을 당시 일본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내뱉은 말이다. 관방장관이라면 일본 정부의 공식 대변인이라   있다.

 

(일본 언론과 정치권은 일본과 센카쿠 열도를 사이에 두고 분쟁을 일으킨 중국과 독도를 두고 영토 분쟁을 일으킨 한국이 손을 잡고 역사문제로 일본을 압박한다고 받아들였다. 스가 요시히데는 ,  양국에 유감의 뜻을 전달하며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거듭 강조했다)

 

일본  논리를  마디로 반박해보면,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면, 이게 범죄인가 범죄가 아닌가?”

 

라고 말할  있다.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다툼의 여지가 있겠지만, 국제법상 혹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선에서 이건 정당한 행위다.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이 점점 노골적이자 안중근은 북간도로 망명했고, 4개월 뒤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 만나 엄인섭, 김기룡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게 된다.   이범윤은 대장으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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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여명이 넘어가는 의병들은 두만강을 건넌다.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격파하며 의병의 이름을 떨쳤다. 그러다가 3 회령 전투에서 일본군 5  명과 붙었다가 패배한다.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거다.

 

분명한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밝혔다는 거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즉, 만국 형법과 국제공법으로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동학농민항쟁, 을미사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당시 한국 국민들을 수탈하고 압살한  생각한다면, 의병투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의병투쟁의 과정에서 적군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있다.

 

안중근의 경우에 한정해서 생각해 보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사격, 이후 일본인 수행원 3명에게 사격, 3 부상

주변 러시아 인사들에 대해서는 총격하지 않음

총알이 남아있음에도 사격을 멈추고 ‘대한민국 만세 외침

법정투쟁에서 자신이 대한의군 참모중장임을 확인시키고, 이토 제거를 ‘교전행위 선언.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를 말함

일본인 수행원 3명에게 부상을 입힌 것에 유감을 표명

개인적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는 동기 추정을 맹렬히 거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목적인 동양평화를 위한 행위임을 분명하게 밝힘

 

1960년대부터 불어닥친 테러리즘의 광풍 때문에 안중근의 의거를 테러와 같은 카테고리에 넣어서 그의 의거를 폄훼하려고 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이런 주장을 반복하고 있.

 

그들의 주장에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런 ‘행위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테러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약자(弱者) 혹은 소수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견 혹은 신념을 대외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행위'. 백보 양보해 일본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한쪽의 테러리스트는 다른 쪽의 자유 투사

 

라는 격언을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안중근 의사가 총을 빼어들었을까? 안중근은 , ,  삼국이 연합하여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자고 설파한 인물이다. 일본을 적대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함께  이웃, 같이 싸워야  전우로 생각했다.

 

그런데 전우가 배반을 했다. 함께 해야  동지가 배신을  거라 판단한 안중근은 총을 뽑아든 것이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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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를 다큐멘터리로 제작중입니다. 2020년 3월 공개 예정입니다. 펀딩 목표 금액 1천만원으로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얼빈 의거 장면을 촬영하려 합니다. 

 

프로젝트 잃어버린 총을 찾아서 펀딩(링크) 

 

안중근 의사의 사격장면 재현을 위한 물적 토대는 크게 3가지로, M1900 권총과 32ACP 탄, 그리고 발리스틱 젤라틴입니다. 총은 미국 총기 옥션에서 낙찰받아 현재 배송 프로세스를 밟는 중입니다. 펀딩은 32ACP 탄과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십자가 흠집’이 있는 탄의 위력 실험을 위한 발리스틱 젤라틴 구매 비용,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기자재 대여와 인건비로 사용 예정입니다.

 

총기 사격 실험에 고속촬영 장비와 인력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아울러 고속촬영을 위한 조명 세팅에도 비용이 들어갑니다.

 

110년 전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어떤 악조건 속에서 의거에 성공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는지를 실물 총을 가지고 실험할 예정입니다.

 

현재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국내 재현 사격을 추진중이며, 만약 국내사격이 여건상 어렵다면 미국 현지에 섭외한 사격장에서 촬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