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7년 6월 1일. 바쁘게 새 정부를 꾸려나가던 문재인 대통령은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f1.jpg

“가야사 연구와 복원은 영·호남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국정과제로 꼭 포함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가야역사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 사업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로 포함되었다. 그 후로 2년,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도 반환점을 돌고 있다. 가야사 발굴 프로젝트는 얼마나 진행됐으며, 어떤 성과를 얻었을까? 차근차근 팔로미하시라.

 

 

프리뷰 of 가야

 

최근 발굴 성과를 궁금해하실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시계바늘을 2천 년 뒤로 옮겨 보겠다. 가야가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 가야사를 복원하는 의미도 설명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야의 사전적 정의란 이렇다.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전라남북도의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정치체’

 

서기전 1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시기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의 쇼미더머니를 이겨내지 못한 고조선이 GG를 치고 평양에는 낙랑군이 설치된다(여전히 한사군은 한반도 밖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무시하겠다). 한 무제가 고조선 러쉬를 찍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가?

 

 “고조선 느그들 괘씸하게 한반도 남부 국가가 조공하는 걸 막고 있잖아”

 

고조선이 중개무역으로 얻던 이익이 얼마인지, 교역량은 얼마나 큰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고조선이 이를 통해 얻던 이익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평양에 설치된 낙랑군과 파견된 한나라의 관리들은 미우나고우나 고조선 유민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의 풍습과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낙랑군은 1세기도 못 가 중국대륙의 혼란기와 더불어 독립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미 이 시기의 낙랑은 지배기관으로서의 성격을 상당히 잃고 한반도 내의 독립적 성격을 띤 조직 성격을 굳혀가고 있었다. 필자가 낙랑군수라도 독립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낙랑은 당시 한반도 전역에서 솟아나던 소국들의 엘도라도였기 때문이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민이 대거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부에선 마한, 진한, 변한으로 퉁쳐지는 수많은 소국들이 솟아난다. 소국이라 하면 그 규모가 궁금할 것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솟아난 소국들의 규모는 지금의 작은 면 단위에서 조금 큰 읍 단위의 인구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유사하다. 가야의 전신, 변한의 소국들도 낙랑과 적극적으로 교역하며 테크를 타고 있었다.

 

ad.JPG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스타를 하든 롤을 하든, 유난히 테크와 성장이 빠른 녀석들이 있다. 운과 실력, 맵빨과 현질력 등 이유를 막론하고 그 판은 그 녀석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마련이다. 변한에 솟아난 12개의 소국 중 유난히 테크가 빠른 녀석이 하나 있었다. 김해의 구야국(금관가야)이다.

 

* 여기서 잠깐, 학창 시절에 금관가야, 아라가야라고 배우셨던 걸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고려 때 정리하면서 대충 붙인 이름이다(물론, 광개토대왕비에 적힌 ‘임나가라’라는 명칭도 있지만, 일단은 이렇다).

 

구야국의 리즈시절을 이끌었다고 하는 반신반인의 인물이 있다. 수로왕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거북이 섹드립으로 유명한 구지가의 주인공인 그는 졸라 쩌는 능력을 보이며 신라의 침입을 격퇴했다고 한다. 그랬을 수밖에 없다. 전기 가야 12국의 위치를 보자.

 

azz.jpg

출처 - 홍익대 역사교육과 김태식 교수

 

낙동강 중류, 즉 추풍령 지역까지 그 영역이 올라가고, 또한 부산 지역을 포함한 현재 경상남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유하고 있다. 고대 국가의 강역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대략 이 지역은 12국의 나와바리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경남 중서부의 가야 연맹의 연맹의 대빵인 구야국은 낙랑에서는 중국산 하이테크놀로지를 수입하고 왜국에는 신문물인 철기를 수출하는 무역을 통해 성장하였고, 이후 경상도의 패권을 두고 신라와 아웅다웅한다. 

 

그러나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낙랑과 대방을 꿀꺽한다. 거래처가 사라진 전기 가야 연맹은 흔들렸고, 남해안 일대의 소국들이 구야국을 공격하는 ‘포상팔국의 난’(삼국사기엔 더 일찍 진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료 비판을 한 결과 4세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는 학계 쌤들의 의견이다)이 발생한다. 이 난의 자세한 내용은 미스터리다. 거래처가 끊겨서 하청 업체 쥐어짜다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때 구야국은 신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데, 이후 경상남부의 패권을 둔 명분 싸움에서 신라에게 상당한 빚을 지게 된다.

 

어찌어찌 위기를 수습한 구야국이지만, 여전히 거래처가 절실했다. 이때 백제가 등장한다. 한강과 서울이라는 꿀땅에서 꿍짝거리며 나라다운 모습을 갖춘 백제는 중국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했고 가야를 거래처로 삼았다. 이렇게, 백제-가야-왜의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가 등장한다. 왜국과 한반도 사이의 무역에서 초기 카운터 파트너는 백제가 아니라 가야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qr5.JPG

덩이쇠. 덩이쇠는 당시의 화폐였다. 얼마나 철이 많이 나면 화폐로 썼을까. 왜는 대다수의 철을 가야에 의존해 수입했지만, 훗날 제철기술을 개발하게 되고 더 매력적인 수출품을 마련하지 못한 가야는 국제무대에서 빛을 잃게 된다. 보고 있나, 아베?

출처 - 우리역사넷

 

4세기 중후반, 백제-가야-왜라는 외교 연합 전선은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백제 근초고왕은 으쌰으쌰 하면서 고구려를 공격,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황해도 일부 지역을 먹는 기염을 토한다. 백제의 북벌에 신난 가야는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했고, 신라를 존망의 위기까지 몰아넣는다. 이때까지의 그림은 참 좋았다. 계획대로만 됐으면, 한반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에 그분이 등장한다. 광개토대왕. 그는 백제도 발라버리고 신라의 요청을 받아 가야 땅까지 밟으며 연합전선을 박살 낸다. 전기 가야연맹은 광개토대왕이 벌였던 단 한 번의 남진으로 해체되어버렸다. 역시, 하이테크가 답이다.

 

a3.jpg

전지적 가야인 시점...jpg

 

5세기, 남해안과 인접한 경상 서남부 지역의 가야 소국들이 좃망테크를 타며 조금씩 신라에게 편입되자 새로운 큰형님이 등장한다. 경상 내륙 산간 지방의 반파국(대가야)이다. 잠시 전기 가야연맹의 영역을 생각해보자. 왜와의 교역으로 성장했던 까닭에 영토가 동부로 상당히 치우쳐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후기 가야연맹의 가장 중요한 거래처는 백제였다. 백제는 아직도 호남 지방의 수많은 호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굳히지 못한 상황이었고, 가야산의 풍부한 철광을 개발했던 대가야는 호남 동부 지방을 포섭하여 새로운 무역 중심국으로 자리 잡았다. 다시, 백제-가야-왜의 국제 무역은 복원된 것이다. 

 

az.jpg

출처 - 홍익대 역사교육과 김태식 교수

 

그러나 대가야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낙랑이라는 하이테크 정치 체제와 직접 교역했던 구야국과는 달리, 대가야는 이들과 직접 교역할 기회와 여건이 없었다. 구야국이 그렸던 큰 그림을 닮아가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이후 외교적인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5세기 후반, 그동안 가야에서 철기를 수입해 쓰던 왜국은 철기 개발 기술을 획득했다. 또한, 백제 역시 가야를 거치지 않고 왜와 직접 교류하기 시작했다. 국제 관계에 있어 가야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공기가 되어버렸다. 가야 패씽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드디어 중국에 직접 사신을 보내보기도 했으나, 남부지역조차도 통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강한 외교력을 발휘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외교술 자체는 남부의 안라국이 더 뛰어난 편이었다. 무력과 정치력이 따로 노는 가야 연맹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6세기 초반, 백제의 호남 지방 남진에 따라 가야는 자신들의 나와바리였던 호남 동부 지역을 상실하였고, 결국 백제와 대립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522년, 대가야의 이뇌왕(異腦王)은 오랜 숙적이던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지만, 외교적으로 능수능란한 신라에게 있어 대가야의 노선 전환은 먹잇감이 입속으로 들어온 격이었다. 결혼 동맹은 금방 깨져버렸고, 가야 내부도 북부와 남부로 분열됐으며, 망국을 예측한 가야의 동부 소국들은 앞다투어 신라에 투항한다. 

 

단 한 번, 최후의 시도가 있었다. 백제 성왕이 기획하고 주도한 554년의 관산성 전투였다. 백제 + 가야 + 왜의 연합군은 신라와 결전을 치러 승리 직전까지 갔지만, 성왕의 전사와 함께 가야를 500여 년간 뒷받침해준 외교 연합전선은 종료됐다. 백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대가야는 562년 신라의 기습을 받아 순삭당한다. 이로써 ‘가야사’는 종료되었다.

 

 

꿈은 높은데 현실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며 가끔 이익단체의 활동을 하는 협의회와 어엿하게 사업자 등록하고 운영하는 회사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외교적으로 상당한 수완을 발휘했던 신라의 사례를 보면, 공격적인 M&A를 통해 여러 작은 회사를 인수합병한 하나의 회사와 여러 작은 회사가 연합한 협의회 사이엔 분명한 역량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야는 소상공인 연합체였다. 가야는 시작부터 끝까지 대외적인 사안에 대해 통일된 아이디어를 갖추지 못했다. 전기 가야 연맹에 큰 타격을 준 ‘포상팔국의 난’에서도 드러나지만, 치열한 외교적인 벌어지던 6세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재밌는 점이 많다.

 

529년,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지만 신라 측 신부 수행원들이 스파이 임무를 벌였다. 결국, 신라는 결혼 동맹을 날려버리고 남부 가야의 탁순국 절반을 꿀꺽한다. 더 이상 대가야를 믿을 수 없던 남부 가야의 중심, 안라국은 531년, 주도적으로 가야, 백제, 신라, 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안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왜라는 지원을 등에 업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었다. 

 

a5.jpg

안라회의가 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라국의 고당 복원 모형(국립함안박물관 소장)

너비가 50m정도 된다. 추정 복원 모형이긴 하지만, 다소 소박하지 않은가? 졸라 휘황찬란한 사극의 궁궐은 개뻥임을 알 수 있다.

 

안라회의를 통해 대가야의 입지는 추락했고 안라국이 외교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모두 가야의 소국 한두 개쯤은 가볍게 밀어버릴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지니게 된 상황에서 남부 가야 연맹의 줄타기 외교는 이미 무리수를 지니고 있었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 구한말 고종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역사속으로, 퇴장하다

 

541년, 백제 성왕의 한강 유역 수복 프로젝트와 진흥왕이 다스리는 신라와의 충돌로 인해 가야의 운명은 또다시 소용돌이로 빨려든다. 안라국과 아이들은 대놓고 침 흘리는 신라에 화친요청을 하지만 모조리 거부, 결국 백제 성왕을 찾아가 또다시 국제회의를 열게 된다. 제1차 사비회의다.

 

가야: 신라가 우리 애들 다 작살 냈는데 백제는 어떻게 우릴 지켜줄거임? 그것만 보장하면 백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백제(성왕): 아이고 너네 많이 컸네?^^7 근초고왕 시절엔 찍소리도 못하던 것들이 딜을 걸어오고. 뭐, 신라가 쳐들어오면 보호해주긴 할게. 근데 너희 애들은 신라 때문이 아니라 걔네가 허접해서 망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가야보다 한강 유역 수복(아직 고구려의 땅이었고 나제 동맹이 파기되기 전이었다)에 더 관심 있었던 성왕으로서는 당장 신라와의 충돌을 피하는 것이 중요했다. 멸망한 동생들을 되살리고 백제가 적극적인 신라와의 대결을 펼치길 바랬던 가야 연맹은 실망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다시, 왜국과 강한 유대를 보이면서 동시에 신라와 접촉하여 어떻게 비벼보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러한 가야와 왜의 독단적 움직임에 개빡친 성왕은 가야-왜 사신단을 소환한다. 이것이 544년, 제2차 사비회의다.

 

백제(성왕): 야 느그들 이제 나 건너뛰고 왜랑 놀더라?^^7 걔네 있으면 방해만 되니까 싹 다 내보내고 형만 믿어. 낙동강 쪽에 성 쌓아서 지켜줄게 걱정 ㄴㄴ해.

 

가야: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성왕의 제안은 명백했다. 가야에게서 왜를 빼면 남은 건 그건 한낱 촌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가야 입장에선 을사늑약과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이 강요를 대충 회피하는 것까진 성공하고 안라는 무려 고구려(?)에게 까지 구원의 손길을 뻗어보지만 실패, 결국 줄타기는 무너지며 각개격파 당한다.

 

6세기에 진행된 외교회의에서 가야의 소국들은 모두 대표단을 보냈다. 수차례의 국제회의를 통해서도 성과가 없던 까닭은 외교적 불균형 관계뿐 아니라, 가야 대표단 내부의 의견 불일치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서로서로 고만고만한 국력을 가진 채 성장하고, 성장한 뒤로도 옆동네 가야 형제와의 합병보다 공존을 선택한 평화주의자들은 스타트업 혹은 소상공인연합체로서 강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멸망했다. 

 

가야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는 여기서 대충 마무리하고, 이제 우리 시대의 가야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https://www.instagram.com/ddirori0_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