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09.11.9.월요일
펜더


 




영화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25분간의 오프닝...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    목 : Saving Private Ryan(한국 출시 제목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    독 : 스티븐 스필버그
주    연 : 톰 행크스, 톰 시즈모어, 제레미 데이비스, 맷 데이먼, 베리 페퍼 등등
제작년도 : 1998년
제 작 사 : 드림웍스 SKG 외 4개 사
수    상 : 99년 제 71회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비롯해 5개 부문 수상, 전 영국 비평가 협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 작품상, 전미감독조합 선정 감독상, 전미 군인협회에서 시상한 [노르망디의 정신상], 워싱턴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상하는 USO 메리트 상, 미 육군에서 [공로 시민상] 수상 기타 등등 많이 받았음.
러닝타임 : 170분


 






70년대 중반 이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말할 때 우리는,


 


- 죠스와 스타워즈가 써내려간 이야기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미 80년대 헐리우드 영화는 스필버그의 인생 이야기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이 시점에서 헐리우드를 말아 드시고 계신 우리 조지 루카스 형님과 스티븐 스필버그 형님... 이 두 큰 형님은 서로간의 돈독한 우정만큼이나 확실한 [내공]으로 전 세계 영화판을 찜 쪄 먹고 계셨고, 실제로 지금도 찜 쪄 먹고 계신다. 부와 명성을 한 손아귀에 다 움켜쥔 두 분...그 중에서도 우리 스필버그 형님에 대한 이야기가 요번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중점적으로 이야기 되겠다.


 


우리 솔직하게 툭 까놓고 말해보자, 스티븐 스필버그 형님께서 만든 영화 한편이라도 안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있나?? 따져봐라... 스크린에서도 만족 못해 동북아시아의 쪼메난 반도국가 한국의 빙과류 계를 일순간에 평정해 버린 시커먼 [죠스]에서부터 외계인을 만나면 일단 손가락부터 맞대야 한다는 새로운 상식을 전파시킨 `ET`,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보기만 해도 쥐 내리는 단어를 일상화 시켜버린 [쥬라기 공원]... 영화계 불멸의 거장이란 찬사를 받던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디어를 현실화 시켜버린 21세기 판 피노키오 `AI`, 그리고... 이제는 점쟁이까지 겸업해 보겠다고 찍어낸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 밖에도 [인디아나 존스], [아미스타드], [쉰들러 리스트] 등등.... 하다못해 길바닥에 구불려 다니는 영화 찌라시에도 그 이름 스필버그는 대문짝만하게 찍혀져 나온다.


 




자, 이런 거장께서도 마음에 걸려 하시는 게 하나 있었다... 뭐냐고? 그 이름 앞에 붙어 있는 [흥행 영화감독]이란 수식어가 못내 가슴에 아려왔던 것 이였다... 왜? 사람이란 게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울 스필버그 형님도 이제 좀 [예술 감독]이란 소리도 들어보고,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올라가 감독상 같은 거도 한번 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웬걸... 안주네. 특수효과상 같은 건 찍는 족족 주는데, 작품상이나 감독상 같은 건 아예 줄 생각을 안 하니 말이다. 스필버그... 그게 못내 한스러웠던 것이었다. 해서 찍은 게 바로 85년의 [칼라퍼플]이었다. 들어는 봤나 칼라퍼플? 듣도 보도 못했다고?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칼라퍼플이란 녀석의 의의는,


 




- 스필버그도 진지한 사회비판 영화를 찍으려고 [시도]는 했었다.


 


정도의 위치를 점한 녀석이다. 이거 찍은 다음에 2년 있다가,


 


- 하늘을 날아다니는 캐딜락!!


 


이라면서 무스탕 전투기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뭐 작가인 발라드의 유년시절 이야기 였으니 넘어가겠다. 그래도 이 작품은 칼라퍼플 보다는 덜 망했으니 그럭저럭 위안을 삼을 만하다. 이렇게 연속 두 작품이 망가지고 나서 스필버그 형님 다시 절치부심해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영화로 복귀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나온 것들 중 대박 친 작품이 바로 쥬라기 공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찍고 난 뒤 찬사는 [마이클 크라이튼]이라는 삼류 감독이자 일류 작가에게 돌아갔고(이 아저씨 감독이다...가끔 TV에서 "숀 코넬리의 대열차 강도"란 타이틀로 휴일 낮 시간에 땜빵 프로로 나오는 작품 있을 것이다...이 사람이 연출한 작품이다...한마디로 재미없다) 스필버그가 흥행의 귀재이고, 흥행의 키워드인 점은 변함이 없으나, 그의 영화가 어떤 메시지나 사회적 비판을 담아낼 수는 없다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코폴라와 스콜세지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었고, 돈은 벌었으나 [졸부] 취급을 받는다고 스스로 자격지심에 빠져 있었다. 결국 울 스필버그 형님 이런 콤플렉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칼을 뽑아들고 만든 것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 되겠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비롯해 8개의 오스카를 거머쥐고는 소원 성취한 듯 했다. 영화의 신도 그 동안 '엄한 영화' 찍어가며 오스카를 움켜쥐겠다고 설레발 친 스필버그가 불쌍했던지 인심 좋게 8개의 오스카를 건네주고는 덤으로 '부록'을 하나 더 건네준다. 바로 촬영감독인 야누시 카민스키(Janusz Kaminski)였다.


 


쉰들러 리스트는 스필버그에게 8개의 오스카와 함께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전장의 효과를 120% 재현해 낸 걸출한 촬영 감독인 야누시 카민스키(Janusz Kaminski)를 부록으로 건넸던 것이다.


 




어쨌든 쉰들러 리스트 이후 스필버그는 예술과 상업의 경계성을 모호하게 오가는 연출자로 자리매김 하고 싶었는지, 아미스타드.... 좀 심하게 망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흥행했다고 볼 순 없는 흑인 노예 이야기도 해보고, 호박 속에 갇혀 있던 공룡 유전자를 다시 뽑아내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열씌미 지내다가... 결국 1998년 다시 한 번 아카데미에 노크를 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뽑게 된다. 글타 라이언의 등장이었다!!!


 



 


1. 영화사상 가장 잔인했던 25분...


 


영화판의 금언 중 흥행에 관련한 몇 가지가 있다... 본 필자도 충무로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지금도 영상작가 교육원이나 영상원 등에서 작가나 감독의 꿈을 꾸는 이들에게 가르쳐 주는 금언!


 


- 초반 5분을 잡아라!!


 


이다... 영화 상영 시작해서 5분 안에 관객들을 영화로 몰입시키지 못하면, 그 영화는 끝이란 것이다. 여기에 보태서,


 


- 영화 제작비의 60%는 영화 시작점과 마지막 종결점에 투입된다.


 


란 말도 있다. 그 만큼 영화에서의 초반 5분은 중요하다는 것일 게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5분이 뭔가... 영화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오프닝이란 수식어와 함께,


 



 


- 당분간 이 정도로 충격적인 오프닝은 등장하지 못 할 것이다.


 


란 말이 비평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흘러나올 정도로 스필버그는 초반 5분을 [확실히] 조져 버렸다.


 


다시 한 번 아카데미의 닫힌 문을 두들기기 위해 스필버그가 정말 작심하고 만든 작품이기에 스필버그가 이 작품에 들인 공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스필버그와 함께 전쟁 영화로 인간에 대한 성찰과 전쟁을 비판했던 <씬 레드 라인>의 테렌스 멜릭 감독이 주인공 안으로 들어가 인간이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까지 피폐해 지느냐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스필버그는 그간 그가 보여주었던 상업적 코드의 장점들을 모두 끌어내 전장의 [극사실주의적 표현]을 바닥끝까지 보여주었다.


 


영화 촬영 직전부터 전 세계 군장 매니아들과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 유럽의 군장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스필버그는 고증에서부터 먹고 들어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의상 디자이너였던 조안나 존스톤은 3천벌의 군복을 준비해야 했고, 거기에 보태 2천 켤레의 군화를 제작. 다시 [많이 신었던 티]를 내기 위해 군화를 짓밟아야 했다. 그나마 의상의 경우는 낫은 편이었는데, 군사 매니아들을 [광란의 도가니탕]으로 몰고 가게 만들었던, M1 소총의 클립 튀어 나오는 장면과 [히틀러의 전기톱]이란 별명을 유감없이 증명해 주었던 MG 42 등 영화 전반에 걸쳐 사용 되었던 총기류를 확보하는 건 말 그대로 '스필버그 감독 구하기' 작전을 펼쳐야 했다.



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총기를 담당한건 영화총기 전문가이자 건스미스(총기 개조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사이먼 애덜튼이었다(블랙호크다운에도 이 녀석이 총기관련 담당자로 참여한다). 이 인간은 2차 대전 당시의 소총류가 지금은 거의 [유물] 상태로 골골거리고 있고,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총기 역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란 걸 확인하고 고민하게 된다.


 


- 이거 그대로 들고 영화 찍다간 애들 다 죽습니다.
- 그냥 흉내만 내면 안 될까?
- 지금 애들 총싸움 하자는 것도 아니고... 제작비 쓰는 김에 좀 더 쓰시죠?
- 좀... 더 써?


 


사이먼은 이런 위험한 총을 들고 영화 찍었다간, 진짜로 사람이 골로 갈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고, 3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2천정의 총을 찍어내게 된다(실제로 예비군 훈련 가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M1 카빈 소총... 호바스 상사로 열연했던 톰 시즈모아가 들고 다니던 그 총을 예비군 훈련장에서 쏘다보면 한방 쏠 때 마다 총열 덮게가 튀어 오르는 것을... )


 


배우들도 라이언을 찍기 위해 고생을 한 건 마찬가지였다. 당시 외신을 통해서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작품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고, 톰행크스와 톰 시즈모아 같은 애들이 해병대 훈련캠프에서 빡빡 기고 있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 나왔는데, 실제로 스필버그는 배우들을 10일간 해병대 대위였던 데일 다이에게 보내 [빡세게] 훈련을 시켰다. 여기서 이 외신의 2착이 압권이었는데,


 


- 빡센 훈련 덕에 출연배우들이 현재 트러블을 일으키며 서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라는 뉴스 단신이 소개 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당시 스필버그는 맷 데이먼... 그러니까 우리의 라이언 일병은 이 훈련에서 [열외]를 시켰던 것이었다. 덕분에 영화상에서 라이언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후후.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원제에 관한 것이다. 영어제목이 Savin Private Ryan인데, 번역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미군에서 Private은 이병, 즉 Private 2nd class : PV2라를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병을 부를 땐 어떻게 부르냐고? 일병의 경우 Private 1st class의 약자인 PFC로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의 올바른 한국 제목은 라이언 '이병'구하기가 옳다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영화상에 등장하는 모든 주변 환경에 대해서 스필버그는 철저한 고증을 우선시했다. 이런 고증은 옷이나 총기와 같은 소소한 소품뿐만이 아니라 덩치가 큰 '장비들'에 있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극 후반 관객들을 압도했던 티거 탱크(Tiger. 6호 전차란 녀석인데, 독일어 발음이 티거이다)에 대한 환호가 컸었는데, 실상은 소련의 T-34 전차를 티거처럼 보이게 [위장]을 하였던 것이다. 아 아쉬워라...


 


레인져 부대원들을 개죽음으로 안내했던 상륙용 주정들의 확보에 있어서도 스필버그는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2차 대전 때 썼던 주정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까?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배를 구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고, 결국 박물관에 있던 좀 쓸 만 한 녀석들은 다 끌어 모아 겨우 숫자를 맞췄다.
이렇게 주정을 맞췄다 싶으니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있는데, 이 배를 띄울 바다가 없었다는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어디서 했을까? 그렇다 바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흘러 50년이 지난 촬영 당시의 노르망디는 더 이상 상륙작전을 펼칠 환경이 아니었던 것이다(2차 세계 대전 이후 개발이 시작된 노르망디 해안은 황금빛 모래사장이 아니었다).



결국 프랑스가 아닌 아일랜드 해안가로 낙찰을 보고, 아일랜드에서 영화를 찍기로 결정을 보게 된다. 이 덕분에 스필버그는 아일랜드군을 엑스트라로 쓸 수 있게 된다.



원래 스필버그는 촬영지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져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에 공히 협조요청을 했으나, 영국군이 거절하자 아일랜드군 단독으로 촬영하게 된 것이다(영국군으로서도 심사가 뒤틀릴 것이 자기네들도 50년 전에 피 흘리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펼쳤는데, 미군만 멋있게 그리는 영화에 엑스트라로 나와 달라고 하니 좋다고 달려갈 수 있었을까?). 750여명의 아일랜드군 엑스트라들은 대부분 브레이브 하트때부터 엑스트라로 출연한 병력들이라 제법 영화인답게 촬영에 임했다는 후문이다.


 


(노르망디가 제외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1년 내내 관광객들이 들끓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60년 전 그곳은 죽음과 공포, 시체들로 메워졌다면, 지금은 돈을 물고 날아오는 관광객들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차와 장갑차를 보면서 완벽한 고증을 이루어냈다며 찬사를 보냈는데, 실은 이 전차와 장갑차 때문에 스필버그도 고생깨나 했다. 이미 반세기가 훌쩍 뛰어넘은 그때의 전차와 장갑차들이 아직까지 멀쩡히 굴러가는 게 있었을까? 몇 대 있긴 있지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충분한 수량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영국의 한 동호회였다. 바로 'SBG : Second Battle Group'라는 군용차량 콜렉터 동호회에서 두 팔 걷어 제끼고 스필버그 감독 구하기 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이들이 제공한 장갑차와 개조한 티거 덕분에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특히 SBG의 회원 스티브 라몬비란 사람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티거 전차를 개조해낸 사람이다. 소련제 T-34를 완벽하게 독일제 Tiger로 변신시켰다. 일반관객들은 잘 포착하지 못했는데, 이때 등장한 티이거는 초기형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순전히 스티브 라몬비의 취향 때문이었다)


 


음 그렇다면, 슬슬 영화를 찍어 봐야지?? 에 또... 라이언 하면 기억나는 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초반에 보여주었던 그 잔혹했던 살육전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실제로 이게 크게 먹어줬거든. 실제로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스필버그는 스토리보드를 사전에 만들거나 하지 않고, 오로지 핸드헬드(Hand held...한국말로 하면 들고 찍기가 되는데, 카메라를 트라이포드에 올려놓고 고정된 앵글로 찍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뛰어 다니면서 찍는 것이다)로 초반 씬을 조지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에 더해서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 감독이었던 야누시 카민스키 형님은 카메라 앞의 렌즈 보호막을 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다. 거기다가 종례에 쓰던 180도 셔터를 버리고 90도와 45도 셔터를 써서 배우들의 움직임이 화면에 튀게 만들었다.... 결국 영화는 무슨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한 분위기를 120% 만들어 냈고, 실제 관객들은 전쟁터 한가운데 내동댕이쳐진 느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형님들 아주 작심하고 [막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2. 오버로드 작전?


 


1941년 영국 본토항공전을 끝내놓고,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 결국 동토의 땅 소련으로 밀고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땅덩이 큰 거 하나는 세계 최고인 러시아 애들이 아닌가? 아무리 전격적이네 뭐네 해도 러시아의 큰 땅덩어리와 나폴레옹도 몰아낸 동장군 앞에서 히틀러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바 코앞에서 미적거리며 그 진격의 속도를 멈춰야 했던 41년 12월... 히틀러는 도버해협 건너의 영국과 대서양 너머의 미국에 대한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 바로 보이지 않는 [서부전선]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1차 대전 당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양쪽 전선을 유지하다가 결국 망해버렸던 기억이 다시 슬금슬금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런 불안은 소련의 부채질 덕분에 서서히 '실체'로 드러나게 된다. 소련이 영국과 미국 애들에게 줄기차게 [제2전선]을 요구한 것이다.


 


- 아니 우리는 하루에만 7,8천명이 죽어 나자빠지는데, 이럴 수 없어!! 네들이 독일 애들 뒤통수 때리면, 우리가 좀 편해지잖아!!


 


스탈린 정말 줄기차게 이런 요구를 했었고, 그때마다 영국과 미국은,


 


- 아 쫌만 기다려봐 일단은... 그래, 아프리카 어때? 아프리카에 상륙작전을 벌일 테니까...응?


 


유럽 본토에 대한 진공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스탈린에게 영국과 미국은 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토취(Torch) 작전을 들이밀며 달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이탈리아 상륙작전... 이렇게 보면 미국과 영국이 유럽 본토진공에 마음이 없는 듯이 보이지만, 누가 뭐래도 연합군의 유럽 상륙작전은 분명 [실행]될 거란 걸 유럽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연합국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히틀러도 눈뜬장님이 아닌 이상 이 제2전선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된다(히틀러도 유럽 사람이었으니까). 바로 [대서양 방벽]의 출현이었다. 히틀러는 대서양을 접하고 있는 연안에 유럽판 [만리장성]을 쌓기로 결심 한 것이다.


 



 


- 북쪽의 북빙양부터 남쪽의 비스케 만까지!!


 


히틀러는 총연장 3,860킬로미터에 이르는 서부 해안선 전체를 [요새]로 만들기로 했고, 이 3,860킬로미터의 구간 사이에 총 1만5천개의 거점을 건설 하도록 지시했다(독일군은 실제로 이 명령을 실행해 옮겼다).


 


100만 톤의 철과 1,500만㎦의 콘크리트로 휘둘러 쳐진 이 거대한 역사를 히틀러는 [대서양 방벽]이라 불렀고, 독일 국민 역시 이 대서양 방벽의 등장으로 연합국의 제2전선 형성은 불가능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틀러가 한 발 먼저 대서양 방벽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할 때 영국과 미국은 연합 참모 본부와 합동 참모 본부를 창설하며 슬슬 독일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대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유럽진공에 대한 계획이 나오기 시작한다. 1942년 4월 런던의 회담 자리에서 유럽진공에 대한 작전 안이 나온다. 바로 [ROUND UP]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원래 1943년 실행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프리카에 대한 상륙작전인 토취 작전에 의해 연기 되었다가, 다시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3년 5월 제3차 워싱턴 회담에서 "오버로드(Overlord)"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바뀌게 되고, 유럽진공을 위한 사령부인 CCSSAC(Chief of Staff to the Supreme Allied Commander)가 구성되면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1943년 12월이 되자 영미군은 본격적인 대륙 침공에 앞서 마지막으로 사령부의 정비를 끝마친다. 바로 연합 원정군 총사령부(SHAEF : Supreme Headquaters Allied Expeditionary Forces)로 개편된 것이다.


 


(이때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연합군 총사령관 자리에 아이젠하워 대장을 앉히게 된다. 영미 양국은 이 총사령관 자리에 대해 신경전을 벌였지만, 역쉬... 물주가 짱 먹는 건 고금의 진리. 미국이 짱 먹게 된다. 원래 이 자리는 당연히 마샬에게 돌아가는 걸로 되어 있었는데, 루즈벨트가 마샬은 자기 곁에 있어야 한다며 부득불 우기는 통에 결국 "20개 사단에 필적 할 만한 미소"를 가지고 있던, 사람 좋은 아이젠하워에게 이 자리가 돌아가게 된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이 있기 전에 영국 애들은 본격적인 유럽진공에 앞서 시험 삼아 한번 독일군을 찔러보기도 했다. 프랑스의 디에프항을 비롯해 주변 5개의 방어진지를 기습 공격 한 다음에 돌아오는 디에프 작전이 바로 그것이다.


 


결과가 어쨌냐고? 한마디로 [실패작]이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한...3분 만에 캐나다군 1개 대대가 사실상 괴멸 당했던 건 애교로 봐줄만 했다. 디에프 근처에 상륙한 5100명의 병력 중 3648명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 올 수 없었고, 영국 애들은 구축함 한척과 33척의 상륙용 주정을 잃어야 했다. 육군과 해군이 이렇게 깨지는데 공군이 빠질 수 있을까? 공군도 역시 106대의 비행기를 독일군에게 조공해야 했다.


 


어쨌든 이 디에프의 짧은 에피소드는 2년 뒤에 있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히틀러는 디에프의 대승을 교훈(?)삼아 영미군은 상륙작전을 할 때 [항구]를 노린다고 믿게 되었고, 해안선에 대한 방어보다는 항구에 대한 방어에 치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44년 6월에 벌어졌던 연합군의 진공에서도 끝까지 칼레에 병력을 배치하다가 사태를 최악으로 끌고 나갔다. 반면 연합군측은 좀 더 생산적인 교훈을 도출해 내는데, 일단 제공권의 압도적인 우위가 있어야 한다는 점.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에 의한 상륙군에 대한 원호, 견고한 항구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해안선으로의 상륙, 상륙부대와 지원부대의 유기적인 무선통신 확보 등등.... 말 그대로 확실한 예행연습이 되었던 것이다.


 


- 디예프에서 한 사람이 전사했기 때문에 D-day에는 10명이 구조 되었다.


 


훗날 마운트배튼이 한 말이었다.


 


3. 노르망디... 시작해 볼까?


 


1943년 3월 12일 영국군의 프레드릭 E. 모건 중장은 명령 하나를 받게 된다.


 


- 1944년 5월 1일 유럽으로 진격 할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작전을 입안하기 바란다.


 


말로 하면 굉장히 쉬워 보이는 것 같은데, 모건 중장은 근 1년을 뺑이 쳐야 했다. 인류 역사상 단일 작전으로는 최대라는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그 작전 계획 수립부터가 [노가다]였다. 39개 사단, 287만 6천명의 인원, 함선 5,300척, 항공기 12,000대를 운영해 유럽으로 넘어가겠다는 '생각'자체가 무리였다. 그러나 까라면 까야 하는 게 군대 아니던가?  1년 동안 모건 장군은 뺑이를 쳐야 했다.


 


첫 번째 난관은 도대체 어디로 상륙 할 건가라는 아주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선택부터 난관이었다. 일단 당시 연합군들의 분위기는,


 


- 유럽 어디라도 좋다... 안전하게만 내려다오.


 


였다. 해서 대충 꼽힌 것이 6군데 정도였다. 맨 처음엔 포르투칼까지 검토 되었다 하니 말 다했지. 여하튼 이 여섯 곳의 면면을 보면, 일단 네덜란드와 벨기에 쪽이다. 상대적으로 프랑스 쪽 보다는 독일군의 방어가 덜 되었다는 점이 좋았지만, 역시 너무 멀었다... 어디서? 영국 본토지! 거기다가 [머나먼 다리]란 작품에서 보여주었듯이 이 동네 길이 엄청 꼬불꼬불 거리고, 좁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풍차와 방파제의 동네답게 습지대와 제방, 하천 등등이 널려 있어서 전차나 기갑차량이 움직이기엔 쥐약인 동네였다. 간단하게 부결되었다.


 


다음 후보는 말 많고 탈 많았던 파드 칼레 이 동네 보면, 옛날부터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애들이 많이 거쳤던 동네였는데, 음... 삼총사란 영화보믄 울 쥔공 달타냥이 영국으로 달려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찾아오려고 출발하던 동네가 바로 여기였다. 영국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기에 항공지원이나 함포 지원에서 확실한 이점을 제공해 주는데다가, 수송거리가 짧아져 병력이나 물자 운송하기도 편했다... 천혜의 조건이지?? 반면 문제점도 있었는데, 일단은 벼랑이 높고, 사구가 많았다. 병력을 넓게 포진시키기에는 문제가 있었고, 강풍이 불어와 낙하산 부대나 글라이더에 의한 침투도 위험했다. 결정적으로 이 동네는 히틀러가,


 


- 상륙작전을 한다면 분명 칼레다!!


 


이렇게 생각하고 대서양 방벽 중에서 가장 공을 들여서 튼실하게 방어를 해 놓은 곳이었다. 나중에 B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대서양 방벽을 순시하던 롬멜 장군도 칼레의 방어를 보면서,


 


- 튼튼하군... 근데 노르망디 쪽은 상대적으로 허술하잖아!!


 


이랬을 정도였다. 일단 칼레는 보류이고, 그 다음은 세느강 하구에 상륙한다는 작전이었으나 금방 폐기 되었고, 브리타뉴 반도 서안과 비스케만은 해안절벽이 너무 높고, 파리와 상륙지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포기 했다. 자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바로 노르망디다!!!


 


일단 강풍을 차단할 수 있고, 해안에서의 대부대 수용이 가능할 정도로 탁 트여져 있다는 점, 그리고 내륙으로의 진격이 가능할 정도의 통로가 있다는 점. 결정적으로 독일군의 방어 준비가 상대적으로 약했다는 점들이 노르망디를 상륙지점으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자, 여기서 독일군 애들의 방어 전략을 한번 보자. 실제로 [대서양 방벽]이란 게 완성되고, 연합군이 침공해 와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들은 하고 있었지만, 이미 전략 폭격기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본토로 꾸역꾸역 몰려오는 미군과 영 연방군들의 숫자에 독일 측도 슬며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히틀러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바로 서부전선의 사령관을 두 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서부전선 독일군 총사령부의 사령관인 룬드쉬테트 원수와 그의 예하로 서부유럽 해안을 담당한 이름도 희안한 B집단군 사령관이 된 롬멜 원수... 일단 이 둘은 근본적으로 전략적 사고 자체가 틀렸다.


 



룬드쉬테트 원수



룬드쉬테트는 고전적인 [기동방어] 개념을 들고 나왔다. 즉, 적이 상륙한다면, 최초 상륙지점의 상륙은 허용하되 전략예비를 상륙지점 후방에 배치 시켜 놓고, 상륙하는 놈들을 탱크로 밀어 붙이잔 개념이었다. 정통파였던 것이다. 반면에 기갑전의 왕자였던 롬멜은 이 기동방어에 반대 하였다. 기갑전에 대해선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롬멜이 기동방어를 반대한다니... 이유는 간단했다. 아프리카 시절, 제공권이 상실된 상황에서의 탱크들이란 건 말 그대로 [사격목표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걸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독일 영공 안에서도 전투를 회피 할 정도로 쇠퇴한 독일 공군의 전력을 볼 때에는 기동방어란 말 그대로 죽을려고 빽쓰는 짓이었다.



롬멜의 생각은 간단했다. 상륙부대를 해안선에서 막아 내자는 것이었다. 한때 히틀러가 만든 대서양 방벽을, [히틀러의 몽상]이라며 질타하던 롬멜, 이제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기동방어를 포기하게 된다.


 



롬멜 원수


 


자, 문제는 이런 두 명의 입장 차가 격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서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7개의 기계화 사단들 때문이었는데, 롬멜은 이 사단들을 자신에게 넘겨 달라고 떼를 썼고, 룬드쉬테트는 이런 롬멜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히틀러는 이 두 명의 중재자가 되어야 했는데, 그 중재란 게 참... 아니 한 만 못한 거였다.


히틀러가 내놓은 중재안이란 게 7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롬멜에게 할당하고, 나머지 4개 사단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 휘하. 즉, 히틀러 밑으로 들어오게 했다는 것이다(이 4개 사단은 히틀러의 명령 없이는 못 움직이게 했다).


어쨌든 이 상황 하에서 롬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 만조시의 해안선을 주전장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롬멜은 대서양 방벽을 보다 완벽한 철옹성으로 만들어 보겠다며 동분서주 했는데, 상륙부대의 상륙용 주정을 방어 하겠다고 [벨기에의 문]이라는 높이 3미터짜리 철제 빔을 해안에 박아 넣고, 아스파라거스(Asparagus)라는 글라이더와 적 항공기를 차단하는 방책을 예상 낙하지점에 설치하면서 곧 있을 상륙 작전에 대비했다. 실제 이 아스파라거스는 글라이더 낙하 예상 지점에 5천 만 개를 설치 할 계획 이었으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엔 계획의 10% 정도 밖에 설치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위력은 발휘 하였다.


 


이런 롬멜의 준비상황을 알게 된 연합군 사령부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5월 침공 계획을 상륙주정의 확보를 위해서 6월 달로 연기한 상황에서 롬멜이 그 시간들을 활용해 대서양 방벽을 철옹성으로 만들어 가는 걸 보며 아찔할 수밖에... 실제 롬멜의 이런 행동 덕분에, 유럽 침공 계획은 상당 부분 수정 되어야 했다.



롬멜이 설치한 각종 기뢰와 벨기에의 문 같은 쐐기꼴의 <상륙용 주정 전복용 방책>들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근본부터 바꿔 놓게 만들었다. 당장에 가장 크게 대두 되었던 것은 야음을 틈타 상륙작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힘들어 졌다는 것이다. 만조가 되는 밤에 치고 들어갈 경우 상륙 부대가 해안으로 진출하는 거리도 짧아질 뿐만 아니라, 야간이기에 적의 공격에 어느 정도 은폐와 엄폐가 용이해 진다는 이점이 있었는데, 이 철책들의 등장으로 어쩔 수 없이 간조 때에 맞춰 상륙을 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공병부대를 대동, 이 철책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추가사항이 발생하게 되었고, 종국에 가선 전차부대까지 이 상륙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4. 가자 노르망디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있기 몇 개월 전부터 영국과 미국의 공군들은 유럽에 대한 제공권 확보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독일 전투기 사냥에 나선 건 물론이거니와 독일 전투기 공장에 대한 집중 폭격을 가해 독일 공군을 빈사상태로 몰고 갔다. 여기에 더해 독일군의 물자와 예비 병력의 이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1944년 5월에만도 900량 이상의 기관차와 16,000량 이상의 화차를 파괴하였다. 물론 노르망디 해안에 대한 상륙을 위해 사전 폭격도 실시되었지만, 이 역시도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에 한발의 폭탄을 떨어뜨리면 북프랑스 지역에 두발을 떨어뜨리는 비율을 맞춰 노르망디로 상륙한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빛을 발한 건 연합군 측의 첩보전이었다. 포티튜드 작전이라 명명되었던 이 작전은 간단히 말해 연합군이 칼레로 치고 들어올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유럽 방면에 있던 90개 사단이 만약 노르망디로 내쳐 달려온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다. 고작 37개 사단을 가지고 상륙 작전을 벌여야 하는 연합군 측으로선 어쨌든 이 독일군 병력들이 노르망디 쪽으론 얼씬도 안하길 빌어야 했고, 실제로 얼씬도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연합군측은 가공의 군단을 만들어 병력을 부풀리는 건 기본이었고, 스키 바인더나 산악용 레펠 등을 대량 구입하는 전표를 만들어 마치 스칸디나비아 반도 쪽으로 상륙하는 [척]을 하게 된다(덕분에 독일군은 27개 사단을 유럽 북부에 계속 주둔시켜야 했다. 위조 전표 몇 장 덕분에 완전히 발목 잡힌 것이다. 독일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가 아닌가? 당시 영국군은 이런 위조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수많은 역정보를 뿌렸는데, 연합군이 최소 90개 사단 이상을 운용해 칼레로 내려온다는 냄새를 독일군 첩보망이 있는 여기저기 뿌리고 다녔다)


 


자, 그런데 오마하란 게 무엇일까? 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이 담당한 상륙지점 중 하나이다. 당시 노르망디의 상륙지점은 5개로 나뉘어 졌는데, 영국군의 뎀프시(Miles C. Dempsey) 중장이 지휘하던 영국 제2군이 골드, 주노, 소드 세 개 방면으로 진출 하였고, 브레들리 장군이 지휘하던 미1군이 상륙해야 할 해안이 바로 유타(Utah)와 오마하(Omaha)였던 것 이였다.



당시 이 상륙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겨우(!!) 7개 사단 뿐이었는데, 유타 해안으로 들어간 건 미 제4사단(운 좋은 놈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쥔공 톰 행크스가 소속된 미 제1사단 애들이 달려가 떼죽음 당했던 그곳이 바로 오마하였다. 그럼, 거시기 맷 데이먼이 날아가 뿔뿔이 흩어졌던 101 공수사단 애들은 어디로 날아간 것이었을까? 상륙 작전 당시 미국의 82공수 사단과 101 공수사단 애들은 유타해안 서쪽에 낙하하게 되어 있었다. 왜? 82사단은 메르데레(Merderet)강에 떨어져 그쪽의 교량을 점거하는... 공수사단의 아주 정통적인 임무에 투입되었고, 101공수사단은 유타해안의 독일군 반격을 저지하면서 4사단을 원호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자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공수사단 최대의 적이었던 기상이 속을 썩였던 것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군용 낙하산이란 게 대부분 라운드 슈트식의(원형 낙하산) 멍텅구리 형이었는데(한마디로 바람 부는 데로 몸을 맡기는 것이다), 결론은 영화에서처럼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지... 이 기상이란 문제가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또 이 기상상태였다.


 


앞전에 그노무 벨기에의 문이라는 철책 때문에 간조 시에 상륙을 하기로 작전을 변경 했다는 이야길 전했는데, 문제는 간조면 벌써 해가 뜬 상태가 되고, 결국 벌건 백주대낮에 기관총좌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 우리보고 가서 사격 표적지 하라고?


 


결국 여기서 타협점을 본 것이 간조와 해돋이 시간을 맞춘 '러시 타이밍'을 잡자는 것이다. 즉, 여명에 치고 들어간다는 것인데, 6월 한 달 중 그런 날은 불과 3일 뿐이란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상륙용 주정을 안전하게 조작하려면 육지를 향해 부는 바람이 시간당 13~19Km정도로 유지되어야 했고, 함포 사격의 정확성을 위해서 시계가 5킬로미터 이하여서는 또 안됐다. 여기에 공수부대에선 수송기의 목표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구름이 전체 하늘의 6/10이상을 덮어선 안 된다는 조건을 들고 나왔고, 이뿐만이 아니었다. 낙하산 부대가 강하 때 뿔뿔이 흩어지는 걸 막아야 한다며 육상의 바람이 시간당 32킬로미터 이하여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게 된다. 기본적으로 D-day 당일 날 안개나 아지랑이가 피어서는 안 되는 건 물론이고 말이다. 이런 날씨가 6월 중에 걸릴 확률은 1/60 정도였다. 그야말로 확률과의 전쟁이었다.


 




자 이렇게 되니 연합군 파견군 최고사령부 소속의 기상위원회 애들은 그야말로 [점쟁이]가 돼야 했다. 특히나 영국 공군 출신의 기상위원회 짱 이었던 J.M 스태그 대령은 말 그대로 온갖 요구사항의 쇄도에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미 한 달 전인 5월 8일 아인제하워는 6월 5일을 D-day로 잡고, 6일과 7일을 대타로 잡아놓았다. 이 상황에서 연합군은 D-day 5주일 전부터 유럽 해안선에 있는 방어진지와 통신망에 약 5만3800회 출격 3만 7백 톤이나 되는 폭탄을 흩뿌리며 다가오는 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을 끝마쳤다. 이 상황에서 6월 3일 총 17만 명으로 구성된 상륙부대는 배에 승선을 완료 한 상태에서 스태그에게 기상 상황을 물어봤다. 당시 상황?


 


- 보면 몰라? 비바람 몰아치잖아! 구름? 비오는 데 그럼, 해가 떠 있냐? 호랑이 장가가?
- 이 자식 까칠하네...그러니까, 내가 지금 날씨 물어봤어? 앞으로 어떻게 될 거냐고?
- 이거 보이지? 이게 저기압이라는 거거든?
- 저기압이 뭐 어쨌다구?
- 저기압이 삼단콤보로 이어지고 있다고!


 


이미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고, 구름은 잔뜩 낀 상황! 더구나 세 개의 연속한 저기압이 스코틀랜드에서 뉴펀들랜드까지 쭉 뻗어있는 상태였다. 기상 조건은 최악이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공격 일을 하루 늦추게 된다.


 


6월 5일이 되자 잠깐 동안 날씨가 개었으나 여전히 출격에 적당한 날씨는 아니었다. 당장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압도적인 제공권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상륙작전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에 더해서 계속 이런 식으로 연기되다간 상륙부대의 사기저하는 물론, 공격 개시일이 적에게 노출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는 건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사령부에서 짱구를 굴리는 참모들 사이에서 7월로 작전을 연기하자는 말도 나왔지만, 만약 이 시점에서 공격타이밍을 놓치게 되어 7월로 작전을 연기하면, 그만큼 독일 본토로 진격할 시간을 놓친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바로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긴장된 순간에 스태그가 입을 연다.


 


- 아주 짧지만, 예상보다 빠르게 한랭전선이 다가왔습니다... 이 상태라면 6월 5일 일요일 오후에는 짧은 동안이지만 날씨가 회복되기 시작해서 6월 6일 저녁까지는 이어질 것 같습니다...


 


지상 최대의 작전을 시작해도 좋다는 이 영국 대령의 말은 역사적으로 잘 [기록]되어졌다. 아이크는 거듭 스태그에게 괜찮은지에 대한 확답을 요구했으나, 스태그는 그저 웃으면서 대답을 안했다(녀석도 나름 쫄았던 것 같다). 결국 아이크는 몽고메리에게 의견을 구한다.


 


- 화요일에 결행해서는 안 되는 무슨 이유가 있겠소?


 


- 저 같으면 GO를 하겠습니다.


 


몽고메리... 고스톱 하다가 고박 쓸 확률 높겠다. 여하튼 아이크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지상 최대의 작전은 시작된다.


 


- 2부에서 계속


 


펜더(jagdpant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