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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세운상가, 그 골목의 추억

2003.12.21.일요일
딴지 생활부


그 날은 어느 좋은 봄소풍날이었드랬다. 봄소풍은 정릉, 가을소풍은 서오릉이 개교 이래의 교풍이었으므로 그 날도 우리는 볕 좋은 정릉에 모여서 김밥을 다 먹음으로써 사실상 끝난 소풍날 오후의 새끼줄을 꼬고 있었다. 유난히 검은 피부에 머리마저 심한 곱슬이라 누구도 본명을 부르지 않는 마이콜 오경삼이 말했다.


"실비아 크리스텔꺼 봤냐?"
"웬 실비아 크리스텔?"
"이런 촌놈. 아직도 실비아 크리스텔을 모르다니"


머리가 커 평소 대갈장군이라 불리던 백종일이 껴들었다


"그러는 넌 봤냐?"
"봤쥐. 진짜 맞더라"
"합성 아니구?"
"진짜라니까"
"조까. 니가 어떻게 알아"


말인즉슨, 실비아 크리스텔의 뽈노 사진이 있는데 마이콜은 이걸 봤단 거구 대갈장군은 그런 게 있을 리 없으며 있더라도 합성일 거란 얘기였다. 아! 뽈노. 말만 들어도 쏠리기 시작했다. 마이콜에게 물었다.


"근데 넌 실비아 크리스텔 사진을 봤냐?"
"다 나오는데가 있지"
"개구라까시네. 증거 대봐"
"증거 대면?"
"내가 한 코 대준다"
"좋아, 가자. 씨바!"


그래서 우리 셋은 그 곳엘 갔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기를 써서 알고 싶어 하는 그 곳. 까딱 잘못하면 골방에 끌려가 있는 돈 다 뜯기고 후장까정 대줘야한다는, 그러나 잘만 하면 실비아 크리스텔 뿐 아니라 옆집 누나 뽈노도 구할 수 있다는 흥미진진, 기대만빵, 스펙타클, 어드벤처한 천일야화의 무대.


가판대에 즐비한 플레이보이, 허슬러, 펜트하우스, 하이소사이어티 따위의 잡지들을 잠시라도 쳐다볼라치면 어느새 다가와 팔짱을 끼는 삐끼 아저씨들은 무시무시한 공포이면서도 야릇한 유혹이었으니 언제고 돈이 생기면 꼭 한번 와보리라 어린 마음에 굳게굳게 다짐하던 그 곳. 그 이름만으로도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던 세운상가 그 골목.


마이콜 , "각자 얼마씩 있냐?"
대갈장군 , "난 만원"
, "나두"
마이콜 , "좋아, 나도 만원 있으니까 3만원 정도면 살 수 있을 거다. 기다리고 있어"


소풍날의 특별용돈을 모아 마이콜 혼자 씩씩하게 작전을 수행하러 간 사이 대갈장군과 나는 세운상가 2층 화장실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나타난 놈은 품속에서 A4용지 4분의 1만한 크기의 전리품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오늘 단속이 떳단다. 다른 데로 빨리 가자"


미처 그 전리품을 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세운상가를 떠났다. 그리고 종로를 거슬러 인사동을 지나고 안국동을 거쳐 도착한 정독도서관. 도서관 화장실에서야 겨우 펼친 그 전리품은 그러나, 실비아 크리스텔도 아니고 옆집 언니도 아닌 절구통 몸매를 가진 일본여자의 뽈노였으며, 상대남자는 거시기도 아주 거시기하게 작은 초로의 부실남이였으며 인쇄상태는 조악하다 못해 칼라의 핀트조차 맞지 않아 여자의 가슴이 검정, 빨강, 파랑, 노랑으로 화려하게 널부러져 있었으며 호치키스로 대충 찍어놓은 제본은 두어번 넘기자 낱장으로 이산가족이 될 지경이었다. 총 20쪽 남짓한 허접 찌라시가 3만원?


"인상 드러운 아저씨가 얼마 있냐길래 3만원 있는데요 그랬더니 3만원을 뺏다시피 가져가서는 이걸 주는데 펴보면 죽인다잖아"


"븅신, 니가 한 코 대"


어쨌거나 그 조악한 도색물은 한동안 우리들 딸의 동반자였음을 고백해야겠다. 당시 14살 우리들의 상상력은 절구통 아니라 드럼통이라도 능히 소화해낼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들어갔겠거니 잊었던 그 도색물이 두 달 뒤 이상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례시간에 담임이 말했다.


"반장, 백종일. 끝나고 학생부실로 가봐"
"네?"
"반장이란 놈이..."


그랬다. 그때 나는 반장이었다.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어 마땅한 반장으로서 학생부실에 불려 가는 일은 불길하고도 불미스러웠지만 별 수 있으랴. 학생부실엔 학생주임이 예의 그 당구대를 잘라 만든 몽둥이를 책상 위에 턱하니 올려놓고 우리를 야리고 있고 한쪽 구석엔 못 보던 놈들 셋과 함께 언제 불려왔는지 마이콜이 무릎을 꿇고 벌을 서고 있었다. 학주가 말했다.


"니덜이 주범이란 말이지? 일단 엎드려봐"


퍽퍽. 영문도 모른 채 맞은 다음 학주가 설명해준 사건 경위는 이런 거였다. 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 도색물을 사실은 마이콜이 셋 중 한 놈에게 만원을 받고 팔았으며 다시 그 놈이 다른 놈에게 5천원에 팔고 다른 놈이 마지막으로 얼간이에게 2천원을 받고 팔았는데 이 얼간이가 소지품 검사를 하던 중 걸렸단 거였다.


그냥 길에서 주웠다고 하면 될 걸 혼자 죽기 싫었던 이 얼간이, 엉덩이 찜질 몇 대에 이실직고, 그래서 다른 놈의 삼실직고와 그 놈의 사실직고를 거쳐 결국 주범인 세운상가 3인방이 검거된 거였다. 죄명은 음란서적 유통죄.


검거된 뒤 다시 본 도색물은 서너 쪽만 겨우 남아 절구통이나마 팔다리가 성치 않은 상태였다. 다 떨어진 절구통 때문에 이 고생이라니. 그 뒤,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오시고 근신 일주일 내내 교무실에 불려가 음란서적을 유통시킨 죄로 오가는 선생님들의 음란한 조롱을 샀던 기억은 지금도 낯뜨겁기만 하다.


특히 말대가리 미술 선생이 교무실을 드나들 때마다 "많이 컸냐?"며 우리들 바지춤을 어루만지던 기억은 끔찍하다 못해 드럽기까지 하다. 거기에 비하면 중학생활 내내 일명 세운상가 3인방으로 불리며 "남은 책 없냐"는 농담을 감내했던 건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이다.   


어쨌거나...


뜬금없이 이런 두환이 담배 피던 때 얘기를 꺼낸 건 엊그제 신문을 보다가 세운상가의 그 골목이 급속하게 쇠퇴해가고 있단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음란물 역시 온라인시장에서 유통될 뿐 7,80년대의 번성은 어느새 옛말이 되어버리고 그 골목 상인들은 지금 밥조차 먹기 힘들단 얘기였는데 한때 세운상가 3인방의 멤버였던 탓이었을까, 기사를 읽고 난 뒤 옛 애인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씁쓸해졌다.


세운상가야말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매스게임 연습하느라 다 보낸 우리들에게 은밀하고도 짜릿한 다락방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이미 도심의 흉물이 된지 오래고 청계천 복원과 발맞춰 조만간 철거될 이 건물야말로 서민들의 소박한 물방앗간 같은 곳은 아니었을까. 최첨단 전자제품과 음란물이 뒤섞인 이 거대한 상가건물이야말로 지난 세월 우리들의 지리멸렬한 자화상 같은 건 아니었을까.


난 아직도 말대가리가 우리의 도색물을 집으로 가져가 싸모와 함께 킬킬거리며 봤을 거란 상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때의 말대가리만큼 나이를 먹은 지금에는 그 상상이 조금도 흉측하다거나 음란스럽지 않다. 하루에도 몇 십 통씩 제목조차 낯뜨거운 메일을 받는 요즘이지만 오히려 그때의 그 조악했던 도색물이야말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성지침서이자 어른들의 부부활력 가이드였으리란 생각, 다만 복고풍 페티시즘일까.


사실 난 세운상가의 철거나 그 골목의 쇠퇴 따위엔 별 관심이 없다. 난 다만 우리 세대의 은밀하고 소박했던 추억이 대뜸 신문 지상에 밥을 걱정하는 곤궁한 현실로 발가벗겨진 것이 마뜩찮을 뿐. 그래봤자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겠지만 난 아직도 가끔은 간첩 접선하듯 힘들게 구한 뽈노 테이프를 VTR에 밀어 넣으며 느꼈던 그 긴장과 흥분이 그립다.


조정화면이 끝나자마자 나오던 FBI Warning의 그 흥미진진함이란. 더러는 속아 공테이프를 구하기도 했지만 그 때조차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이프가 끝날 때까지 치직거리는 화면을 눈이 빠져라 보던 경험, 우리 세대가 가진 즐겁고도 야릇한 추억 아닐까. 뭐 맨날 하는 말이지만 아님 말구.



 
마이콜! 대갈장군! 이거 보믄 연락해라!
아무리
(amuri@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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