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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학자다.

 

뛰어난 천재로서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6두품 출신으로 진골이 아니면 출셋길이 막힌 ‘철벽 천장’이 드리워졌던 나라 신라를 떠나 열두 살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난다.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던 빈공과가 목표였다.

 

그 아버지 최견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그 신분적 한계에 어지간히 한이 맺혔던 사람으로 보인다. 열두 살 아이를 만리타국에 보내면서 최견일은 이렇게 말했다. “10년 안에 과거 급제를 하거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최치원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열심히 공부한다. 원체 될성부른 떡잎이었는 데다가 (아무리 자식을 출세시키고 싶기로 웬만큼 영특하지 않고서야 열두 살 소년을 혼자 유학 보내기가 쉬웠을까) 성실함이 더해지니 최치원의 공부는 일취월장했고, 874년, 유학 7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한다.

 

하지만 한때 세상의 전부 같았던 당나라는 당시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과거에는 합격했으나 관직 자리가 나지 않아 한동안 백수로 지내다가 시골 고을 지방관을 역임했다가 물러났는데 황소의 난이라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안 그래도 허덕이던 당나라는 더욱 엉망진창이 된다.

 

유명한 ‘토황소격문’ 등을 남기기도 했던 최치원에게도 당나라는 가망이 없어 보였다. 당나라 경력을 살리면 신라에 가도 괜찮게 살 수 있으리라 싶었던 그는 과감하게 신라 귀국을 결행한다. 나이 스물여덟. 16년 만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러나 금의야행(자랑삼아서 하지 않으면 생색이 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비단옷은 입었지만, 신라 조정은 그를 제대로 알아봐 주지 않았다. 대우해준다는 것이 6두품의 한계인 아찬 벼슬이었다. 결국, 절세의 천재라 할 최치원은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크게 쓰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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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여러 글과 책 가운데 화랑 난랑을 위한 비문에서 ‘풍류’를 논한 것이 있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실려있으니, 실로 (풍류는) 유·불·선 을 망라하면서 모든 백성을 이어준다.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고 억지로 일을 시키지 않고, 말없이 행동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노자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며, 악행은 만들지 않고, 선행을 높이는 것은 부처의 감화이다.” 하였다.

 

최치원은 또한 앞일을 내다보는 이인(異人)으로도 유명하였는데 백년은 기본, 천년 뒷일까지 내다보는 혜안으로 여러 예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오죽하면 신선이 됐다는 이야기가 돌았을까. 한 제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느 날 아리수(한강) 남쪽을 거닐다가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통탄했다고 한다.

 

“천 백여 년 뒤 온 세상이 몹쓸 전염병에 휘말릴 제, 이 지역을 중심으로 기묘한 도가 생길 것이니 이를 ‘은재(殷喍:허다한 개싸움)’라 할 것이다. 이 은재는 풍류의 유불선 대신 개(改), 불(佛), 천(天)을 이어 백성들을 어지럽게 할 것이다.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물러가라 부르짖으니 개독의 가르침이며, 새벽 예불은 빼놓지 않으나 한 번 자리에 눌러붙으면 금강역사도 떼기 힘드니 그 시대 불교 고승들의 감화요, 그러면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은 있으니 이는 천주교를 따름이라. 20년간 집사이면서 새벽 예불을 드리는데 영성체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시끄러운 개판이겠는가. 오호라 은재로다.” 하였다.

 

제자들은 이 말을 믿지 않고 입을 모아 말하되 “스승님. 세상에 그런 도가 어디 있겠으며 그런 도를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합쳐서 행하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유불선이 망가진다 하여도 개불천의 세상이 어찌 오겠습니까.” 하였다. 최치원은 또 한 번 하늘을 우러러 통탄하여 가로되 그런 이가 천년에 하나 나올지는 모르나 분명히 이 아리수 남쪽을 대표하여 화백 회의 회원까지 오르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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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예언을 상상하던 한 제자가 남긴 시가 삼국유사 부록에 전하였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작자 역시 미상이다.

 

隊袒恨殷喍 대단한은재

제자 무리들이 팔뚝 걷어부치며 ‘은재’라는 도를 한탄하되

世終敎去來 세종교거래

세상이 끝나고 모든 가르침이 죽는 날이 온다면

考念恥何難 고염치하난

부끄러움 생각하고 곱씹는 일 얼마나 어렵겠는가

壓道敵理柰 압도적이내

도를 압박하고 올바른 도리를 적대하니 이를 어찌할꼬

串歲淫普煞 관세음보살

세월을 꿰뚫는 어지러움 두루 해를 미치고

割來淚揶窈 할래루야요

미래를 동강내니 눈물과 야유 그득하다

猩牦蝴痛悽 성모호통처

원숭이도 소도 나비도 아파하며 슬퍼하리라

史頹何世搖 사퇴하세요

역사가 기우매 세상은 얼마나 흔들리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