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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 S. Bay 추천0 비추천0






1999.3.29.월

일보 인도네시아 특파원 Don S. Bay


97년 중반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경제위기가 그 해 말 한국마저 좌초시키면서 나의 자카르타 사무실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현지업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교공장과 일부 벨기에, 일본업체 등 주로 인도네시아나 현지 제 3국 업체들과 거래하고 있던 나는 98년 초 인도네시아 정부시책에 의해 무수한 시중은행들이 폐쇄되거나 중앙은행 통제하에 들어가고 한국은 한국대로 97년말 1800원대까지 치솟은 달러당 환율로 수입계획이 무더기로 취소된 것은 물론 이미 열어놓은 수입 L/C 들마저 취소되면서 서로의 L/C와 은행신용도를 믿지 못하게 된 한국과 인도네시아 중소기업들 사이의 무역은 사실상 당분간 불가능해 보였다.


거래 공장의 원자재 수입이 중단되고 이에 따라 자연히 물동량도 대폭 줄어들면서 궁지에 몰린 나가 궁여지책으로 한 일은 기존에 본사와 연결하여 하고 있던 의류 수출입 외에 가능한 다른 일들을 닥치는 대로 부딪쳐 보는 일이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조로 들어선 새 업무는 인도네시아에 지사를 갖고 있지 않은 중소기업들로부터 시간당 30불을 받으며 시장조사와 지사업무를 대행해 주는 일이었다.


계약을 한 한국기업이 얼마 안가 부도가 나거나, 제대로 된 시장조사 리포트를 보내주고 나면 함께 청구한 금액을 떼어먹고 입을 씻는 얌체들도 있었지만 IMF로 인해 한국기업들의 지사나 연락사무소가 썰물처럼 자카르타를 빠져나가거나 대폭 축소되는 과정에서 자기 회사 고유업무 외에 다른 회사일까지 봐줄 만한 인력이나 시간을 가진 지사가 거의 없어졌다는 점이 그나마 상대적인 경쟁력이 되었다. 하지만 의류만 가지고 10년 넘게 일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건축용 흙포대, PVC 카펫, 가성소다, 고철, 핸드백, 시멘트까지 조사하고 일이 되도록 엮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많이 공부해야 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담하는 도중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98년 8월 갑자기 형이 자카르타에 날아왔다.


형은 그 당시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쿠리어(courier ; 상업서류송달업)업계를 잠깐 떠나 97년 초부터 학교대상의 이벤트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해 겨울방학을 위해 준비한 스키캠프의 예약이 정원을 초과할 만큼 꽉 차 있다가 난데없이 날아든 IMF의 좌우 스트레이트로 거의 다 취소돼 버려 파리를 날리고 만 회사가 이제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카르타에 오래전부터 진출해 있던 한 친구가 할 일이 있으니 한 번 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황선배라는 형 친구는 나도 그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나가 예전 대기업의 현지공장 넘버투맨으로 있을 때 급한 물건은 자기 회사를 통해 보내 달라며 명함을 전해 준 일을 필두로 그 후 우리 아이들 다니던 한인 유치원 체육대회 때, 그리고 자주 손님들을 모시고 가던 한국식당에서 곧잘 얼굴을 마주치곤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생활 7년 동안 줄곧 현지 쿠리어 전문회사에 파견직원으로 나와 있었는데 현지 사무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를 파견하는 형식이 되었던 한국본사는 그 동안에도 여러 번 바뀌었다.


내가 형 친구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형이나 형의 옛날 친구들이 나와 다른 세계에 살던 학창시절부터 비롯된 것이다. 유도를 배운 것이 화근이었는지 학창시절 내내 싸움판을 전전하며 매일 밤늦게 들어오던 형은 간혹 옆구리를 병에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 있기도 하고 눈가에 칼자국 비슷한 걸 달고 오기도 했다. ( 장남이 그렇게 튀면 차남은 대부분 반대방향으로 튀는 법. 나 형이 그러는 동안 은이를 쫓아 다녔다는 건 13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


황선배는 형이랑 몰려다니는 친구들이 상대편 무리들과 한판 붙다가 막판에 대장끼리 결판을 지어야 할 때면 전광석화 같은 태권도 이단 옆차기, 돌려차기로 상대를 한방에 보내버리는 전설적인 한국판 동방불패였다고 한다.


형도 나이를 먹고 나이트기도를 서던 어느날 밤 몸도 못가눌 정도로 늘씬 얻어맞고 집에 들어와 "이젠 맞고 다니는 게 속 편해" 라고 말하며 프론토라는 인도네시아 전문 쿠리어회사에 취직한 후로 형은 완전히 변했고 형이나 그 친구들에 대한 나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그 당시 생각에 섬뜩해지는 때가 있다.


할 일이 있다는 말에 인도네시아에서 새 직장을 잡을 희망으로 비행기 티켓을 사고 자카르타에 도착한 형을 황선배는 며칠씩이나 바람을 맞췄다. 골프약속이 있고, 가족들과 안여르 비치(Anyer beach)에 가야 하고, 오늘은 다른 손님이 있고... 하는 이유로 며칠을 기다린 끝에 비로서 그를 만나고 돌아온 형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다.


당장 취직이 가능한 것처럼 말했던 전화통화와는 달리 황선배는 지금 널 위해 딴 일 제쳐놓고 열심히 찾고 있는 중이라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는 이내 골프얘기, 돈 얘기, 여자얘기로 그날 밤을 다 보냈다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형은 자세히 물어보지도 못했다. 미루어 보건데 당시 절박한 심정이었을 형은 한국에서 황선배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저 실없는 큰소리임에 틀림없었을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급기야 이 먼 이국땅까지 날아 온 것이다. 나 보기 면목이 없을 정도로 황당해 하던 형의 아직도 순진한 구석이 안쓰러웠던 것은 물론 황선배에게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날 황선배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언젠가 불쑥 전화를 받아 블록엠(Blok M) 한국식당에서 나와 만난 날에도 그는 학창시절 주먹으로 날리던 시절의 얘기, 자카르타에서 얼마나 벌었다는 얘기와 이젠 벌만큼 벌었으니 미국으로 이민 가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왜 자카르타에 사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기가 번 돈 액수를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하며 그리고 나면 왜 그 다음 행선지는 항상 미국인지 알 수가 없다.



" 내가 2차 살께. 이건 니가 내 "


저녁을 사겠다고 불러내고서도 식사하는 동안 내내 식당에 모인 다른 한국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맞은 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듯 이 테이블에서 저 테이블로 옮겨 다니던 그가 왜 나를 굳이 불러냈을까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둘러 식당을 나서는 그를 보며 어디 가라오케라도 예약을 해둬서 저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의 차 앞에 오도카니 서있는 두 인도네시아 여자를 가리키며 황선배가 하는 말에 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 아까 꼬셔논 애들인데. 제들 데리고 가서 놀자. "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다. 한국의 압구정동쯤 되는 이곳 블록엠은 백화점과 식당들뿐 아니라 일본인 가라오케와 한국인 가라오케가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는 곳이고 시간을 죽이려고, 누군가 유혹하려고 또는 유혹을 당하려고 찾아오는 청년 학생들로 항상 끓어 넘치는 곳이다. 그 아이들은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는 한 시간 동안 거기 그렇게 기다리며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간 곳은 싸구려 펍. 취기가 오른 황선배가 다시 한 마디 한다.



" 너 걔 데리고 나가도 돼. 임마, 선배가 여자까지 붙여 줬으니 먹은 술값은 니가 내고. "


고객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항상 그랬다. 그날 맘에도 없는 고등학생을 붙여주며 선배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생색을 내던 그는, 형이 와 있는 동안에도 형과 저녁에 만날 때마다 나에게 술값 내러 오라고 나중에 전화하곤 했다.


마치 스스로 인질처럼 여겨진 형이 불쾌해 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 황선배의 최대고객인 모 신발공장 사장은 황선배가 내게 하는 것과 똑같이 그를 부렸다. 형과 식사를 하다가도 그 사장에게 전화를 받으면 황선배는 스나얀(Senayan) 경기장 앞 아틀렛 호텔 코모도 바(Komodo bar)로 부리나케 달려가 술값을 계산해 주곤 했다. 그 50대의 사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는 예쁘장한 인도네시아 아가씨를 옆에 낀 채 언제나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형은 비행기를 세 차례나 연기하며 황선배가 겨우 겨우 찾아냈다는 기가 막힌 자리를 기다렸지만 황선배가 형을 그 회사에 데리고 간 것은 세 번째 연기한 비행기가 출발하는 날 오전이었다. 골목을 돌아 돌아 들어간 끝에 도착한 세 명 일하는 코딱지만한 포워딩 회사가 황선배가 말한 기가 막힌 자리라는 것에 정말 기가 막혔지만 그들이 준비했다는 계약서 초안을 들여다 보고는 결국 뒤집어지고 말았다.


직원으로 등록은 해줌. 그러나 월급없음. 차량지원없음. 사무실 책상도 스스로 준비할 것. 전화비 쓴 만큼 낼 것... 이건 노예문서와 다를 바 없었다. 친구를 그렇게 팔아먹고 일찌감치 꽁무늬를 뺀 황선배 대신, 속은 것만으로도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애꿎은 형에게, 목표를 놓친 내 분노의 십자포화가 퍼부어졌다...


 


형이 자카르타에 다시 온 건 그해 11월 초였다. 이번엔 홍이사란 사람과 함께였다. 8월에 형이 귀국할 때 난 형이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지 않도록 몇 마디 조언을 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개인 자격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차피 인도네시아 회사로부터 월급이나 커미션을 받는 파견직원 업무라면 우선 한국에서 자카르타 인바운드 물량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를 잡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한국업체로서도 손해될 일이 없다. 그래서 형은 그 사이 열심히 뛰어 한국에서 물동량 기준 37위라는 한 에어카고 업체와 계약을 한 것이다. 같이 온 홍이사는 물론 그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 동안 내가 한 일은 자카르타에 소재한 쿠리어 업체들을 총망라하여 한국과 거래를 희망하는 업체를 찾는 것이었다. 늘 하던 일이어서 시간도 별로 들지 않았다. 8월 당시 황선배는 그 노예문서 만든 회사를 찾아주면서 인도네시아엔 쿠리어 업체가 별로 없어서 힘들었어. 그래서 다들 우리 회사만 쓰는 거지"라고 했단다.


그러나 전화번호부를 들춰보고 인터넷을 열어보니 자카르타에만 수백개의 크고 작은 쿠리어 업체 명단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팩스번호가 기재되어 있는 업체에 보낸 전문만도 200여장. 황선배가 했다는 그 발언은 내가 전에 근무하던 공장장의 말을 떠오르게 했다.


당시 서울에서 의류오더를 수주하던 것이 점점 벅차질 무렵 자카르타에 부임한 나는 현지에서 수주영업을 시작하려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하지만 공장장은 찬 물을 끼얹을 뿐이었다.



" 자카르타에 있는 한국업체들 중에 자체적으로 오더 받는 데는 한 군데도 없어. 다 한국 본사에서 받아 주는 거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해. "


그러나 며칠 뛰어본 결과 한국업체들 대부분이 현지에서 상당량을 수주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고 우리도 첫해 100만불 가까운 현지수주 실적을 올렸다.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당당히 얘기할 줄 아는 용기있는 사람이 흔치 않고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나이와 짬밥을 담보로 내세우며 자기만의 상상이나 금방 탄로날 명백한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전문에 회신을 받고 내 사무실까지 방문한 업체들이 십여 군데. 그중에는 담배재벌인 삼뿌르나(Sampoerna)그룹, 항공재벌인 머르빠띠(Merpati)그룹처럼 인도네시아에서 손꼽히는 대형 업체들의 계열사도 상당수 있었고 물론 영세한 군소업체들도 끼어 있었다. 사전 상담을 그렇게 진행하면서 인도네시아 쿠리어 업계의 맥락을 짚은 다음 최종적으로 몇 개의 업체가 선정되었다. 그 보고서가 서울에 도착한 직후 형과 홍이사가 최종 결정을 짓기 위해 자카르타에 날아온 것이다.



" 어떻게 된거야?? 이거 보고한 거랑 틀리잖아!? "


인도익스프레스(PT. Indoexpress Buana)에서 부사장 알피안(Alfian Sutanto)과 상담이 진행되는 중간에 홍이사가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한명의 희귀한 사람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통역해 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하며 직접 알피안과 영어로 상담을 붙은 홍이사가 알피안이 이야기하는 바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명백했다.


한국에서는 꿈도 못꿀 일이지만 알피안은 학창시절 인도네시아 국립대학인 우니페르시타스 인도네시아(Universitas Indonesia)를 비롯한 세 개의 대학교에서 입학허가를 동시에 받아 그 세 대학을 동시에 졸업하는 기염을 토하고 얼마 후 삼뿌르나그룹 계열사인 쿠리어 전문 인도익스프레스와 에어카고 전문 글로벌(PT. Global Putra Indonesia)의 부사장으로 전격 임명된 이제 31세의 똑똑한 남자다. 국내파인 그의 영어는 아주 유창하지는 않았지만 알아듣기 쉬운 또박또박한 말씨였다. 하지만 홍이사의 영어는 나도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가격 경쟁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황선배의 회사를 사용하고 있던 홍이사의 회사는 인도익스프레스와 계약함으로써 kg 당 최소 U$1.50, 연간으로는 15만불 이상 절감할 수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건 매출의 20%를 가져가는 황선배의 몫이 빠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전국을 연결하는 완벽한 지사망에 지난 7년간 UPS와의 합작경험으로 선진화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인도익스프레스는 월 40톤이 넘게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한국으로부터의 쿠리어 물량 중 상당량을 흡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 상황을 전날 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모신 식당에서 차근차근 설명해 줄 때에는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알피안이 영어로 반복하자 이번엔 정색을 하며 내 보고가 잘못됐다고 무섭게 따져드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중요한 상담 중에 그런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을 일으키는 것을 영어만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 홍이사가 열을 내는지 알 길 없어 눈을 휘둥그레 뜬 알피안 앞에서 간신히 홍이사를 이해시킨 후 상담 통역은 원래의 내 몫이 되었지만 홍이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알피안이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회전의자를 삐딱하게 돌려 놓고 앉은 홍이사는 연신 코를 후비고 있다. 검지 손가락이 두번째 마디까지 들어가는 것 같다. 알피안은 짐짓 못본 척 하고 있었지만 건너편에 앉은 형과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고 얼굴마저 화끈하게 달아 올랐다.


나흘 간의 출장일정 동안 알피안은 매일 저녁식사에 우릴 초대했지만 우린 한 번밖에 응하지 않았다. 동양인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상식적인 예의의 감정이 있기 마련이다. 아직 계약도 체결하지 않은 시점에서 그렇게 계속 얻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주는 음식 받아 먹자고 나서는 홍이사를 말리는 게 만만찮은 일이긴 했다.


물론 계약이 거의 확실시되는 인도익스프레스의 저녁식사초대는 사실 매번 응해도 그렇게 큰 실례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 출장 왔다가 한 군데만 만나고 돌아갈 수는 없어 요식행위로 만난 머르빠띠그룹의 메가 카르고(Mega Kargo)는 경우가 틀렸다. 이미 대세가 인도익스프레스로 넘어간 것을 모르는 이들은 그 사이 형이 일할 사무실까지 단장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회사 전체 임원들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까지 마련하겠다고 제의했다.



" 먹구 보는 거야. "


이렇게 나오는 홍이사를 말리기 위해 다시 한참을 설득해야 했다.. 홍이사는 한번 왔다 떠나면 그만이지만 계속 자카르타에 남아 이들과 앞으로 또 어떤 일을 진행하게 될지도 모를 나로서는 거래 상대방에게 명백한 손해가 될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출장기간 중 잠깐씩 종적을 감추던 홍이사는 출장 마지막 날 당장 싸인할 테니 만들어 놓으라고 한 인도엑스프레스와의 계약서를 받아 들고는 다시 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자기가 사장이나 다름없으니 이 정도 조건이면 즉시 서명해도 상관없다고 불과 이틀 전 말했던 그가 갑자기, 이미 서로 협의해서 확정한 문안을 가지고 이건 문제가 많으니 사장과 협의해야 한다며 한 발을 빼는 것이다.


알피안은 이번에도 벙벙한 표정이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형은 그동안 내가 모르는 일도 많았던 듯 자기는 다음 비행기 타면 안되겠냐고 속삭인다.


홍이사가 서명해서 보내주겠다던 계약서가 한 달 째 무소식인 동안에도 난 비교적 낙관적이었다. 12월에는 서울출장을 가니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면 그때 고치도록 조치하면 되고 늦더라도 연내에는 계약이 마무리될 것이므로 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을 위해 일다운 일을 했다는 생각에서였다.


알피안이 계약서를 몹시 독촉한 덕에 자주 만나다 보니 가끔은 서로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도 기분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때까지도 알피안을 제대로 평가하진 못했던 것 같다. 인도익스프레스는 내가 업체수배 전문을 보낸 첫날 찾아온 화사들 중 하나였다. 보잘것없이 작은 내 사무실에 업체들을 불러 상담하는 것이 좀 쑥스럽고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단 시간 내에 많은 업체들을 만나려면 교통이 엉망인 자카르타를 직접 운전하며 찾아 다니는 것보다 훨씬 빠른 방법이었다.


부하 직원 두 명과 함께 내 사무실에 들어서던 크지 않은 키의 알피안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가 내미는 부사장 직함의 명함도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작은 회사의 부사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리이니까. 그가 부사장으로 있는 두 회사의 사장은 위나르코(Soetjahjono Winarko)라는 사람이 역시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난 아마도 알피안이라는 이 사람의 나이로 보나 내 작은 사무실을 꺼리는 기색도 않고 스스럼없이 들어서는 모습으로 보나 아마 하룻밤 운수대통해서 이름뿐인 감투를 쓴 사람일 거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나중에 삼푸르나그룹임을 알고 나서 시각이 좀 바뀌긴 했지만 까뿍(Kapuk)에 있는 인도익스프레스 부사장실의 조악한 모습에 성실하고 열심히지만 그룹에선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글로벌의 그의 사무실이 궁전같다는 사실은 그 당시 미처 몰랐다. 내막을 모두 아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때 알피안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2월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서울에 돌아왔을 때 형의 상황은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방문했을 때에도 홍이사와 사장은 계약서에 곧 서명하겠다면서도 계속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그리고 12월 31일, 98년의 마지막 날 파국이 찾아왔다. 홍이사가 황선배의 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동안 형에게는 비밀로 해 가며 인도네시아 출장 때부터 황선배를 접선하고 있던 홍이사는 인도익스프레스가 그 동안 제공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유용한 상담자료로 사용하였고 황선배는 물량을 전부 놓치느니 자기 몫을 좀 줄이는 선에서 인하된 가격으로 계약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형과, 인도네시아 업무를 위해 채용되었던 형의 옛 프론토 동료들은 그날 피눈물을 흘리며 그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홍이사가 내 컨절팅 커미션을 떼먹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허무한 연말이었다...


우리가 완전히 당했다는 소식을 알피안에게 이멜로 보내는 새해의 기분은 정말 참담했다. 알피안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은 물론 소위 인도네시아보다는 훨씬 좋은 나라, 조금은 더 선진국 국민이라고 자부하던 한국사람으로서 홍이사가 알피안에게 한 비열한 행동은 마치 나 자신의 치부인 것처럼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업체를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 형과 그 동료들에게도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거의 반년이 걸렸던 작업의 원점에 서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내가 잠시 방심했기 때문인 것만 같아 형에게도 가슴 쓰리도록 미안했다. 하지만 자카르타에 돌아와 만난 알피안의 반응은 의외로 밝았다.



" 비록 내 윗분들이 좀 실망은 하겠지만 최소한 이 일로 우리가 회사에 구체적으로 손해 낸 건 없지요. 돈(이건 내 이름), 너무 실망하지 말고 또 노력해 봅시다. 좋은 방법이 생기겠죠. 그리고... 며칠 전에 보내준 실패 보고서. 잘 썼더군요. 우린 직원들한테도 다 읽어 보라고 했지요. 요즘은 실패한 걸 사실대로 보고하는 놈도 없고 정말로 미안해 하는 놈도 없거든요. "


알피안이 그렇게 얘기해 준 것이 내게 큰 격려가 된 것은 물론이었다. 어쩌면 그는 그때 이미 서울지사 설립계획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후에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가 제시한 그 계획은 나뿐 아니라 형과 동료들까지 흥분에 들뜨게 했다.


밤을 새며 만든 프레젠테이션들 중 하나를 알피안이 기본틀로 채택하고 곧이어 인도익스프레스의 확정안이 나오면서 서울지사 설립은 급속히 구체화 되었다. 알피안이 비용송금을 시작하고 항공화물업체들을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던 형과 동료들은 이제 사무실을 알아보고 관계 부처, 법무사를 뛰어 다니느라 바빠졌다. 비록 제 3국 물량까지 당장 소화낼 수는 없지만 한국과 인도네시아간 만을 매달 오가는 만만치 않은 물량을 누구보다도 싸고 빠르게 운반해 줄 쿠리어 업체가 한국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 사람들이 썩었다고 하죠. 맞아요. 여기 세관이나 공항은 썩을 대로 썩었어요. 하지만 우리도 그래서 거기 맞춰 나가는 수밖에 없죠. 남들은 지금 통관장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만 뒷돈을 주죠. 하지만 우린 모두에게 줍니다. 나중에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르니까요. 맨 밑에서 맨 위까지, 맨 끝에서 다른 끝까지. 가끔 공항에 감사가 나올 때는 아무도 일 못합니다. 며칠 씩 말이죠. 미스터 황 회사도 못해요. 쿠리어 물품 통관은 법대로 하자면 법에 맞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일을 멈춘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감사도 우리 돈을 받은 사람일 테니까요. "


업무협의를 하는 동안 알피안은 그런 말도 담담하게 했다. 구정 후에 있을 서울출장을 협의하는 자리에서였다. 사실 그때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그가 어느 정도되는 호텔에 묵을 생각이냐는 거였다. 미리 알아보았던 서울의 호텔비는 인도네시아 특급호텔에 비해서도 훨씬 비싼 편이었고 부사장이지만 엄연히 인도네시아인인 알피안에게 그런 출장비가 부담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알피안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 날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마세요. 사실을 얘기할까요? 난 수마트라(Sumatera) 바딱(Batak) 출신입니다.(바딱은 피폐한 지방으로 유명함) 우리 아버지가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 무슨 돈으로 했을 거 같아요? 너무 어려운 시절이라 어떤 사람을 사기 치셨죠. 그 사기친 돈으로 자카르타에 와서 사업을 하신 거에요. 물론 나중에 갚았지만. 나도 춥고 배고픈 거 잘 참아요. 잠만 잘 호텔, 아무데나 잡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 난 아직 그를 우습게 보았던 거다. 단지 그의 놀랄만큼 명쾌한 솔직함에 난 잠시 멍해졌을 뿐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형은 당장 삼성동의 6만원 짜리 호텔을 예약해 버렸다.


알피안의 짧은 서울출장 마지막 날인 3월 9일 밤, 나는 그와, 이제는 그의 서울지사원이 된 형과 그 동료들을 남산 밑 동보성이라는 정통 중국집에서 저녁을 대접했다. 아직 좀 더 손질해야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지난 8월부터의 시작된 모든 사람들의 수고가 서울지사라는 형태로 만족하게 마무리되는 흐뭇한 순간이었다. IMF의 한 가운데에서 미국이나 유럽의 어떤 선진국도 아닌 인도네시아의 한 회사가 서울에 지사를 세우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그렇게 사람들 예상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알피안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은 일도 있었다. 한국의 봄과 꽃샘추위를 우습게 보고 양복 윗도리마저 자카르타에 두고 온 그는 내가 96년 자카르타에서 생산한 플리스 자켓 쌤플을 입고 출장기간 내내 추위를 버텨야 했다.


알피안이 내게 화답하며 2차를 산 곳은 하얏트 호텔 로비 라운지였다. 대학시절 데킬라를 즐겨 마셨다는 그는 그곳에서 모두를 위해 데킬라를 시켜놓고 좌중을 주도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의 사장이며 그룹 감사로도 등재되어 있는 위나르코가 사실은 삼대째에 이른 삼푸르나 그룹 회장의 사촌이며 사장으로 임명된 후 한번도 알피안의 회사를 방문한 일도 회사일에 신경을 써본 적도 없다는 것을 들은 것도 그곳에서였다.


말하자면 부사장 알피안은 사실은 인도익스프레스와 글로벌이라는 두 개의 대형 계열사를 운영하는 실질적인 사장인 셈이다. 그런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자신의 직위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신규사업 전면에 뛰어들어 발벗고 앞장서는 그의 젊음과 의욕을 난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를 변변한 식당도 없는 6만원짜리 호텔에 재워 아침마다 그 옆 편의점에서 덜덜 떨며 라면을 먹게 했으니 나도 심각한 의전상의 실수를 한 셈이다. 어지간히 사람볼 줄 모르는 내 눈을 탓할 수 밖에...


알피안과 내가 자카르타에 돌아온 지금 인도익스프레스의 서울지사는 이제 거의 모든 준비과정을 마쳐가고 있다. 영업쪽에서만 일해 왔던 형과 동료들은 이제 한번도 해보지 않은 경리자료, 대차대조표도 만들고 심심치 않게 본사에 보고서도 보내야 할 모양이다. 그것도 영어로.


모든 것이 아직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동안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온 인도익스프레스 서울지사원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경제위기의 상황에서 과감한 모험을 하는 알피안, 모두에게 행운과 건승을 빈다.



 


- 딴지일보 인도네시아 특파원 Don S. Bay ( donsbay@cbn.net.i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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