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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박당 추천0 비추천0






1999.3.8.월

딴지 교육부 기자 최가박당



서양넘더러 어떤 단어를 한국인에게 한국어로 설명하라니까 단 1초도 주저없이 초스피드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고 해보자.


" 설치류 동물이구 말이야. 쥐 비스꼬롬하게 생겼는데 몸은 짙은 노란 색에 까만 줄무늬가 있고, 푸짐하게 생긴 커다란 꼬리도 있고 말이야. 심심하면 바퀴돌리는 넘! "


다람쥐! 하고 정답을 외치기 전에 우리는 단번에 알게 된다. 이 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넘이거나 최소한 한국에서 10년 이상 살아본 경험이 있는 무늬만 서양넘이라는 것을.


아무리 언어의 천재라도 외국어로서 배운 이상 저딴 식의 한국어를 구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척 보면 알 수 있다. 외국넘이 우리나라 넘보다 우리말을 잘해버리면 이미 그 넘은 외국넘이 아닌 이상한 한국넘으로 접수되는 거다. 이쯤되면 짜식 한국어 잘 하는데! 하고 감탄하기 보다는 씨바, 저 새끼 뭐야! 하며 황당한 표정을 짓게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외국어를 하려면 위의 수준으로 해야 한다고 틈만 나면 동포들을 들들 볶아대는 나라가 있다.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토플, 토익으로는 부족해서 좃선일보와 설대가 협잡해서 만든 창조적인 영어시험까지 동원해 가뜩이나 취직 안되 죽을 상인 대딩들 말려죽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이제 고딩들에게까지 손을 뻗치는 게 이 나라의 못말리는 외국어교(영어교가 주도하는 싸이비 종교라고 생각하면 됨) 전도사들이다. 이들은 음흉하게도, 주말에 TV앞에 앉아 오락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고딩들에게 전도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


문제의 주말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자칭 명문 고등학교 두 팀이 편갈라 나와서는 외국인 한 명을 두고 난리 부르스를 벌인다. 그 외국인에게 영어로 주어진 단어를 설명하는 거다. 우리의 고딩들이 과장된 몸짓과 말도 안되는 콩글리쉬를 뻔뻔스레 외쳐대다가 외국인이 정답을 맞추면 방청석에서는 모두 할렐루야!를 외치듯 감탄사를 연발해대는데 사실상 이 감탄사는 무대에서 나뒹굴기까지 하며 온 몸으로 열연한 까만머리 친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친구는 설명과정에서 방청석을 웃긴 것으로 역할을 다 한 거다. 잘했다 치타) 말도 안되는 설명에도 정답을 유추해내는 노란머리 아저씨의 명석함을 향한 것이다.


이 웃기는 퀴즈 프로그램에는 잘 짜여진 드라마가 한 편 마련되어 있다. 한 여학생이 그야말로 온 몸을 바쳐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명석한 노란머리 아저씨도 이 여학생의 못말리는 콩글리쉬는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시간은 흐르고, 더 이상 아는 단어도 없고...


이 난처한 상황에서 여학생은 위기에 처한 올리브처럼 헬프 미, 헬프 미, 뽀~~빠이~~!를 외칠 수밖에 없다. 이 때 홀연히 나타난, 뽀빠이보다 멋있는 버터냄새 풍기는 남학생. 나타나자마자 속사포를 쏘아댄다.



Its a kind of rodent(설치류 동물이구요), bla bla bla ....


10초도 안 지나서 노란머리 아저씨는 정답을 외친다.


Squirrel!(다람쥐!)


앞에서 미리 예상해봤듯이, 이 경우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반응한다.



씨바, 저 색휘는 머야!(입이 좀 벌어진 상태라 발음이 좀 꼬일 거다)..


하지만 그 곳 방청석에서는 씨바 대신 할렐루야!가 터져 나온다. 이번에는 노란머리 아저씨의 명석함이 아니라 까만머리 친구의 버터맛 샛바닥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가 쏟아지는 거다.


또 하나의 지맘대로 명문 고등학교도 여기에 질 수는 없다. 이 쪽에서는 웬 여학생이 나와서 쏼라쏼라쏼라... 좋다, 함 붙어보자. 뽀빠이와 원더우먼의 대결... 마늘 냄새나는 떨거지들은 다 치워내버리고 이 두 녀석의 대표들이 지네 고등학교의 자존심을 걸고 쌈을 벌이는 거다.


일류대학 출신의 개그맨들이 가담해 뭔가 엘리트적인 분위기를 잡으면서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시작하게 되면, 시청자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AFKN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캡션 자막이 흘러나오니 영어공부에 도움이 될 거다). 그리하여 불꽃튀는 접전 끝에 마침내 원더우먼의 승리로 막을 내릴 때, 한껏 교양있는 티를 내는 사회자는 문제를 맞추던 외국인에게 흐뭇한 미소를 띄워보내며 되도 않는 영어로 묻는다.



What do you think of korean high school students English?


CNN Headline News 앵커모냥 쏼라쏼라하는 년넘들 데려다 대표로 세워놓고서는 한국 고딩들의 영어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씨바야 장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쩔래?


요즘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댄스그룹들은 결성단계에서부터 기획사의 면밀한 계산 아래 우리말이 서툰 재미교포 랩퍼를 반드시 포함시키고 있다. 이들은 각종 토크쇼에 나와서 서툰 우리말로 시청자들을 어설프게 웃기다가도 유창한 영어로 어린 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무늬만 한국인인 이들의 유창한 영어를 접하는 청소년들에게 영어의 필요성 내지는 영어의 중요성을 외치는 어른들의 구호는 왜곡된 기호로 이식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에게 영어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인 실체로서 받아들여지며 맹목적인 추종의 대상이 되는 거다.


반쪽 한국인 랩퍼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빠져드는 우리의 청소년들은 부지불식간에 유창한 영어를 흠모함과 동시에 서툰 우리말을 동경하기까지 한다. 적어도 세련된 영어를 위해서 촌티나는 한국어를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되는 거다.


원주민에 가까운(사실 그들은 원주민이라고 해야 한다) 영어실력을 발휘하는 TV 속의 고교생들을 무조건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오락거리로 포장해내는 방송사들의 무분별한 상술이다. 방송사에서 그들을 마치 고교생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표준적인 모델인양 포장해가는 동안 우리들의 평범한 고교생들은 모국어와 외국어를 합리적으로 구별해 파악해야 하는 이유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문제인 거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외국어이며 외국어여야 하며 외국어일 수밖에 없다. 어떤 세계화 논리도 한국인에게 영어가 외국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시킬 수는 없는 거다. 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외국어를 익히면서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모국어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모국어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외국인을 설득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소통하고 설득하는 행위는 그 언어와 관련된 문화의 이해를 전제하는데, 자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갖출 능력이 없는 이가 타국 문화에 대한 이해를 얻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자국과 타국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며 보수적인 시각이라고 목청을 높힌다. 그리하여 영어를 모국어로 택할 자유까지 부르짖기에 이른다. 이들의 진보적인 관점이 가지는 선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논리적 단순함에 대해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림은 언제나 닫힘을 전제한다. 집에 문이 있는 것은 열고 닫음을 위한 것이지, 닫힘만을 위한 것도 열림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집과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로서의 문은 열고 닫음의 유기적인 작용이 있을 경우에만 그 의미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닫힌 문을 경계하는 건 좋지만, 그 도가 지나쳐 모든 문을 열어놓기만을 주장한다면 그 집은 이미 편안한 가정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는 셈이 된다.


진정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우리나라를 생각한다면 세계를 향한 문의 열려있음만을 볼게 아니라 그 문의 열리고 닫히는 리드미컬한 흐름을 합리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로 말하자면 외국어와 모국어의 리드미컬한 흐름이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진정한 세계화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거다.


댄스그룹과 단숨에 1억원을 버는 연예인들을 동경하며 미래를 꿈꾸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우리 사회는 진실한 꿈꾸기의 모델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모델을 제공해주기는커녕 우리 청소년들을 끊임없이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세계 136위 영어후진국의 업보는 어른들의 몫이지 청소년들의 몫이 아니다. 우리의 청소년들은 중학교 때부터 손바닥 맞아가며 단어 외운 죄 밖에는 없다. 그들이 5-6년씩 영어공부를 해오는 동안 회화수업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 있으며 영어실습실 한 번 알차게 이용해본 적 있던가.


뽀빠이와 원더우먼으로 앞을 가리고 딸딸이친다고 해서 그들의 영어실력이 발기할 것 같은가.


외국인 앞에서 쑈를 벌이는 TV 속 친구들의 모습에서 영어공부를 위한 작은 동기를 얻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TV 프로그램을 만든 이들이 알리바이 삼고싶어 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게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청소년들에게 주는 꿈이라고는 뽀빠이가 되고싶다거나 원더우먼이 되고싶다는 식의, 성인이 되면 물거품처럼 사라질 미숙한 바람일 뿐이기에 지속적인 동기부여로서의 동력을 전혀 가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영어를 그들 뽀빠이나 원더우먼처럼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영어권 나라에서 태어나거나 최소 5년 이상은 살아 반쯤은 내이티브 스피커가 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바람직하지도 않다.


지난 기사에서도 목놓아 외쳤지만 또 한번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공부는 쉬운 게 아니다. 영어도 쉬운 게 아니다. 합리적인 학습방법을 제시해 주되, 무책임하게 그런 거 다 쉬운 거야 하고 외쳐대는 사기행각은 집어치워라.


이한우나 하일의 한국어를 들어보라. 한국 국적을 획득하기까지한 그들이 쓰는 한국어에도 여전히 어색함이 남아 있다. 누가 그 어색함을 탓하겠는가. 이한우나 하일의 한국어보다 완벽한 본토 영어를 바라는 우리 사회의 영어지상주의는 병적이지 않은가?


 


씨바야 우기지 좀 마라. 영어는 외국어다.



 


- 딴지 교육부 기자 최가박당 ( hoggenug@netsg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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