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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척 매뉴얼] 농담

2007-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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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척 매뉴얼] 농담


 


2007. 6. 15


읽은 척 매뉴얼 편찬위


 


 


 읽은 척 매뉴얼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당 도서의 선정 이유




과거 읽은 척을 했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유토피아>에 이어 2년 여 만에 다시 재개하는 읽은 척 매뉴얼의 그 세 번째 대상 작품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되겠다.







 


당 도서의 선정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 번째, 앞서 읽은 척을 했던 작품들이 당시 베스트셀러이던 처세서와 고전 사상서였던 만큼 금번에는 읽은 척 매뉴얼이 가장 폭 넓게 활용될 수 있는 카테고리인 유명 문학작품의 범주 내에서 그 대상을 선택하였다.



두 번째, 밀란 쿤데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 중 한 명으로 문학 전공자가 아닌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인용, 거론되는 만큼 읽은 척 하지 않을 경우, 혹은 어설프게 읽은 척을 할 경우 자칫 개인의 존엄성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  




세 번째, 과거 남로당 접선특위의 프로필에서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을 꼽으라 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가장 많이 꼽혔던 서적의 작가가 밀란 쿤데라였던 만큼 당 도서에 대한 읽은 척은 지적 소외에 대한 자아 보호용 방어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연애기류 형성용 설레발 수단으로도 다양한 멀티유징이 가능하다는 점 등이 있다.


 




 읽은 척 매뉴얼


 


1)내용 요약




밀란 쿤데라의 <농담>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서로 다른 4명의 화자가 각각 자신의 시점으로 서로를 묘사하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다른 시각으로 중첩되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서사적으로 간략하게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허나 글쓴이의 챕터별 메시지를 이해하는 정도면 족한 처세서나 사상서의 읽은 척과는 달리 문학작품의 읽은 척을 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메시지가 구체적 인물과 사건으로 구현되는 쟝르적 특성상 작품 내용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이해, 혹은 암기가 선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겠으므로 다소 지루한 감이 있다 하더라도 개략적인 내용을 훑어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4명의 화자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루드빅을 중심으로 <농담>의 구체적 내용을 요약해보았다. (참고로 필자가 읽은 척 대상으로 삼은 서적은 민음사에서 출판된 작품이다. 고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농담>의 경우 등장인물의 발음이 번역 과정에서 다르게 표기될 수도 있음이다.)  


 







20세기 중엽의 체코. 공산 혁명이 있은 후 열혈 빨갱이임을 자처하며 사회주의 전파에 앞장서던 청년 루드빅은 방학 중에 자신이 흠모하던 여학생인 마르케타와의 달콤한 애정행각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마르케타가 당의 교육 연수에 참여하느라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즉 자기 대신 스탈린주의와 연애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차마 그 애정 삑사리의 속상함을 직접적으로 호소하기에는 너무나 가오가 떨어지는 나머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식으로 그녀가 받고 있는 당의 교육 연수를 조롱하는 엽서를 보냈다가 위대한 사회주의를 모독한 혐의로 동지라 생각했던 친구들의 손에 의해 당에서 제명당하고 군에 입대하여 강제 노동으로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런 와중에 진창에서도 꽃이 피듯 부대 근처의 공장 기숙사에 살고 있는 루치에라는 여성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생겨 영창에 갈 수도 있는 위험까지 무릅쓰고 루치에와의 하룻밤을 위해 근무지 이탈을 감행하지만 결국 루치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루드빅과의 섹스를 거부함으로써 사랑에게서까지 배반을 당한 듯한 절망에 빠져버린 루드빅은 쓸쓸히 부대에 돌아왔으나 뒤로 넘어져도 꼬추가 부러진다는 격으로 탈영이 발각되어 감옥에 가게 되고 다시 복역 후 3년간 탄광에서 일하는 등 꼬인 인생의 무한루프를 보여준다.




그로부터 15년여가 지난 후 루드빅은 농담 한 마디를 이해하지 못해 자신을 파멸시킨 끔찍한 무대였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귀향의 이유는 복수 때문. 즉 15년 전 자신의 농담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자신을 적극 변호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친구 제마넥이 오히려 결정적으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음으로써 시대 전체의 배신감을 한 개인의 배반으로 치환시켜 그를 증오해오며 인고의 세월을 버티던 차에 라디오 방송의 이너뷰어로 자신을 취재했던 헬레나라는 여성이 바로 제마넥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떻게든 그녀를 모욕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제마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왕들의 기마 행렬>이라는 전통 축제가 벌어지는 고향으로 온 것이다. 헬레나는 취재를 가장한 밀월을 위해, 루드빅은 사랑을 가장한 복수를 위해.




이 때 루드빅은 호텔 이외의 좀 더 안락한 숙소를 제공 받기 위해 과거 당으로부터 자신과 비슷하게 배반(혹은 스스로 선택한 종교적 회피)을 당했던 코스트카에게 집을 빌리게 되고, 마침내 비장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헬레나와의 섹스 복수극을 치르게 된다. 그 후 루드빅은 코스트카를 통해 기억 저편에 사랑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던 루치에에 대한 얘기(물론 루드빅과 루치에가 과거 연인 사이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코스트카와 루치에의 얘기)를 듣는다. 들은 얘기인즉슨 루치에는 어린 시절 별 생각 없이 일군의 패거리들에게 정기적으로 윤간을 당해왔고 그 충격으로 섹스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팽배했던 와중에 어떤 군인(루드빅)과 만났으나 그와의 관계에서도 상처만 커진 채 떠돌던 중 우연히 코스트카를 만나게 되고 신앙의 힘으로 돌보아준 코스트카 덕에 루치에는 남성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고 다시 섹스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코스트카와 섹스를 했음이다. 여기서 당연히 루드빅은 15년의 세월을 뛰어 넘는 충격과 좌절과 질투와 무기력함의 번뇌 종합세트를 받으며 괴로워한다.




그 다음날 어찌어찌해서 <왕들의 기마 행렬> 축제 장소에 오게 된 루드빅(헬레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침 식사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이 곳에서 루드빅은 그토록 증오했던, 혹은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배반의 가해자로 기억되어야만 했던, 그래서 그의 부인을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욕을 보이는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해서라도 복수를 하려했던 제마넥을 만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제마넥과 헬레나는 법적 절차만 밟지 않았을 뿐 이미 갈라선 상태였으며 게다가 제마넥의 새 애인은 그의 대학 제자였던 만큼 헬레나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던 것. 결국 루드빅 자신은 복수랍시고 날렸던 총알이 오히려 이혼해주지 않겠다고 버텼을 헬레나를 자연스럽게 떨어지게 해줌으로써 제마넥에게 축포를 쏴준 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개인에 대한 역사의 무심함을 깨달은 루드빅은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헬레나에게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진 둘의 관계에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이별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하는 헬레나는 그 충격과 배신감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조수가 지니고 다니던 다량의 진통제를 먹고 루드빅에게 유서를 날린다. 그러나 헬레나가 진통제인줄 알고 먹었던 다량의 알약은 바로 변비약. 변비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헬레나의 비서가 진통제 통에 변비약을 보관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은 본의 아니게 벌어지는 삶의 우스꽝스러움이 헬레나, 즉 자기뿐만이 아닌 타인들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경험한 루드빅은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였으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만큼이나 마음처럼 되지 않는 삶을 살아 온 야로슬라브(야로슬라브는 루드빅과 달리 순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전통의 가치를 보존하고픈 욕망이 현대성에 의해 배신당하는 인물로 본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 인물이지만 루드빅 중심의 서사적 내용 요약을 위해 전술하지 않았다.)를 우연히 만나 <왕들의 기마 행렬> 뒤풀이인 연주회에 참석해 실로 오랜만에 자기 고향의 전통음악 연주에 심취해있던 중 야로슬라브가 내출혈로 갑자기 쓰러지자 그를 품에 안은 채 이렇게 생각한다.




‘증오의 대상 제마넥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던 귀향이 결국 이렇게 땅에 쓰러진 내 친구를 두 팔에 안고 있는 것으로 귀결되었구나.’




세줄 교훈




인생에 정답은 없다.


정답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있을 뿐.


고로 웬만하면 외로운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자.



 


2)읽은 척 스킬 구사하기




미리 강조하건데 밀란 쿤데라와 같은 대인들의 작품을 읽은 척 하는데 있어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등장인물의 이름과 스토리를 정확히 외우는 명석한 두뇌와 구라를 진실로 둔갑시키는 연금술사적 표정관리만으로는 가당치 않은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문학적 감동. 고로 뇌세포와 안면근육의 환상적인 앙상블로 완벽하게 읽은 척을 해냈음에도 주위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잽싸게 코털 한줌이라도 뽑아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좌중을 응시하거나 아니면 군대 첫 휴가 때 먹었던 짜장면 곱빼기를 추억하는 표정으로 헤벌레 침을 흘려주는 것이 오히려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이라 하겠다.




얼핏 생각하면 어차피 남들도 안 읽을 테니 대충 작가 이름과 그의 저서들 몇 개의 제목만 외우고 만일을 대비해 작품들의 대략적 스토리만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는 척, 읽은 척, 잘난 척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자칫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마인드임에 틀림없다.




생각해보라. 물론 한 생애를 비슷한 수준의 읽은 척만 하는 사람들하고만 운 좋게 교류를 하게 된다면 상관없겠지만 어느 날 불행히도 진짜로 대인의 작품을 읽어버리고서 문학적 감동의 멀티 오르가즘을 경험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 것인가.




설마 무협지도 아니고 노벨 문학상이 거론되는 이런 문학작품씩이나를, 게다가 400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런 가혹한 책을 진짜로 읽을 사람은 민간인 중에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정확히 비례하게 정말 읽어버린 사람은 자신이 마구 감동을 먹었던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에 대하여 벅찬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물론 반가워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휴머니스트임에 분명하리라. 아아 남의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스토리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미묘한 감동을 게워내고, 행간에 숨어 있던 망측한 암유들까지 굳이 끄집어내며 그저 남들 앞에서 쪽팔리지 않기만을 바랐던 한 개인의 순박한 영혼에 관장약 1배럴을 투여하는 것과 같은 그 이후의 사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대인들의 문학작품은 그만큼 날로 읽은 척을 할 수 없음이다. 수려한 문체와 치밀한 구성의 하드웨어만도 벅차거늘 그 안에 또 너무도 깊은 철학적 고뇌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깔려있기 때문에 자칫 실수를 했다가는 읽은 척이 뽀록나는데 그치지 않고 더 심하게는 열심히 읽었어도 오독을 해버리는 저렴한 지성의 소유자로 몰리게 되어 차라리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읽고 감동에 몸서리 칠 계획이라고 말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고로 앞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가면서까지 소개한 내용 및 교훈 요약 등 기본 매뉴얼을 충분히 숙지한 독자라 하더라도 자신은 작품을 통해 영혼의 떨림까지 경험했다며 그 감동 먹은 척까지 연출해주기를 원하는 까다로운 상대를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혹은 읽은 척 시전자의 평소 품행을 보았을 때 대상 서적을 읽었을 리 만무하다며 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현실 악플러들을 대비해 다음과 같은 세부 사항에도 유의하도록 하자.




 루드빅의 인생을 조진 그 농담은 무엇인가?




읽은 척 시전 후 받을 수 있는 가장 기초적 예상 질문이라 하겠다.




제목이 <농담>이기도 하거니와 주인공이 무심코 건넨 농담 한 마디로 인생을 조지기 시작했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보니 대체 무슨 농담을 한 것인지에 대한 주위의 반문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내용 요약에서 밝혔듯, 마르케타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고 당의 교육 연수에 참여한 것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데 그 교육 연수 내용이 너무도 보람차고 황홀하다는 내용의 편지까지 받자 루드빅은 자신의 연애기회를 앗아간 스탈린주의를 질투하며 단 세 줄의 글을 엽서에 적어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종교는 인류의 아편이라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패러디해 낙관주의를 아편에 빗댐으로써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건전한 정신을 조롱하고 덧붙여 스탈린의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자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트로츠키를 찬양한 발언이라 하겠다. 물론 루드빅의 입장에서는 사랑에 눈 먼 열혈 사회주의자가 자포자기적 심정을 세련된 감수성으로 표현한 반어적 농담이었지만 당의 입장에서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한 발언으로 간주되어 이때부터 주인공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고로 실전에서는 <농담>의 농담이 무엇이냐를 묻는 질문에 괜히 득달같이 본문의 농담을 외어가며 읽은 척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속내를 방정맞게 드러내서는 안 될 것이며 좌측상방 15도 각도의 시선을 유지하며 잠시 무거운 표정을 지은 후,




“이는 마치 과거 박통시절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가 그럼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냐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던 웃지 못 할 역사적 희극의 사회주의적 버전이라 할 수 있지.”




정도로 운을 띄워 과연 상대가 직접 읽어 놓고서도 못미더워 유도심문을 하는 적군인지, 아니면 무장 해제한 채 무슨 말을 해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월척인지를 가늠하도록 하자.




적군일 경우에는 당연히 그 정도 수준의 비유적 대답이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거나 다른 질문으로 넘어갈 것이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되묻는 월척이라면 아마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 최불암 시리즈가 나온다고 해도 낚일 대상이라 하겠으므로 그 이후부터는 만사 오케이라 하겠다.




 <농담>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반공서적인가?




주인공 루드빅의 인생을 꼬이게 했던 농담이라는 것이 텍스트 상으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칫 실수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특히 과거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한 마디로 빨갱이들에게 잔혹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하는 이승복 어린이의 일화가 연상되어 떠오르는 세대라면 더욱 밟기 쉬운 발목지뢰라 할 것이다.




특히 본지의 매뉴얼로 읽은 척을 시전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아마도 가내 수공업적 읽은 척 참고자료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되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도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관하여 딱 지뢰 밟기 무난하게 서술하고 있다.


 



물론 <농담>이 사회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작가 스스로도 “<농담>은 실존의 장편소설로 다루어져야 한다. 나의 소설은 결코 정치적 팸플릿과 같은 역사적 상황이 테마는 아니며 내게 있어 역사적 상황은 복수, 망각,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역사와 인간의 관계, 본래 행위의 소외, 섹스와 사랑의 분열 등 나를 매혹하는 실존의 주제를 극도로 날카로운 빛으로 내리 쬘 때만이 의의가 있다.”라 밝힌 바 있다.



실재로 <농담>에는 여러 인물들이 사회주의뿐만이 아닌 여러 절대 가치들과 불협화음을 이루는데 루드빅과 사회주의, 우정, 사랑과의 삐딱선, 코스트카와 기독교 신앙의 아사무사, 야로슬라브와 민족 전통의 야로, 헬레나와 정열적 사랑의 삑사리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과연 가치가 인간을 배신한 것인지, 인간이 가치를 배신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애초 인간이 가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승자박을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하겠으니 눈치 빠른 이라면 이 논란의 여지 역시 충분히 읽은 척의 소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농담>은 많은 절대 가치들 중에 사회주의도 한 예로 들어 절대 가치, 혹은 절대 신념에 대해 딴지를 날린 작품이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처럼 ‘비뚤어진 사회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묘사한 작품이라고 섣불리 읽은 척을 하는 것은 마치 영화 <밀양>을 두고 반 기독교적 이단 영화라고 평가하거나, 본 읽은 척 매뉴얼을 두고서 <농담>에 대한 스포일러성 기사라고 규정하는 것에 다름 아닌 농담이라 할 것이다.




 기억할만한 섹스씬


 


증오의 대상이었던 자신의 학창 시절 친구인 제마넥의 부인 헬레나에게 섹스를 통해 간접적인 복수를 하려했던 루드빅은 헬레나와의 정사 과정에서 소프트한 SM적 장면을 연출한다. 섹스 중 헬레나의 뺨을 수차례 갈기는데 난생 처음 그런 무례한 애무를 당하고서도 형언할 수 없는 자극을 느꼈던 헬레나는 루드빅이 자신과의 운명적 사랑임을 더욱 확고히 오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AV 어워드 수상작 감상한 척 매뉴얼도 아니고, 대인의 문학작품을 읽은 척 하는데 있어 사람 저렴해 보이게 무슨 이런 섹스씬을 기억해야 하느냐며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읽은 척은 때로 숲이 아니라 나무에서, 스케치가 아닌 디테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럿이 모인 상태에서 아마도 진짜로 읽었을 누군가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다는 둥 니체의 영원회귀가 저떻다는 둥 작가의 고매한 정신세계에 대해 지도 무슨 말인지 모를 열변을 장시간 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너무도 훌륭한 책이라고 하니 말을 짜르기도 어색하고 당췌 못 알아먹을 얘기만 하고 있으니 계속 들어주기도 지겨운 양수겹장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을 때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던 당신이 “그런데 말야. 주인공이 헬레나와 섹스를 할 때 벌인 안면 스팽킹은 복수에 대한 메타포인걸까 아니면 헬레나의 매저키스트적 기질을 간파한 도구적 관능이었을까.”정도로 살짝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너무도 낯설지만 모두가 주목할 수밖에 없는, 너무도 뜬금없지만 모두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9회말 역전 만루 홈런볼이 관중의 잠자리채로 낚여버리는 대반전이라 할 수 있으며 9시 뉴스데스크에서 네이키드 뉴스가 이루어졌을 때의 그 환호성이라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농담>vs<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른 많은 작품이 있음에도 고우영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삼국지이듯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밀란 쿤데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농담>보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먼저라 할 것이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이지만 아무튼 국내에서 영화가 개봉되었었기 때문에 갖는 대중적 친화력의 이유도 있을 것이고, <농담>보다는 훨씬 있어 보이는 철학적이면서도 시적인 제목 자체의 갑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훨씬 에로틱한 요소가 많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전술한 여러 이유로 <농담>의 읽은 척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은 척 하는 것보다는 실효성 면에서 다소 떨어질 수 있음은 사실이다. 짐작하건데 실전에서 <농담>에 대하여 구라와 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치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읽은 척의 대장정을 완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엉뚱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질문이라거나, 더 심하게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읽은 척 없이 <농담> 읽은 척은 무의미하다는 식의 예상치 못한 반응을 얻고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농담>에 대한 읽은 척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하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가 <연금술사>의 증보판이라 할 수 있듯, 곰브로비치의 <포르노그라피아>가 <페르디두르케>의 연장전이라 할 수 있듯. 밀란 쿤데라의 모든 소설은 <농담>이 그 시원이자 원석이기 때문에 대중적, 매체적 인기에 영합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혹은 <느림>등을 쿤데라의 대표작으로 들먹이는 행위는 문학적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라며 일장훈계의 사자후를 터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담>에서 나오는 코스트카의 연애관이나 헬레나의 약병 에피소드 등은 <이별의 왈츠>에서도 변형되어 등장하고, 루드빅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사회주의에 대한 농담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가 한 줄 신문 기사로 의사에서 유리창 닦이로 전락하는 설정과 유사하며, 지식인 루드빅이 탄광 노동을 통해 얻게 된 근육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자부심은 <느림>에서도 재현된다. 물론 단순 에피소드나 설정뿐만 아니다. <농담>에서 보여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이 빚는 미묘한 모순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그의 모든 소설의 공통적인 근간인 것이라고 준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선호자를 타겟으로 하는 공격적 읽은 척 스킬은 자칫 평론가적 아집과 계보적 꼬장으로 비쳐지며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이라고 하는 본 매뉴얼의 취지에 크게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므로 시전에 있어 신중함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상이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 대인들의 작품을 읽은 척, 감동 받은 척 한다는 것은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섣부르게 읽은 척을 남발할 경우, 강호의 은둔 고수로부터 정신적 관장을 당할 위험성도 매우 큰 법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딴지 편집장 너부리(newtoile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