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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일 거다. 2002 월드컵이 끝난 직후인 걸로 기억하는데, 영화사  곳에서 이순신 장군에 관한 시나리오를 개발한다고  찾았던 기억이 난다.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테니 중간과정은 생략하겠다.

 

영화사가 주목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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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은 이순신 장군.

 

장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을 생각했었다. 장렬한 죽음이었다.”

 

라고 말할  있겠는데,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런 말을 남겼다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급박한 전투상황, 주변의 환경, 임종을 지킨 사람과의 관계, 이순신 장군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해 봤을 (상식적으로도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단  말할 리가 없지 않은가?)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은 와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어떤 말을 남겼던 걸까? 아니,  이전에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戰死) 것이 맞는 걸까?

 

 

 

1. 이순신 장군, 스스로 탄환을 맞았다? 

 

『김덕령이 죽고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산속에 숨어 화를 모면했으며,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부자 형제들이 서로 의병이 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숙종 시절 문신이었던 이민서가 남긴 글이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을 언급할 마다  언급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가 용인하는 영웅은 “죽은 영웅 뿐이다. 살아있는 영웅은  자체로 권력자에게 부담이 된다.

 

이때쯤이면 이순신 장군은 권력자였던 선조에게 완전히  밖에 .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이민서가 남긴 글이다.

 

김덕령이 죽고  ...”

 

선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영웅들에 대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범케이스로 의병 중에서 김덕령, 관군 중에서 이순신을 선택했다(눈에 가시같은 존재였기에 굳이 고르고 마시고  거도 없었을 거다).

 

선조는 김덕령의 팔다리를 부러뜨리게 했고, 이걸 앞에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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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고, 그가 반란을 모의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번이나  이름이 거론됐다는 점에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남원에 이르렀을  반군이 무너졌기에 진주로 돌아갔는데, 훗날 알고 보니 이몽학과 내통을 했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김덕령은 곽재우와 함께 거론되던 의병장이었단 거다. , 이름값이 너무 높았고,  하면 이름이 소환됐다. 이몽학의  이전에 송유진의  때도 김덕령의 이름이 소환됐다

 

이번 거사에는 김덕령 장군도 참여한다니까!”

 

진짜? 그게 사실이야? 김덕령이 언제 오는데?”

 

우리가 일단 거병하면 안에서 호응하기로 했어.”

 

진짜지?”

 

 사람이 속아만 살아왔나. 믿으라니까 그러네!”

 

이랬을 확률도 있단 소리다. 마디로 반란군이 김덕령의 이름을 팔았다는 건데, 이몽학의  당시 반란군은 김덕령 뿐만 아니라 곽재우와 이덕형도 뜻을 같이 한다며 주변을 포섭했다. 유명한 이들의 이름을 팔고 다녔다

 

이렇게 보면 김덕령이 이용당했다고   있겠지만, 선조 행정부로서도 어쩔  없는 부분이 있었을 거다.

 

(선조)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대질하여 심문하고는 오히려 그를 아깝게 여겨 좌우에게 묻기를, “ 사람을 살려줄 도리가 없는가?” 하니, 대신 유성룡 등이 아뢰기를,

 

 사람이  도리는 없습니다. 다만 아직 그대로 가두어 두고 그의 일당들을 국문한 뒤에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고, 판의금 최황(崔滉) 등은 즉시 형신(刑訊) 것을 청하였다. 상은 재삼 난색을 지었으나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을  아니라, ,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기도 하였다. 정언 김택룡(金澤龍) 아뢰기를,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9(1596) 8 1일의 기록  발췌

 

 기록에서 주목해봐야 하는  2 있다.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최항의 발언은 김덕령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말하고 있다. 김덕령은 전과나 활약에 비해 이상하게 고평가된 인물이었다.

 

곽재우와 같은 반열에 올릴 정도의 명성을 자랑했지만(김덕령 본인도  명성을 부담스러워했다), 그에 상응할 만한 전과를 보여준  아니었다.

 

대신 냉정하고 가혹했던 것으로 유명했. 군율을 어겼다며 가볍게는 곤장, 심하게는 귀를 잘라버렸. 이런 평소의 행동이 적을 만들었던 걸까?

 

김덕룡에 대한 김택룡의 발언으로, 권력의 본질과 당시 선조 행정부의 상황을 단적으로 확인할  있다.

 

국가가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이란 대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다. 화장실 들어갈  마음하고 나올  마음이 다르듯,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영웅이 필요하지만 차츰 안정기에 들어갈 쯤이면? 권력을 위협하는 군사력, 더구나 민간의 통제되지 않는 군사력 대해서는 불편함을 표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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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선조에게 확실한 ‘시범 케이스 필요했던 시점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직후에 선조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선조의 앞을 가로막은  백성들이었고, 선조에게 선위(禪位: 왕위를 물려주는 )하고 물러나란 상소를 건넨  양반들이었다. 왕의 체통을  벗어던지고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이라 하여 명나라로의 망명을 타전했던 상황에서 승전보를 울린  이순신이었다 와중에 세자 광해는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했다.

 

권력이  상황에서, 노회한 선조는 선위파동을 일으키며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었다. 한양을 다시 수복했고, 선조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방도를 찾아나갔.

 

 번째는 전쟁영웅들에 대한 압박이었다. 민간에서는 전쟁영웅의 위상이 보다 높았다. 이를 제어해야 권력누수로 이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몽학의 난으로 대표되는 ‘반란 일어나지 않았는가? 선조,  나아가 기존 권력체제에 대한 불만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이걸 제어해야 했다. ‘국가가 차츰 편안해 지는데 본의는 그것이다. 이미 외세의 침략으로 권력이 무너질 위기는 지나갔으니, 내부 단속을 위해 본보기를 보이란 거였다. 김택룡은 비웃음을 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의 인심이 그러했고,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