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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6.수요일


아홉친구


 


원래 쓰려던 글은 진도가 안 나가는데, 자꾸 옆에서 다른 주제가 쿡쿡 쑤시고 들어온다. 저번에도 파토님 글에 한마디 덧붙였는데, 비슷한 주제가 이어지는 것 같더니 <매트릭스> 이야기가 나온다. 매트릭스, 필자가 아주 관심있게 본 영화라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필자가 아주 옛적에 처음으로 딴지에 투고한 글이 <매트릭스> 해석이기도 했고.


 


지난번에 사회주의 국가에서 쓰는 인민이란 말을 화제로 꺼냈었다. ()과 민()의 결합은 단순 병렬이 아니라 권력 관계가 숨어있으며, 이 말이 오랜 시간 동안 쓰여오고 또 그 개념을 공유하는 만큼 우리에게도 이러한 관념이 이미 자리잡아 있다고, 또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친절한 링크 '예전글' (덕만과 미실, 그리고 민주주의 글에 덧붙여서...)


 


<매트릭스>야말로 이 관계를 정말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영화다.


 


당신이 지금 빨간 약과 파란 약 앞에서 고민한다고 생각해보라. 깨어있지만 남루하여 권력으로부터 공격받는 지식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안주하는 백성이 될 것인가의 갈림길이 거기에 있다. 실상, 우리는 이미 그 선택지를 거쳐왔다. 잘 생각해보시라. ()과 민()의 구분은 지식에 의해 갈리지만, 진짜 지식은 이미 공자가 2천년 전에 말했듯 때때로 익히는실천이 없으면 갖춰지지 않는다. 똑같이 배웠어도 행동은 다르다. 어느 약을 먹었는가가 다른 게다.


 


그리고 2편으로 가면 좀더 무서운 현실이 펼쳐진다. 구세주가 ‘the one’이 아니라는, 이를테면 ‘just a one’이었던 거다. 매트릭스 권력이 구세주의 출현 가능성을 이미 열어놓았다는 시점부터, 네오의 체제 말살 가능성은 없어진다. 혁명이란 건 권력이 그 파괴력을 예상하지 못해야 가능한 법이다. 개인의 초인적 각성이 예상 밖의 지지세력을 규합할 수 있을지라도, 어쨌든 권력이 예상 가능하다면, 어쨌든 대응이 가능하다.


 


3편까지 가면 매트릭스 기계 권력의 힘이 충분히 깨어있는인간들을 다 죽이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전까지는 그러니까 맞장구나 좀 쳐준 거였다.


 



우리는 권력이 가진 힘을 과소평가할 때가 많다


 


매트릭스와 시온의 사람들이 갈등을 빚는 이유는, 그 사이에 잠자는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는 백성들이 잠자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시온 사람들은 그들을 깨우려고 한다. 네오의 출현은 이 공식 자체를 바꿀 순 없지만, 생각보다 키아누 리브스의 각성 파워가 대단해서였는지, 잠자는 백성들의 수가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매트릭스는 이들을 전부 몰살시키려고 마음 먹었다. 이렇게만 보면, 아주 뻔하지만 흥미있는 정치 스토리다.


 


여기에 변수가 되고, 3편의 결말을 이끌게 된 존재가 바이러스와 같은 스미스 요원이었다. 애초에 매트릭스 권력 안에서 활동하던 히트맨이 자가증식을 시작한 것이다. 스미스 요원의 출신은 매트릭스 내부기 때문에 매트릭스 시스템 스스로는 이걸 치유할 수 없다. 그런데 매트릭스 시스템이 바이러스화 되면 백성들도 모두 죽는다. 이 지점에서 네오가 타협한다. 매트릭스 권력이 시온 사람들과 공생하는 조건으로 바이러스를 퇴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래봤자 네오가 부활할 수 있듯이 스미스 요원도 언제 어떻게 부활할지 모르지만, 언발에 오줌누는 것조차 급했던 매트릭스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여러분은 이 스미스 요원을 무엇으로 해석하시는가.


자가증식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매트릭스도 인간도 그 수단일 뿐이고, 권력에 기생하여 그 횡포를 부리나 정작 커지고 나면 권력 시스템 안에선 퇴치할 수 없는, 오직 각성한사람에 의해서만 저지가 가능한 존재.


 


<매트릭스>의 매트릭스 권력과 시온 사람들을 현실 정치의 은유로 파악한다면, 스미스 요원의 의미는 자본이 가장 들어맞는다.


 



선도 악도 없다. 자가증식에 방해되면 누구든 적이다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노무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의미가 무엇인가. 그가 끝까지 적대시한 것이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한나라당 정권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이든 김대중이든, 또한 진보나 개혁의 무슨 명찰을 달고 있든 간에, 현 정권에 반감을 가지는 이유는 합리성이나 소통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꼴통이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의 소멸, 심지어 경상도 지역 정파조차도 완전히 소멸할 거라고 예상되진 않는다. 이한구 의원이 4대강 사업 진척 속도에 대해 비판했다는 뉴스만 봐도 화색이 돈다. 그가 4대강 사업을 스톱시킬 거라고 기대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상대가 있었으면 하는 게 간절하지 않은가.


 


정말로 아예 없애버리고 싶었던,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간 비열한 상대는 권력이 아니다. 정치 권력은 최소한 새로이 사회에 진입하는 사람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 매트릭스 권력이 이미 그런 걸 다 알고 있었듯이 말이다. 그 다음에 탄압한다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진짜 적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자가 증식일 뿐이며, 때문에 권력이든 지식이든 소시민이든 누구에게나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권력에겐 비자금을, 지식인에겐 회유의 뇌물을, 소시민에겐 비정규직의 채찍과 소비문화의 당근을 제공한다. 자가증식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셋 다 한꺼번에 해도 상관 없다.


 


물론 이들이 자본이란 이름으로 우리를 맞상대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의 친절한 벗이다. 그가 인간도 아닌 스미스 요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세계에서 당신은 숫자로 보인다. 가처분소득의 행위자, 혹은 지갑을 가진 유기체.


 


스미스 요원은 오래전에 또다른 변종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 영화 속의 잠자는백성들은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하지만, 현실의 눈뜨고 자는백성들은 몇 년 주기로 투표를 한다. 때문에 이들을 세뇌시킬 기능이 필요하다. 그것이 언론이다. 오늘날 언론 자본이란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언론은 자본과 밀접하게 결탁하여 거짓말을 유포시켜 왔다.


 


노무현이 임기 내내 싸워왔던 건 이들이다. 그건 노무현이 좌파이거나 고졸 출신 법조인이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언론과 자본은 자가증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현 정권을 밀어주고, 권력은 이에 전국토의 삽질화로 보은할 뿐이다. 대차대조표에 빨간 글자가 쓰일 것이라 예상된다면 자본은 언제든지 현 정권의 엉덩이를 걷어차버릴 수 있다. 단지 그에 대신하여 권력을 잡을 이들이, 지금 정권보다 우호적일 거라고 예상되지 않기 때문에, 한나라당 정신차리라며 약간의 쓴소리를 사설에 실어주고 있는 정도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인()과 민()의 구분을, 필자는 보수적인 관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뭇 전통적인구분을 없애려는 시도가, 당연히 인간의 평등을 우선시하는 시각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건, 권력이든 지식이든 뭐든 상관 없이 돈 앞에 평등, 즉 자본 논리로 인간과 권력을 파악하려는 시도다. 무조건 돈만 벌면 장땡이라는 사고 방식은, 필자 의견으로는 지식인과 백성, 지역 기반 권력과 소외자의 구분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더군다나 그 배금주의적 사고방식은 위의 구분들을 모두 무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 자칫 평등주의 비스무리한 사고로 잘못 전해질 가능성이 있다. 이 위험성에 노출되기로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다.


 


사람에 구분이 있다는 관점이 현대의 평등권적 시각에서 옹호될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근대 이전에 정치가들의 사명은 늘 생존권에 맞춰져 있었다고 본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겨우 일이백 년의 근세를 제외하고는 인류 최대의 문제였다.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위정자는 역성혁명도 가능하다고 했던 게 유학이다. 자본 논리의 가장 큰 문제는, ‘돈 앞에 평등이란 헛소리도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 인류의 고질적 생존권 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데 있다. 우리가 당면한 빈곤층의 생존권도 그렇거니와, 기아 재해 지역에 대한 무관심이 어떤지, 기업들의 행태가 어떤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기업 이미지 개선이란 마케팅 차원의 이익이 없으면 아스피린 한 알도 주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매트릭스>의 세계가 그렇듯이, 전통적 정치 권력의 세계란 백성들을 사이에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콜로세움이었다. 필자는 제2의 노무현, 혹은 제7의 노무현이 나타날 수도 있고, 또한 똑같이 희생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가 스스로 백성들을 잡아 죽이지 않는 한, 즉 백성을 기반으로 한 권력인 한에는, 8의 네오 혹은 노무현이 권력을 쟁취해도 또다른 정적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질 수도 있다. 상대가 친일파든 군인 출신이든 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정적들에게 가한 패도적이고 잔혹한 술수에도 불구하고, 또 그 시기의 노동자들이 아주 암울한 핍박을 견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가 어느 정도의 평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그가 자본 논리에 뼛속까지 물든 현대적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박 대통령이 무슨 기계의 국산화를 성공했다는 보고에 기뻐했다거나,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거나, 농민들과 모내기를 하고 막걸리잔을 기울였다는 소소한 일화들이 그의 과오를 다 덮을 수야 없겠지만, 전근대적 정치인으로서 인간적 면모가 있었다는 정도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뼛속 깊이 권력욕에 젖었는지는 모르지만, 뼛속 깊이 셈속에 밝아 시늉으로만 고무장갑을 낀 인간과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뼛속 깊이 권력욕에 젖은 상대에 대해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내가 권력을 바란다면 상대도 권력을 바랄 수 있다. 더군다나 네오의 존재에는 매트릭스가 전제된다. 새로운 개혁과 희망을 말한다면, 이미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네오가 부활할 수 있다면 매트릭스도 언제든 재건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는, ()과 민()의 구분이 현 시점에서도 유효한지 점검해볼 수 있다.


 



매트릭스는 현실이다. 내가 있다면 매트릭스도 있다. 인정하라.


 


그러나 스미스 요원에 대해서는 다르다. 어떤 정권이든 돈과 선전은 필요불가결이다. 자본과 언론이 그 역할을 해주는 이상, 권력 시스템 안에서 그들을 제거하기는 불가능하다. 필자가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를 지지한다고 하면, 그건 그들이 비판 받고 오류를 고칠 창구를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며, 자본의 증식과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 자본의 자가증식을 막는 일은, 돈을 벌되 그 증식을 바라지 않으며, 정보를 얻되 그 진위를 가리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이 지식인이고 인()의 본래 모습이다. 이 지점에서는, ()과 민()의 구분은 불가피하다.


 


어느 분이 이전 글의 댓글에 지식이 무언지 모호하다고 물어봤었는데, 이걸로 답이 되는지 모르겠다. 지식은 당신이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고를 그 시점에, 소신 그대로 밀고 나가게 하는 그것이다. 그걸 다른 말로 용기라고 불러야 될지, 시쳇말로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학교 졸업장 자체는 아닌 게 분명하다. 그건 쥐톨만한 경험에서도 비롯될 수 있지만, 반면 해박한 상식과 전문 교육으로도 얻지 못할 수 있다.


 


분명한 건, 지금 이 시점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예전처럼 재야선비나 노예나 백정의 이름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노숙자와 실업자의 이름을 얻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권력보다도 자본과 그에 결탁한 언론의 탓이며, 지난 10년을 잃어버리고 네오와 같았던 그가 죽은 것도 그들의 탓이라는 거다. 그는 권력의 탄압이라면 무슨 고문이든 이겨냈겠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부패한 정치인으로 본다는 두려움엔 이기지 못했다. 네오를 죽인 건 끝까지 깨어있지 못했던 우리들이다.


 


필자는 감히 그 현실적 상황이 어때야 한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다음 정권을 차지한다면 반드시 나아질 것인가, 또다른 희생양이 필요한가, 후보 단일화가 가장 알맞은 해결책인가도 잘 모르겠다. 늘 회의적이다. 유일하게 단언할 수 있는 건, 스미스 요원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시온 사람들의 수나 세력이 아니라, 각성 그 자체라는 거다. 우리 사회가 장차 어떻게 될지야 모르지만, 스미스 요원의 소멸에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전복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거대한 암흑의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간 경제활동의 부산물로 취급되는 체제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현실에도 있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각성이다. 하루하루가 암담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현실이 그 반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타협은 달콤하고 흐뭇하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노무현과 김대중을 욕하는 아저씨 아줌마를 욕할 수 없다. ()이 원래 그런 거라고 체념해도 좋다.


 


한 가지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고 있는 게 아니며, 언제든 빨간 약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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