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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식 연기하세요.”

 

X 결혼식장을 예약한 예비부부들이 들어가 있는 단톡방에 뜬 메시지다. 8월 22일 오전에 날아온 톡이었다.

 

심란한 마음에 집 근처 수변길로 산책을 나왔는데, 한 줄의 톡, 꼬리처럼 이어지는 대화들이 내 마음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신랑, 신부 빼놓고는 전부 다 마스크 썼음.”

“사진을 찍을 수가 없음.”

“공무원들이 와서 식을 지켜 봄.”

“공무원들이 식장만 왔지, 연회장은 안 옴.”

 

톡들이 이어졌다. 결혼 직전의 신랑 신부들은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 : 신랑 신부가 결혼 직전에 우울감에 휩싸이는 것)에 걸리는 게 통과의례라는데, 우린 여기에 코로나 블루 (Corona Blue)까지 더해졌다. 2020년 여름, 내 인생에서 누구보다 푸르러야 할 여름은 쪽빛보다 더 파란 딥 블루(Deep Blue)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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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결혼이란 걸 하게 됐다

 

한국 나이로 41살. 법적으로 내 남자가 될 사람의 나이는 47살. 어쩌다 보니 결혼이 늦은 게 아니다.

 

“내 인생에 결혼이란 단어는 없다.”

 

라고 생각할 때쯤 나타난 남자였다. ‘사랑’이란 게 그렇게 뜨거운 게 아니라는 것, 사랑 다음에 남는 시큼털털한 ‘인간 본연의 맛’을 알아버린 나이이기에 큰 기대도, 바람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좋으니 잘 만나보자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결혼을 고민하게 됐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보기에도 내가 꽤 괜찮은 것 같았나 보다. 지천명의 나이가 다 될 때까지 깨끗한(적어도 내가 아는 한) 호적을 더럽히겠다고 결심한 거였다.

 

이때가 2020년 2월, 코로나 초기였다.

 

“나이도 있으니 작게 해볼까? 스몰 웨딩이 나쁘진 않은데...”

 

스몰 웨딩을 생각했다가, 상대가 나름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는 점, 양가 부모님이 그동안 사회적으로 뿌려놓은 것들을 회수해야 한다는 압박들이 오갔고, 결국 타협 본 게 나름 ‘중간 사이즈’의 하객 규모였다.

 

한참 식장을 알아보러 다니고, 결혼 준비를 할 때쯤 신천지 사태가 터졌다. 결혼식장 규모를 150석 규모로 확 줄이자고 말했다. 식을 7월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9월로 미루게 됐다.

 

“그때쯤이면 좀 잠잠해지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순진한 착각이었다.

 

인생 최대의 소비행위

 

나이가 나이다 보니 나름 돈을 번다. 또래만큼은 벌고, 모았고, 썼다.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돈 한 번 원 없이 쓰겠네.”

 

라고 말했는데, 그 말뜻을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웨딩 플래너를 고용해서 하라는 걸 다 해 봤다. 남들 한다니까 하는 거도 있지만, 어떤 오기도 있었던 거 같다.

 

“나이 들었다고 남들 하는 거 안 하면... 어딘지 무시당하는 느낌.”

 

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 하는 걸 다 따라해 봤다. 피부관리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고, 웨딩 촬영도 하고, 매뉴얼에 있는 건 다했다(메뉴얼이란 데에 약하다).

 

돈이 눈처럼 사라졌다. 하늘에서 예쁘게 내려오다 내 손에 잡으려 하면 사라졌다. 눈앞에서 펑펑 내리는 눈.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는 것. 그게 결혼식에 사용하는 돈이었다.

 

예식장을 잡을 때는 코로나가 이렇게까지 갈까란 생각을 했었다.

 

“최대한 작게 하면 되지 않을까?”

 

“9월이면 한풀 꺾이겠지.”

 

예식장에서도 그때쯤이면 상황이 호전될 거란 낙관적인 분위기를 말했고, 봄 결혼식을 올렸어야 할 이들이 가을로 다 미루던 때였다. 그 북새통을 뚫고, 150석 홀을 하나 빌렸다. 나름 강남에서 괜찮다는 예식장이었다.

 

전광훈 목사, 예비 신랑신부들을 멘붕에 빠뜨리다

 

“하느님이 이근안을 살려둔 목적은 이럴 때를 예비한 게 아닐까?”

 

같은 목사끼리이니 말도 잘 통할 거다. 8월 15일 광복절 집회의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을 해 주고 싶다.

 

이 코로나 시국에 그렇게 광화문에 모였어야 했을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떠안게 됐다. 이제까지 버텨온 자영업자들의 비명이 울려 퍼질 때쯤 우리의 고민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어쩌지?”

 

8월 18일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됐고, 실내 행사는 50인 미만으로 제한됐다. 50인 이상 모임에 참석만 해도 벌금 300만 원이라고 했다. 당장 예식장에 연락을 했다. 이미 그쪽도 정신이 없었다.

 

“죄송한데, 저희들은 지금 당장 8월에 식을 올리시는 분들...”

 

그들에겐 당장 이번 주, 다음 주에 식을 올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가 더 급했다. 여러 가지 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내가 식을 올리는 식장은 작은 홀이 두 개로 쪼개져 쓸 수 있기에 각각 50인씩 두 개로 쪼개면 된다는 꼼수부터 시작해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에 한해서 ‘답례품’을 주는 방안까지 몇 가지 방안들이 나왔지만, 9월에 결혼할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쪼개기와 답례품...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찰 거다)

 

예식장들도 멘붕에 빠진 거 같았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은연중에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는 2주 정도 가면 정리가 될 거 같아요.”

 

2단계라서 2주인 건가? 아니면, 8월에 남은 기간이 2주라서 그런 건지 2주 안에 끝날 거 같다는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예약한 예식장 뿐만 아니라 많은 예식장에서 이 ‘2주’란 말을 많이 꺼낸다. 이게 어떤 희망사항(!?)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이건 교묘한 상술 같은 거라 할 수 있다. 2주 뒤에 상황을 봐서 그다음은? 만약 이게 2단계가 계속 유지되든가, 3단계로 넘어간다면? 그때는 그때의 대책이 나오겠지만, 예비 신랑신부들은 대처할 시간을 뺏기는 거다.

 

“2주 뒤에는 다른 상황이 될 겁니다.”

 

란 걸로 시간을 버는 거다. 그 사이 식을 취소할지, 연기할지, 강행할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 대처할 시간을 버리는 거다.

 

요 며칠 나는 식을 안 해도 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상황이다. 인생에 한 번 웨딩드레스도 입어봤고(웨딩촬영은 했으니) 큰 미련은 없다. 그동안 뿌린 부조금 회수는...그래 포기해도 좋다.

 

다만 아까운 건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식장 ‘위약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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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뉴스>

 

추신 1. 지금 예비부부들 카페나 결혼 준비 사이트 같은 데를 가보면 기자들이 상주하고 있다. 글 하나를 올렸더니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제보받는다, 연락 달라 등등의 쪽지들이 날아왔다. 다들 저마다 힘든 사정을 말하고, 방법을 찾고 있는 상황이기에 기자들에게 제보를 하고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이용될지 눈에 보이는 것도 있어(정부 정책 문제라든지, 뭐 그런 거 말이다)그냥 딴지일보에 기고한다. 다들 조심스러워하는 뭔가가 있다.

 

추신 2. 내 ‘상대’가 말하길

 

“19~20군번들 힘들 거야.”

 

라는 말을 했다. 외출, 외박, 휴가를 이렇게 통제하니 안에서 푹푹 썩어갈 거란 말이다. 돌이켜 보니 19학번, 20학번도 힘들 거 같다. 인생에서 가장 빛날 순간, 가장 기쁜 순간, 뭐라도 좋으니 보고, 배우고 맘껏 뛰놀아야 할 상황인데 이 인생의 황금기에 코로나라니.

 

같은 의미로 2020년에 결혼하는 우리 같은 이들도(결혼식은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훗날 뭔가 세대 구분이 될 거 같다. 2020년을 기준으로 산업적으도, 경제적으로도 한 번 정리되고, 사회문화 관습적으로도 한 번 싹 물갈이가 될 거 같다. 당장 결혼식만 하더라도 안해도 된다거나, 간략하게 해도 좋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는가. 아마 먼 훗 날 2020년은 세대 구분의 분기점이 될 거 같다.



아, 내가 글을 기고한 건 커다란 의미는 없다. 기존 기자들이나 언론의 쪽지에 답을 하면 정치적으로 이상한 의미가 덧붙여지거나 하지 않은 말들이 들어가는 게 짜증나서 우리처럼 결혼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딴지에도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있을 거고 막상 결혼식을 준비하면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테니 미리 알아두면 좋겠다는 목적이다.

 

뭐,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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