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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과 지> 中 (이하 동일)

 

우에스기 겐신의 난입을 목도한 다케다 신겐은 황급히 학익진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승기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넘어갔다. 전략을 짜고, 먼저 말을 움직였는데 그 수를 피하고, 역으로 기습을 건 상황. 기세도 넘어갔고, 결정적으로 수적인 우세가 역전됐다. 

 

누가 봐도 다케다 군이 밀리는 상황. 이 전투를 통해 다케다 신겐군의 숙장(宿將)들이 많이 전사한 걸 보면 당시의 급박함을 알 수 있다. 

 

딱따구리 전법을 제안했던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는 자신의 실수로 군이 붕괴의 위기에 처하자 실책의 책임을 지겠다며 우에스기 군에게 돌격했다가 전사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의 시체에는 무려 80군데의 상처가 있었다고 한다. 상당수가 총상이라고 하는데, 이 대목은 좀 이해가 안 간다. 이미 피투성이가 된 적장의 사체에 80군데나 날붙이를 밀어넣을 이유가 있을까? 야마모토 간스케의 분전을 표현한 듯 한데, 분명 과장된 부분이 있다. 야마모토 간스케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지 않은가? 까놓고 말해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역사와 신화가 혼재된 하나의 ‘서사시’ 같은 느낌이다)

 

야마모토 간스케뿐만이 아니다. 신겐의 동생이자 그림자 무사였던 노부시게(信繁)와 삼촌인 모로즈미 마사키요(諸角昌淸)도 전사했다. 장남인 요시노부(義信)도 부상당한다. 여기에 신겐까지 더해진다. 말 그대로 지휘부가 초토화된 거다.

 

우에스기 겐신은 끈질기게 신겐의 목을 노렸다. 카와나카지마 전투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일기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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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신은 신겐 주변에 병사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호위 기마무사 12기만 데리고 돌격을 감행했다. 신불(神佛)의 도움이랄까? 장남 요시노부(義信) 부대를 돌파, 그대로 신겐에게 돌입한다.

 

전광석화처럼 신겐의 앞까지 달려온 겐신은 자신의 칼날을 신겐의 목을 향해 날렸고, 신겐은 미처 칼을 뽑아들 여유가 없었기에 들고 있던 지휘용 쇠부채로 이걸 막아낸다. 첫 일격이 가로막힌 걸 확인한 겐신은 다시 칼날을 휘둘렀고, 이번엔 신겐의 팔을 베었다. 그리고 세 번째 휘두른 칼날이 신겐의 어깨에 박혔다. 이때 달려온 신겐의 부하가 신겐의 장창을 휘둘러 겐신의 기마무사를 제압하면서 신겐은 그 목을 보전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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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게, 과연 신겐과 겐신의 일기토가 있었는가 하는 대목이다. 

 

“신겐의 등장으로 전국시대 전투의 형태가 달라졌다.”

 

신겐 이전의 전투에서 무장은 맨 앞에 나서서 몸으로 싸우는 존재였다. 그러나 신겐이 등장하면서 무장의 전투 방식이 달라졌다. 이제 맨 앞에서 위험하게 칼과 창을 들고 나서는 게 아니라 후방에서 군 전체를 통솔하는 ‘지휘관’의 역할로 바뀌었다. 이런 신겐이 겐신과 일기토를 한다? 

 

물론, 군이 붕괴해서 본진이 무너졌으니 지휘관에게 칼날이 날아올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신겐과 겐신이 일기토를 한다? 지휘용 부채인 군바이(軍配)를 가지고 칼을 막고, 싸웠다는 게 맞을까?(나중에 이 부채를 확인해 보니 여덞 군데나 생채기가 나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이건 역사와 전설이 결합된 듯하다.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실제로 벌어진 ‘역사’이지만, 역사상 유래 없는 라이벌끼리의 회전이란 부분, 라이벌이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었다는 점 때문에 후대에 각색되거나 윤색되어진 부분이 많다. 겐신이 칼을 부채로 막아냈다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많은 역사학자들도 이건 ‘각색’이라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군바이(軍配) 이야기는, 

 

“다케다 신겐이 불의의 일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낸 상징.”

 

이라고 본다. 다케다 신겐의 본진은 쑥대밭이 됐지만, 의외로 잘 버텨냈다. 숙장(宿將)들의 목이 날아가고, 병력의 상당수가 와해된 상황 속에서 신겐 군은 전면붕괴까지 가지 않았다. 대장인 신겐만 살아있다면, 아직 해볼만 하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대 병력보다 더 많은 별동대 병력 1만 2천이 아직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은가? 

 

카와나카지마 전투를 크게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눈다면, 우에스기 겐신이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 오전 6시부터 오전 10시까지는 우에스기 겐신의 일방적인 승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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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별동대가 전선에 도착한 오전 10시 이후부터는 우에스기 군이 밀리는 형국이 된다. 

 

“주군을 구하라! 어서 강을 건너라!”

“이대로 밀어붙이면, 우리가 승리한다! 어서 강을 건너라!”

 

사이죠 산에서 치쿠마 강(千曲川)으로 내쳐 달려온 신겐의 별동대는 황급히 강을 건넜다. 본진이 거의 궤멸 수준으로 무너지는 걸 바라본 별동대는 있는 힘을 쥐어짜내 달려왔고, 이후의 전투는 신겐 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우에스기 군의 배후를 잡았다! 계속 몰아 붙여라!”

 

아무리 우에스기라 해도 배후를 잡힌 상태에서 수적인 열세까지 더해지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에스기는 용전분투! 이름값을 했다. 

 

오전 10시에 우에스기 군의 배후를 잡은 신겐 군의 별동대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이미 승패는 결정 났다고 해야 할까? 신겐 측도, 겐신 측도 더 이상 전투를 이어나갈 이유가 없었다. 서로의 군세는 꺾인 상황이었고, 승부를 볼 수 있는 여력도 없었다. 결국 겐신이 먼저 몸을 뺐다. 겐신이 젠코사(善光寺)쪽으로 병력을 물렸다.

 

오후 4시 경, 신겐 군이 승리의 나팔을 불며 전투가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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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의 승자는 누구?”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수적인 열세 속에서 탁월한 ‘감’과 ‘지략’으로 다케다 신겐을 궁지에 몰아붙인 우에스기 겐신의 승리일까? 하지만 겐신이 먼저 몸을 뺐다. 그렇다면 신겐의 승리일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별동대가 우에스기 겐신의 뒷덜미를 잡기 전인 오전 10시까지는 겐신의 승리, 우에스기 겐신이 부대를 물린 오후 4시까지는 신겐의 승리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 정도와 장수들의 죽음을 보면 다케다 신겐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신겐 자신은 물론, 그의 아들까지 부상을 당했고, 참모와 삼촌, 동생이 겐신의 손에 죽었다. 병력상의 피해도 신겐 군이 약간 더 많았는데, 양측의 사상자 비율을 보면 우에스기 겐신 군이 참전 병사의 72%가 상했고, 다케다 신겐은 참전 병사의 88%가 상했다. 

 

양측 사상자 숫자를 보면,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확인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양측 모두 ‘정예강군’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현대전에서 편제부대의 50%가 괴멸할 경우에는 항복을 하거나 후퇴하는 게 상식이다. 이 정도 수준의 피해라면,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양군은 편제병력의 70% 이상이 피해를 봤음에도 퇴각할 때까지 싸웠다. 양쪽 군대 다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증거다. 

 

전사자 숫자는 어떠했을까? 우에스기 군은 3,400명 다케다 군은 4,500명 수준이었다. 수적 열세를 극복한 기습과 다케다 군에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 우에스기 군이 우세라 볼 수 있지만, 전략적인 면에서는 다케다 신겐의 승리다.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후 이 땅은 다케다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재미난 건 이 전투 이후 우에스기와 다케다는 서로 자신의 승리를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다케다의 승리라고 보는 게 맞다. 전국시대의 전투란 해당지역을 차지한 자의 승리다. 그런 의미로 다케다의 승리를 말할 수 있지만, 그 피해규모를 생각한다면 신겐의 온전한 승리라 보기 어렵다.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고 해야 할까? 엄청난 희생을 통해 카와나카지마를 얻었다 하지만, 그 희생에 비해 얻은 게 별로 없었단 소리다. 

 

그렇게 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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