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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나스카 평원에는 크기가 최대 3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그림들이 땅에 그려져 있다. 2백 개가 넘는 이 그림들은 기원전 3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그렸는지 아직 알려진 바는 없으나 이 당시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한 문명이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어 괴베클리 테페와 더불어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근거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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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라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긴 부리를 가진 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Ancient Summit

 

괴베클리 테페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초고대 문명을 보여주긴 하지만, 외계인이나 신 같은 초월적인 존재를 의미하거나 인간이 필요한 문명의 범주를 넘어서지는 않는 반면 나스카 지상화는 어떻게 그렸는지 방법을 짐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토템이라고 보기도 어려워 용도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면에서 초고대 문명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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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남동부 샤늘르우르파 외렌직(Örencik)에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다. 1963년 처음 발견되었고,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나스카 지상화가 기원전 300년경에 만들어졌고, 그 후에 수많은 사람이 지상화를 봤지만 실제로 지상화가 발견된 것은 불과 80년 전인 1939년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앙코르와트 사원은 정글 속에 있어 존재가 늦게 알려졌고, 마추픽추는 높은 산에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발견되었으며, 은허의 갑골문은 그것이 문자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늦게 알려졌지만, 나스카 지상화가 늦게 알려지게 된 건 좀 다른 이유다.

 

 

한 발 떨어지니 전체 그림이 보였다

 

3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 탓에 땅에서 봐서는 이게 그냥 땅을 파놓은 흔적으로만 보일 뿐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발명되어 하늘에서 땅을 볼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단순히 땅을 파놓은 것이 아니라 새, 거미, 고래 등을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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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 그림은 경비행기를 타고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비행기 외에도 전망대에서 구경할 수 있다. 사진/Adventures to Peru

 

인간은 육체라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식 또한 육체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인류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육체의 한계 밖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한 인식의 영역을 조금씩 늘릴 수 있게 됐다.

 

이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통계 등의 기술을 발달시킴에 따라 인간 사회에 어떤 문제가 존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과학 기술의 발달에 의해 알게 된 것들 중에는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도 많다. 과학 기술은 우리가 직접 인식하던 대상들을 한 발 떨어져 볼 수 있게 함으로써 그동안 보지 못하던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한 발 떨어져 본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대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그 대상을 제대로 관찰할 수 없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만 본질을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앞에 얘기한 나스카 지상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사회현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내가 속한 집단이나 단체, 국가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기는 굉장히 어렵다.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숲 안에서 전체 숲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다만 인간에겐 가장 강력한 무기인 상상력을 동원하면 최대한 주관의 함정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 글에선 이것을 ‘한발 떨어져 보기’라고 부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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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일이나 다른 나라의 일은 파악이 쉽다

 

우리는 과거의 일이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인지(여기서 맞는 방향이란 인간사회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공리-에 가까운 방향은 어느 쪽인지를 말한다) 파악할 수 있다.

 

선조 때 시작된 붕당정치가 선조로부터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명성황후 민자영이 일본군대를 끌어들여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지, 미국은 왜 중동의 패권에 집착했는지, 트럼프가 당선된다는 것이 미국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는 번탈남이라고 불리는 인셀들이 다른 나라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홍콩에선 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인종차별은 뭐가 문제인지, 일본은 왜 우경화됐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비교적 쉽게 알아낸다.

 

≫용어설명

번탈남: ‘번식에 탈락한 남자’의 준말

인셀: ‘비자발적 독신주의자(involuntary celibate)’의 약자로, 2014년 미국의 총격 살해범 엘리엇 로저가 자신의 구애를 거부한 여성에게 분노를 표시하면서 온라인상에서 사용했던 용어로 알려져 있다.

 

‘객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이해관계가 없으며 한 사건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벌어지는 일들과 벌어지는 사건 사이에 유기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두고 지푸라기를 잡기도 하지만 물 밖에서 보면 그런 상황을 대부분 알 수 있다. 개별적인 사안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고 자신의 이해가 걸려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여유와 능력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개별의 사안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안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안 외에 다른 일들을 생각하거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그 사안을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각자 본업과 일상이 있기 때문에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일만한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 탓도 있다.

 

특히, 크게 보면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얼핏 봐서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은 언론이 제시한 프레임 대로 보기 십상이다. 언론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제기하면 그 문제의식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언론이 말하지 않는 훨씬 더 심각한 사안들은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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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에서 영화 <내부자들>에서 ‘대중들은 개돼지’라는 말은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탐스런 뼈다귀가 눈앞에 던져지면 그 뼈다귀를 누가 왜 던졌는지를 고민하고 그 뼈다귀를 물지 말지 고민하는 일은 쉽지 않다. 충분한 시간과 지식을 갖춘 사람조차 잘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육체라는 주관 속에만 세상일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기자’라는 최대한 객관적 관찰이 가능한 직업을 발명해 냈지만, 우리나라에서 기자는 객관적 관찰이라는 사회적 효용을 거의 상실한 존재가 돼버렸다. 

 

(이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하겠지만, 기자들이 이런 사회적 효용을 거의 상실한 데에는 기자들이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주관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이고, 애초에 우리 주류 언론들이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를 거치면서 철저히 누군가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대 제식 훈련과 비슷한 취지로 운용되는 ‘사쓰마와리 시스템’은 이런 시스템의 존재를 가장 잘 보여준다.)

 

≫용어설명

사쓰마와리: 입사한 수습기자에게 경찰서를 순회하며 취재하고 기사를 쓰도록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언론이 추구할 가치는 중립이 아니다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한다면 우리들은 언론이 던져주는 뼈다귀만 무는 개돼지가 되어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 언론들은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지만 철저하게 정파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의제를 던질 때는 항상 그 의도를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나라 언론, 기자들은 항상 중립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언론이 추구해야 할 것은 중립이 아니라 공정이다. 중립은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중점에 위치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누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더라도 언론이 중립을 지키려면 그 또한 하나의 의견으로 존중해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중립이란 방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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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에 방영된 KBS<저널리즘 토크쇼 J> 유튜브 채널에서는 5.18과 관련된 망언들마저 하나의 의견으로서 보도하는 KBS에 대해 이런 제목을 붙였다. “[J 컷] 5.18 헛소리마저 중립병 환자마냥 보도한 KBS

 

중립이 언론의 바람직한 태도처럼 보인 건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기계적 중립이라도 지켜라는 사회적 열망 때문이었다. 땡전 뉴스로 상징되는 언론의 태도는 너무한 거 아닌가라는 자성과 함께 기계적인 균형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그 당시 언론들은 기계적 중립조차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언론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기득권과 권력의 이해에 부합하는 보도를 일삼아 왔다. 지금은 중립이라고 말하기라도 한다지만 언론이 말하는 중립이 수구기득권 층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중립이라는 말도 그들이 실제로 추구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언론 환경에서 민주주의 사회 시민으로서 ‘한 발 떨어져 보기’ 스킬은 우리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스킬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사안을 바라보지 않으면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정파적인 언론이 던지는 뼈다귀만 물면서 살 수밖에 없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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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흑서를 낸 다섯 명 중 진중권을 제외한 4명은 ‘한 발 떨어져 보기’에 실패한 지식인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진중권은 나머지 네 명과 다르게 훨씬 악질적이다. 어떻게 아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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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2020 신년토론 

 

2019년에 있었던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에 수많은 교훈을 남겼다. 조국 사태는 가까이서 바라볼 때와 한 발 떨어져 볼 때 전혀 다른 사태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한 발 떨어져서 전체적으로 바라봐야만 이 사태의 본질이 보인다. 

 

조국 사태의 본질은 뭘까?

 

조국 사태의 본질은 검찰 쿠데타다. 따라서 조국사태가 아니라 2019 검찰 쿠데타라 불러야겠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이 사건을 검찰 쿠데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5.16쿠데타를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나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 공산 폭동으로 받아들였던 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보도만 보고 조국 사태검찰 쿠데타라는 걸 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현대사에 벌어진 비극들에 대해 공부하고, 언론들이 그동안 어떤 태도로 우리나라 사회를 보도해왔는가 등에 대해 ‘한 발 떨어져서’ 종합적으로 바라봐야만 검찰 쿠데타라는 본질이 보인다.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본 조국 사태는 어떤 모습이길래 검찰 쿠데타 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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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