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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직업은 밥그릇이다. 밥벌이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가진 재산이 많아서 굳이 벌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해서 돈을 벌고 있다면 그 일이 밥그릇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지 몰라도 밥그릇에는 등급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그릇의 크기가 크고 넓은 쪽을 선호한다. 많이 벌면 좋은 밥그릇이라는 거다. 그리고 뺏기거나 깨질 염려가 덜한 튼튼한 밥그릇을 선호한다. 두 가지를 다 갖고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내가 보기엔 의사들의 밥그릇이 딱 그렇다.

 

의사의 밥그릇

 

의사의 밥그릇이 크고 튼튼하다는 내 말에는 어떠한 비난과 조롱의 의미도 없다. 학창시절부터 남보다 몇 배는 치열하게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하고 그 후에도 십수 년은 고생해야 전문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그들의 크고 튼튼한 밥그릇이 부당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최근 의사 파업 사태를 보면서 그 견고함에 새삼 놀랐을 따름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뭉쳐 파업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일이야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아직 그 직업 종사자가 되기도 전에 면허를 따기 위한 시험을 거부하는 형태로 저항 할 수 있는 직업은 이 나라에서 의사가 유일하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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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파업이 노동자의 신성한 권리임에도 지금까지 우리는 보호받지 못한 파업들을 숱하게 봐왔다. 파업 때문에 밥그릇이 깨져나가다 못해 몸이 깨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반면 의사들의 파업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받았다. 의협과 정부의 협상이 타결되고 전문의들과 전공의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피해를 입었어야 했다는 말은 아니다). 파업 전과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국시를 거부한 의대생 집단이 유일하다. 그들은 아직 의사가 아니므로 어찌 보면 아직 밥그릇을 완성하지 못한 자들이 가장 손해를 봤다고 할 수 있겠다. 그조차 손해가 될지 원상복구가 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의 밥그릇은 강자의 밥그릇이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사태

 

지난 6월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를 두고 사회 전반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보안 업무를 맡고 있는 공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놓고 ‘공정’시비가 붙은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밥그릇을 튼튼한 정규직 밥그릇으로 바꾸어 주자는데 뜬금없이 웬 공정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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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시스>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주체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을 이미 따낸 사람들과 공사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이었다. 내가 얻은, 혹은 내가 얻기 위해 노력 중인 비교적 대우가 좋고 튼튼한 일자리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내어주는 게 공정하지 않다는 불만이었다. 누군가의 오해를 이용한 누군가의 왜곡으로 3년 이상 일한 사람들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마저 묻히고 몇 개월 알바로 일하던 사람까지 한순간에 공사 정규직이 되는 것처럼 언론까지 나서서 호들갑을 떨었다. 덕분에 밥그릇의 크기는 별로 달라지는 것 없이 예전보다 튼튼한 밥그릇을 얻게 된 사람들이 졸지에 죄스럽게 됐다.

 

그런 와중에 비정규직으로 일한 지 3년이 되지 않아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경쟁률이 어마어마한 정규직 채용 공채에서 떨어지면 졸지에 원래 있던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내려놓을 지경이 되었지만 보호도 관심도 받지 못했다.

 

약자의 밥그릇은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외부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다.

 

어느 초등학교의 징계

 

전북 고창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장을 비롯한 일선 교사, 행정실 직원 등이 지난 5월에 점심시간에 급식실에서 술을 마신 사실이 적발돼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하고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리 학생들이 학교에 없었다고 해도 엄연한 근무시간에 그것도 교내에서 교사들이 술을 마셨으니 징계가 부당하다 말할 수는 없겠다.

 

의아한 점이 있다면 징계의 내용이다. 교장은 1개월 정직을, 교사 4명은 불문경고 처분을 받았는데 기간제 교사 1명은 계약이 해지됐다. 교장과 정교사, 기간제 교사가 교내에서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다 적발되었다면 각자의 책임과 권한의 크기에 따라 징계의 경중이 가려져야 할 것인데 이번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가장 힘이 없는 기간제 교사가 가장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이를 두고 혹자는 어차피 계약 만료 후 연장을 안하면 학교를 떠나야하는 기간제 교사의 계약해지보다는 교장의 정직 처분이 더 무겁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기간제 교사는 실업자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도 잘못은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기간제 교사인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 교장과 다른 교사들을 보채 술자리를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 사건으로 계약해지 징계를 받은 그는 다른 학교에서라도 근무할 수 있게 될까?

 

같은 잘못을 해도 밥그릇이 튼튼하지 못한 약자의 밥그릇이 먼저, 더 쉽게 깨진다.

 

누가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가

 

글을 쓰고는 있지만 밥그릇을 가지고 강자와 약자를 운운하는 내 기분도 씁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들고 있는 밥그릇의 등급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갈리는 것이 불편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크지도 않고 깨지기도 쉬운 밥그릇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연대하여 한 목소리를 내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뿐더러 그렇다고 잘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목소리를 냈다가 쥐고 있던 숟가락마저 뺏기는 일이 부지기수다.

 

취준생과 학생들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닿을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을 향해 있다. 그러므로 약자의 밥그릇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이 목표로 하는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미리부터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같은 분야에서 더 튼튼한 밥그릇을 가진 사람들 또한, 애석하게도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약자의 밥그릇을 튼튼하게 만들고 보호하는 것이 자신의 밥그릇을 작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먹고 사는 것은 숭고한 일이니 나와 내 가족의 밥그릇을 지키려 하는 것을 두고 마냥 비판할 수는 없다.

 

약자의 밥그릇은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보호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를 움직이는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런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언론이 있다. 따라서 가장 큰 책무는 정부와 국회, 그리고 언론에 있다. 정치가 잘 해내지 못하면 언론이 나서서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알려야 한다.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것 없이, 밥그릇을 든 모든 이들은 때때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것을 들고 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한다. 그 싸움을 바라보는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 언론들을 생각해본다. 왠지 그들의 시선은 유독 강자의 밥그릇에만 따뜻하고 약자의 밥그릇에는 더없이 싸늘하고 차가웠던 것 같다. 시선조차 주지 않은 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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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또 하나의 약속>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국민의 발이 묶였다’고 탄식하고 기사와 사설에서는 국민을 볼모로 밥그릇 싸움을 해서 되겠냐며 준엄하게 꾸짖었던 이들 보수언론이 의사의 파업 앞에서는 한없이 온순해져 그들의 주장에 귀를 쫑긋 세운다.(현 정부가 정파적으로 다른 입장이어서 이에 대항하는 모든 집단에 우호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현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기업 노조에게도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란 앞에서 이들은 누구보다 많은 양의 기사를 쏟아냈지만 온통 논란을 가중시키는 내용뿐이었다. 오해와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증폭시키고 부추기는 방향으로 애썼다.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아진 3년 미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약자의 밥그릇을 보호하는 일에 그토록 매몰차고 무관심할까. 그 또한 밥그릇 때문이겠다. 아무래도 그들은 약자의 밥그릇보다는 강자의 그것에, 강자의 그것보다는 밥그릇 자체를 만들어내는 재벌 대기업에 붙는 편이 자기 밥그릇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자기 밥그릇도 없이 기생했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타인과 사회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헌신하는 직업은 대중의 존경을 받아왔는데, 한때는 기자를 비롯한 언론인도 그런 존경을 받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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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을 뒤로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1987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1면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