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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행정’을 강조한 도지사 

 

'복도통신'이라는 것이 있다. 청사 내 복도에서 공무원들이 쑥덕거리며 소문이 퍼지고 정보가 흘러나간다. 당연히 도지사 주변 정보가 복도통신 제1관심사이다. 기자들도 복도통신을 자주 활용해 데스크에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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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통신에 돌아다니는 얘기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공무원들은 경남도청 소통기획관실(기업으로 치면 홍보실) 소속인 나에게 가끔씩 질문을 갖고 온다. 더러 아는 내용도 있고, 모르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그 복도통신 중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이 있다. 

 

바로 도지사가 화를 냈다는 소문이다. 실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3년간 경남도청 생활을 하면서 그런 소문은 들어본 적 없다. 도지사는 속내를 숨기는 것이 잘 훈련된 사람이었고, 화가 나도 참았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다만, 딱 한 번 짜증 내는 것은 본 적 있다. 2019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고위 공무원들을 모아 놓고 전략회의를 진행했다. 주제는 ‘도정혁신’이었다. 행정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논했다. 담당 부서에서 몇 가지 안을 올렸고, 도지사는 토론에 부쳤다. 

 

하지만 고위 공무원들은 대부분 고시 출신에 경력이 십 년 이상 베테랑 공무원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려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답답한 도지사는 토로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 있어야 되겠습니까?”

 

도지사는 답답했고, 경남도청 공무원들은 도지사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직전 도지사인 홍준표 시절 경남도청은 그야말로 심플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진주의료원 폐업, 학교 급식 지원 중단(무상급식 중단) 등으로 도민들과 싸우기 바쁜 공간이기도 했다. 그 시절, 공무원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도지사는 미래를 이야기했다. 국가전략을 보고, 자신이 만든 정책이 국가정책이 되도록 노력했으며, 항시 세계의 흐름을 살폈다. 직원들은 “도지사가 학자 스타일 같다”고 나에게 여러 번 말했다.

 

도지사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도지사로 취임한 직후부터 책을 꾸준히 추천했다. <축적의 길>, <지방자치가 우리 삶을 바꾼다>, <공유플랫폼 경제로 가는 길>, <추월의 시대> 등 우리를 냉정히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책들이 주를 이뤘다. 간부들은 당연하고, 평직원들 책상에도 도지사가 추천한 책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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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초청 특강이 끝난 후 직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하고 있는 도지사.

 

하지만 책만 추천한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지는 않는다. 앞서 책을 쓴 저자는 물론이고,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카피라이터 정철 선생 등 여러 전문가들을 경남으로 모시고 특강을 했다. 내 기억에 이런저런 특강까지 합치면 도지사가 초청한 전문가 특강이 20여 차례는 되는 듯 싶었다. 이때 간부공무원들과 관심 있는 공무원들 100여 명은 오프라인으로, 그리고 각 부서에 실시간으로 방송됐다.

 

특강을 한 후 도지사가 직접 사회를 봤다.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고, 도지사도 개인적인 의문이 있으면 질문을 했다.

 

사실 이 정도도 부족하다. 도지사도 이를 알고 있었다. 공무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도지사는 직접 마이크를 들었다. 예를 들면, 2019년 7월 12일 거제 삼성호텔에서 간부 공무원 워크샵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도지사는 30분 동안 특강을 통해 부울경이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해법이 없다고 도정 방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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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공무원 워크숍에서 직접 도정 방향 PT를 진행하는 도지사.

 

민관협력도 늘 당부했다. 민관협력을 한다면 훨씬 더뎌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추진된 사업은 명분이 뚜렷하므로 더욱 안정적인 추진이 가능하다. 도지사는 “민관협력을 하면 둘러 가는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 보면 그게 더 질러(빠르게) 가는 길입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정리하자면, 도지사는 지시만 하는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행정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공공기관과 민간이 협치해야 하고, 지사는 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명료한 지시보다는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스스로 부서에서 옳은 방향을 찾아가도록 유도했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과거 같으면 한 번에 도지사 지시를 받아서 마무리하면 끝날 일이 스스로 방법을 찾아야 하니 2번, 3번 보고해야 한다.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걸 잘 아는 도지사는 자신의 말이 어렵다고 느껴지면 조언을 구할 전문가나 관련 사례를 항상 소개해줬다. 

 

공무원들은 피곤했지만, 성과는 뚜렷했다. 

 

서부경남KTX를 비롯해, 동남권 광역교통망, 스마트국가산단, 진해 신항(12조 원) 등 대형 국책사업을 연이어 가져왔다. 평소라면 이 가운데 하나만 가지고도 ‘4년의 성과’로 홍보할 일이었다. 

 

국고지원 예산액도 거의 배 가까이 늘었다. 도지사의 힘이 강한 것도 있었지만 경남도청 공무원 역량도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막말로 대통령 지시도 안 들어 처먹는 중앙부처 관료들이 호락호락할 리 없다. 

 

왜 이게 필요한지 ‘추진 배경’과 이런 사업을 했을 때 어떤 ‘기대효과’를 볼 수 있는지 충분한 논리와 구체성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부울경도 수도권처럼 생활권역을 형성하려면 수도권 지하철처럼 광역철도망이 필요하다. 물론 정부 부처는 ‘경제성’을 이유로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수도권이야 인구 2,500만 명이 살기 때문에 무슨 사업을 해도 경제성이 충족되지만, 부울경은 기껏해야 800만 명이다. 

 

‘NO’라고 할 근거는 충분한 셈이다. 도지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철도망 국비 지원 사례를 모아 달라고 했고, 모아본 결과 90% 이상 수도권에 집중돼 있었다. 이를 토대로 도지사는 중앙부처를 설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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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김경수 지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지역과 함께하는 한국판 뉴딜의 본격 추진을 위한 '제2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에서 동남권 광역교통망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경남도청은 하루에도 수많은 공공기관과 공문을 주고받는다. 공문에는 공문과 관련된 각종 첨부자료가 붙어 있다. 내가 보기엔 경남도청 자료는 타 시도나 일부 중앙부처에서 만든 자료보다 더 뛰어났다. ‘지시’를 받고 어거지로 만든 문건과 스스로 ‘생각’을 하고 만든 문건은 그 차이가 명확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업의 기획의도(추진배경)에서는 ‘소통을 늘이겠다’. ‘편의를 높이겠다’,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써놓고는 실제 사업 계획에서는 되레 소통을 줄이고,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는 공문들이 널렸다. 

 

‘윗선’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내용을 만들고, 앞에 쓸 말이 없으니 하나마나한 소리를 넣은 것이다. 하지만 경남도청 문건은 달랐다. 최소한 앞뒤가 모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생각하고 답하고 방향을 찾도록 하는 것, 이것이 김경수의 방식이었다.

 

 

행정은 권력이 아니다

 

공직에 처음 들어오는 직원에게 도지사와의 첫 대면은 아마 평생 남을 기억이다. 도지사는 2019년 1월 28일 신규공무원 임용장 수여식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여러분의 고용주는 도지사가 아니라 도민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일이 고용주인 도민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생각해 주십시오. 해왔던 방향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요렇게 하면 도민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겠다. 그게 바로 혁신입니다...”

 

여기까지는 평이한 전개다. 도지사는 말을 잇다 잠시 멈칫했다. 할 말이 있었는데 잠시 잊어버렸다. 할 수 없이 다음으로 건너뛰고 얘기를 하다가 아까 하려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아, 생각났다. 행정이라는 것이 왜 필요하냐면 말이죠. 사회의 약자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이 없으면, 우리 사회는 힘 있는 사람, 부유한 사람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강한 사람에 유리한 구조를 행정이 나서서 균형을 잡아줘야 합니다. 물론 설사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잘못된 행정으로 부당한 피해를 보고 있으면 그건 풀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합리화하고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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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8일 신규공무원 임용장 수여 직후 기념 촬영 모습.

 

2021년 7월 6일 신규 공무원 간담회에서는 이런 말을 했다. 

 

헌법에 보면 권력이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옵니다. 1조에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는 말이 있고, 나머지는 권력 대신 권한입니다. 모든 권한은 국민의 권력을 위임받아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위임된 권한을 권력처럼 생각하는 조직은 어그러집니다. 권한을 행사하는 공직자가 겸손하지 않으면 인허가권도 갖고 있고 권한이 많으니까 갑질이 나옵니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은 행정기관보다 약하니까 잘못하면 우선순위가 바뀌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걸 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국민들로부터 나오니까 국민들께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국민이 맡겨놓은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모 기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도지사는 공무원들에게 어려운 사람이었다. 대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려 했고, 인간적으로 직원들을 대했다. 경남도청 공무원 노조 게시판은 특성상 기관장을 비판하는 글이 다수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드루킹 바둑이 운운하는 극우 네티즌까지 몰려와 도지사를 비난하는 경우도 잦다. 혹여 도지사를 옹호하는 글이 올라오면 ‘비추’가 쏟아지는 곳이다.

 

그곳에 지난 7월 23일. 김경수 지사가 도지사직을 상실한 직후 한 편의 글이 올라왔다. 나는 이 글이 도지사를 바라보는 경남도청 공무원 다수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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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경수 도지사의 뒷모습을 보며

 

3년 전 정치에 때묻지 않은 사람이 도지사로 왔다. 

신선하기도 하고 잘 생겼고 소박했다. 

매사에 겸손했고 도정과 도민을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물론, 나 같은 하위공무원이 볼 때는 저걸 왜 하나? 싶기도 하고 

딱 부러지게 방향을 정해주지 않아서 힘든 때도 있었다. 

 

지사는 큰 그림을 그리는데, 직원들은 매뉴얼에 있는 일만 하기를 바랐다. 

정무직과 일반직의 차이라고 할까. 

어쨌거나 지사는 가고 권한대행 시대가 왔다. 

앞에 정책을 잘 이어가겠다는데, 그건 다음 정권, 다음 도지사가 누가 되느냐에 달렸다. 

 

지금 도지사 하마평에 오른 사람 그 누가 와도 

김경수 지사처럼 인간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비록 우리를 힘들게는 했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게 하거나 법 밖에 일을 강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김경수 지사를 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새로운 지사가 오면, 노무현을 그리워하듯이 김경수 지사를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