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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 요약

 

조선 왕족의 무덤 총 개수는 118기이다. 이 중 왕과 왕비의 무덤인 능(陵)은 42기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2기는 북한에 있어 함께 등록되지 못했다). 헌데, 조선왕릉을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도심 속의 보석 같은 울창한 숲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관람할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조선왕릉은 단 한 번도 석실 발굴이 없었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이라곤 하나 무덤과 숲 외엔 볼 거 없이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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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상설도(좌)와 조선왕릉 모습(우). (클릭하면 확대)

 

하지만 조선왕릉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거대한 비밀이 있다. 

 

조선왕릉은 거의 도굴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시기, 왜군에 의해 선릉과 정릉이 털린 것이 유일한 도굴 성공 사례이다. 이유는 이렇다.

 

조선은 고구려부터 고려까지 이어져 왔던 한반도 전통 무덤 양식인 석실묘(돌로 방을 만드는 무덤)를 버리고, 극보수적인 방법인 회곽묘를 표준으로 삼는다. 회곽묘 공법이 자리 잡을수록, 그 견고함도 더해갔다. 

 

특수한 재료와 섞은 석회로 곽 주변을 돌리던 초기 방식은 훗날, 아예 석회벽을 둘러 나무곽의 역할을 대신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아무튼, 있는 대로 석회를 들이부었다는 거다. 그냥 콘크리트 무덤이 되는 것이다. 유학의 보급과 더불어, 선조의 무덤을 고스란히 지키고 싶었던 만큼 조선 버전의 회곽묘는 왕가에서 사대부까지 널리 쓰이는 스탠다드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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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형태의 조선시대 회곽묘. 관을 둘러싸고 있는 회곽을 개방한 상태. 그냥 콘크리트 그 자체다. 

 

이렇게 되면, 석회가 굳으면서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고, 내부 온도는 물 끓는 온도보다 한참 높은 온도로 올라간다. 즉, 관 내부가 하나의 초고온 멸균실로 변한다. 

 

그 덕분에, 조선의 회곽묘에서는 매우 잘 보존된 미라와 한글편지, 의복 등이 발굴되면서, 기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던 영역, 이를테면 필자 같은 사람들이 천착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밝혀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회곽묘는 고고학의 노다지인 것이다.

 

(흥미진진한 1편의 내용을 자세히 ‘링크’)

 

 

조선왕릉 축조, 그 변태 같은 디테일

 

조선은 왕릉을 변태처럼 만들었다. 왕릉을 만들 때마다 수없이 국무회의를 하고, 당대의 최고 기술자들이 총출동했으며, 만든 후에는 만든 과정을 세세히 적어 백서를 만들었다. 그것이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왕릉 관리자를 임명하고, 왕릉에 딸린 단독 예산도 마련하며, 왕릉 관리 사찰을 만들어 왕릉 케어를 맡긴다. (강남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봉은사는 선릉 관리의 명분으로 왕실의 지원을 듬뿍 받는다) 

 

즉, 조선왕조에 있어 왕릉 건설은 중차대한 국책 사업이었다.

 

그래서 왕릉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이는 모가지가 뎅-겅했다. 왕릉 구역에선 흔한 나무 하나 쉽게 자를 수 없었으며, 그 덕분에 왕릉 구역은 수백 년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존해왔다. 

 

‘왕릉은 신성한 구역’이라는 의식이 민간에 뿌리 깊게 자리한 덕일까. 일제강점기의 부분적인 훼손이 있긴 했지만, 나라를 되찾자마자 정부는 왕릉을 빡세게 관리한다. 그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다.

 

의궤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 

 

전술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의 ‘산릉도감’이라는 명칭은, 지금으로 치면 ‘왕릉축조위원회’로 후려칠 수 있다. 왕이 승하하면, 왕릉 건설을 위한 정부 부처가 발족했고, 왕릉 조성이 완료되는 5~6개월 동안 존속했다. 그리고 이 부처에서 진행한 모든 일을 변태같이 기록했다. 그 기록의 디테일은 연구자가 보더라도 정신이 아득해질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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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무덤을 만들 때 쓰인 도르래의 모습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 (국립고궁박물관)

 

왕릉 내의 건축물을 예로 들어, 우리가 알기 쉽게 후려쳐 보자. 

 

건축물 내 서까래는 몇 개고, 기둥은 몇 개며, 기둥의 길이는 어느 정도고, 각 기둥의 인테리어는 어떻게 했는지 나온다. 다음은 재료다. 서까래는 어떤 나무를 썼고, 기둥은 어떤 나무를 썼으며, 문은 어떤 나무로 만들었는지 나온다. 

 

다음은 기술자다. 서까래는 누가 만들었고, 기둥은 누가 만들었고, 문은 누가 만들었고, 마감 공사는 누가 했는지 나온다. 여기에 해당 기술자에게 얼마의 보수를 지급했는지, 해당 기술자는 어디 출신인지, 또한 건축물의 공사 기간은 어땠는지 기록되어 있으며, 해당 건축물 공사와 관련한 각종 공문까지 모조리 망라한다. 물론, 모든 건축물과 석재, 조각품의 설계도 또는 조형도는 필수로 수록된다.

 

일반적으로 무덤과 관련한 연구는 고고학이 주도하지만, 조선왕릉은 의궤의 변태 같은 디테일 덕분에, 문헌 연구가 중심이 됐다. 조선왕릉에 일정 부분 훼손이 발생해도, 의궤에 적힌 그대로 복원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용어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어려웠는데, 수십 년의 노력 끝에 거의 ‘완벽한 복원’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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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종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왕릉이 발굴되지 않은 이유

 

그런데 의궤의 존재는 동시에, 조선왕릉을 굳이 파도 되지 않는 근거가 된다. 그동안 조선왕릉을 발굴하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왜 파냐? 의궤 보면 되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파보지 않아도, 이미 의궤에 모든 것이 다 나와 있었다. 즉, 답지가 달린 수학 익힘책의 느낌이랄까.

 

 

2. 부장품이 별거 없다.

 

무덤의 꽃은 부장품이다. 그런데 조선왕조는 도굴을 우려해 부장품을 거의 넣지 않거나, 넣어도 다 모형으로 넣었다. 그리고 뭘 넣었는지도 다 안다. 의궤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3. 전주 이씨 종약원의 반대

 

현실적인 이유다. 현재 조선왕릉의 의례는 전주 이씨 종약원이 이어받아 그 원형을 지켜가고 있다. 자세한 규정이나 법적 절차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조선왕릉을 발굴하려면 종약원의 동의가 필요하다. 왕릉뿐 아니다. 민간의 조선 양식 무덤 발굴은 모두 후손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덤을 판다는 거부감, 그리고 굳이 팔 필요 없다는 이유가 종합적으로 작용해, 조선왕릉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 박탈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이유다. 유네스코는 ‘원형 보존’을 최상의 원칙으로 여긴다. 조선왕릉이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상, 왕릉의 핵심인 관을 뜯는 것은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위협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왜 발굴해야 하나

 

전술한 이유 때문에, 그동안 조선왕릉의 발굴은 단 한 번도 석실 중심을 판 적이 없다. 관뚜껑을 다시 연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 번 정도는 파봐야 하지 않겠냐’라는 논의가 없던 것은 아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 시절에, 세종대왕 초장지(지금의 세종대왕릉은 이장 후에 조성되었다) 발굴을 시도한 적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70년대에 한 차례 조사했던 다른 무덤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미숙했던 발굴실력, 그리고 엄밀하지 않았던 조사 데이터 정리로 인해 벌어진 촌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시사점은 있다. 처음 세종대왕 초장지 발굴을 시도할 때, ‘무덤 내 벽화를 확인할 수 있다’, ‘운 좋으면 시신도 있을 것’이란 기대를 모았다. 까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러니까, 학계에서는 은근히 발굴을 원하고 있다.

 

왜 발굴하면 좋을까? 그 이유, 세 가지로 정리해봤다.

 

 

1. 사라진 조선 왕들의 얼굴

 

불타버린 어진.JPG

불타버린 태조, 원종(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순조, 순종의 어진. 태조의 어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태조의 모습보다 젊은 시절의 모습을 닮고 있는 어진이나 얼굴 부분이 손상되어 알아볼 수 없다. (클릭하면 확대) (국립고궁박물관) 

 

한국전쟁 시기, 부산의 한 창고에서 대화재가 일어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서울에서 가져온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이 보관돼 있었고, 대부분의 어진이 불에 타 버린다. 하필이면 얼굴 부분이 집중적으로 탔다. 역대 황제, 역대 쇼군의 초상화가 고스란히 보존된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정말 안습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왕릉은 모든 공돌이를 갈아 넣어 핵딴딴한 회곽묘로 만들어졌다. 즉, 유골은 물론이요, 운 좋으면 시신의 미라도 발굴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발굴만 되면, 어진보다 더 생생한 얼굴 복원이 가능하다.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만들어질 사극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임금뿐이랴? 조선의 여성들은 하물며 왕후라 할지라도, 얼굴이 없다. 왕후의 살아생전 모습이 어떠했는지 복원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 의미는 역대급이다.

 

미라가 아니라 유골뿐이라 해도 의미는 충분하다. 현대의 법의학 기술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있으니까. 왕과 왕후의 유골이 품고 있는 수많은 정보가 역사를 새로 쓰게 도와줄 것이다.

 

 

2. 보고 배울 것이 충분한 조선왕릉

 

강남에서부터 수도권까지 분포된 조선왕릉은 도심 속 허파와 같은 존재다. 빌딩과 건물 숲 사이, 시간이 멈춘듯한 그 공간만으로도 존재감은 충분하나, 여전히 ‘볼 게 없다’라는 아쉬움이 사뭇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왕릉을 발굴한 후, 발굴품을 모두 모아 자그마한 박물관을 만들었으면 한다. 관계된 의궤의 데이터와 실제 데이터의 차이를 비교하는 전시, 부장품들의 제작 과정을 직접 체험해보는 전시, 왕들의 옷을 복원한 전시 등 작지만 풍부한 박물관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왕릉마다 박물관을 만드는 것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일부 왕릉은 도시 계획에 의해 원래의 지역을 내준 곳도 있다. 그런 지역의 건물을 매입하여 박물관으로 조성하면, 왕릉의 복원이라는 명분도 충분할 것이다.

 

 

3. 왕릉, 종가에서 시민으로

 

앞서 조선왕릉의 의례는 전주 이씨 종약원이 주관한다고 언급했다. 왕실의 후손인 전주 이씨가 해당 의례를 주관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왕릉은 국가 문화재다. 왕릉을 조성하고 유지해오면서, 무수히 많은 조선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갔다. 그 노력의 역사를 생각하면, 조선왕릉은 수많은 시민에게 전해진 역사적 유산이다.

 

물론, 전주 이씨 종약원이 국가의 지원이 없던 힘든 시기에도 조선왕릉을 지켜온 역사는 인정한다. 그것은 앞으로도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문화재의 가치를 알리고 보존해나가는 것은 이제 해당 관계자들의 일만이 아니다. 지역의 정치참여자, 즉 시민 모두의 책임이다. 왕실의 의례는 물론, 조선왕릉이라는 문화재의 유지와 보존은 다수의 시민이 참여해나가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매우 타당하다.

 

아직까지는 문화재 발굴과 보존에서 시민들의 참여가 적극적이지 않다. 그런데 조선의 적잖은 왕릉이 도심 속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의 산책길로 애용되고 있다. 즉, 지역 주민의 참여를 끌어낼 최적의 여건을 갖췄다. 따라서 조선왕릉 발굴을 통해, 미래 세대의 참여를 통한 문화재 보존의 길을 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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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백성의 땀과 노력이 담긴 조선왕조의 상징, 조선왕릉. 

 

‘망자는 말이 없다’던 시대는 지났다. 때론 말 없는 망자의 말이, 거짓으로 점칠된 산 자의 글보다 더 실체적인 진실을 알려준다. 고고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 덕분에 한국의 발굴 기술은 세계 수준이다. 즉,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조선왕릉을 발굴할 적기라 하겠다.

 

발굴로 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위협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세계문화유산 자체가 해당 문화재를 더욱 널리 알리고, 더욱 잘 보존하자는 취지로 도입되었다. 따라서, 세계문화유산 보다 더욱 널리 알리고, 더욱 잘 보존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 방법을 택해야 한다. 물론 42기의 왕릉을 모조리 발굴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1~2기 만이라도 제대로 발굴한다면, 유네스코의 인증보다 더 훌륭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왕릉 발굴을 허하라.

 

 
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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