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본 연재 기사에서 일본 통치 편을 쓰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다. 알다시피 일본 관련 이슈는 한국 사회에서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콩에서 영국과 일본의 통치를 비교해서 소개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이번 회를 써 내려간다.

 

홍콩은 1842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다. 155년의 모든 기간을 영국이 지배한 건 아니다. 1941년 12월 25일 ~ 1945년 8월 15일, 3년 8개월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 홍콩인들은 155년 동안 영국과 일본 두 나라에게 식민을 경험한 셈이다. 

 

그런데 두 나라의 지배에 대한 홍콩인들의 스토리텔링은 ‘극명하게’ 다르다. 

 

 

일본의 지배와 영국의 복귀

 

일본 침략.jpg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며,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홍콩에서도 10여 개의 항일 지원 단체가 구성되었고,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과일야채 노점들이 자선 판매를 하기도하고, 귀향 복무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상하이, 난징, 우한 등이 속속 함락되고 대륙의 신문사들이 홍콩으로 와서 복간하면서, 홍콩은 중국 남부의 항일 중심지가 되었다.

 

1938년 9월 홍콩영국 정부는 중립을 선포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병사 파견, 무기 제공 등) 요청을 거절하고, 중국인 입법국 의원의 중국 재정 지원 제안도 부결시켰다. 홍콩적십자회의 파견 봉사도 금지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의 민족 정서를 고려하여 민간 차원의 지원만큼은 계속 허용했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고, 다음날 광동성과 홍콩의 경계에 있던 일본군이 홍콩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홍콩의 카이탁 공항을 폭격하고, 포병과 항공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신계로 들어왔다. 

 

25일 홍콩 총독 마크 에이치슨 영(Sir Mark Aitchison YOUNG)은 일본군사령부가 진주한 페닌슐라(Peninsula) 호텔로 가서 항복했다. 이로써 3년 8개월의 일본 통치가 시작되었다. 영국군 9천 명, 홍콩정부 공무원, 영국과 미국의 교민 등 3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일본군 컴온.PNG

영국군 항복 후 홍콩시내로 진입하는 일본군.

 

1943년엔 카이로 회담이 열렸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홍콩 반환을 요구했다. 그즈음 영국 정부 내에서도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세계 질서에 협조하는 이미지 관리 등을 이유로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쇼와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홍콩에선 중국과 영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서로 받겠다고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제 명실상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전후 세계에서 홍콩이 영국령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판단을 했다. 영국 정부도 결국 홍콩을 계속 지키는 것으로 결정했다. 처칠 수상은 내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가능할 것이라고까지 하며 홍콩 주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8월 24일, 마침내 중국은 홍콩에 대한 주권 회복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륙을 두고 마지막 승부를 겨루는 전쟁 중이라 홍콩을 두고 다툴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중국 국공내전이 시작되었고 그 여파로 많은 노동력과 자금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1948년 말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공산당은 홍콩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공산당이 파업을 선동해서 홍콩 경제를 마비시키고 혼란을 유도하여 홍콩을 회수할 명분으로 삼을까봐, 공산당이 운영하는 학교를 폐쇄하는 등의 대비를 했다. 

 

1949년 초에는 홍콩으로 엄청난 인구가 유입되었고 그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국경을 만들었다. 홍콩 시민이 아니면 중국으로의 출입경과 홍콩 내 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8월부터 홍콩 거주민 신분증을 발급했다. 

 

국공내전,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공군.jpg

베이징에 입성하는 중공군 (국공내전)

 

 

찬란하게 스토리텔링 된 영국의 지배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에 따르면, 일본 통치 시기에 시민들은 ‘공포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쌀, 설탕, 식용유, 소금 등 생필품은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다. 식량이 모자라 많은 시민들은 대륙으로 강제 이주될 정도였다. 

 

일본 통치 기간 3년 8개월 만에 홍콩의 인구가 1백 50만에서 60만으로 감소했다. 당시 화폐인 군표를 남발하였기에 통화 팽창으로 홍콩경제도 ‘반신불수’에 빠졌다. 

 

반면 ‘홍콩스토리’에서 영국 통치 시기는 언제나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포장된다. 일본과 영국의 통치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극단적인 편차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졸저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를 참조하기 바란다) 

 

홍콩역사박물관의 설명만 보면, 영국의 통치 시기는 모든 것이 완벽했던 것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정말 보잘 것 없던 농어촌에서 영국의 식민지로 변천”했다고 되어 있다. 총독 28명의 ‘치적’을 정리해 놓았는데, 치적만 등장할 뿐 그들의 실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영국 통치 시기의 상황에 대해 한 마디의 비판은커녕 오히려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이런 기록만 보면, 홍콩인들에게 영국은 구원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대 총독.jpg

홍콩역사박물관. 역대 홍콩 총독들. / 이미지 출처-티스토리<일상에 날개를 달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을 홍콩역사박물관과 홍콩해방(海防)박물관에서는 ‘중광(重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광복(光復)‘과 같은 뜻인 ’중광(重光)‘이라는 두 글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시 빛을 찾았다고? 아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조국’인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영국의 통치로 다시 돌아가는데 ‘중광’이라고 표현하다니.”

 

홍콩해방박물관에서는 영국 ‘통치’ 시기와 일본 ‘점령’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영국은 홍콩을 ‘통치한’ 것이고, 일본은 홍콩을 ‘점령한’ 것이라 한다. 박물관의 설명은 그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언론기사나 교과서의 스토리텔링도 마찬가지다. 

 

홍콩의 역사 인식을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생긴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이라고 마냥 좋지만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가 영국의 식민지배 시기보다 무조건 못 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홍콩인들의 의식을 보면, 영국의 지배에는 긍정을 마지못해 찬사를 보낸다.

 

이 부분에서 말하고 싶은 건, 역사도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것이다. 서술된 역사가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일본에 대한 평가는 중국과도 관련이 깊다 

 

제국주의 일본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한국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동남아시아까지)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근현대사에 있어 일본과 몇 번의 전쟁을 치른 중국은 일본과의 역사 서술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지금의 통치자인 중국공산당은 일본과의 전쟁으로 세력을 키워온 존재이기에 제국주의 일본을 끌어들일수록 자신의 존재와 당위가 부각된다. 

 

타자로서 일본의 존재는 중국공산당의 역사, 나아가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연히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는 홍콩역사박물관의 홍콩스토리는 물론, 홍콩의 교과서에서도 일본은 자주 활용되고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선양하는 영화를 ‘주선율’ 영화라고 하는데, 중국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지원하는 ‘주선율’ 영화나 드라마 대부분은 항일을 주제로 한다. 민족주의에 편승해서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한껏 뽐내고 국민의 지지를 쉽게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jpg

베이징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 걸린 대형 벽화. 중일전쟁 때 중국 항일부대와 일본군의 전투 장면을 담았다. / 이미지 출처-<한경DB>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방향과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 구성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나됨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는 타자이다.” 

 

타자가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다는 말은, ‘적’을 만들어야 ‘내’가 보인다는 말이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남’을 부정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란 것인데, 내가 비판하는 대상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우리가 비판하는 대상을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타자는 우리를 비추어주는 거울인 것이다. 영국 통치 시기에 영국은 중국인을 차별했고, 일본 통치 시기에 일본은 영국인을 차별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면, 민족주의는 적들의 피를 먹으면서 자란다. 한국 민족주의가 일본을 포함한 서구 제국주의의 결과물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콩(박물관이나 교과서 등)에서도 일본을 강력하게 ‘타자화’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영국에 비해 그렇다는 말이다. 

 

홍콩의 영국군이 일본군에 투항하고 2주 뒤인 1942년 1월 10일, 일본군 사령관은 홍콩의 중국인 지도자 130명을 식사에 초대하였다. 일본군 사령관은 중국인은 일본의 적이 아니라면서, 중국인은 일본인과 힘을 합쳐 ‘대동아공영’ 즉, 아시아 모든 민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자고 했다. 

 

일본군은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들에게 중국인을 향한 절하기를 시켰다. 또 인력거를 끄는 사람과 청소부들을 향한 절하기를 시켰다. 일본군이 홍콩에서 민족과 계급을 의식하면서 통치했다는 의미이다. (영국인에 비해 대우를 해줬다는 의미이지 홍콩인에 대한 핍박이 없었다는 건 아니다)

 

대동아공영권.PNG

▲1941년 12월, 도조 히데키의 명령으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에서 작성한 <대동아 공영권에서의 토지 처분안(大東亞共榮圈における土地処分案)> 문서에 나온 대동아공영권 구상 범위. 아메리카, 호주 일부와 인도까지 포함된다. 

 

당시의 관방 간행물은 연일 홍콩은 이미 “동아시아인의 홍콩”이 되었으며, 영국의 식민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일본이 동아시아라는 구호로 다른 식민 주체인 영국을 타자화한 것이다.

 

일본 통치 시기는 영국 통치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통치하는’ 이화제화(以華制華)가 기본이었다. 중국인 엘리트들을 전면에 내세운 ‘화민대표회(華民代表會)’와 ‘화민각계협의회(華民各界協議會)’를 통해 통치했다. (하지만 실권은 전혀 없는 자문기구에 불과했다고 스토리텔링 된다) 

 

일본 통치 시기에는 영국 통치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인들이 중앙행정기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중국인들에게 해명하고 설명했다.  

 

 

서구적인 시각과 중국적인 시각에 지배당하는 홍콩의 역사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일본 치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언론을 통해 일본이 만든 대동아공영권 개념에 찬동하면서, 영국 통치에 대한 불만을 적극적으로 토로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해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우리’를 배반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그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 것은 죄악이라고 ‘중화민족’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유격대의 일원으로 싸웠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떤 홍콩인들 특히 일본 유학을 경험한 중국인 지도자들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지못해 협조했다. ‘공포’와 ‘현실’이 소극적으로나마 협조를 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홍콩인들은 두 개의 중국인 대표 단체(화민대표회, 화민각계협의회)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할 수 없이 협조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두 단체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진 1944년부터는 회의에서 발언을 하지 않는 등 거의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홍콩역사박물관.png

홍콩역사박물관

 

홍콩역사학계는 주로 서구적인 시각과 중국적인 시각의 지배를 받고 있다. 홍콩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를 강조하는 재미 역사학자 차이룽팡(蔡榮芳)은 역사 서술 방식에 주목하고 있는데, 대다수의 역사책이, 

 

1. 일본군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2. 대동아공영권은 정치 선전에 불과하다는 것

3. 애국적인 홍콩인들이 일본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이런 점만이 부각될 경우, 역사의 다양한 환경 또한 두루뭉술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의도된 역사만 남게 된다.

 

차이룽팡은 일본 통치 당시의 홍콩인 모두를 일본의 ‘협력자’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차이룽팡은 일본에 대한 ‘협력자’를 세 종류로 나눈다. 

 

1. 당시 달리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득이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부류 - 대다수의 홍콩인

2.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인의 통치에 적극적이면서도 주동적으로 협력한 부류

3. 일본이 제창한 ‘아시아인의 아시아’ 개념에 진심으로 동조하면서, 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의 패권을 반대한 부류

 

차이룽팡은 ‘협력자’라는 범위만을 분석하였기에 저항 세력의 존재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 세 가지 부류에 해당하겠지만, 적극적으로 투쟁한 부류가 분명히 있었다. 우리의 독립군에 해당하는 동강(東江) 종대(縱隊)였다. 

 

사람은 다르다.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두뇌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두뇌의 작용에 따라 누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 상황을 절대 수용할 수 없고, 누구는 이도 저도 아닌 유체 이탈의 상태로 살아간다.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일본 통치 시기에도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주인이 누구로 바뀌든지 평소 살던 그대로 살고, 누구는 구관이 명관이라고 하면서 신관에 대한 저항의 길을 걷고, 누구는 모든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산다.  

 

역사는 상상을 허락하지 않지만 아주 매정하게 이렇게 상상해보면 어떨까? 일본의 통치기간(식량 사정과 경제 등이 좋지 않았다) 동안 홍콩인들이 잘 먹고 잘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서술되었을까?

 

 

바뀌는 통치자와 환경, 홍콩인의 실리주의를 강화하다

 

식민주의는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한국은 오래전에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과연 우리는 모든 나라, 모든 힘으로부터 해방되었을까.

 

1950 홍콩 구룡지역.png

1950년 홍콩 구룡지역.

 

홍콩은 일본의 통치를 받았지만, 전쟁 직후 중국대륙처럼 그러한 반일 감정은 없었고, 일본 상인들도 1940년대 말에 홍콩으로 다시 돌아올 정도로 분위기는 좋았다. 원래 식민지라는 입장이기에 다른 식민 경험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측면이 있다. 물론 전쟁 시기였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되었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통치받은 경험은 도리어 영국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마음을 만들었다. 전쟁 중이라는 점이 고려돼야 하겠지만, 일본 통치 시절은 이전의 영국 통치 시절보다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로 인해 많은 홍콩인들이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44년 홍콩의 저명한 중국인 의사는 런던에 가서 중국인 사회 상층부는 모두 영국의 통치를 희망한다고 유세하기도 했다. 

 

되돌아온 홍콩영국 정부는 일본에 협조했던 홍콩인과 외국인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하게 처리했다. 인도인 경찰과 간수들은 인도로 송환했지만, 다른 경찰들은 상당히 많은 인원을 계속 임용했다. 중국인 엘리트들은 구분해서 처리했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사들은 정계와 사교계에서 퇴출했고, 소극적으로 일한 사람들은 다시 기용했다.  

 

일본이 제창한 아시아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중국인으로서 홍콩인들의 민족의식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홍콩영국 정부로서는 통치 스타일을 바꾸어야 했다. 

 

1946년에는 홍콩 재건 건설 프로젝트를 모두 홍콩(중국)인 상인들이 수주했다. 1948년에는 홍콩(중국)인을 처음으로 수석 정무관으로 임명했다. 1951년에는 입법국 의석 중 홍콩인수가 영국인을 초월했다. 또 ‘인종차별법’ 즉, 외국인만 빅토리아산 정상과 장주도에 거주할 수 있는 법률을 폐지했다. 

 

빅토리아 산 정상.jpg

빅토리아산 정상 전망대.

 

차이룽팡은 일본 식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홍콩인들의 정서가 유예, 동요, 의혹, 기대를 보여주었는데, “홍콩인이 자신의 이익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의 통치를 경험하고 난 이후, 홍콩인들의 정체성은 더욱 복잡해졌다. 

 

영국의 통치하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이 일본의 통치하에서는 갑자기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영국 통치 시기에 고생하던 사람이 일본의 통치 시기에는 ‘떵떵거리면서’ 사는 장면에 홍콩인들의 두뇌는 혼란스러워졌다. 

 

이런 역사 경험은 각자의 두뇌(유전자)에 각인되는데, 누구는 명분(낭만적)적인 입장이, 누구는 실리(현실적)적인 입장이 강화된다. 특히 ‘이중’의 식민지 경험 때문에 ‘명분’보다는 이놈 저놈 겪어보니 그래도 믿을 것은 ‘실리’밖에 없더라는 신념이 사회적 권위를 얻게 된다.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는 이렇게 ‘실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문화대혁명과 홍콩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