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지도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존경할 만한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해온 것 같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그랬고 그 뒤를 잇는 김대중에게도 그랬다. 독립운동, 시간이 지나 민주화운동의 유무는 지도자로서의 삶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여기에 하나 덧붙여지는 것이 있다면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아는 인간적인 매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학력이나 학벌은 역사와 민중, 그리고 삶에 대한 태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재야의 리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랑할 만한 학력과 학벌을 가진 이들이 국민이 선출한 리더를 우습게 보는 이유다.
해방정국과 두 번의 쿠데타를 거치면서 우리는 강력하고 영웅적인 리더를 주문해왔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상이 대세였다. 대중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에게 권력을 쥐여줄 테니 제발 우리는 관심을 끄고 격양가를 부르며 살 수 있게 해달라 읍소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민주주의 사회에 어떤 리더십이 적합한가 학습하는 중이고 리더십에 대한 질문을 품게 만든 공신들은 단연 노무현과 문재인이다.
노무현의 유산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대통령의 권력을 민주적으로 창출하는 데에만 관심 있었지 대통령의 권한을 어떤 사람에게 맡길 것인가,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대통령에게 시민들은 무엇을 주문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빈한했다. 뽑아만 주면 다 알아서 하겠지, 혹은 정치는 당신들에게 맡기고 나는 일상에 충실한 사람으로 돌아가겠다, 이런 태도였다. 말로만 민주주의를 외쳤지 일종의 과두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교훈은, 민주주의는 한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것과 선출 권력에게 맡겨두는 것만큼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기후 위기, 게다가 팬데믹까지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에 놓인 지금 시기, 우리는 어떤 리더를 원하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학식과 통찰력에 탄복한 전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노무현은 국내에서는 잡놈 취급을 받았지만 적어도 밖에서는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는 수평적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그리고 인품으로 흠잡힐 데 없어 모두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민주주의자 문재인을 거쳐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를 요구받고 있다. 지도자가 꼭 ‘존경’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질문도 하게 된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수직적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 발전에 고스란히 제물로 바친 인물이다. 많은 이들이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칭하는 이유다. 하지만 노무현은 권위를 거부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첫 번째 지도자다. 지도자는 저 위 발코니에 서서 명령하고 지휘하고 손 흔드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눈높이에서 고민하고 기뻐하고 때로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에 두지 말고 제발 수평적인 눈높이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보아달라며 끊임없이 의견을 묻고 구하고 연구해서 알려달라고 피드백을 강요했다. 다 알아서 하라고 뽑아놨는데 뭘 자꾸 성가시게 묻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국민에게 '네 알겠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다 알아서 합지요' 하지 않았다. 그게 당신들의 역할이고 의무가 아니냐 왜 나에게만 다 맡겨놓고 책임을 방기하느냐 오히려 큰소리쳤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설파하며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라고 채근했다.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탄핵정국에서 촛불시민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판단하면 된다는 것, 내 판단과 결정이 곧 권력이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젠 몇 번의 집회나 시위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지지선언하고 거리에서 구호 외치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던 시대는 갔다. 민주주의는 소위 ‘명망가’들이 만드는 게 아니라 수많은 ‘나’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 각자 누가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부단한 학습을 통해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인지 나름대로의 기준과 눈높이를 가졌고 상황을 객관적 비판적으로 보는 눈을 키워왔다. 후진적인 한국 정치, 무능한 정치인, 부패한 엘리트 집단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수준 높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를 방증한다. 이것이 노무현이 남기고 간 유산이다.
진화된 노무현들
이제야 비로소, 10년 보수정부를 몰아내고 문재인이 닦아놓은 국가기강의 토대 위에 시민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역할을 나누는 진화된 노무현식 정치를 할 수 있는 때가 왔다. 의회권력과 한층 성숙해진 시민의식, 노무현 때는 없었던 다양한 대안적 매체가 우리가 가진 강력한 힘이다.
언론 지형이 기울었다고 한탄하지만 이는 노무현 때도 똑같았다. 지금은 부족하나마 우리의 스피커를 갖고 있으며 스스로 언론이 되고 발화자가 되며 전령들이 된다는 것, 그때에 비하면 엄청난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론 카르텔의 마타도어 총공세에도 문재인 지지율이 고정적인 이유이고 이재명의 도덕성 논란이 사위어가는 힘이다.
노무현은 시민들과 소통하고 싶어 했고 소통하는 방법을 알았던 리더였다. 소통 수단의 부재로 답답해하던 그는 실시간으로 쌍방 소통하는 이 시대를 미리 내다보았다. 늘 시민과 함께 하려 했으나 그렇지 못해서 성공하지 못한 노무현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 것은 그가 확충하고 간 IT 인프라 덕분이다. 노무현은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어쩌면 비로소 새 시대를 열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시민의 요구를 이행할 수평적 리더십, 수직적 존경이 아니라 수평적인 연대를 통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대리인으로서, 일머리를 갖추고 문제해결능력, 실행 능력까지 갖춘 실무자로서 리더의 자격을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을 노무현에 비유하면 화를 내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그것이 오히려 노무현을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은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이 실력을 키워 끊임없이 진보하고 성장할 것을 주문했다. 그것이 자신을 버리라 한 이유이고 밟고 가라는 의미이다. 국민의 수준에 맞는 국가지도자를 얻는 법이고 지지자의 수준에 맞는 리더가 키워지는 법이다. 노무현이든 문재인이든 그들을 신격화하고 절대시 하는 것은 민주주의자 답지 못한 태도이다. 이것은 이낙연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는 문재인과 공과과를 함께 나누어야 할 동료들이고 이는 다음 시대의 리더가 될 이재명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왜 이재명을 지지하는가
"민중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파멸시켜버려야 한다. 무릇 인간이란 작은 모욕에는 반격하지만 크게 짓밟히면 반격할 엄두를 못 낸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문제의식이다. ‘민중’을 ‘기득권’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동의하게 된다. 그는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통치술과 군사력, 판단력, 자유의지를 꼽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두 번째 덕목인 분별 있는 잔인함, 신중한 잔혹함을 요구하는 판단력이다. 문재인에게 없지만 이재명은 갖고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덕목이 바로 이것이며 기득권 카르텔이 이재명을 악마화해 온 이유다. 싸움판에서 초월한 위치에 있는 듯 지켜만 보다 겨우 협치하라 한 마디 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링 위에 선수로 올라가 손에 흙과 피를 묻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책임감, 의무감, 도덕성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지도자도 불완전한 존재이며 모든 면에서 완전하게 도덕적일 수도 없을 뿐더러 청렴할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적어도 암묵적으로 합의된 정도의 도덕성이란 늘 있게 마련이니 그 정도의 기준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그렇다고 하늘에 사죄하라고 요구하는 전근대적인 신민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 외교무대에서 대통령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영부인 역할에 대한 천박한 인식을 드러내는 사람들, 국민을 피지배계층으로 보고 대통령을 아직도 권위주의 시대 리더십의 인식에서 한 발짝도 걸어 나오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세력들은 마키아벨리식으로 말하면 잔혹하게 쓸어버려야 하는 적폐들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손해 보는 법이다. 하지만 사랑이 저울질하여 반반 분담하는 것이 아니듯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망이 큰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것임을 잘 알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저들이 솔솔 피워올리는 정치 무관심과 정치혐오에 빠지는 것은 저들의 이익에 내 삶을 갖다 바치는 것이며 내 삶의 개선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본 이재명은 협상할 뿐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이들에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것이 분별 있는 잔혹함으로 비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더로서 필요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시민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유권자라는 이유로 굽신거리는 리더는 이 시대에 맞지 않다. 때로는 계몽군주로서 때로는 자애롭고 포용력 있는 리더로, 때로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기회주의적 실용주의자가 될 수 있어야 하며 반사회적, 반민족적 행위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고 잔혹한 면모를 보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대다.
또 하나 그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정치를 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체득한 원하는 세상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하는 인물이다. 이것이 기득권과 비타협적으로, 오히려 그들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전략적 사고를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많은 진보인사들이, 가깝게는 신지예가 금을 넘어간 것은 한심한 일이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들은 운동을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성폭력 피해 여성을 위해 일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쉽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데도 고마워하지도 않고 알아봐주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억울한 것이다. 정통 좌파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칭 B급 좌파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조국이나 추미애를 위해서, 이재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보다 성숙한 사회에서 시민권을 행사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 아픈 사람들을 좀 덜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이재명을 선택한 것이니 이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인 것이다.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대리인으로 내세운 리더, 세상을 머리나 명분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득한 리더, 시민과 함께 호흡하는 것의 막강한 힘을 아는 리더, 노무현이 꿈꿨던 수평적 정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이름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노재명, 그래서 나는 이재명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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