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올해도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여느 해도 그랬겠지만, 정리하고 보니 만남이 좋은 것만도 아니고 헤어짐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모든 일은 좋고 나쁨이 있는 것 같다. 동전의 양면처럼.

 

하지만 그것은 지금의 좋고 나쁨일 뿐, 나중에도 그 좋고 나쁨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을 그냥 살아간다.

 

그 시간이 행복하길 바란다. 나에게도, 나와 함께하는 이들과 나와 헤어진 이들에게도.

 

안녕.PNG

 

 

딴지로부터 떨어진 협박 숙제

 

2021년이 이제 며칠 안 남았다. 세상에.

 

세월이 빠르다는 어른들 얘기, 나 역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보니 그거 정말이었다. 혈기는 왕성한데 일 년은 달팽이처럼 지나가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맞이하는 연말에는 괜스레 마음이 설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긴 했다. 아마도 한 살 더 먹고 진짜 어른이 되고 싶었던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나쁜 일은 모두 묵은해와 함께 세월 너머로 흘려보내고, 새롭고 좋은 것으로 가득 찬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나름 진지한 각오를 다지곤 했다. 1월 1일이 되면 동해 바다로, 정동진으로. 하다못해 동네 뒷산으로라도 새벽같이 달려가 나의 새해 각오가 얼마나 단단한지 증명하려 애쓰곤 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라졌다. 지인들과 습관처럼 신년 인사를 주고받아도, 정작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어쩐 일인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심드렁하고 허전하다. 어른(진짜 어른이 되었는지는 확신이 잘 서지 않는다), 아니 생활인이 되어보니 그저 명절 쇠다 1년 다 보내고 하릴없이 나이만 먹은 느낌이다. 

 

설 → 어린이날+어버이날 → 여름휴가 → 한가위 → 연말. 

 

1년 동안의 주요 이벤트가 대략 이런 사이클로 돌아간다. 사이사이 끼어있는 생일, 결혼식, 초상, 돌잔치 등 다양한 경조사까지 지내다 보면 정말이지, 1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지나가도 되나 싶은 정도다. 먹고 살기 위해 내가 뭘 했었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해냈는지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은 채 한 해가 가버리고, 툭하면 연말이 돌아온다.

 

난 생활인으로서, 2021년 연말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한 살 나이만 먹고 말았다는 자괴감을 부여잡은 채 다른 감흥 없이 덤덤하고 조용히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딴지로부터 협박이 숙제가 떨어졌다. 생활인으로서 올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결산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응?  

 

연말결산이라니.jpeg

 

나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지난 시간이 불만스럽고 후회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굳이 지난 일을 다시 들춰내어 마음 아프게 반성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스스로 반성을 해야 하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난 일은 잘 덮어 버리고 가는 편이 더 좋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그런데 숙제를 받아들고 나니 올해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랐다. 올 한 해 동안 만나고 헤어진 많은 인연이 생각났다. 즐겁고 행복한 만남도 있었고, 무겁고 괴로운 만남도 있었다. 가슴 아프고 슬픈 헤어짐도 있었고, 가벼운 헤어짐도 있었다.

 

 

뒷골목 출신 고양이와 만남

 

2020년 12월 31일. 날짜만 보면 작년 같지만, 이 사건으로 올해를 열어재꼈으므로 올해 일이라 친다. 

 

이미 고양이가 세 마리나 있던 우리 집에 네 번째 고양이가 들어오는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번 호구 잡히면 고양이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다던데, 그게 진짜인지도 모르겠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2020년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 앉아 있던 나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간 큰 아이에게 전화를 좀 해보고 웬만하면 가보라는 것이었다. 친구 만나러 학교 앞에 간 우리 애가 고양이에게 잡혀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이상한 소리였다. 혹여, 학교 근처에 고양이라는 별명의 불량배에게 잡힌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급히 학교로 달려갔다. 글자 그대로 ‘고양이에게 잡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큰 애를 만났다.

 

털 상태도 푸석푸석하고 꼬질꼬질한 데다가 꼬리도 어디서 다쳤는지 절반 정도만 남아있는 것이 누가 봐도 길고양이였다. 우리 애가 한 걸음 떼면 녀석은 쪼르르 앞으로 달려가서 털썩 드러눕고, 또 한 걸음 떼면 또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털썩 드러눕기를 반복하며 우리 애를 못 가게 잡고 있었다. 

 

하는 짓만 봐도, 드러누워 쳐다보는 간절한 눈빛만 봐도 “나 춥고 힘들어. 죽을지도 몰라. 그러니 얼른 데려가서 키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새 식구를 들이는 중차대한 일을 그냥 그렇게 덜컥 결정할 수는 없었다. 

 

혹여 전염병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데려갔다가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부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운이 좋아 건강하다 해도 집에 있는 고양이들과 합사에 실패하면 어쩌나…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아내가 나에게 가보라고 한 것은 분명 상황을 ‘잘 수습’하고 돌아오라는 뜻이었다. 그 ‘잘 수습’한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두뇌풀가동.jpg

두뇌를 풀가동해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 날 따라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다. 영하 17도로 최저 기온을 찍은 날이었다. 

 

그 추위에 그냥 그 고양이 두고 가자니,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쁘게 보이려고 필사적으로 바닥에 머리를 비비며 구르는 못생긴 고양이가 안쓰러웠다. 

 

“너무 추워서… 혹시 죽을까봐 걱정돼.”

 

아이의 말이 무겁게 들려왔다.

 

“너 우리랑 갈래?”

 

차 문을 열며 고양이에게 물었더니, 이 못생긴 녀석, 잠시 망설이다 폴짝 올라타는 것 아닌가. 한참을 냄새 맡고 살피더니 자동차 시트에 얼굴을 묻고 코를 골았다. 이제 지 팔자 필거라 확신한게 틀림없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고양이 데려간다고. 

 

아내는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크기는 얼마난지, 성별은 무엇인지, 나이는 얼마나 된 것 같은지, 털색은 어떤지 등등 고양이의 인상착의를 자꾸 물었다.

 

동물병원에 먼저 들러 진찰을 받았다. 나이는 한 살에서 두 살 사이로 추정되며, 다행스럽게도 귓속에 진드기 말고는 별다른 전염병 없이 건강하다고 했다. 다른 고양이들의 눈을 피해 따로 방에 격리하고 며칠을 지냈다. 진드기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갈 때만 잠깐씩 고양이들에게 보여줬다.

 

IMG_4091.jpg

이 녀석이다.

 

 

녀석, 새로운 식구가 되다

 

진드기 치료를 마치는 날, 고양이를 어떻게 할거냐고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어떻게 하다뇨? 키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나요?”

 

의사 선생님 얼굴이 확 펴졌다.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칭찬하시며 중성화 수술할 때 대폭 할인해주시겠다고 했다. 

 

큰 아이에게 너도 동물 좋아하니 커서 수의사가 되보는 것은 어떻겠냐고도 했다. 그리고는 동물 등록제가 입법되어 이 녀석을 꼭 등록을 해야한다며 칩에 내 전화번호를 등록하고 고양이 목덜미에 삽입했다. 고양이의 이름은 달봉이가 되었고, 그렇게 나는 이 녀석의 공식적인 보호자가 되었다. 

 

달봉이의 중성화 수술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남달리 우람하던 이 녀석의 부라리가 사실은 뱃속에 잠복해있는 ‘잠복고환’인 것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개복 수술이라 일반적인 수컷의 중성화 수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더 크기도 했지만, 잠복고환이 예상 밖의 장소에 있어 더 어려운 수술이었다. 상처가 커서 실밥을 푸는데까지 꼬박 두 달을 병원을 다녀야 했다. 

 

한동안 수술 부위에 털이 자라지 않아 걱정했는데, 올 가을 쯤 되자 배에 다시 털이 자라났다. 이제는 회복도 완전하게 되었고 다른 고양이들 틈에 끼어서 잘 지내고 있다. 

 

다른 고양이들에게 냥냥펀치를 얻어맞으면서도 엄청 귀찮게 치댄다. 후퇴는 없다. 뒷골목 출신 답게 파이팅이 넘친다. 먹을 거라면 간식이든 사료든 새우깡이든 쥐포든 그 무엇도 마다않고 열심히 먹어치운다. 

 

그렇게 난, 어깨 위에 또 한마리 고양이를 건사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고양이를 구조했다는 생각은 일방적인 나의 편견이자 착각이었다. 달봉이는 원하는 것을 얻기위해 얼마나 필사적이어야 하는지를 온 몸으로 가르쳐줬다. 설령 그것이 커다란 도박이었다하더라도 달라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IMG_6534.JPG

달봉이의 개인기. 이불 덮고 드러눕기다. 

녀석, 뒷골목 출신이라 그런가 눈매에 깡다구가 보인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달봉이와 함께 하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 가족은 달봉이의 엉뚱한 행동에 웃었고, 녀석의 조금씩 고와지는 털을 쓰다듬으며 사랑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다 주는지 목격했다. 

 

난, 길고양이를 건사한 것이 아니라 새 식구를 맞이한 것이었다.

 

 

중년에 만난 병, 약, 그리고 안경 

 

오십줄에 들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나도 늙는구나 하는 것이다.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과연 그런 적이 있기는 했던가 싶을 만큼 가물가물한 옛 일이 되어버렸고, 팔다리는 늘 뻐근, 튼튼하다고 자부했던 허리 마저도 고장이 났는지 수시로 쑤신다. 

 

원래 그다지 건강한 몸뚱아리는 아니었다. 겉은 돌도 소화시킬 것 처럼 우락부락해도 속은 한없이 여리고 민감하다. 일찌감치 찾아온 알러지성 비염은 이제 천식으로 업그레이드 되었고, 심혈관계 질환의 상징인 혈압도 꾸준히 상승, 이제 매일 약을 먹으며 다스려야 할 정도가 됐다.

 

그리고 올해,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통풍을 만나면서 드디어(?) 지병 3관왕을 달성했다.

 

통풍.PNG

 

처음에는 족저근막염인가 싶게 발 뒤꿈치와 아킬레스 건이 뻐근하게 아픈 증상이 수시로 생기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도저히 견디기 힘든-마치 관절의 뼈와 뼈 사이에 긴 쇠꼬챙이를 꽂고 휘휘 젓는 느낌의- 통증이 밀려왔다. 그 길로 병원에 달려가 통풍 진단을 받고, 매일 먹는 약을 또 하나 늘렸다. 

 

이제 요산수치가 꽤 떨어졌는데도 처음 만난 통증의 공포 때문인지, 먹는 것, 마시는 것 모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알콜 뿐 아니라 그렇게 좋아하던 탄산음료와도 작별했다. 

 

또 한가지, 올해 난생 처음으로 안경이라는 것을 만났다.

 

어려서부터 꽤나 좋은 시력을 유지해온 나는 그동안 한번도 안경을 쓴 적이 없었다. 여전히 평소 시력은 좋은 편이다. 그런데 조금씩 작은 글씨들이 잘 보이지 않더니, 이제는 책을 읽거나 모니터를 볼 때에는 꼭 돋보기 안경을 써야만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눈이 나빠지는 것이, 그래서 안경을 써야 뭔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한 일인줄 몰랐다. 

 

돋보기.PNG

 

충전기에 빼곡하게 쓰여있는 전압과 전류랑 사양표기가 잘 안보인지는 꽤 됐지만, 휴대폰 글씨 크기를 최대한으로 키워놓아도 돋보기 안경없이는 잘 안보인다. 운전을 하다가 혹시 문자메시지라도 오면, 안경 없이는 초점이 맞지 않아 절대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운전을 하려면 돋보기 안경을 꼭 벗어야 한다) 

 

24인치 모니터에도 빼곡한 엑셀 파일이 열리면 꼭 안경을 써야 숫자들이 확인 가능하다.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겠다고 스마트워치를 샀지만, 도대체 글씨가 보이질 않으니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찬 기분이다.

 

서글프게도 선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눈의 노화는 이것이 시작일 뿐이라고 한다. 눈의 노화와 함께 망막세포수도 감소하기 때문에, 고해상도 모니터를 봐도 화질이 향상된 것을 느끼기 어렵다고 한다. 억지로라도 좋게 생각하자면 모니터에 많은 투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지만, 진짜 억지다. 

 

눈의 노화는 일상생활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일임에 틀림없다.    

 

눈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다른 지병들은 고치고 싶었다. 매달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약에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고장나고 아파져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는 것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싫고 화가 났다. 왜 어른들이 그렇게 건강식품에 관심을 가졌는지 이제 이해가 200% 된다.

 

병원에 갈 일이 없던 예전엔 건강보험이 무척 쓸데없는 지출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가장 필요하고 고마운 제도를 꼽으라면 단연코 ‘건강보험’을 꼽을 것이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건강해져서 건강보험 신세 안지고 싶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지는 만큼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의가 더 쉽게 흐트러진다. 선천적으로 건강한 슈퍼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은 나에게 더 열심히 움직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뭐, 어쩌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참고로 나의 투병기는 이 기사를 참고하시면 되겠다. 50대 아저씨의 노화 견문록: 비염, 통풍, 천식, 고혈압 기사 링크)

 

만남과 사랑할 때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좋은 점을 꼽자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나도 덩달아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묘한 착각에 취하기도 한다. 삶의 질 측면에서만 보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즐거움이라 하겠다.

 

여러가지 일을 하며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을 만들면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곱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작가든, 독자든, 서점이든, 그리고 다른 출판사의 사람들이든 다들 그랬다. 

 

고운 글과 그림을 그리는 것이 혹, 도를 닦는 과정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사려깊고 순수했다. 그들의 열정은 왜 작가의 길을 선택했는지 충분히 설명해줄 만큼 뜨거웠다. 덕분에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나도 많은 것을 배운다. 작가와 작품을 아끼고 응원해주는 독자들도 열정적이면서도 너그러웠다. 

 

올해 철학 그림책 <바본가>를 작업한 김형준 작가님이 며칠 전 꿈에 나왔다. 지인들이 꿈에 나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기에 근황이 궁금해 안부 문자를 보냈다. 

 

F0468F09-1967-4C9C-B61D-43ACFB8C733E.jpg

 

김형준.jpg

출처-유튜브<이야기 곳간, 월천상회> 링크

 

잘 지내고 있다고 하시며 올 해 나를 만나 함께 한 것이 무척 기쁘고 고마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연말 인사로 나누는 덕담일 수도 있겠지만, 작가님의 문자가 마음에 남았다. 나도 올해 그와 만나게 된 것이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바본가>를 통해 김형준 작가를 만났지만, 그를 통해 또 니체를 만나고 철학을 만났다. 무지렁쟁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내가, 사유의 즐거움이란 것을 어렴풋이나마 맛보고,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며 알아가는 희열을 느낀다. 작가를 만나고 작품을 만나 시야가 넓어지고 세상이 달라지니, 그 인연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친하게 지내는 한 선배 출판사 대표님이 그랬다. ‘책 만드는 사람들은 다 꼭 안아주고 싶을만큼 예쁘고 안타깝다’고. 열심히 책을 만드는 것이 예쁘고 그럼에도 돈을 별로 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열심히 책을 만드는 것이 예뻐보인다는 그분의 이야기가 난 무척 따뜻하게 들렸다. 

 

다른 점을 찾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굳이 공통점을 찾아내서 ‘우리는 한 배를 타고 같이 가는 사람들이잖아’라며 끌어안아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쓰고보니 본의아니게 책광고네?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필진은 책 광고 해도 된다고 했으니 아름다운 전통에 따라 불만은 딴지 편집부로 접수해주시면 좋겠다.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이별과 아파할 때

 

가깝게 지냈던 한 친구를 떠나 보내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집 안의 전폭적 지원을 업고 외국 유학 길에 올라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친구였다. 가족들을 모두 미국에 두고 혼자 돌아와 기러기 아빠가 된지 여러 해, 외롭지 않냐는 물음에 ‘그러니까 놀아달라’며 싱글대던 속 좋은 친구였다. 그와 나는 같은 취미를 가진 것 만으로 묘한 동질감을 가졌고, 가끔 만나 함께 밥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  

 

그런데 그 친구, 한마디 인사도 없이 훌쩍 먼길을 떠나버렸다.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 못했다. 해답을 찾으려 한참 동안 기억을 더듬고 주고 받았던 대화를 복기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갑작스런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보내주는 일과 명복을 빌어주는 일 뿐이었다. 

 

다른 이별도 있었다.

 

그림책 <정육점 엄마>의 주인공 ‘정육점 엄마’와의 이별이다. <정육점 엄마>는 이제 어른이 된 작가의 마음에 남아있는 엄마의 투박한 사랑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IMG_7259.JPG

 

작가는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아주 오래 전 있었던 엄마와의 이야기를 꺼내어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했다. 엄마 덕분에 생긴 ‘정육점집 딸’이라는 타이틀을 창피해했던 어린 시절에 괜시리 가시돋친 말만 골라 뱉으며 엄마 가슴을 할퀴고 멍들게 했던 철없던 시간을 고백하고, 엄마에게 사과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어른이 된 딸은 이 그림책을 통해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식만을 위해 애써왔던 엄마를 최선을 다해 위로하고 안아주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자랑스러운 엄마를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싶다고 했다.

 

이 책을 작업하며 오래 전 헤어진 우리 엄마가 생각났다. 작가님의 작업실을 방문하며 ‘정육점 엄마’와 마주치기도 했는데, 책 내용 때문인지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마음이 쓰였다. 엄마와 헤어질 때의 나에게도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난 우리 엄마를 어떻게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지 뒤돌아봤다.  

 

올 여름, ’정육점 엄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리고 그림책 <정육점 엄마>가 세상에 나왔다. 정육점 엄마와 작가님의 이별을 곁에서 지켜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육점 엄마’의 빈소에 꽃을 바치는 것 뿐이었다. 

 

헌화.png

 

책에 헌사를 쓰고, 몇 달 동안 나도 앓았다.

 

모든 것은 때가 있나보다. 

 

삶의 마지막 페이지가 죽음이라 불리는 헤어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제 나도 조금씩 누군가의 마지막 페이지를 마주치게 되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나에게도 그 때가 올 것이다. 언젠가 마주칠 마지막 페이지를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체념의 순간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진정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 설레는 소풍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고 싶다. 그리움을 가슴에 묻은 우리에겐 그 기대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테니 말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 열심히 살란다

 

2021년, 만남과 헤어짐 속에, 웃음과 눈물 속에, 한 살을 더 먹었고 딱 그 만큼 앞으로 나아갔다. 

 

예상했던대로, 정리하고 보니 역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분명, 희노애락이 거의 같은 비율로 얽히고 섥혔을텐데, 돌아보면 무거운 기억이 더 선명해지는 것은 왜일까. 역시, 지난 일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하지 않는게 개인의 정신건강에는 이로운 것 같다. 

 

장담하는데 2022년에도 또 다른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수많은 웃음과 눈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냥 열심히 살고 뒤돌아 보지 말아야겠다. 오늘 당장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는게 이기는 거다.

 

우리, 이렇게 같이 늙어간다. 

 

추신: 이 시기, 딴지엔 정치, 사회 등 주요 결산을 하는 분들이 많고 다들 한창 바쁠 터이다. 이 와중에 50대 생활인의 결산(?)을 요구하는 딴지 편집부의 변태적 행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성격상 무척 부끄럽기도 하다. 독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부디 행복해지시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