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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건강한 거 아니였어?   

꽤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어마어마한 폐활량과 근육을 가진 슈퍼특급 몸뚱어리는 아니지만, 웬만큼은 달릴 수 있고 힘도 쓸 수 있으며 내 몸 하나는 잘 건사하고 버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운동하는남자_Photo by Gabin Vallet on Unsplash.jpg

 

친구들이 모였다 하면 이야기가 기-승-전-건강으로 돌아가는 술자리 화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 들어보니 어디가 아프다는 둥, 어디 아픈 데에는 뭐가 최고라는 둥 벌써 앞다투어 늙은이 소리를 내는가 싶어 영 마땅치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아직 할만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아직 젊고 건강하다고, 그러니 앓는 소리 말고 활기차게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같지는 않더라도, 아직 나의 몸 상태는 적어도 그때의 7~80%는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고기 2~3인분은 여전히 뚝딱 해치울 수 있을 만큼 식욕도 왕성하고 소화능력도 좋았다. 아니, 당연히 그렇다고 여겨왔다. 

 

어려서부터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다. 나이가 들면서도 수영과 스케이트, 태권도, 테니스, 인라인, 스노보드 등등 돈 들여서 정식으로 취미 삼아 즐겼던 스포츠들도 꽤 있었다. 덤벨을 손에 쥐어 본 것이 백만 년쯤 되었지만 여전히 팔뚝에는 알통이 수줍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4~5킬로미터 정도는 (천천히) 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인라인 마라톤이나 단축 마라톤에도 참가하고 낙오 없이 완주도 했었다. 어쩌다 주말이면 배낭 메고 등산도 해보았고,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달려보기도 했다.

 

하지 말라는 나쁜 짓 - 예를 들면 음주나 흡연 같은 - 도 거의 하지 않았다. 술은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가 잘하지도 못한다. 어쩌다 술자리가 있을 때 한두 잔 분위기를 맞추는 정도가 다였다. 간혹 술 못한다는 말을 못 믿고 강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날 먹은 것을 기어이 몽땅 확인시켜줄 때까지 마신 적도 있긴 하지만, 워낙 술을 안 받아주는 체질이라, 그 양은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미세했다. 다만, 흡연은 좀 했다. 술로는 못 버텨도, 중간중간 사람들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에 낄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고 뭔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특권같이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지 모를 죄책감에 줄곧 줄이려 노력했고, 몇 년간 끊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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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도 그렇게 얘기했다. 외모만 보면 돌도 소화하고, 소도 때려잡을 것 같다고 했다. 대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체육 특기생이냐고 오해 받았다. 사회에서는 체대 출신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도 받았다. 말할 수 없는 사연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다니면서는 강하고 혈기 왕성한 건강 개체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훨씬 심해졌다. 사람들의 이런 평가에 어느새 나도 동화되어, 나 자신을 며칠 밤을 새도 괜찮을 만큼, 그리고 언제라도 마라톤을 뛸 수 있을 만큼 건강하다고 믿게 됐다.

 

# 육아와 운동의 상관 관계 

그나마 하던 운동에 담을 쌓기 시작했던 것은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아이를 돌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내를 두고 차마 ‘운동하러 다녀올게’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혼자 둬도 괜찮을 만큼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나면 아내랑 함께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핑계 김에 집안에서 늘어져 게으름 부리는 것이 더 달콤한 일상이 되었다.

 

배가 좀 나오게 됐고 체중이 불었다. 파도에 모래가 쓸려나가듯 아주 조금씩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휴일이면 몸은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웠고 피로감에 잠이 쏟아졌다. 애 키우면서 몸이 날아갈 것 같을 리는 당연히 없을 테니, 애 키우는 사람이 피로한 것은 당연하다 생각했다. 배 좀 나온 것이야 뭐, 운동 조금 하면 다시 원상 복귀할 것이라 생각했다.

 

첫째가 좀 컸으니, 슬슬 운동도 시작하고 활동 영역을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 일은 원래 마음 먹은 대로 안되게 되어있다. 다섯 살 터울로 둘째가 생겼다. 다시 9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쳤다. 갓난아기를 젖먹이고 기저귀 갈며 키우는 육아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유치원에 가는 첫째와 갓 태어난 둘째를 동시에 보살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난도 육아로 접어들었다. 아내와 함께 운동하는 시간은 다시 몇 년 뒤로 자동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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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죽을 것만 같던 첫째 때의 육아는 정녕 순한 맛이었다. 아이를 안아주고, 놀이터에 나가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나는 여전히 힘이 세고 튼튼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일 뿐이었다. 아이를 안아 올리며 용을 쓰고, 아이와 뛰면서 헉헉대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운동을 안 한 지 시간이 좀 지나 체력이 떨어졌나 보구나. 얼른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자신을 위로했다. 

 

아시다시피 운동이라는 것은 발전소 돌리는 일 같아서, 한 번 멈춘 것을 다시 돌리려면 꽤 많은 에너지와 의지가 필요하다. 탄력이 붙어 습관이 되기 전에는 쉽게 지치고 하기 싫어진다. 저질이 되어버린 체력이 몸과 마음의 발목을 잡는다. 그걸 물리치고 꾸역꾸역 운동을 시작해도 몸의 변화는 요원하고 침대의 달콤함은 매 순간 우리를 유혹한다. 그제야 내 몸도 예전처럼 어찌해보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 눈이 간다, 물론 피부도 함께 간다 

나이는 눈에서 가장 먼저 느껴졌다. 안경도 쓰지 않고 언제나 1.5, 1.5의 건강한 시력을 자랑하던 눈이 점점 어두워졌다. 시야가 뿌옇고 흐리게 보이는 날이 많아져서 눈을 자주 비볐다. 바늘에 실 꿰는 일쯤은 언제나 가능한 정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휴대전화 어댑터의 글씨가 안보였다. 모니터의 글씨도 잘 안 보였다. 왜 어른들이 눈이 어두워진다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야가 침침해서 자꾸 불을 켰다. 

 

눈이 나빠지는 속도는 서서히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갑작스럽고 급격했다. 휴대전화 화면의 글자 크기는 최대로 키웠다. 어느새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독서용 돋보기를 맞췄다. 선배 형은 눈이 나빠져서 좋은 점도 있다며 신소리를 했다. 레티나네, 4K네 하면서 모니터는 고해상도 경쟁을 하지만 받아들이는 망막이 낡은 탓인지 정녕 저해상도 모니터도 크게 개의치 않게 되더란다. 함께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두 번째, 나이가 드니 상처가 늦게 아문다. 어렸을 때보다 몸에 상처를 입는 빈도는 낮아지긴 했는데, 어쩌다 한 번 상처가 생기기라도 하면 그게 아무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상처에 약 안 발라도 금방 아물었는데, 이제는 꼬박꼬박 소독하고 연고 바르고 밴드로 싸매줘도 예전에 비해 회복이 훨씬 더디다. 흉도 잘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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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외에도 피부에 느껴지는 변화들은 또 있다. 산유국이라는 별명을 선사해 주었던 지성 피부는 어느새 사막처럼 바짝 마른 건성 피부가 되어버렸다. 로션을 바르지 않으면 얼굴이 마른다. 가을, 겨울이면 더 심해진다. 피부의 회복력도 줄고 탄력도 줄어드니 윤기도 가시고 어떤 날은 점심 때까지 얼굴에 베개 자국이 남아있기도 하다. 

 

찬바람에 반응하는 것은 피부만이 아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등이 결리고 담이 드는 일도 잦아진다. 땀도 많고 열도 많고 추위도 안 타던 체질이, 어느새 가을바람에 오실 오실 떠는 연약한 체질이 됐다. 겨울이면 한두 번 씩 감기를 독하게 앓는다. 감기 정도는 병원 가면 일주일, 안 가면 7일이라며 호기를 부리던 내가 이제는 병원에 안 가면 감기가 낫지를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동네 가정의학과 선생님이랑 친해지는 것은 꽤 서글픈 일이다. 

 

# 의사 양반! 내가 고혈압이라니! 

신입사원 시절 격년마다 돌아오는 건강검진은 좀 과도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들 건강했다. 그저 그날은 회사 사람들이랑 함께 하는 꽤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그 건강검진이 돌아오는 것이 은근히 겁이 나기 시작한다. 생애 총 흡연 기간을 묻는 문진표도 부담스럽다. 체중과 허리둘레를 재는 신체검사도 왠지 부끄럽다. 전립선이 커졌다거나, 지방간을 조심하라거나, 꾸준한 운동으로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한다는 의사 소견에 점점 절박해진다.

 

어느 날 감기 때문에 회사 앞에 있는 병원에 갔다가 의사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처음 간 병원이라 의례적인 혈압 체크가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내 혈압 수치를 보고 아직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느냐며 얼른 혈압약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혈압이 좀 높은 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혈압약은 한 번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는 말에 시작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였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꼭 성인병 환자가 되는 것 같아 싫었다. 조금 운동해서 살을 빼면 혈압도 떨어질 거라는 생각에 기대고 있었다. 정작 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혈압은 어려서부터 좀 높은 편이었고요, 지금 뭐, 몸에 아무런 이상이나 증상 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데, 꼭 먹어야 할까요?”

 

나름 건강한 편이니 아직은 괜찮은 것 아니냐고 의사 선생님께 볼멘소리를 했다.

 

“왜, 투석하고 싶어서 그래요? 당연히 아무 증상 안 느껴지지. 이러다 신장 망가지는 거 금방이에요. 안돼, 안돼, 큰일 나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뭔가 어지럽다거나 뒷골이 당긴다거나 하는 증상이 느껴지지 않으니 별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오산이었다. 이제 나도 도착하기 싫은 정류장에 기어이 도착한 것 같아 많이 우울했다. 한 달에 한 번 혈압약을 처방받아 먹으면서도 그것을 내 일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함께 갈 친구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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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르기성 비염, 천식, 통풍 그리고 유전 

유전자는 위대하다. 유전자는 오던 것을 빠짐없이 물려주기 때문이다. 중간에 간혹 빼 먹을 때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분 탓이다. 전달된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빠뜨리는 경우는 없나 보더라.

 

나는 알레르기성 비염을 물려받았다. 봄이나 가을이면 아침마다 온 가족이 재채기 경연했다. 그런데 알레르기성 비염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많이 호전되었다. 아침 재채기 외에는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다. 자주 막히던 코도 괜찮아졌고, 달리기든 수영이든 운동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감기가 좀 자주 걸리는 것 말고는 딱히 의사를 만날 일도, 약도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정상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굳게 믿었다. 내가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에서 흐릿하게 잊혔고, 급기야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른다섯 살 되던 해 봄, 가로수에서 흩날리는 꽃가루를 보고 숨이 차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꽃가루로 인한 계절성 알레르기가 ‘일시적으로’ 왔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도 자주 숨이 찼다. 봄과 가을 환절기가 되거나, 맥주를 마시면 더 심했다. 숨이 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냐 하면 꼭 물속에서 빨대(스노클링할 때 쓰는 두꺼운 호흡기 말고, 우유 마실 때 쓰는 얇은 빨대)로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다. 키보다 깊은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하면 더 정확하려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실은 무척 절박하다.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공기가 아주 조금만 들어온다. 호흡은 자꾸 크고 잦아지는데도 점점 숨이 가빠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온 신경은 숨 쉬는 것에만 집중되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목구멍에서 숨이 들어가고 나갈 때 피리 소리 같은 천명 소리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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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선진국에만, 그것도 어린아이들에게만 있는 병이라고 들었는데, 이젠 우리나라도 어엿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우리나라 인구의 약 5~10%가 천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얼리어댑터인 나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 같이 흡입하면 기도에 직접 작용해서, 기도를 넓혀주는 흡입약을 처방받았다. 언제 천식 발작이 나올지 모르니 늘 휴대하고 다니라고 했다. 이렇게 두 번째 친구가 생겼다. 얼마나 우울하던지 저 친구랑은 꼭 헤어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좀처럼 물러설 기미가 안 보였다.

 

세 번째 친구는 그 유명한 통풍이다. 통풍은 요산이 원활히 배출되지 않아 생기는 병이다. 핏속에 요산의 농도가 올라가면 그 요산의 결정이 관절에 달라붙어 쌓이게 되면서 염증이 발생한다. 환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준다는 무시무시한 질병이다.

 

요산은 단백질을 분해할 때 많이 나오는데, 배출이 잘 되지 않으니 고기류, 생선류, 갑각류 등등 고단백 음식을 피하라고 했다. 또 술, 특히 맥주는 소화과정에서 요산을 아주 많이 만들어내기 때문에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과당이 들어간 주스나 음료수 등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아아… 콜라도 안된단다.

 

주변 사람들이 통풍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으면서, '통풍은 음식도 조절하고 음주도 피해야 하는, 청교도의 생활 자세가 자동으로 강제되는, 인생을 아주아주 재미없게 만드는 나쁜 질병이라, 나에게 오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혹여 나도 그게 걸리면 얼마나 힘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으며 슬픈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기어코 그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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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너무도 강렬하고 매서워서, 마음이 절로 경건하고 숙연해졌다. 관절에 꼬챙이를 찔러넣고 빙글빙글 돌리는 것 같이 날카로운 아픔이었는데, 문제는 잠시도 쉬지 않고 몰아친다는 것이다. 대개 자세를 바꾼다거나 돌아눕는다거나 하면 아픈 게 좀 덜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통풍은 그런 거 없었다. 앉아도 아프고 누워도 아프고 다리를 올려도 아프고 내려도 아프다. 그것도 일정하고 균일한 강도로. 정말이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참느라고 참았지만, ‘아이고, 아이고’하는 신음은 거의 흐느낌으로 변해있었다.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아침 일찍부터 진료를 기다리시던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사람 먼저 봐주시라’라고 할 정도였다. (이 자리를 빌려, 그때 그 할머니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선…생…임. 진통제… 먼저…. 놔주세요.”

 

선생님을 보자마자 어디 아프단 소리도 하기 전에 애원했다.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가 제일 아픈지 발을 이리저리 눌러보는 선생님 멱살을 잡을 뻔했다. 발작이 잦아들 때까지 한동안 다리에 깁스하고 목발을 짚어야 했으며, 그날부터 요산 수치를 낮추는 약을 지속해서 먹기 시작해야 했다.

 

의사 선생님은 맥주를 많이 마시거나, 내장탕을 많이 좋아하거나, 육식 위주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주로 통풍에 걸린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선생님. 저는 술은 거의 마시지 않을뿐더러 형편상 고기도 많이 먹지 않습니다. 내장탕은 쳐다도 못 보는데요, 대체 저는 뭣 때문에 통풍이 걸린 걸까요?”

 

억울한 마음에 볼멘소리했다. 의사 선생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움… 그냥 걸린 거에요.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무슨 소린가. 대학 갈 때 삼수까지 했는데, 또 재수가 없다니. 유전자가 제일 중요한 요인일 수 있다는 거였다. 뭐 이런 팔자가 있나 싶어 억울했지만 유전자 문제라면 고스란히 내 책임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 편 좀 누그러들기도 했다. 

 

그렇게 세 번째 친구가 나에게 왔다.

 

#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최초의 경험 

살살 달래는 것이야말로 병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괜스레 그 친구들 성질 긁어봤자 고생하는 것은 결국 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피가 뜨거운지, 내 몸뚱어리가 내 맘대로 안된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치밀어 오르는 화가 주체가 안 됐다.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몸이 나빠질 정도로 못된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보다 술·담배를 훨씬 더 많이 하는 친구들도 건강하게 잘만 지내는데, 나만 벌써 이 꼴이 된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아가 났다.

 

천식과 혈압은 같은 병원에서 처방받을 수 있어 한 달에 한 번만 방문하면 되었다. 통풍관리를 위해 정형외과도 한 달에 한 번만 가면 됐다. 그런데 나만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성가셨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환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어려웠다.

 

짜증스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병원에 정기적으로 다니며 관리하는 동안에 세 친구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정되고 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잘 아는 지인이 치료 방법을 한 번 바꿔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통풍으로 다리를 절뚝이며 다니던 것을 보고 아주 안타까웠었다고, 자기가 여러 번 목숨을 신세 진 용한 의원이 계시는데, 함께 가서 맥을 잡아 보자고 했다.

 

“아… 목숨을 신세 졌던 ‘용한 의원’이라니…”

 

이 대목에서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가슴이 웅장해졌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친구들을 떼어내 줄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된 것이라 믿었다.

 

한의원은 꽤 오래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곳이었다. 주중에는 한산했지만 주말이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이 진료를 받으러 오는 통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북적였다. 더욱 믿음이 갔다.

 

진맥을 보시고는, 간과 췌장이 많이 약해져서 폐와 기관지가 알레르기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장에 스테로이드가 많이 쌓이는 바람에 통풍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스테로이드를 빼면서 간과 췌장을 보하면서 균형을 찾으려 하니, 힘들어도 스테로이드를 쓰지 말아 보자고 했다.

 

‘균형` 

 

역시 한의학은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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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침을 맞고 약을 먹으며 흡입제를 끊었다. 처음 며칠 동안에는 견딜 만 했다. 숨이 좀 차도 몸이 균형을 찾는 과정이려니 했다. 선생님도 조금 버티다 보면 숨 가쁜 것이 점점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숨이 가빠져서 흡입제 없이 하루를 버티는 것이 힘들어졌다. 침을 맞아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가도 금세 다시 호흡이 가빠졌다. 숨소리는 그르렁거렸고 미친 듯이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 번 기침이 시작되면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올 것처럼 뒤집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목이 쉬었다. 숨쉬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가슴 전체가 별도 조각인 듯 아프고 답답했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워도 너무 숨이 차서 30분 이상 잠들지 못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괴로웠다. 숨이 가빠 기침하다가 잠이 깼다. 헐떡거리느라 다시 누울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무릎에 팔을 괴고 최대한 가슴을 키우고 목을 빼서 숨을 쉬려 애쓰는 것 외엔 없었다. 그렇게 뜬눈으로 꼬박 몇 날 며칠을 새면서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운동은커녕,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혼자서 목욕탕에 들어가 샤워하기도 어려웠다. 아내 손을 잡고도 세 발짝 이상 발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아프면 아픈 대로, 기침하면 기침을 하는 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마치 데드풀이 유전자가 변이되었던 것처럼 어떤 변곡점이 오지 않을까? 다음 순간을 기대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기침하다가 아주 잠깐 필름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 아주 빨리, 아주 큰 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침을 하던 중이었던 것을 까맣게 잊었다. 바로 직전에 무슨 일하고 있었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는 뭘 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았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이지?’, ‘어디가 잘못된 거지?’, ‘이거 큰 문제인가?’에서부터 ‘운전하다 이렇게 됐으면 죽었겠다.’ 그리고 ‘집에 어떻게 가지?’까지. 놀랍게도 매일 오후 8시~9시 사이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로 내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오는 현장을 아내가 우연히 목격했다. 괜찮냐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아내에게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왜?”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놀란 아내는 까불지 말고 다시 흡입제 치료하라고 명령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수포가 되는 것이 아쉬웠다. 은근과 끈기로 살아온 미련한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 같아 속상했다. 하지만 실은 '혹시 이러다 진짜로 숨이 넘어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괜찮지만 네가 영 불안해하니 내가 약을 들이켜줄게.’ 그래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아내의 말에 못이기는 척 황급히 흡입약을 들이켰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기침이 잦아들고 호흡이 편안해졌다. 한 달 반 동안 도대체 난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현자타임이 세게 왔다. 

 

‘사기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내가 뭔가 의사 선생님의 지시를 잘못 따랐나?’, 아니면 ‘그냥 바보짓 한 건가?’ 잠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러나 숨이 쉬어진다는 것, 그래서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가정의학과 선생님을 만나 알레르기약과 흡입제를 처방받았다. 그리고 조금 더 큰 병원에 가서 정확한 검사와 체계적인 관리를 받기로 했다. 그 후로 일주일 동안은 아내가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다시 숨을 편히 쉴 수 있으니 정신 놓는 일은 없을 것이더라도, 한 달을 넘긴 기침과 호흡부전으로 가슴은 몸과 분리되는 듯 아팠고 목이 말도 못 하게 쉬어버렸으며 체력은 세 발짝도 걷지 못할 만큼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평생 처음으로 내 몸에 자신이 없어졌고 두려웠다. 허약해 빠진 내 몸에 화가 났다. 미련함에 화가 났다. 호흡이라는 당연하고 사소한 일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몰랐다. 괜한 욕심으로 공연히 여러 사람 고생만 시키게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지옥 문고리를 잡았다 놓는 동안  나에 대해, 건강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이 머리를 휘저었다.

 

슬픔_Photo by Joshua Earle on Unsplash.jpg

 

 

# 가난하지만 건강은 해야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죽음을 만났다. 처음 만난 죽음은 금붕어의 것이었다. 움직임이 점점 약해지던 그 녀석이 배를 드러내고 물 위로 떠 올랐을 때 그 서늘하고 고요한 느낌을 기억한다. 예뻐했던 강아지도 떠났다. 사랑해 마지않던 마이클 잭슨도 세상을 떠났다. 달콤한 식혜의 기억을 선물해주신 할머니와도, 온 세상이었던 어머니와도 헤어졌다. 내가 만난 죽음은 곧 사랑하는 이들이 떠나가는 이별이었다. 

 

이번에 나는, 아주 먼 훗날에나 마주할 것으로, 그래서 당장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으로 여겼던 그 ‘죽음이라는 것’을 아주 가까이 스쳐 지나가며 그 형상을 구체적으로 본 느낌이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이 괴롭고 아파 죽을 것 같던 며칠의 시간, ‘아파 죽겠다’라는 그 말에 얼마나 큰 고통이 담겨 있는지 느껴졌다. 그리고 ‘죽음’이 더 이상 막연한 무엇이 아닐 수 있다는 구체적인 절박함이 다가왔다. 

 

죽음은, 그것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그래서 인사를 나눌 아주 잠깐의 시간을 바라는 것마저 욕심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이별, 그것에 대한 서러움이다. 

 

어떻게 살면 그 필연적인 헤어짐이 덜 서러울까. 다들 죽으면 간다는 그곳이 하늘 위에 존재하기를, 그래서 언젠가는 그리웠던 이들을 다시 만나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나의 바람은 세상과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에게서 세상으로, 관점을 돌려보니 그렇게 보였다. 나도, 내 부모와 형제도, 우리는 모두 수 천만년 동안 이어져 온 대자연 일부이고 자식일 뿐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대자연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우연히 ‘나’라는 형태로 빚어져 지금 여기에 잠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았을 뿐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원히 살 것처럼 살다 간다. 아니, 형태를 바꾸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몸은 죽어 흙이 되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 흩어진다고 했으니까. 

 

삶도 죽음도 모두 다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마지막 말씀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렇게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그 안에서 뒤섞이는 것. 혹시 우리는 그렇게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 아닐까.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닐까. 

 

억겁의 시간 속에 순간을 살 뿐이지만 인연에 인연을 더해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된 기적만으로도 우리는 잘 살아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악착같이 건강해야겠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서러움을 최대한 미뤄야겠다. 자기 삶을 개척하는, 늠름한 어른으로 자랄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기 때문이다. 

 

가족 흑백사진_Photo by Nienke Burgers on Unsplash.jpg

 

그리고 함께 어울려 잘 살아야겠다. 돈과 명예가 행복의 절댓값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알만큼 나이를 먹었다. 가난한 자의 정신 승리일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나누며 웃을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을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성공한 삶 아닐까. 그렇게 건강히, 어울려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물 받은 이 비루한 몸뚱이를 아주 효율적으로 알뜰히, 그리고 의미 있게 사용하는 제일 나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니 

담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