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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승전국들은 독일의 군대 자체를 와해시키려 했고, 그 결과가 충실히 반영된 것이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그 주요 내용을 확인해 보면, 

 

- 육군의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한다. 장교 숫자를 4천 명으로 제한한다. 

- 전차, 전투기 등 최신 무기의 보유를 일절 금지한다.

- 해군 병력은 1만 5천 명으로 제한하고, 배수량 108,000톤으로 선박 보유를 제한한다. 잠수함 보유금지

-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강 동쪽 60킬로미터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병력 배치를 금지한다.

- 참모본부를 없앤다.

 

병력을 10만 명으로 제한하고, 장교 숫자를 줄이는 것, 전차와 전투기 등 최신 무기 보유를 금지하는 것 등은 실질적으로 군비를 제한해서 전쟁할 수 없는 군대로 만드는 거였다. 

 

1차 대전 당시 협상국을 괴롭혔던 잠수함, 미래전의 가능성을 보여준 전차와 전투기 등의 보유금지 등은 독일의 전쟁 의지를 싹부터 도려내겠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독일군을 경찰 수준으로 그 전력을 떨어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라인란트 지방의 역사적인 내력을 살피기 이전에 그 전략적 가치를 우선 확인해야 한다. 라인란트 지역은 라인강의 서쪽 지역이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프랑스와 접해 있는 지역이다. 강을 경계로 서쪽을 비무장한다는 건, 독일로선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선 우선 라인강을 건너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1차 대전 당시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통해 벨기에를 찍고,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 프랑스를 공략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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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지방

 

만약 라인란트를 비무장지대로 만든다면, 독일은 전쟁을 꿈꾸지 못할 거다. 설사 전쟁이 터진다고 하더라도 프랑스는 천혜의 방어선인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수월하게 독일군을 막아설 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도하작전은 공격부대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부대는 분단되고, 교두보를 만들기 전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에 짓밟힌 경험이 있는 프랑스로서는 라인란트의 비무장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기 전부터 프랑스는 라인란트 비무장화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처음에 프랑스가 고민한 방법은 라인란트를 아예 독일에서 떼어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붙이거나 중립화할 수 있는 별개의 공화국으로 만들까를 고민할 정도였다. 달리 말한다면, 독일이 라인란트를 재무장한다는 건 곧 전쟁이 임박했다는 방증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참모본부 해체는 어떤 의미일까?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Battle of Jena–Auerstedt)는 독일이란 나라의 운명을 뒤바꾼 전투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격멸한다. 그리고 베를린에 입성한다. 이 전투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바짝 엎드리게 된다. 당장 병력은 4만 명으로 제한됐고, 엘베강 서쪽과 폴란드 지역을 상실했으며, 덤으로 1억 2천만 프랑의 배상금도 토해내야 했다. 

 

이 전투로 2명의 독일인이 각성하게 되는데, 한 명이 <독일 국민에게 고함>어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요한 고트리이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였다. 독일의 굴욕스러운 패배에 충격을 받은 피히테는 독일인의 애국심을 환기하기 위한 강연을 펼쳤고, 이 강연을 정리한 책이 바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다. 피히테가 이때 내놓은 독일 민족 부흥의 방법은 ‘교육’이었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도덕 재무장과 민족혼을 깨우치는 교육을 통해 독일 민족을 발전시키려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런 피히테와 함께 주목해 봐야 하는 인물이 바로 게르하르트 요한 다피트 폰 샤른호르스트(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이다. 전쟁 관련 서적 중 가장 유명한 책이라 할 수 있는 <전쟁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쟁론을 읽어보진 못했어도 전쟁론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계속이다.’이란 말은 알 것이다. 이 책을 쓴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동양에 손자가 있다면, 서양엔 클라우제비츠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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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요한 다비트 폰 샤른호르스트

(Gerhard Johann David Von Scharnhorst)

 

이 클라우제비츠에게 군사학을 가르친 이가 샤른호르스트이다. 프랑스군과 싸우다 포로가 된 샤른호르스트는 이때부터 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에 졌는지를 연구했고, 이후 프로이센군의 군제개혁에 나서게 된다. 그 결과 나오게 된 게 바로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였다. 이 당시 프로이센이 만든 작품들을 보면, 국민 개병제, 고급인재들을 양성했던 전쟁대학(Kriegsakademie), 오늘날의 참모개념을 만들어낸 장군 참모(Generalstab)이다. 지금은 참모란 개념이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18세기 후반까지 참모란 개념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프로이센은 이때부터 독일 장교의 신화를 써 내려갔던 거였다. 

 

독일 장교들이 전쟁에서 보여준 강렬한 인상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잔상이 뚜렷이 남았다. 일례로 독일군 특유의 임무형 지휘 전술(Auftragstaktik)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00만 명 가까이 동원되는 대단위 작전의 작전명령서가 불과 1~2장인 경우가 많았다. 상부에서는 상황을 제시하고, 판단은 현장의 지휘관에게 맡기는 거였다. 즉, 전장의 즉시성과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인정한 거다. 미군도 월남전 패배 이후 국방개혁을 하게 되는데, 이때 주목받은 게 독일의 임무형 지휘 전술이었고 이를 미군에게도 이식하려고 노력했다. 

 

승전국들이 독일군의 참모본부를 없애려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던 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독일이 순순히 참모본부를 없앤 건 아니었다. 승전국들의 감시를 피해 다른 이름으로 참모본부를 계속 유지했던 것이 독일군이었다.

 


2.

 

마지막으로 배상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경제적 박탈은 아주 쉽게 일어나며, 사람들이 그런 박탈을 인내하는 한, 바깥 세계는 그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육체적 능률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은 서서히 약화한다. 그러나 삶은 어쨌든 계속된다. 그러다 결국엔 인내의 한계에 닿게 될 것이고, 절망과 광기의 구호가 무력감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선동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발하여 일어나고, 인습의 끈들은 풀리게 된다. 그것이 곧 위기이다.”

- <강화조약의 경제적 귀결> 中 발췌

 

20세기 경제학계의 슈퍼스타 케인스. 그가 쓴 <고용·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은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된다. 한 마디로 거시경제학의 창시자이다. 또한 수정자본주의를 주장해 대공황 당시 미국에서 시행됐던 뉴딜 정책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던 인물이다. <고용·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이 나오기 17년 전에 출판된 그의 첫 번째 인기작이 바로 <강화조약의 경제적 귀결>이다. 케인스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그가 파리강화회의를 참석했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영국 재무성 고문의 입장으로 영국 대표단에 합류했는데, 이때 배르사유 조약을 옆에서 지켜본 케인스는 분노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그의 정의는 간단했다. 

 

“베르사유 강화조약은 대중의 요구와 주요 행위자들의 성격이 합쳐져 가능해진 최고의 덧없는 협정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옆에서 지켜본 케인스는 극도의 절망에 빠져 재무부의 직책을 사임했다. 그리고 2개월 만에 쓴 책이다. 이 책은 출간 6개월 만에 12개 언어로 번역돼 10만 권이나 팔려나가며 일약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이 너무 과도하다는 거였다. 도대체 독일에 부과한 배상금이 얼마나 됐기에 과도하다는 말이 나온 걸까? 

 

『1,320억 마르크를(330억 달러) 금 기준으로 배상할 것』

 

1,320억 마르크란 배상금은 당시 독일에 어떤 수준일까? 1923년 독일의 GNP가 457억 마르크였다. 독일 국민이 먹고 마시지 않고 2년 11개월을 일하면 겨우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독일 한 해 세입이 60~70억 마르크로 추정되는데, 독일 국민의 세금을 모두 배상금으로 갚는다 해도 22년이 걸리는 금액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휴전 직후 독일은 선박, 철도, 석탄 등의 원자재, 군수용품 등의 현물 배상금을 연합국에 지급해야 했다. 

 

이른바 ‘예비배상금’이라 불렸던 건데, 그 금액을 정확히 책정할 순 없으나 독일 전체 국민소득의 1/5 정도라 추정하고 있다. 현물배상은 독일 경제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쳤는데, 잠재적 성장 능력을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돈을 벌어서 배상금을 지불하고 싶어도 그 수단이 되는 생산시설, 원자재, 유통 인프라를 떼어갔으니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 부분을 보고 독일 국민은 분노했다.

 

분노 다음에는 현실이 찾아왔다. 

 

당장 첫해 배상금 10억 마르크를 건넸지만, 그다음은 없었다. 독일 정부는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1920년 독일의 물가는 전쟁 직전인 1914년에 비해 10배가 올랐다. 1922년에는 여기서 다시 10배가 올랐고, 반년 후에 다시 10배가 올랐다. 1923년 10월 한 달 동안에만 물가가 300배나 올랐다. 전쟁 전 독일 화폐 중 가장 큰 금액이 100마르크였는데, 1923년 말에는 100조 마르크 화폐가 발행된다. 

 

전쟁 전 환율로 보자면, 100마르크는 240달러와 교환됐다. 그러던 것이 1923년 1월이 되면 1달러면 1만 마르크로 바꿀 수 있게 됐고, 9월이 되면 9,800만 마르크, 11월이 되면 1조 마르크가 된다. 1923년 11월이 되면 빵 한 조각의 가격이 200억 마르크에서 1,400억 마르크로 폭등하게 된다. 국가 경제의 붕괴는 독일 국민의 생활 기반을 송두리째 붕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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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