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저물어 간다. 올해도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시대의 어른으로 추모를 받는 분들도 있었고, 마지막까지 편치 못한 이들도 있었다.
1. 백기완 선생 별세 (2월 15일)
출처-<민족사진연구회>
달동네, 새내기, 새터, 동아리, 모꼬지.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노나메기(너도 나도 올바로 잘 사는 세상),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선생이 만들거나 발굴한 말들이다. 백기완 선생은 민중의 벗이자, 민중예술과 민중문화를 이끈 분이셨다.
김경수 지사는 백기완 선생에 대해 "시대를 고민하던 학창 시절, 그 이름만으로도 청춘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어른이셨습니다"라고 추모했다. 김 지사와 마찬가지로 그는 투쟁을 하는 청춘들에게는 든든한 디딤돌이었다. 사자갈기 머리와 두루마리 자락으로 청중을 휘어잡는 명연설은 큰 힘과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약하고 가난한 이들 앞에서는 울보였다. 참가자들이 경찰에 잡혀가면 온 힘을 버텨 싸우다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가 처음부터 역사에 바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1960년까지 그는 한국전쟁으로 삶이 무너진 농민을 돌보며 약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려 애썼다.
역사에 나서게 된 건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강행하자 그에 맞서 투쟁하면서다. 3선 개헌 반대, 유신 철폐를 외치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79년에는 YW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살점이 떨어지고 손톱이 뽑히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 사건은 박정희 피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또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였다. 당시 시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혼식을 위장해 시위를 하려고 한 것이다. 이때 고문을 받다 10시간 만에 깨어나 죽을힘을 다해 쓴 시가 '묏비나리'다. 이것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토대가 되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中-
독재정권의 군홧발은 묏비나리와 함께 더욱 그를 끓어오르게 했을 뿐이었다. 2014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 그의 발언이다.
당시 인터뷰 영상
(해당 기사 링크)
과거, 용산참사 영결식 당시 이명박을 향해 호통치다가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
“전두환 정권 때 그 재수 없는 애새끼한테 매를 맞고 쓰러졌다가 깨어보니 내 앞에 똥이 있어. 바지에다 똥을 쌌어. 엉망으로 깨지니 오줌도 쌌는데 땅바닥, 시멘트 바닥에도 깔렸어. 그런데 이 새끼가 그걸 내 혓바닥으로 핥으라는 거야. 못 핥겠다고 하니 마구 밟는 거야. 내가 이렇게 괄시를 받으며 죽는구나…. 그게 절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죽어가는 놈을 또 죽이면서 절망을 강요할 때 뭐가 생각난 줄 알아? 짓밟힐수록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알았어. 그걸 우리말로 '서돌'이라고 해. 불씨지. 절망은 서돌이 지펴 나오기 전의 상황이야. 짓밟힐수록 불꽃이 인다, 이 말이야. 죽일 테면 죽여라, 난 서돌이 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생명력, 그게 바로 서돌이지.”
서돌을 품은 백기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건 1987년이었다.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김대중과 김영삼이 갈라서는 걸 막기 위해 대통령 후보에 나섰으나 결국 분열을 막지 못했다. 그는 선거 이틀 전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 세력의 대연대를 이룩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후보직을 사퇴한다. 민주세력 후보 단일화안이 산산히 깨진데 대해 한없이 안타깝게 생각한다. 표를 흩뜨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애국자의 길이라 믿기에 여러분 곁을 떠난다."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이 얻은 표는 총합 53.1%였다. 노태우는 36.6%였다. 이후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는 늘 그늘 속에 방치된 약자를 돌봤다.
강정마을, 밀양송전탑 주민들, 쌍용차 노동자, 한미FTA 저지, 백남기, 촛불집회, 태안발전소 산재 사망자 김용균 씨 등..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약자들을 생각했다. 폐렴으로 인한 호흡기 시술로 말을 못 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며칠에 걸쳐 마지막으로 약자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의 마지막 글에는 항암 투병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고 김용균 씨 모친에게 “김진숙 힘내라” “김미숙 어머니 힘내라”는 글귀와 전태일 신문 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쓴 “노동해방 백기완”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민중의 벗이었다.
2. 채현국 이사장 별세 (4월 2일)
출처-<한겨레>
2015년까지 베일에 가려졌던, 필자도 몰랐던 분이다.
서울대에서 이순재와 함께 연극을 했다. 중앙방송(현 KBS)에 입사했으나 군사정권 찬양을 해야 한다는 말에 미련 없이 때려치우고 부친 채기엽 씨가 벌린 사업에 뛰어들었다. 강원 도계 흥국탄광(흥국은 ‘채현국이 흥해라’는 뜻으로 그의 부친이 지은 이름이다)을 통해 큰돈을 벌었고, ‘흥국’으로 시작되는 여러 기업을 일궈 역시 큰돈을 벌었다.
1970년대 초엔 전국 납세자 순위 2위에 이르는 재벌 못지않은 거부가 되었다. 물론 부친 채기엽 씨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사업하면서 이상화 등 독립운동가를 지원했었다. 1949년 중국에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채기엽 씨의 회사 금고를 뒤졌는데, 전해져오는 말로는 “한국은행 수장고보다 더 많은 금이 있어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시작되자 채현국은 정경유착 시대에 박정희와 얽히지 않고 사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든 사업을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노동자에게 무려 10년 치 임금을 퇴직금으로 나눠줬다. 당시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무일푼이 되었다. 사업을 받은 젊은 친구들은 그가 물려 준 사업을 일구지 못하고 줄줄이 파산했다. 그중 사업을 받은 서울대 친구 하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를 이사로 등재해 놓았었는데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무일푼 날건달이 되었지만, 가진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양산 효암학원 산하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에서 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경주 우익단체 대표 이협우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임상수 씨가 억지로 그와 부친에게 재단을 맡겼기 때문이다. (관련 딴지 기사 링크)
30년 넘게 재단 이사장으로 일했지만, 급여는 받지 않았다. 늘 학교에서 풀을 뽑고 나무를 일궈서 학생들은 이사장이 아니라 환경미화 노동자로 그를 알고 있었다. 학교에는 이사장 거처가 있었는데 4~5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필자가 본 그곳에는 싱크대와 화장실이 설치돼 있었다.
납세 순위 2위 거부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었으니 통장이나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건달이라고 불렀다. 기자들은 수없이 그를 취재하려 했으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결코 응하지 않았다.
“나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다. 사업을 하다 보니 탄광에서 사람도 죽고 그랬다. 남들에게 존경받아서는 안 되는 놈이다, 기사에 나가면 위선이 된다.”
2014년 이진순이 쓴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것을 잘 봐두어라>란 제목의 한겨레 기사에 그의 인터뷰를 담을 때도 “어디 누구를 도와줬다는 말을 쓰지 마라, 독지가라 쓰지 마라, 미화하지 마라”는 조건 아래 인터뷰가 이뤄졌다.
그가 대중 앞에 나타난 시간은 2015년부터 불과 3~4년 남짓이다. 그동안 그는 여러 명언을 쏟아내었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무수한 해법만이 있을 뿐이다."
"돈 버는 재미는 마약보다 더한 거다. 신앙이 되어 버린다."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 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얼마나 의심 할 수 있느냐. 의심할 수 없으면 영혼의 자유는커녕 지식의 자유도 없습니다. 의심만이 배움의 자유, 지식의 자유를 가능케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질서만 가르치지 방황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의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과학도 믿으면 미신이라고 합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울대학은 97%의 아첨꾼을 키워냅니다. 왜냐면 '우수하다' '똑똑하다'는 것은 먼저 있는 것을 잘 배운 것이니, 잘 배웠으니 아첨 잘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그중에 몇몇은 호루라기 부는 놈이 가끔 나와요. 그게 참 신통해.”
“아는 것과 기억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이 되려면 자신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도 구별해야 합니다.”
“쓴맛이 사는 맛”이라는 비석을 학교에 새겨 놓고, 시시하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꿨던 우리 시대의 어른이었다.
3. 노태우 사망 (10월 26일)
출처-<경향신문>
10월 26일은 참 공교로운 날이다. 명량대첩이 있었고, 박정희가 죽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시작된 날이다. 노태우도 이날 죽었다.
육군사관학교 정규 1기(11기)로 전두환과 하나회에 가입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 당시 최전방 9사단 사령관으로 있던 노태우는 최전방 병력을 빼내 중앙청(정부종합청사)을 장악해 전두환을 놀라게 한다.
이후 허화평 등이 추진한 직선제(이미 3김이 제거된 상태이므로)를 막고 전두환이 원하는 간선제(체육관 선거)를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전두환의 신임을 얻었고, 5공화국이 들어서자 정무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장관 시절 그는 시종일관 전두환을 거스르지 않았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장세동이 옷을 벗자 드디어 전두환의 후계자 지위를 굳혔다. 그리고 최루탄이 자욱한 1987년 6월 10일, 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사실상 대통령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국민과 미국의 압력에 몰려 전두환이 내민 직선제 개헌 카드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에 힘입어 36.6%라는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이 되었다.
출처-<대통령기록관>
대통령이 된 후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를 통해 동구권과 연이어 수교를 맺고 북한과 '불가침'이 포함된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총선에서 야권에 패배하고, 취약한 지지층으로 인해 그는 늘 정치적인 한계에 다다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범죄와의 전쟁', '공안정국', '3당 합당' 등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집권력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퇴임한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려 했으나, 재임 중 5,0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나 전직 대통령 최초로 구속되었다. 이후 12.12 군사 쿠데타와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등을 이유로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기도 했다.
1997년 대선 직후 풀려났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건강 악화로 전두환과 대조적으로 비교적 조용한 삶을 살았다. 추징금(비자금 중 뇌물이 분명한 돈)도 대부분 납부했다. 말년에는 소뇌위축증으로 침상에서 말도 못 하며 지냈다. 아들 노재헌이 최근 광주 민주화운동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전두환과 대비되는 말년으로 인해 싸늘한 시선이 전두환보다는 많이 거두어졌다. 이로 인해 죽은 후 국가장으로 장례가 진행되었다.
(노태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딴지 기사 ‘노태우에게는 여섯 번의 선택이 있었다’ 클릭)
4. 전두환 사망 (11월 23일)
출처-<연합뉴스>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육사 정규 1기(11기)이며, 성적은 낮았지만, 친화력이 뛰어났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기억했으며, 장교 시절 급여는 대부분 인맥 관리에 쓰였다고 한다. 하나회에서 기회를 엿보던 중 윤필용 사건에 휘말려 경쟁자들이 사라지면서 하나회 기수로 치고 나갔다.
박정희는 그에게 보안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겼고, 박정희가 죽자 수사권을 쥔 그는 이를 빌미로 권력 쟁탈전에 나섰다. 결국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직속 병력은 없었지만 하나회 후배인 박희도, 최세창, 장세동 등이 불법적으로 동원한 병력과 노태우가 역시 불법적으로 동원한 병력에 힘입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쿠데타가 성공한 후, 이범준 중장을 중심으로 역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수월하게 되었다. 1980년 5월 17일, 국무회의장을 무력으로 포위한 채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학교를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가와 김대중, 학생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유혈진압을 주도했으나 끝까지 '발포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고 대통령이 된 후 세지마 류조(관련 딴지 기사 링크)의 제안에 따라 국풍81, 프로스포츠 출범, 올림픽 유치 추진, 언론통폐합 등을 진행했다.
미국의 요청으로 일부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으며, 이때 통금 등이 사라지고 잠시나마 학교에서 교복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추진하던 핵 개발 및 자주국방 프로그램을 폐기했다.
집권 초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노신영 등이 추진한 일본 차관과 노동자 쥐어짜기로 일단 위기를 넘겼으며,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자 '하청'을 하던 한국경제도 덩달아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 발표.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박정희 못지않은 공안사건을 일으켰으나,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자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6월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범국민적 저항과 군 내부의 반발, 미국의 반대로 결국 민주화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후 노태우에게 당시 1,500억 원에 달하는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자신을 비판해도 된다는 약속을 통해 선거를 도우며 민정당 정권 재창출을 이뤄냈다.
퇴임 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으로서 노태우 위에 군림해 2000년까지 권력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그렸다. 그러나 국민적 저항으로 결국 백담사로 유폐되기에 이른다. 이후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재임 시절 무려 7,000~9,0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와 12.12군사정변,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으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노태우와 마찬가지로 석방된다.
그는 노태우와 달리 석방된 이후 주요 인사들과 골프 회동을 활발하게 했으며, "왜 나만 갖고 그래", "통장에 29만 원이 전부"라는 말로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추징금(비자금 중 뇌물이 분명한 부분)도 절반 정도밖에는 내지 않았고, 세금 또한 탈루하는 등 마지막까지 좋지 못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비쳤다. 죽은 후 노태우와 달리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전두환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딴지 기사 ‘노태우에게는 여섯 번의 선택이 있었다’ 클릭)
5. 그 외 2021년 세상을 떠난 사람
-조용기 목사 부부
출처-<시사저널>
2월에 조용기 목사의 부인 김성혜 한세대 총장이 세상을 뜬 후 9월 14일 조용기 목사도 세상을 떴다. 한때 신도 8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교회인 순복음교회를 일구었으며, 다른 교회와 달리 방언이나 신의 치유 등을 내세워 신도들을 크게 늘였다.
MBC 보도에 따르면 2000년 기준 연간 헌금액이 1,700억 원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기성 교단은 처음에 이단으로 지목했으나 철회했다. 한기총을 만드는데 일조했으며, 기독교 정당을 만들려고 했다. 이때 전광훈 목사 등과 함께하기도 했다.
다른 대형교회와 달리 표면적으로 자식 세습을 하지 않았으나, 교회 돈을 종자돈으로 아들인 조희준과 조민제에게 국민일보를 창립하게 했다. 이들은 모두 배임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전경환
출처-<SBS>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도 노태우 사망 5일 전인 10월 21일 사망했다. 10.26사태 당시 경호실 경호 계장으로 있어 전두환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1980년 청와대 경호실 보좌관으로 있었으며, 이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 등을 맡았다. 1988년 새마을중앙회장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이후 2000년대에도 사기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완구, 이한동 전 국무총리
이완구(좌)와 이한동(우)
이완구 전 총리는 10월 14일 별세했다. 한나라당으로 충남도지사와 충청권에서만 3선을 지내는 등 충청도를 기반으로 대권을 꿈꿨으나 '성완종 리스트'로 돈을 받은 혐의를 받고 62일 만에 총리에서 사퇴하면서 정치생명을 사실상 마감했다.
이한동은 판사 검사 출신으로 전두환이 민정당을 만들자 정계에 입문해 내리 6선 의원을 하고, 당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노태우 정부 시절 내무부 장관으로 있으며 공안정국 조성과 노동자 파업을 강경진압해 비난을 받았다.
이후 1997년 신한국당 대통령 경선에 나섰으나 이회창 이인제에 밀려 3위로 낙선하고, 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참가해 자민련 수석부총재가 되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하나로국민연합'이라는 정당 후보로 나와 4위를 차지했다.
이 외에도 민청학련 사건과 김재규를 변호한 인권변호사 강신옥, 대구 지역에서 항일운동·반독재운동 등을 하다 무려 7번이나 체포된 강창덕 민주당 대구시당 고문, 목숨을 걸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마이크를 잡고 가두방송을 하던 전옥주 씨 등 양심 있는 분들도 세상을 떴다.
전옥주 씨
출처-<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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