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강남에 차들이 빗물에 둥둥 떠다니고, 지하철이 침수되어 운행 중단되었다느니, 서울 순환도로 곳곳이 폐쇄된다느니 하는 재난문자가 빗발치고 있던 와중. 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듯이 더욱 맹렬하게 퍼붓고 있었다.
이날은 원래 <근육병아리의 방구석 오마카세>연재 다음 아이템 촬영하는 날이었지만, 촬영이고 뭐고...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노량진에도 물난리가 나서 주문해둔 물건이 오지 못하고 꽁꽁 묶인 것이다.
암튼 그렇게 촬영은 전격 취소되고, 편집장 죽돌과 회사에 고립되어 퇴근이나 제때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꼬불쳐둔 컵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는데..
죽돌 : 그럼 예약해둔 생선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근병 : 수족관에 살려둬서 며칠은 괜찮을 거긴 한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손질해 뒀다가 나중에 구워 먹든지 하고, 주문을 다시 새로 해야죠. 지금 아마 오도 가도 못하는 물량 때문에 시장 전체가 난리일 거예요.
죽돌 : 아이고.. 상인들 우짠다냐.
근병 : 정전이나 안 나야 할 텐데. 수조에 산소 끊기고 그러면 활어들은 워낙 예민해서 다 나자빠질 거라..
일 년에 몇 번은 이런 날들이 있긴 하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거나 폭설로 도로가 꽝꽝 얼거나해서 차들이 발이 묶이는 날들. 다른 어떤 상품보다 재고 기간이 극도로 짧은 수산물들은 이런 기상악화에 치명적이다.
죽돌 : 그래.. 이게 말하자면 재난상황인데 말이지.
근병 : 그쵸.
죽돌 : 이런 와중에도 생업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분들을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네. 기록적 측면에서..
근병 : 뭐 그렇겠죠..
죽돌 : 대통령은 어디 있든 거기가 상황실이라니 집에 있는다지만.. 우리 기자들은 현장에 있을 때 진정한 기자니까..
근병 : 왜.. 또 뭐 할라고 빌드업을 하는 거예요.. 컵라면 먹다 말고..
죽돌 : 김밥 하나 더 먹어 근병아. 밤이 길겠네.
그렇게 딴지 편집부실에서 저녁 당직 중이던 근육병아리는..
대체 이런 건 회사에 왜 있는 거지 싶은,
여러 안전 아이템들을 장착하고..
난데없이 먼 길을 떠나게 된다.
마포구 레버넌트
새벽 두 시.
구멍 뚫린 듯 쏟아붓는 비에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잦아든 빗소리에 나갈 채비를 해본다.
얼른 택시 타고 가서 집중 호우 속 시장 일대를 취재하고 첫차를 타고 돌아온다.
이게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계획 따위는 퍼킹 빅엿을 먹기 마련이다. 서울 교통마비로, 상수동에서 노량진까지 가줄 택시는 아무리 간절히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재난보도는 시작부터 매우 조때있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다.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래도 비가 잠시 소강상태라는 것과, 한 가지 조까튼 건 이걸 진짜로 입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쳐버린 것.
언제 다시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 상황.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걸어간다.
한강 셧다운
다시 폭우가 쏟아질 것을 대비, 동선이 멀어지더라도 고립될 일이 없는 안전한 루트로 간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길을 나선다.
상수 나들목 한강 진입로.
진입 금지 푯말도 없고,, 예상외로 멀쩡하다. 아직 한강물이 그렇게 범람하지 않은 듯.
응 아니었다. 바로 한강물 대면.
여기까지 이렇게 물이 차있다는 것은,, 평소에 자전거 타던 도로와 퍼질러 앉아 맥주 마시던 잔디밭이 모조리 수몰되었다는 말. 굳게 폐쇄된 진입로를 보니 묘한 공포감이 엄습한다.
우쨌든 간에 노량진에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니, 서강대교 도보 구간은 폐쇄되질 않길 기도하며, 토정동 쪽으로 우회해 본다.
그래도 거나한 취객 한두 명은 볼 법한 곳인데, 거리에 지렁이 한 마리도 없다.
"아 여기 맛있지.. 가격 참 좋네.." 한참 메뉴판을 보다가 문득 이게 뭣 하는 짓인가 정신 차리고 다시 걷는다. 기나긴 코로나를 버텨냈는데, 어제 비로 매장들이 물에 잠겨 망연자실해 있을 강남 상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서강대교 북단 진입. 다행히 여긴 건너가도 되나 보다.
다리 아래로 펼쳐진 아찔한 풍경.
온통 믹스커피 떠블샷이다.
여기는 원래 조깅트랙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애처로운 표지판. 대자연 앞에 인간은 진짜 하릴없는 존재인 듯.
아슬아슬하게 떠있는 강변북로. 불어난 한강 수위로 다음날까지 순환도로 여러 구간이 통제되었다.
서강대교 중간지점 진입. 택시고 뭐고 다리 위를 통과하는 차량이 거의 없다.
해태님.. 이제 고만 하소.. 쫌.. 마이 무따 아이가..
반쯤 잠긴 밤섬. 강물이 바로 발밑까지 넘실대고, 습한 강바람이 싸대기를 때리는 통에 밑에 내려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
강너머 보이는 여의도. 강물이 맹렬한 속도로 흐른다.
불어난 강물로 국회의사당 턱밑까지 솟아오른 영등포 수난구조대. 구조대 건물이 고립되어 보이는 아이러니한 장면.
이쪽 사정도 마찬가지다. 커피믹스 천지.
오늘따라 더 기괴해 보이는 설치물.
여의도 랜딩. 비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지나,
장난기 많은 분들이 일하시는 건물 도착.
그럼 수해현장 가서 놀았단 이야기인가..
줄기 한번 겁나 큰 듯.
재난보도는 재난미디어센터가 있는 공영방송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 왜 딴지일보가 해야 하는 건가... 근원적인 고민을 하면서 걷다 보니,
서울교 진입.
여기도 카페라떼.
고립된 산책로 화장실.
조난당한 구명튜브.
수몰 직전의 올림픽 대로. 몇 시간 후 출근길 대란이 눈에 선하다.
방향을 틀어, 세기말 디스토피아적 간지가 물씬 풍기는 노들길 지하차도를 통과해서,
왜인지 짬뽕이 땡기는 신길역 도착.
텅 빈 거리에 엄중한 폰트로 우뚝 서있는 교회 건물을 지나니, 정말로 전멸한 지구에 혼자 살아남은 최후의 인류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대방역을 지나,
왕회장님의 피와 땀이 서린 현대차 남부서비스센터 입구 도착. 바로 옆 건물인 노량진 수산시장에 거의 다 왔다는 말.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지금 어떻게 왔는데..
지하에 물이 들어찼는지, 모터의 굉음과 퍼올린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뚫고 우렁차게 퍼진다.
노량진 수산시장 진입로 도착.
평소에 이곳은 할머니들이 채소를 파는 곳이지만...
이날은 엉망진창 워터파크가 개장 중이다. 하 이걸 다 어쩐대..
배수관이 이미 다 터져 돌아가셨는지, 콘크리트 틈새로 계속 빗물이 리필되고 있다.
하는 수없이 해자를 넘는 닌자 마냥 도강 감행.
우여곡절 끝에 축축해진 상태로 도착한 노량진.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다.
방금 낙찰받은 활어와 선어들이 바닥에 마구 쏟아져야 할 피크 타임이지만,
올라온 물건들이 없어 경매도 일찍 마감했는지, 노는 손을 어찌할지 모르는 중도매인들만 경매장을 서성이고 있다.
꽁무니를 데고 정신없이 들락날락 거려야 할 활어차들과 배송차들이 오늘은 얌전하게 멈춰 서있다.
오늘처럼 시장에 물건이 없는 날은 처음 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 깔린 물건은 새로 들어온 건 거의 없고 대부분 호우 전날에 팔고 남은 재고들이라는.
그야말로 개점휴업 중인 노량진. 1년 365일 명절 빼고 언제나 물건과 사람이 정신없이 드나드는 곳 이곳이, 밤새 비 한방에 멈춰 서버렸다.
경매장에 물건이 들어오질 못하니, 소매점도 답이 없다. 수조가 텅텅 빈다.
수산시장 지하 1층.
일찌감치 경매 모자를 벗고 내려와 있는 중도매인들.
한참 물건을 낙찰받아 거래처 여기저기 뿌리느라 담배 한 모금 빨 겨를이 없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이들이 할 일이 없다.
수조 청소를 하고
미뤄뒀던 작업장 정비를 하는 것 외에는.
근병 : 오늘 물건은 좀 샀어요?
엉클보스 : 수조에서 오래 버틸만한 A급들로 좀 구하긴 했는데, 큰일이네 비가 계속 온다 그러니.
근병 : 입하량이 확 줄었죠?
엉클보스 : 글치.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봐야지. 조업량도 적었을 테고, 이렇게 기상이 안 좋아 물동량이 떨어질 때는 양식장들도 출하를 조절하거든. 보내줘봐야 물건을 못 뺄게 뻔하니까.
근병 : 수조에 남은 애들은 어쩐대요?
마도로스김 : 필렛 작업해서 팔든지, 그래도 안되면 손해 보더라도 구이용으로라도 처리해야죠.
물건을 기가 막히게 빼는 날엔, 흥이 오른 상인들끼리 모여 팔다 남은 맛있는 거를 몽땅 때려 넣고 끓여 먹는 기똥 찬 해물탕을 얻어먹곤 했었는데. 이런 날 함께하는 조촐한 아침밥은 좀 씁쓸하다.
근병 : 이래저래 빨리 정비가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엉클보스 : 우리만 그러겠어. 매장에 물들어 찬 거래처들도 많은 모양이던데. 다 같이 살아야 서로 계속 먹고사는 것인디. 큰일이야. 다들 잘 견뎌야 할 텐데.
식당 TV에서 뚜껑이 떠내려간 맨홀에 행인이 빠져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장난기가 얼마나 많으면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수해 현장에서 실없는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리 큰 줄기로 봐도 지금은 장난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게 재난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호우엔 '재난 컨트롤 타워 부재'라는 타이틀의 기사는 왜 또 이렇게 찾아보기 힘든지.
상부상조 오마카세
오는 길에, 중도매인들 작업장에 남은 활어회 필렛들을 몽땅 쓸어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구이용이 될 처지. 횟감으로서 이 녀석들의 품위는 내가 지켜줄 것이다. 딴지엔 입이 많으니까 뭐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겠지.
작업 한지 좀 된 녀석들이지만,
노량진 숙성실에서 완벽한 컨디션으로 대기하고 있던 놈들이기에, 맛은 오히려 좋을 것이다.
하 이 좋은 횟감들이 시장에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으니, 증말로 맴찢.
다음날. 딴지 주방.
수해 극복 기원, 상부상조 오마카세를 개최할 예정.
구이용이 될 뻔한 녀석들과 배고픈 동료들을 구원해 보자.
돌돔과 병어돔의 질감이 초밥을 쥐기에 딱 좋은 차진 숙성도를 자랑한다.
밥을 좀 짓고,
살을 적절하게 저미며 오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첫 번째 손님 입장.
손님이 많이 시장 하신 듯. 속도가 빠르심.
총수 : 야 이거 쥑이는데.
근병 : 비싼 거라 그래요.
한 접시 리필 중, 자리를 잡는 두 번째 손님.
죽돌 : 그래서 노량진까지 걸어 갔드나?
근병 : 새벽에 택시 안 잡힐 거라고 그랬잖아요.
죽돌 : 아이고.. 고생을 그래해서 우짜노..?
걱정하는 마음, 그렇지 못한 식욕.
서울 경기를 괴롭혔던 비구름이 충청과 호남을 할퀴며 내려가고 있다.
부디 아무도 다치질 않길, 하루 속히 일상의 모든 게 비 오기 전으로 복구되길, 빌며.
<근육병아리의 방구석 오마카세 외전 : 서울 집중 호우, 물에 잠긴 노량진에 가다>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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