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0. 넷플릭스 회원 만이 볼 수 있는 작품에 대한 글을 공개된 장소에 쓰게 된 점 송구스럽습니다. 영화/드라마에 관한 글을 쓸 때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대중문화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독자층에 관해 고민할 이유가 크게 없었는데, 이것도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Netflix-launches-website-Tudum-main-3402edc0-22ef-4394-804e-c4ce28015507.jpg

 

제가 쓰는 글이 감히 그런 기능을 갖고 있을지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만, 이 글은 넷플릭스 회원 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영상 만으로도 작품의 분위기는 충분히 체험하실 수 있으실테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부디 널리 양해해 주시길 빕니다.

 

 

690d8a02d77f0f4cac708a4957541a46ba0409a93ef92d271054ff5a93637816be3c5eb3fb774cc9780ef5cc50190df4f164004ebdd04324bc45b5923a3c59957573ef9a156ad6296e3668372499fe0a809aa2772849288ee64fac3b6b169a08.jpg

 

1. 넷플릭스는 2022년 11월 23일 수요일에 ‘웬즈데이’라는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를 공개했습니다. 아담스 패밀리의 캐릭터 중 한 명인 웬즈데이가 주인공인 새로운 드라마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지요. 이렇게 작품의 제목과 주인공의 이름과 같은 경우 주인공을 ‘타이틀 롤’이라고도 합니다. 웬즈데이 아담스가 투란도트, 해리 포터, 햄릿,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반열에 올랐음을 잠시 다 함께 기뻐합시다.

 

 

 

2. ‘아담스 패밀리’의 원작인 신문 카툰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담스 일가의 설정이 큰 틀에서 완성된 것은 1960년대 미국 ABC에서 방영된 TV 시트콤이었지요. 여담이지만, 마침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의 2021년 최고 히트작인 완다 비전이 2차대전 전후 미국의 TV 시트콤 역사를 시대순으로 재현해 줬으니 완다 비전 에피소드 1-2편을 보시고 1960년대 아담스 패밀리 시트콤의 영상을 찾아보시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겁니다.

 

 

maxresdefault.jpg

 

3. 물론 누가 뭐라 해도 2022년의 드라마 웬즈데이에 열광하고 있는 기성세대 입장에서 아담스 패밀리라 함은 1991년과 1993년에 차례로 공개된 극장판 아담스 패밀리 1편과 2편이겠지요. 이 영화에서 아담스 가문의 장녀 웬즈데이를 열연한 크리스티나 리치는 2022년판 드라마 웬즈데이에서도 중요한 역할로 등장합니다.

 

 

 

4. 드라마 시작 시점에서 웬즈데이가 재학중인 고등학교는 ‘낸시 레이건 고등학교’라는 가상의 학교입니다 낸시 레이건은 로널드 레이건의 영부인으로, 레이건 행정부의 강력한 마약과의 전쟁 정책을 상징하는 ‘Just say no’ 연설로도 유명합니다. 

 

 

이 연설 말미에 낸시 레이건은 마약 중독을 극복해 낸 10대 소녀의 이야기를 인용합니다. 그 소녀는 마약에 중독돼 있던 시절 세상이 검고 회색으로만 보였으나,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면서 세상의 생생한 색깔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됐다고 하죠. 연설은 이렇게 끝납니다. ‘청년 여러분. 삶은 멋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어야죠. 눈을 뜨고 삶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하신 생생한 색깔들로 가득 찬 세상을 말입니다. 삶을 긍정하고, 마약과 알코올의 유혹은 단호하게 거절하세요(Just say no). 다시 봐도 근사한 연설이지요.

 

 

 

40_ronald_reagan.jpg

 

 

5. 연설이 근사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 연설이 상징하는 마약과의 전쟁은 미국 사회의 수많은 모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마약 단속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Just Say No 캠페인으로 대표되는 기나긴 마약과의 전쟁은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비교적 가벼운 범행으로도 유색인종이 대거 실형을 받고 투옥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들을 교도소로 보내고, 교도소를 유지하고, 전과자로 만들어 다시 사회로 내보내는 과정에서 무수한 사회적 비용이 낭비됐습니다. 낸시 레이건이 연설에서 인용한 ‘검고 회색으로 가득 찬 세상’과 ‘생생한 색깔들로 가득 찬 세상’의 대비치곤 꽤나 씁쓸한 결론이죠.

 

 

6. 웬즈데이 아담스는 바로 그 낸시 레이건의 이름을 딴 가상의 고등학교에서 남동생 퍽슬리 아담스에게 학교폭력을 자행한 자들을 더 강력한 폭력으로 응징한 뒤, 작품의 주요 무대인 네버모어 아카데미로 전학을 가게 됩니다. 드라마 웬즈데이 시즌 1을 상징하는 키 비주얼은 누가 뭐라 해도 웬즈데이 아담스와 룸메이트인 이니드 싱클레어가 기숙사의 원형 창문을 배경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일텐데, 이 장면에서 이니드 쪽의 컬러로 가득 찬 절반의 창문과 웬즈데이 쪽의 흑백만이 존재하는 절반의 창문이 명징한 대비를 이룹니다.

 

홀라_웬즈데이3.jpg

 

도입부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가상의 학교명 하나로 이만큼의 암시를 담아내는 걸 보니 시리즈의 문을 여는 시점에서의 팀 버튼 감독의 폼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7. 시즌 1의 키 비주얼은 기숙사 창문을 배경으로 서로 마주보는 이니드와 웬즈데이이지만, 역시 요즘 시대에는 화제를 모을 만한 영상이 필요한 법이지요. 공개된지 2주만에 유튜브에서 1,800만 뷰를 기록한 웬즈데이 댄스 영상을 잠시 감상하시겠습니다.

 

 

웬즈데이 아담스 역의 제나 오르테가가 안무를 짜는데 많은 관여를 했다는 후문입니다. 이미 웬즈데이 댄싱 챌린지가 틱톡에서 이어지고 있더군요.

 

 

8.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에서 화제를 모을 만한 중요한 장면을 유튜브에 공짜로 공개하는 것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상식을 깨려는 노력이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건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겨울왕국의 Let It Go 입니다. 

 

 

세계적으로 영화가 한창 공개 중이던 2014년 1월 31일, 디즈니는 겨울왕국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이 노래의 편집본도 아닌 전곡을 본편 영상과 함께 그대로 공개한다는 영상물 홍보의 역사를 바꾼 용단을 내립니다. 유튜브에서 클라이맥스를 공짜로 보고 들을 수 있으면 누가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러 가겠냐는 우려와는 달리, 이 영상이 크게 히트한 것이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지기도 했죠. 웬즈데이의 댄스 영상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흥미로운 관점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Let It Go는 벌써 30억 뷰를 넘었군요.

 

_127728854_9673452a-c4e9-4623-baf7-cab8feeef301.jpg

 

9. 네버모어의 오피셜 가쉽 퀸 이니드 싱클레어는 SNS를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합니다. 웬즈데에가 네버모어에 전학 온 날에도 우선 인스타그램, 스냅챗, 틱톡 가입을 권하지요. 그렇습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따위는 권하지 않았습니다. 친애하는 동료 트위터리안 여러분, 이것이 세월의 풍파에 밀려난 우리의 숙명입니다. 받아들입시다. 물론 작품 시작 시점에서 스마트폰조차 사용하지 않는 웬즈데이는 이 제안을 쿨하게 거절합니다.

 

 

46560_1669807275.png

 

10. 웬즈데이가 작품 내내 유지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현대 이전의 삶이 얼마나 ‘부피’를 필요로 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타이프 라이터로 소설을 쓰고 축음기로 음악을 들으려면 학기가 시작하고 끝날 때마다 그걸 차량으로 옮겨 줄 집사 정도는 필요합니다. 제작진이 이와 관련한 연출에 꽤 신경을 쓴 것이 보이는데, 웬즈데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물건들을 ‘몇 달에 한 번’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전용 케이스와 가방들, 그걸 트렁크와 지붕에 싣고 이동할 수 있는 의전용으로 써도 될 차량 등을 보면 이런 라이프 스타일은 사용인이 있는 걸 전제로 한다는 걸 새삼스레 실감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이 모든 것을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사이즈로 줄여 낸 혁신이었지요. 게다가 스마트폰으론 첼로 연주는 할 수 없어도 작곡은 할 수 있습니다.

 

 

11. 이 도도한 시대의 흐름에 더욱 도도하게 맞서는 웬즈데이 아담스는 바로 그 사용인이 있는 가문의 장녀입니다. 아담스 가문의 집사 캐릭터로는 러치와 씽이 있는데 특히 씽은 드라마에서도 대활약을 하죠. 씽은 1960년대 시트콤에선 당시 기술의 한계로 특수촬영을 통해 표현된 캐릭터였지만 1990년대 실사영화 이후 아이코닉한 캐릭터로 급부상 합니다.

 

이번 드라마판에선 실제 마술사인 퍼포머가 손 연기를 담당했습니다. 많은 장면에서 실제 배우와 같이 호흡을 맞췄기에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있었지요.

 

 

12. 씽이 그 존재만으로 아담스 패밀리 시리즈의 ‘얼굴’이기도 하다는 점을 넷플릭스의 이 프로모션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웬즈데이가 뉴욕에 씽을 풀어놓는다는 컨셉의 홍보 영상을 함께 감상하시죠.  이런 류의 기획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뉴요커들의 숙달된 리액션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캡처.JPG

 

13. 러치의 캐릭터는 할로윈 시즌에 코스튬으로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살면서 몇 번이고 강조하건데,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널리 알려진 그 괴물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고, 정작 괴물은 원작 내에서 따로 이름이 없이 그저 괴물 혹은 피조물(크리처)이라고 불립니다.

 

 

img.jpg

 

 

14. 바로 이 러치와 씽이 있기에 웬즈데이는 21세기에도 어찌 보면 귀족적이라 할만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트콤과 실사 영화의 웬즈데이는 아동이었기에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야 하는 캐릭터였지만, 드라마의 웬즈데이는 운전사와 집사가 있는 집안의 장녀이기에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캐릭터입니다. 이 대비가 이후의 시즌에서 어떤 식으로 부각될지 팬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가 큽니다.

 

 

 

img.png

 

 

15. 라이프 스타일이 귀족적인 것과는 별개로, 웬즈데이 본인은 손에 기름 얼룩 묻히는 걸 꺼려하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아담스 패밀리 시리즈의 변하지 않는 바탕이자 흥미로운 점이기도 한데, 이 일가는 늘 ‘사실은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웬즈데이는 사용인인 러치와 씽을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가족처럼 대하며, 인사이더/아웃사이더/인기남녀/외톨이 같은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그러나 사실 그 어느 곳보다도 잔혹한 계급사회인 ‘학교’라는 사회에서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쌀쌀맞게 구는 훌륭한 공정함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단 친구가 되면 과거의 감정은 쿨하게 잊어버리고 나름의 배려심을 보이기도 하죠. 이런 편견 없는 성품이 이 캐릭터가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y0nFYo4vWmLAnIZQvzdmyStF1c5.jpg

 

16. 웬즈데이 아담스의 이러한 캐릭터성이 폭발한 명장면은 1993년에 개봉한 아담스 패밀리 실사 영화 2편의 캠핑장 방화 신입니다. 불을 지른다는 그 방화가 맞습니다. 극중극에서 포카혼타스 역을 맡은 웬즈데이 아담스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질책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훌륭하지만, 당시로선 아역에게 이런 대사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대담하고 놀라운 연출이었습니다. 아직도 이 연출과 대사에 감사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자가 있을 정도지요. 이 기회에 실사영화도 보시길 추천합니다.

 

 

116723345_1156781688014468_8650538425006666255_n.jpg

 

 

17. 아담스 패밀리 실사영화의 웬즈데이의 명대사 중 걸스카웃 쿠키란 것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웬즈데이의 반동인물로 등장하는 걸스카웃 여학생이 웬즈데이가 파는 레몬 주스가 진짜 레몬으로 만든 주스인지 한참을 깐깐하게 따지다가 ‘내 걸스카웃 쿠키를 사 주면 네 레몬 주스를 사 줄게’라고 말하자 “네 걸스카웃 쿠키는 진짜 걸스카웃으로 만든 거니”라고 물어보는 장면이죠. 이번 드라마에선 비록 쿠키는 아니지만 그냥 아침으로 먹어주마란 대사로 오마주됐습니다.

 

 

 

 

 

18. 웬즈데이 역의 제나 오르테가는 부친과 모친이 멕시코/푸에르토리코계입니다. 아버지 고메스 아담스 역의 루이스 구스만은 푸에르토리코인이기도 해서 함께 멕시칸/푸에르토리칸 음식을 먹는 영상을 찍기도 했죠. 

 

 

 

 

 

 

19. 제나 오르테가가 웜스 교장 역의 그웬돌린 크리스티에게 범상치 않은 걸 크러시에 빠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뷰 영상을 공유해 드립니다. 첫 35초 안에 세 번 사랑을 고백하고 인터뷰 내내 손을 잡고 있군요. 

 

 

03ee9624d8180f2b5ffdbb6311301654.jpg

 

20. 오늘날 웬즈데이 아담스라는 캐릭터가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는 것은 1990년대 실사영화에서 이 역을 담당한 크리스티나 리치의 명연기에 기대는 바가 큽니다. 그 크리스티나 리치가 드라마 웬즈데이에 중요한 역할로 캐스팅 됐음에도 현재 웬즈데이를 연기하는 제나 오르테가에게 ‘웬즈데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방법에 대해 따로 언급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제나 오르테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한 때 자신이 연기한 아이코닉한 캐릭터를 지금 연기하는 당대의 후배 배우를 존중하는 매우 훌륭한 자세이자 배려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