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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16. 금요일

아외로워


 


'세상이 평등하고 아름다우면 우리는 뭐 먹고 사니' 라는 영화 대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 속 타짜들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실 언론사에게도 해당된다.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언론사들이 아마 다 망해 자빠질 것이다. 물론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에 다니는 나는 ‘기린의 매력’ 이나 ‘북진통일 시나리오’ 같은 주옥 같은 글을 세상에 내놓으며 세간의 칭송을 들을 것이지만.


 



 


어느 인생, 어느 사회나 찬찬히 뜯어보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겠냐만은,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뭐 그렇게 소름이 바짝 돋게 행복하다거나 넌더리가 나게 평등하다거나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따라서 가카 같은 위인도 나오시고, 언론이 보도할 거리는 계속해서 생긴다. 민족정론지가 아닌 다른 군소언론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억울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무시하는 방어기제를 가지게 된다. 그들의 고통에 하나하나 반응하자면 그것도 하나의 고통이 아니겠는가. 방어기제를 가진다는 것이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에 가슴이 아프지 않아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고통을 효과적으로 외면하는 요령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방어기제의 甲은 ‘무관심’ 인데, 무관심 덕분에 우리는 난마처럼 얽힌 세상사에도 평온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무관심 속에 버려진 억울한 사람들이다.


 


법원 앞에 가면 이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오로지 억울함을 풀기 위해 생계를 팽개치고 법원을 들락거리는데, 대체로 변호사들도 나가떨어진 상태라 관련 서류를 보따리에 싸서 직접 짊어지고 다닌다. 법원 근처 사람들은 이들을 ‘보따리 장수’ 라고 부르며, 가급적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글은 법원 앞의 흔한 보따리장수에 관한 이야기다.


 




 


의성김씨 가문은 철종대에 조상인 학봉(鶴峯) 김성일 공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의 태백 인근의 임야를 하사 받는다. 김성일 공은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임명 받아 경상도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후에 학봉 김성일에 대한 논공행상은 아마도 없거나 부족했나 보다.


 


임야를 받았으니 거기에서 장작도 베고 동물도 잡아서 그 땅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산으로 부자가 되어봐야 얼마나 되겠냐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 땅이 수백만 평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상의 공로로 왕이 땅을 하사하여 후손들이 부자가 됐다는 중앙집권왕조스러운 미담으로 이야기가 끝나는가 했더니,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일본의 행정기관인 조선총독부는 이 땅 최초의 근대적인 토지제도를 시행한다. 이른바 ‘조선 토지 조사 사업’ 이라는 것을 통해서인데, 토지를 측량하고, 소유관계를 확실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겸사겸사 애매한 땅을 슈킹하려는 일제의 꿩먹고 알 먹는 프로젝트였다.


 


'토지 조사 사업'에는 일종의 후속조치인 '임야 조사 사업' 이 따라 붙는데, 이것도 그 대상이 취락 및 농경지에서 임야로 바뀐 것 빼고는 엇비슷한 사업이었다. 의성김씨 가문이 가진 임야도 이 사업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잠깐. 조선의 토지제도와 조선총독부가 이식하려는 토지제도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 일단, 조선은 철저히 중앙집권적인 전제왕권 국가였다. 즉, 모든 영토가 기본적으로 국유지였고, 개인과 단체는 국가로부터 토지의 점유를 '허락 받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공유지, 공동경작지 등의 개념은 근대적인(이라고 쓰고 '서구적인' 이라고 읽는) 토지제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성김씨 가문은 이 시점에 독립운동에 집단으로 투신하고 있었다.


 



 


사돈 쪽으로 가면 신흥무관학교 교장도 있고, 초대 임정 국무령을 지낸 분도 있다. 의성김씨들이 가진 태백의 임야 역시 독립운동 군자금을 대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조선총독부의 눈에는 의성김씨일가와 그들이 가진 부의 원천인 태백의 임야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을 빼앗겠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조선시대 공문서를 위조하는 것이었다.


 



 


위 사진의 오른쪽에 있는 문서가 일제가 이 땅이 원래 국유지였음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조선시대 공문서다. 저기에는 속초부사의 관인이 찍혀 있는데, 이 도장은 조선시대의 진짜 관인(사진 왼쪽의 까만 도장)과 비슷하지도 않다.


 


이 사건은 안동지청검사분국에서 맡게 되는데, 이 사건은 불기소 처분이 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서에서 조선총독부는 의성김씨가문이 이 임야를 취득한 경위와 경과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조선총독부가 보기에도 이 땅은 의성김씨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전략)...조선 국왕으로부터 본건 임야를 상으로 하사 받아 여러 대에 걸쳐 계승하여 지금으로부터 46년 전에 하원보를 산지기로 임명하여 수호와 금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후략)'



 


이런 식으로 송사가 진행되고 재판을 하고 하다가 속 시원한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로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게 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후 우리나라는 극심한 혼란기를 겪었고, 전쟁도 치렀다. 그러다가 수십 년이 지나서야 의성김씨의 후손들은 땅을 되찾으려 소송을 치렀다.


 


법학을 잠깐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일제시대에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국가를 상대로(어쨌든 대한민국은 조선총독부의 법률관계를 인계 받았으니) 벌인 장구한 투쟁의 역사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패자였고, 승리한 경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국장의 말에 따르면 "이런 땅 문제는 너무 많고, 그 땅들도 너무 많고, 돌려받을 법적 근거도 빈약할 뿐 아니라 승소할 만한 근거가 확실한 경우도 많지 않다." 고 말한다. 승소한 경우가 있냐는 질문에는 "글쎄요... 거의 없을 걸요." 라고 대답하셨으니, 그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소송을 진행한 의성김씨의 후손 김용진씨도 소송에서 졌다. 이런 소송에서 나오는 말은 사실 언제나 거의 같다. 억울한 사연은 알겠으나 증거가 모자라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관련 법안이 없다는 것이다.


 


김용진씨는 피고측인 국가가 내세운 증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 문서는 조선총독이 문제의 태백시 인근 임야에 대해 완결처리, 측 그 땅을 국유지로 귀속시키는 것을 확정한 결재서류다.


 


이 문서는 태백시의 임야에 대해 일제시대에는 그 처리가 미결된 상태로 삼림국에 이양되었다는 다른 증거서류와 배치되며(일제는 독립운동가 가문의 땅을 수탈하거나 반환하거나를 확정짓지 않고 질질 끄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땅을 볼모로 독립운동가문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문서 자체에도 문제가 많기 때문에 위조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당 문서가 법원 증거자료로 제출될 당시에는 이 문서가 마치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정리하자면 태백시의 수백만 평의 땅은 원래 의성김씨의 땅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수탈이 될까 말까 한 상태로 묶이게 됐고, 광복 이후 반환 소송에서 원래는 없던 미심쩍은 증거로 인해 대한민국 국유지로의 귀속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이런 억울한 재산문제가 그저 '많을 것이다', 혹은 '무지무지 많다' 정도로만 추정할 뿐이지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일은 없다고 했다. 또한 개개의 건이 대단히 넓은 땅에 대한 것이거나, 혹은 도시화 돼서 사실상 반환이 불가능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는 청량리 인근의 땅을 빼앗긴 독립운동가 정인호의 땅이다. 청량리역 맞은편의 상가와 아파트단지가 원래 그의 땅이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 빼앗겼다. 후손인 정진한씨는 이 땅을 되찾거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보상이라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관련 법령이 없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그리하여 여지것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잃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관련 법령 미비'를 이유로 훈장 하나 받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가 많았다. 훈장은 영예로운 것이지만 그들이 치러야 했던 현실적인 희생에 대한 보상이라기엔 너무 초라하다.


 


물론 독립운동가 피탈재산 회복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대 국회에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회장이었던 당시 열린우리당 김희선 전 의원은 이 문제에 선구적인 관심을 보였다. 김 전의원은 '독립운동가 피탈재산의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 을 발의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폭풍같은 정국과 무관심 속에 17대 국회는 그냥 끝나버리고 만다.


 


김희선 전 의원 자신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18대 국회에서도 같은 법안이 법사위에 상정되었지만 무관심은 여전하다. 이 법을 대표발의한 자유선진당 박상돈 의원측에 의하면, 우선 독립운동가 피탈재산 문제를 외면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주체인 국가(피탈 부동산의 경우 국유지인 경우가 무척 많다)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법안 통과에 비협조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실질적인 피탈재산 사정에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들며, 무엇보다도 피탈재산에 대한 입증이 힘든 경우가 무척 많다. 게다가 이제는 그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진 2세나 3세들까지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있다.


 


자유선진당 박상돈 의원


 


그나마도 ‘독립운동가 피탈재산의 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안’은 18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는 것이 사실상 확정적이다.


 


과연 조선시대에 재산을 취득하고 그것으로 지주노릇을 했던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논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야 어찌됐든 조선시대의 재산관계는 일제시대에 이어 대한민국까지 승계됐다. 심지어 매국노들도 자기들의 땅을 가지고 권리를 주장한다. 그런데 왜 유독 독립운동가들의 땅만은 그 권리를 인정받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했다. 일제시대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치욕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국가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우리는 광복을 맞았지만 그 시기에 희생을 치른 사람들은 잊고 있다.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이 침략자에게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겼다면 그 재산을 되찾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설령 그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하더라도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차선책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헌정사상 단 한 번도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적이 없다. 국가는 돈 안 들고 골치 아프지 않는 훈장만 줬다. 훈장은 명예로운 것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치러야 했던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원죄다. 국가와 민족의 위기에 온 몸으로 맞섰던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인색함은 이 정부와, 그리고 제대로된 공론화를 시키지 못했던 정치권, 그리고 우리 모두의 혐의다. 우리가 무슨 낯으로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한 자기 희생을 요구하겠는가.


 


아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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