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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0. 화요일

정우성


 










지난 회


1부


2부


3부


4부


5부


6부




 


“육아는 정치다”


 


가장 바람직한 육아가 무엇인지, 누가 그 방법에 대해서 내게 묻는다면 그 혹은 그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특별히 없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정답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마다 다르며 시기마다 다르지 않을까. 단지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내가 옛 현인들로부터 지혜를 얻기 위해 두 귀를 열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두 귀를 열고 살기를 바라고, 사람이라면 무릇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도 아파하기 슬퍼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두 귀를 열고 두 눈을 뜨고 냄새를 맡고 들숨과 날숨의 소중함을 알기를 바란다.


 





나는 아빠다. 누구나 좋은 아빠가 되고 싶고 누구나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다. 나는 지난 번 글에서 가사와 육아를 부모가 공동 분담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완고하다. 일단 일찍 퇴근해서 저녁을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잔업이 있고, 야근을 해야 하며, 눈치를 봐야 하고, 접대라는 문화도 있다. 때로는 휴일에도 출근해서 일해야 하곤 한다. 물론 개인적인 문제이고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회사를 관둘 자유가 부모에게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 시스템 문제라서 개인의 결단을 촉구할 수는 없다. 정치적인 문제다. 모든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로 환원될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성이 없는 것도 드물다.


 


주5일 근무제라든지, 최저임금제, 법적근무시간은 육아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런 규정은 모두 법령에 기초해서 이뤄지고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과 정치세력의 입김이 작용하며 사회적 합의도 필요한 일이므로 정치적인 문제다. 국가가 육아수당을 지급하고, 국공립 육아시설을 늘리고, 사립 육아시설을 지원하는 것도 개별 가정의 육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것 또한 정치적인 것이다.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아빠 혹은 엄마가 직장을 잃었을 때의 실업수당이라든지 생계 보장을 위한 사회제도 역시 정치적인 거다. 도대체 정치로부터 육아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보통의 엄마와 아빠라면 복지와 사회 보장을 늘리기 위한 정치적 노력과 행동에 으레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또 지지와 거부를 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혜택을 누리려고만 든다.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어인일인지 육아와 자녀교육의 면에서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들도 많다.


 


 


87년 체제


 


나는 우리나라의 육아와 교육 문화를 바라볼 때마다 뜬금없이 87년 체제를 생각한다. 87년 체제는 독재를 무너뜨리고 정치적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성과를 거뒀다. 커다란 사회적 목적이 사라지자 87년 체제의 주인공들(지금의 대부분의 40대)은 사회적인 책무라는 짐을 내려놓고 자기 개인의 시급한 영달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97년 IMF 구제금융을 경험하고 전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탐욕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유대를 잃고 저마다 개인으로 파편화됐다. 그러자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고 또 심한 경쟁을 체험하면서 우리 아이들도 조속히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고 보채기까지 하며 자기 탐욕의 그림자를 아이들에게 드리웠다.


 


그 결과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이 바로 육아와 교육 현장에서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나름의 가치관을 갖고 경쟁과 탐욕으로부터 자기 아이를 지키려는 아빠와 엄마야말로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최전선의 투사인 셈이다.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87년 체제는 정치적 성과를 거뒀지만 정신적 실패를 낳았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의 정신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결국 개인이 알아서 극복하라는 것이므로 불가능한 일이다. 부모의 정치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유대를 다시 만드는 일이야말로 이 탐욕을 거둬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다 보니 우리 인생이 아래 그림처럼 됐다. 안분지족하는 마음이 사라졌고 마음의 평화는 요원해졌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습관처럼 되뇔 수는 있어도 이 회전대에서 자유를 잃는다. 돌고 돌고 돈다. 소주잔을 부딪치면서 허튼소리를 늘어놓으며 세태를 한탄하지만 낮이 되면 우리는 다시 기계처럼 일한다. 어차피 일을 해도 정상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부를 이룰 수 없음을 눈치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기도 한다. 돈이 많다고 하려면 적어도 집은 한두 채 있어야 하고, 자식 결혼 자금은 마련해 둬야 하고, 좋은 차를 굴려야 하고, 좋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야 하는 등등. 우리는 주식을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며 불로소득을 꿈꾼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는 경쟁 피라미드에서 높은 곳에 빨리 다다를 수 있도록 보챈다. 87년 체제의 가장 큰 성과물은 사교육시장이며 부동산 시장인 것이 우연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아니 돈의 많음을 확인하기 위해 돌고 돌고 끝없이 도는 이 회전과 작별을 고해야 한다. 그래야만 바람직한 육아와 양육이 지속 가능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 하지만 이 역시 개인이 해결하기 참 어려운 문제다. 이 또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개인이 스스로 해결하라고 방치하면 할수록 양극화의 골은 깊어지고 누군가의 고요한 비명이 가슴을 찌른다. 2010 년 현재 OECD 국가 중 우리나라 자살률이 제일 높다고 한다. 정치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유대를 확대해야 한다.


 


대한민국 연령대별 인구 10만명당 자살률(통계청)

























































연 령

2000

2010

증감(%)

10-19세

3.8

5.2

1.4

20-29세

11.1

24.4

13.3

30-39세

15.1

29.6

14.5

40-49세

18.8

34.1

15.3

50-59세

22.1

40.1

18.0

60-69세

25.7

52.7

27.0

70-79세

38.8

83.5

44.7

80세이상

51.0

123.3

72.3



 


 


가장 완고한 관료 세력들


 


좋은 육아와 양육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심한 경쟁으로부터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어느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너무 거대하고 검고 완고한 벽 앞에서 개인은 지극히 약하고 초라하다. 어떤 이들은 공동육아와 대안학교를 말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공동육아는 육아의 사회적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엄마 혹은 아빠가 그것에 상응하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써야 한다. 하지만 모든 부모에게 그런 정도의 자발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는 아빠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혹은 엄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므로, 만일 육아를 위해서 부모가 자기 인생을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일반론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육아의 사회적 서비스, 교육의 사회적 서비스가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끝도 없는 경쟁과 순위 싸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게 이해관계가 아주 깊이 개입돼 있다는 점이다. 무릇 이권이 크게 얽혀 있는 영역에는 완고한 관료주의가 자라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완고한 관료주의가 뿌리내린 곳이 있다면 특히 두 곳을 들 수 있다. 바로 ‘산업정책’ 영역이고 ‘교육정책 영역’이다. 전자는 삼성전자 등의 재벌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기 때문이며, 후자는 사학의 입김이 거세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관료가 이른바 ‘삼성장학생’이 되고, 교육관료들은 사학의 눈치를 본다.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산업정책에서 어떤 입장을 펴는가, 교육정책에서 어떤 소견을 가졌는가를 보고 판별하면 대충 맞아 들어간다. 참여정부 시절에 사학법 개정을 둘러싸고 그렇게도 박근혜씨와 한나라당이 거리 투쟁을 하며 격렬하게 저항한 것도 다 그런 맥락이 아닐까. 관료와 재벌과의 끈을 끊지 않고서는 산업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관료와 사학의 끈을 자르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들의 자유로운 유년의 인생을 보장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끈을 과감하게 자를 수 있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노동문제와 환경문제, 참 중요하다. 검찰개혁이나 경찰개혁도 시대적 요청 같다. 각종 비리와 패역에 대한 서슬 퍼런 조사도 중요하다. 사법개혁과 조세정의도 물론 중요하다. 남북관계와 여러 가지 외교정책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아빠라는 실존의 관점에 생각해 보면, 교육정책에서 관료주의를 청산하고 비전과 양심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결여된 사학을 교육시장에서 추방하며, 국가가 결심할 수 있는 영역은 과감하게 실현하는 정치를 보고 싶은 것이다. 굳이 내가 원하는 정책이 있다면 대충 이런 거다. 전문적인 연구를 해서 마련한 정책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딴지 걸어도 좋다.


 



(1) 국가예산의 사학 지원 통제


(2) 서울대를 해체하고 국공립대학교 평준화


(3) 중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인문학 수업을 대폭 늘릴 것


(4) 교육적 책무보다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학교를 이용하는 사학 축출


(5) 국공립 교육의 확대와 강화


(6) 국공립 보육시설의 확충과 민간 보육시설의 지원 확대(혹은 기준 완화)


(7) 미국에서 학위 받은 교수들 좀 그만 뽑자


(8) 관료들의 교육 프로그램도 미국에 좀 그만 보내자


(9) 선생들의 숙제정책 금지 (아이들 숙제라는 핑계로 부모가 대신 숙제를 하도록 만듦)


(10) 국공립대학교 등록금 무상(금융프로그램에 의해서 졸업 후 일정 수준 임금이 되면 차감하는 것도 괜찮아 보임)


(11) 인간적으로 자격 없는 교육자를 공교육현장에서 과감하게 퇴출



 


 


부동산 문제와 육아


 


탐욕의 굴레에서 부모가 벗어나는 게 시급하고, 이건 마치 개인이 결단하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가사와 육아에 봉사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 여유를 가지려면 일에 대해서 좀 자유로워져야 한다. 일을 할 때에는 성실히 임하고 집중해야겠지만 퇴근을 빨리 하고 가족과 저녁을 함께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함부로 직장을 관둘 수 없다. 그럴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아이를 양육하고 또 아이가 성장함에 있어 한 명보다 두 명이 좋은 것 같다. 두 명보다는 세 명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서른 다섯 살이 넘어서 두 아이가 생겼는데, 마흔 살을 넘어서 또 한 명을 낳기가 어렵게 됐다. 내가 아이를 낳는 게 아니라 아내가 아이를 낳는데, 아내의 나이도 있고 또 아내의 인생도 있어서 아무래도 셋째는 요원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가의 보육지원 정책을 늘리고 각종 혜택을 주기 위해 정부와 자치단체가 여러 모로 노력한다. 유용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어딘지 부족하다. 아이를 많이 낳으려면 우선 일찍 결혼해야 한다. 당연하다. 흥미로운 통계청 자료가 있다.


 




































 

1975년

2000년

2010년

남자초혼평균연령

26.8세

29.3세

32.2세

여자초혼평균연령

22.8세

26.5세

29.8세

40대 남성 미혼자

-

32,427명

102,963명(218% 증가)

35~44대 여성 미혼자

-

48,080명

125,493명(161% 증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결혼을 늦게 하는지 분석을 하고, 그것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제의 주원인은 목돈이 필요한 결혼자금 같다. 그러니까 목돈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부동산에 소요되는 목돈이다. 두 남녀가 눈이 맞고 사랑을 하여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직장이 있고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면 결혼도 응당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목돈이 필요하다. 혼례비용이야 쌍방이 어떻게 해서 적절히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집을 사거나 전세를 구하거나 월세를 구하려고 해도 목돈이 필요하다. 기천만원에서 수억 원 이상의 돈이 필요한데, 20대 중후반에 그런 돈을 젊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자꾸 결혼이 늦어지는 것이다. 부모가 평생 모은 돈으로 자녀에게 필요한 목돈을 지원한다. 그러면 부모의 노후는 어떻게 되는가?

 



 


과격한 생각이지만 나는 지금의 부동산 시장이 “대폭락”하기를 바란다(집을 ‘투자 개념’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리고 전세제도가 사라지고 다른 나라처럼 보증금도 낮게 형성되기를 바란다(월세는 경제수준에 맞게 적절하게 수렴할 것으로 본다). 이로써 두 남녀가 결혼을 함에 있어 경제적인 책임을 가진다 하더라도 목돈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면 저출산 문제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을까 싶다. 그 뿐이 아니다. 돈에 묶이고 노예처럼 돌고 도는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개인의 결단이 더욱 용이하지 않을까, 여유를 회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를 내려다보는 대부분의 무게는 하루하루의 생활이 아니라 목돈의 무게다(물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도 있다). 집을 사기 위한 목돈, 보증금으로 묶이는 목돈, 은행에 돌려줘야 하는 목돈 말이다.


 


물론 부동산 거품이 급격히 꺼지면 우리나라 경제는 끝장이므로 연착륙시켜야 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것도 어느 면에서는 타당하겠지만, 나는 아빠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젊은 세대들에게 이 목돈의 굴레를 끊어주고 싶을 따름이다. 집의 크기와 가치가 사람의 존엄성을 대변하지 않는다. 5평에서 사는 사람과 50평에서 사는 사람의 인생의 무게는 같다. 이것을 상식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자라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런 문제 역시 극히 정치적인 것이다.


 



 


 


 


육아는 정치다


 


다시 돌아와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위에서 말한 저출산문제나 부동산문제도 결국 육아에 관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겁이 많다. 불안감 같은 것. 그것은 대개 미래를 향한 불안감이다. 사람이 집단을 이루면 더 불안해 한다. 불안은 전염성이 있으니까. 하여튼 그렇다. 불안감에 있어서는 종교는 참 좋은 알약이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이런 알약을 먹고 불안감을 치유하려 든다. 문제는 사람들이 점점 강력한 효험의 약을 원한다는 것이다. 제사장과 점성술사들의 신비로운 약도 있었는데 점점 잊혀졌다. 약발이 들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자와 구원을 믿었다. 미래를 종교에 저당 잡혀 놓으면서 불안감이 치유될 것을 기원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강력한 종교의 힘으로도 사람들은 평안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기독교도가 온유한 마음을 잃고 탐욕의 전위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쫄지는 말자. 불안은 당신 탓이 아니다.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 자기 혼자라도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사회적 유대를 잃고 개인으로 파편화되게 되면 꼭 나타나는 유형이다. 양육에 있어 ‘알파맘’ 같은 사람들이 그런 유형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쫄아서 그런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는 부모의 비좁은 상상력보다 훨씬 많은 상상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미래에 관한 한 부모의 생각은 본디 역부족이다. 자기 인생도, 자기 미래도 모르는 그 빈약한 상상력 안에 아이들을 가두는 것이야말로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방목하느니만 못하다. 미래는 힘 없는 개인이 준비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미래는 당신의 머리로는 알 수가 없다(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불안하다는 이유로 미래의 무게를 아이들의 어깨 위에 함부로 올려 놓지 말자.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아이를 학대한다. 그리고 이렇게 학대하게 된 까닭은 어른들이 먼저 쫄아서 그런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한다. 그게 사람이고, 불안해서 그런 거다. 사람들은 이제 생각을 만들기 시작한다. 가정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정을 전제로 아이들을 양육한다. 영어를 잘하면 성공한다는 가정, 영어를 잘하려면 유아시절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가정,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성공한다는 가정,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가정, 좋은 학교도 부족하니 좋은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가정, 아이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가정, 좌우간 1등이 좋다는 가정, 돈이 많으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온갖 가지 가정. 이런 가정 밑에는 각종 통계나 전문가들이 쓴 기사들이 있다. 나는 그 통계나 전문가들의 입술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통계나 전문가들이 말하는 미래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믿어도 좋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귀담아 듣는 사람을 붙들고 딱히 이야기할 거리는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고. 부는 세습된다고. 아무나 성공할 수 없다고. 우리 아이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욱 용을 써야 한다는 말씀.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옛날 이야기는 그만하라는 것. 하지만 그건 비좁은 생각이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 세상 또한 바뀔 수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시스템은 바뀔 수 있다. 당신이 바꿀 수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대단한 투사가 될 필요는 없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투사다. 대통령은 법으로 통치하고, 국회의원은 이런저런 법률을 만든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국민이 뽑는다. 당신이 뽑는다. 아빠가 뽑고 엄마가 뽑는다. 우리가 뽑은 사람이 법을 만들고 그 법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간다. 법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정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 당신의 몫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당신을 생각하는 국회의원을 뽑으라는 것. 당신의 교육감을 뽑으라는 것. 이게 바로 시급한 양육의 지혜가 아닐까.


 


아이들의 아주 먼 미래의 출세를 위해서 어려서부터 경쟁을 시키고 이런저런 학원에 보내고 독려하고 목뼈에 깁스를 붙여 옆뒤를 보지 못하게는 만들었는데, 세상이 또 바뀌었다면 이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요컨대 그렇게 기를 썼는데, 어느날 서울대가 사라졌다, 입시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대학 나오지 않더라도 취직하는 데 문제가 없게 되었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을 선호하게 되었다, 영어보다 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대우 받게 되었다, 윤리와 인성이 더 중요해졌다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미래를 좋아한다. 그런데 한 사람의 힘으로는 그런 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여러 사람으로도 안 된다.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의 힘이 모이면 가능해진다. 바로 정치다. 양육은 정치다. 정치는 힘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미래는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 당신이 투표를 하는 순간, 제대로 투표하는 순간 세상은 바뀐다. 더디더라도 바뀐다.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투표를 하자. ‘투표근육’을 평소 단련시키자. 물론 지금 세상이 참 좋고 이대로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굳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지 않으니까. 그게 바로 정치무관심의 본질이니까.


 


일등일등일등을 외치는 것은 관상이 안 좋은 수구 세력들이 좋아하는 언사다. 가만 보면, 일등일등일등을 외치는 시스템을 사학이 강력하게 떠받친다. 가만 보면, 이런 경쟁구도야말로 사람들의 불안감과 교환되면서 눈 먼 돈을 만들어준다. 사학은 수구세력들이 장악했다. 가만 보면 박근혜씨와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학법 개정에 그토록 극렬히 저항했던 까닭은, 교육개혁이야말로 수구세력의, 보수정치의 가장 약한 고리였기 때문이 아닐까. 가만 보면.


 




 


옛날 일이다. 일 때문에 17대 국회 의원회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17대 국회의원인 정봉주 의원을 처음 만났다. 환하게 웃으면서 논점에 어긋난 깔대기가 시작됐다. 열린우리당에서 교육정책은 정봉주로 시작하고 정봉주로 끝난다는. 그런 정봉주 전의원이 교육부장관이 된다면 관료들을 모두 쓸어낼 수 있을까. 누구든 기대하고 싶은 사람을 보고 싶다. 다음 정부에서. 아니면 그 다음 정부에서.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오늘도 나는 괴물과 싸운다. 어린 것들을 방 안에 가두고 부추기는 경쟁심, 질투, 합리성으로 가장한 설득, 강박관념, 거짓말, 개소리, 돈 냄새 맡은 고양이 눈깔, 잘난 척, 머릿속에서 환장하는 먼 미래, 순위 싸움, 쏘세지와 인형들, 그리고 외로움과 불안감. 나는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최전선에 있다. 나는 아빠다.


 


정우성

@hanaeserin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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