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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7. 화요일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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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등교육을 생각함


 


(지난주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등짝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가벼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나는 일등일등일등 부르짖는 경쟁교도들, 혹은 명시적으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되기를 앙망하는 속물 근성과 싸운다. 아빠가 벌이는 이 싸움은 진지전이다. 적들은 포위망을 좁히며 공성전을 시도한다. 그들은 허구한 날 투석기를 이용해서 요란하게 돌을 던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돌들은 정신을 파고 든다. 나는 정신 공격에 일체 응전하지 않는다. 여기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 에피소드 1


 


어느날 딸 아이가 내게 하는 이야기다.


 



“아빠는 맨날맨날 일등만 좋아해.  맨날 일등 유나, 일등 유나, 한단 말이지.” 



 


난 매우 놀랐다. 나는 한 번도 아이에게 일등을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고 암시조차 던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 아이는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곰곰이 생각하자 짚히는 데가 있다.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밤’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잠을 자기 직전에, 잠에서 깨어난 그 순간마다 아이에게 따뜻함과 환상을 주기 위해 애써 왔다. 특히 아이가 오줌을 누기 위해서 중간에 일어날 때에는 가급적 함께 일어나서 아이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뭐라고 중얼거린다.


 



“아빠는 유나를 너무 사랑해요”, “유나는 아빠를 너무 사랑하지?” 따위다.



 


그런데 어느 날에서부턴가 아이가 밖에서 경쟁에서 초래되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온다는 느낌을 받고 위로를 겸해서 표현을 바꿨다.


 



“아빠는 일등 유나도 사랑하고, 꼴등 유나도 사랑하지?”라는 표현이었다.



 


바로 이 표현의 문제였다. 잠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나 혹은 중간에 잠시 일어난 경우, 그 순간은 의식과 무의식의 넘나드는 문이 열린다. 그 문에서는 다른 어느 때보다 언어의 파급력과 의미의 지배력이 훨씬 강해진다. 내가 비록 일등과 꼴등을 공평하게 언급했다고 하더라도, 그 순서가 늘 일등이 먼저고 꼴등이 나중이었던 것. 그리고 아이는 그 순서를 맨날 들으면서 ‘아, 우리 아빠도 꼴등보다는 일등을 좋아하는구나’라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날부터 나는 순서를 바꿨다.


 



 “아빠는 꼴등 유나도 사랑하고, 일등 유나도 사랑하지?”라는 것이다.



 


물론 그냥 꼴등이니 일등이니 하는 표현도 필요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꼴등’이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넣고 싶었다. 꼴등에서 초래되는 부끄러움이나 경직성은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인데, ‘꼴등도 괜찮아’라는 자연스러움을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일종의 면역력이라고 할까? 아빠의 사랑으로 말이다. 그런데 ‘꼴등’만 넣어서는 대척점이 없기 때문에 ‘일등’이라는 표현도 함께 넣었던 것이다.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말이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서, “유나는 꼴등 아빠도 사랑하고, 일등 아빠도 사랑하지?”라는 질문도 추가했다. 아이나 나나 거의 눈은 감겨 있다. 아이는 “예”라고 답을 해준다. 그 순간 아빠와 아이는 완성된다. 물론 표현은 자주 바뀐다.


 


 


# 에피소드 2


 


"서울 모초등학교의 1학년 학생의 성적표를 본 일이 있다. 모든 항목에 대해서 “매우 잘함”으로 기재된 성적표(학교생활통지표)다."


 


옛날 시점으로 말하자면 ‘올수’다. 모두 최고점수다. 그러나 옛날과는 뚜렷이 달랐다. 첫째 평가항목이 매우 많다.마치 직장에 취업하려는 구직자를 위한 추천의 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갑론을박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아이를 교육하는 데 있어, 우리 아이가 어떤 부분에서 약하고 어떤 부분에서 잘하고 있는지를 부모가 잘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유용하겠다. 정보화 사회 아닌가. 바로 그런 유용성이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교육공학자들이 생각해낸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정보가 과연 진정으로 유용한 것일까? 그런 정보를 ‘생산’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계속 평가를 받으며 기록될 것이고, 학교 교사도 아이를 계속 평가하고 기록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런 정보가 필요없다면 그런 평가와 기록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정보는 언제나 이력(history)을 갖지만 축적된 이력 중에 극히 일부분만이 유의미한 의미를 가질 뿐이다. 그런데 그런 정도의 정보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큰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이것은 효용성 면에서도 효율이 낮다. 대부분의 정보는 몰라도 되며, 알면 피곤할 뿐이다. 그런 정보를 부모에게 줘서 뭐 어쩌란 말이냐?


 


게다가 아이는 공장에서 쓰이는 부품 사양(specification)이 아니다. 기업의 공장에서는 부품마다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 부품리스트를 만들고 리스트로 분류되어 관리되는 각 부품은 언제나 가장 좋게 개선돼야 한다. 물론 한 인간을 사회의 부품으로 보거나, 혹은 인생의 어떤 시기를 전체 인생에서 한 부품으로 본다면, 그와 같은 ‘부품 사양’으로서 아이들을 훈육하는 것도 맞을지도 모르겠다. 교육철학의 문제다. 그런 철학이니까 아주 구체적인 항목을 열거하면서 아이들을 빽빽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양품과 불량품의 구별이 없다. 불량품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거나 버림받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우리 인간에게는 ‘정신’과 ‘마음’이라는 게 있어서,그런 평가를 적어 부모에게 줘서 뭐 어쩌란 말이냐. 


 



 


<그러므로 나는 꼬지꼬지하게 구체항목으로 늘어놓은 생활통지표를 없애주기를 교육감에게 요구한다. >


 


그런 게 필요하다면 학교에서 지금 담임이 다음 담임에게만 건네도록 할 것을 요구한다. 뭔가를 부모에게 제공해야만 공교육 서비스 관점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야만 학교에서 뭔가 일을 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겠냐고 생각한다면,


 


교사가 학생을 1년간 관찰하면서 느꼈던 점을,

‘문장으로’,

‘편지형식으로’ 기록하길 바란다. 


 


A4 2-3쪽이면 충분할 것이다. 편지는 인류의 오랜 전통이며(오늘날 기독교 경전의 초석도 바로 선생의 서한이다), 기호나 한두 개의 단어가 아닌 ‘문장’이야말로 깊은 관찰과 사고를 요하기 때문이다. 아이 한 명 한 명에 대해서 깊이 관찰하고 사고하기를 현장의 선생과 교육관료들에게 나는 요구한다.


 


 


#에피소드 3


 


딸 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다. 유치원에서는 이미 한글을 깨친 친구들이 많다. 딸은 한글을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읽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쓰기와 읽기에서는 우리 딸이 꼴등이다. 아빠와 엄마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주 간단한 한글 훈독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결국 흉내만 내고 말았다. 부모도 그렇고 아이도 아직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언어는 말하기, 읽기, 쓰기가 있는데, 그 중에 ‘인간’으로서 어린 아이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하기’요, ‘어른’으로서 가져야 할 언어 덕목으로는 특히 ‘쓰기’가 중요한 것 같다(미성숙한 어른들에게는 여전히 ‘말하기’가 중요하다). ‘말하기’는 언어 놀이로서 상상하는 데 쓰이고, ‘쓰기’는 언어 능력으로서 사고하는 데 쓰인다. 그냥 내 생각이다. 아이는 마음껏 상상해도 좋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할 것 같다. 시간적 순서가 중요하다. 머리는 아직 생각할 준비가 되지 못했는데 언어가 앞서 나가면 병난다. 육체적으로 생기는 병만 병이 아니다. 정신적인 병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다. ‘언어’는 정신병리학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물론 근거 없는 내 직관에 불과하지만).


 



 


딸 아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대다수의 어른들이 깜짝 놀랄 정도의 말하기 능력을 가졌다. 재미있고 묘하고 둥글둥글하며 뾰족하고 시끄럽다. 쓰기와 읽기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소요되는 능력이 말하기 쪽으로 간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여섯 살에 이 정도면 훌륭하고 감사하며 더 바랄 게 없다. 언제, 어떻게 한글을 깨치게 할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이 있다. ‘유치원에서 알아서 배워 오라는 것’ 

 


“유나야, 아빠는 유나가 친구한테 한글을 배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친구한테 나쁜 것과 좋은 것을 배울 것이다. 물론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들도 배운다. 만일 나쁜 것을 배워 온다면(좋다/나쁘다의 기준이 부모마다 다르겠지만), 아빠와 엄마는 바로바로 교정해 준다. 아빠는 예쁘지 않다고 말해주고, 나쁘다고 말해준다. 아이는 잠시 생각에 젖지만 이내 자기 나름의 경계선을 찾아간다. 좋은 것을 배워오면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까지 칭찬한다.


 


“나가서 뽐내고 와라” 혹은 “나가서 인정받고 와라”가 아닌, “나가서 배워 와라”가 부모에게나 아이에게나 더 나은 접근 같다. 가장 이상적인 대인관계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며,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배풀고 가르치고 도와주려고 인간관계를 맺는 게 아니다. 상하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경쟁하러 관계를 맺는 것도 아니다.


 


배움에 대한 즐거움


 


부모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등이 좋다. 남들한테 자랑할 수 있으니까. 단지 그 뿐이다. 아이들을 보채면서,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야!’라고 말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거다. ‘엄친아 이데올로기’는 결국 ‘내 아이 자랑하기 이데올로기’와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보자면, 일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스트레스와 자기 욕망의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 간과되기 일쑤다. 이건 마치 마약과 같은 속성이다. 또한, 배우려는 자세보다는 남을 가르치려는 자세가 앞서기 때문에 인생 초반에만 총명해 보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어린 시절에 그 잘 났다는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가?


 



 


반면에 꼴등은 적어도 순위 경쟁에서 생기는 다그치는 스트레스는 없다. 물론 부모의 관점에서는 남한테 아이를 과시할 수 없으므로 유감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꼴등은 무궁무진하다.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리고 배우려는 자세만 있으면 언제나 나아가게 마련이다. 겸손의 미덕에 더 익숙해진다. 꼴등교육도 괜찮다. 일부로 꼴등교육을 시킬 것까지야 없지만, 미친듯이 선행학습시키지 않고 별도로 첨가제를 넣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뒤쳐지게 된다. 그리고나서 자기가 진심으로 관심있고 흥미로운 어떤 감정을 느끼면 다시 자연스럽게 따라잡게 된다. 필요한 것은 부모와 아이의 자존감(양쪽 모두의 자존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그냥 방치해 버리면 관계가 망가질 수 있다)이다. 자연스러운 뒤처짐을 손쉽게 인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움에 대한 즐거움이다.


 


성적이나 순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성적이나 순위는 여섯 살보다는 열 살, 열 살보다는 스무 살, 스무 살보다는 서른 살, 서른 살보다는 마흔 살, 마흔 살보다는 쉰 살, 쉰 살보다는 예순 살이다. 사실 성적이나 순위가 인생의 행복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은 어떻게 늙느냐가 중요하고 그런 자세로 아이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빠다.


 


정우성

twitter: @hanaese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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