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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뚝심송 추천0 비추천0

2012. 4. 2. 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한참 전 어느 날.


 


박지원 전 장관의 인터뷰를 마친 시점에서, 딴지 수뇌부에서는 모종의 비밀 회합이 열린 적이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 사이에서 한참 정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이 타이밍에 국내 유일의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의 임무는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중차대한 주제를 가지고 딴지 사옥 지하 27층 비밀 회의실에 관계기관 관련자들이 모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 모인 사람들의 명단은 말할 수 없음이 당연하고, 만약 내가 말을 하게 된다면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 모두는 죽어줘야 되는 거다. 영화 보면 항상 그렇잖은가.


 


결국, 여러 가지 불비한 여건상 딴지 정신에 걸맞는 궁극의 뽕빨이너뷰까지는 못하더라도, 유권자들의 보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정보들을 최대한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음은 당연지사.


 


정치부장이라는 삼엄하기 짝이 없는 유령직책을 맡고 있던 본 기자, 분위기의 중압감에 눌려 나도 모르게 “질 수 밖에 없는 적의 진영에 뛰어든 후보자들”을 싸그리 훑어, 장대한 시리즈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 버리게 된다. 너불 편짱의 치명적인 협박에 굴복해서 한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라고 말해야 될 것 같다. 나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총선이라는 전국적인 싸움판을 지켜보다 보면, 적진에 뛰어든 후보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도저히 이기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에 따르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인 이유에 의해, 또 다른 미래에 대한 계산에 의해, 또는 오기로, 또는 뭐가 뭔지 잘 몰라서, 심지어는 본인이 걸린 정치중독증에 따른 주화입마의 결과로 인해 그러기도 한다.


 


그 중 대부분은 예상대로 참패를 하기 마련이다. 물론 극히 일부는 예상을 뒤엎고 승전보와 함께 개선하여 정치적 입지가 확 넓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거야 로또 맞는 거랑 비슷한 일이고..


 


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걸까? 한쪽 구석에는 개인적인 궁금증도 있었다. 시리즈의 컨셉이 그렇게 정해지자, 남은 일은 과연 누구를 만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 편짱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바로 이거였다.


 



정동영.


 


시리즈 컨셉에는 잘 맞는다. 논의 당시 정동영은 부산이 되었든 강남이 되었든 민주당이 이기기 어려운 곳에 가서 사즉생의 각오로 임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 상태였고, 그 두 곳 모두 민주통합당의 깃발을 들고 가서는 낙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상식적일 수 밖에 없는 “적지”였다.


 


하지만,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난 조건반사적으로 “정동영 인터뷰는 내가 못한다”라고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정동영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나의 인식은, 아니 나의 감정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한, 아니 그냥 얘기하자. 매우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야 제쳐놓더라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객관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입장을 바꿔 다시 그 인터뷰를 내가 진행하겠다고 말을 해 버리게 된다. 그런 나의 변덕의 원인은 바로 정동영 본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 당시에 이미 말만 앞세우고 구태 정치를 일삼으며 지난 대선을 망쳐먹은 장본인에서, 거의 모든 집회 현장에 나타나고 끊임없이 행동하는 정치인으로 “정동영은 변했다”라는 의견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라는 고집을 피우면서 “변한 게 아니라 변한 척 하는 거다”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기도 하다. 거기에 더해 “비록 변했다 하더라도, 정동영은 언젠가는 또 사고를 칠 것이다”라고 악담까지 늘어놓던 중이었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의 사진 한 장은 그런 내 입장에서도 뭔가 아니다 싶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시위중인 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올라갔던, 업계 전문용어로 “아시바”라고 불리우는 건설용 비계에서 위험천만하게 매달려 내려오는 정치인 정동영의 모습.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책 한권의 말보다도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하는 수도 있다.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난 이건 뭔가 다르다는 놀라움에 빠져 버렸고, 과연 이 혼란 속에서 진실의 무게추는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정동영과의 인터뷰가 준비되기 시작했더니 이번에는 또 정동영 측에서 문제가 발생해 버렸다. 부산 출마를 포기하고, 강남으로 방향을 튼 정동영 측은 강남을 지역구를 타겟으로 선정했고, 오랜 시간동안 강남을 지역구에서 출마를 준비해오던 전현희 비례대표 의원 측과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지역구는 경선을 치르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그 경선에서 정동영이 승리하면서 야권 단일후보로까지 선정되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가하게 인터뷰를 할 짬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거기에 거의 모든 종류의 장외집회에 참여하던 정동영이 제주 해군기지 건과 관련해서 강정까지 날아가기도 했고.


 


결국 일정은 예상보다 훨씬 지연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그 정도 난관에 굴복한다면 딴지스가 아니지. 뒤늦게라도 인터뷰는 성사되었고, 나는 19대 총선 서울 강남을 지역구 공식 야권단일후보 정동영 후보를 만나고 왔다.


 


인터뷰의 핵심은 이거다.


 


과연 정동영은 변했는가? 그리고 그는 적지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가?


 




 


인터뷰는 지하철 대치역 7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대한민국 자식연합이 디자인해준 정동영 후보의 캠프에서 있었다. 폐쇄된 공간이 아닌, 오픈 카페 개념의 캠프에서 인터뷰가 진행되는 덕분에, 주변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같이 녹음되고, 후보자와 인사하려는 손님들 덕분에 인터뷰는 수시로 중단되었으며, 공식 일정의 압박으로 인해 시간에 쫓기며 어렵사리 진행되었다. 캠프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사진은 죽지않는 돌고래 기자가 노련하게 찍어줬고, 정말 힘들었던 녹취는 이동현 필진이 담당해주었다. 쉽지 않은 일에 수고해준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인터뷰가 개시되기 직전, 캠프 사무실 앞에서 뜻하지 않았던 꽃미남(죽지않는 돌고래 말고) 둘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정동영 후보의 장남과 차남. 어느새 훌쩍 자라 부친의 선거를 돕겠다고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던 두 청년을 만나 잠깐의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사설이 길었다. 바로 들어간다.


 


(이하, 물뚝심송=물, 정동영 후보= 정)


 




 


물: 후보님께서는 기존에 워낙에 질곡을 많이 겪어 오신 분이라서, 최근 후보님의 긍정적인 행보에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신뢰와 갈채를 보내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안좋은 모습을 기억하면서 불신을 가진 분들 역시 많이 있다는 거지요. 그런 불확실한 부분을 털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시간 배분을 과거의 일 절반 정도, 총선에 대한 이야기 반 정도 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정: 과거 이야기가 너무 많네. 하하하하


 


물: 최선을 다 해서 솔직하게 털고 가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솔직하고 마음 편하게 얘기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정: 예. 마음 편하게 하겠습니다.


 


물: 워낙 많이 알려지신 분이라서 뭐 과거 얘기를 많이 물어보진 않을 거고요. 정식으로 이번 19대 총선에 강남을 지역구에 출마하신 정동영 후보님과의 인터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


 


물: 대학 시절에 운동권 경력은 별로 없으시죠?


 


정: 대개 그렇게 알아요.


 


물: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가요?


 


정: 저는 유신학번이었거든요.


 



 


정동영 후보는 72학번이다. 방송인 출신이라 그런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실제 나이를 알게 되면 놀라기도 한다.


 


물: 그렇죠.


 


정: 유신학번이었고, 그 유신에 저항한 첫 시위의 맨 앞자리에, 앞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물: 그럼 알려진 바와 다르게 (학생 운동을) 하셨던 거네요?


 


정: 저는 그런 걸 대단하게 자랑한 적은 별로 없는데요. 73년 10월 2일, 유신철폐, 박정희 타도를 외친 서울 문리대 10월 2일 첫 시위로 해서 구류 한 달을 살았어요.


 


물: 구류까지 사셨던 건가요?


 


정: 한 달 살았죠. 무기정학을 맞았는데,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죠. 74년 4.3. 민청학련이라는 그 이름은 그 날에야 알았어요. 데모다운 데모도 못 해보고 전부 다 잡혀갔어요. 그때는 제가 동대문 경찰서하고 서대문 구치소에서 3개월 구속됐었죠.


 


물: 그런데 그런 기록들이 왜 알려져 있지 않은 거죠? 자랑을 안 하셔서 그런 건가요?


 


정: 제가 자랑하지 않아서 그렇죠. 자랑거리는 아니죠. 그 시대에 누구나 다 고민하고 그 대열에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출소해서 서대문 구치소에서 나와서 바로 강제 집행영장을 받고 강제 징집돼서 삼 년 군생활을 했죠.


그런데 강제 징집 돼있을 때, 보안사에 가서 고문받은 게 나한테는 제일 힘들었었어요. 친구들 문제 때문에. 조작된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는 게 다 조작사건이었거든요. 거기에 연루되어서 제가 보안사 안가에 지하실에 가서 고문을 당했던 것이 제일 힘들었던 기억이에요.


 


물: 그런 경력은 좀 알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정: 얘기할 기회에 가끔 했죠. 우리 동기들이 다 알죠. 서울 문리대 72학번 구속자가 한 70~80명 돼요. 우리 동기들이.


 


물: 많습니다.


 


정: 그래서 모임이 있죠. 마당모임이라고. 몇 년 전에 우리가 모인지 삼십 년 됐을 때 책도 하나 냈죠. “마로니에 아래서” 라고...


 


정확한 제목은 <새벽을 엿본 마로니에 나무> 였다.


 


정 : 그거 뭐, 우리 때는 자랑이 아니에요. 감옥을 갔건 안 갔건 그 시대를 같이 살았으니까.


 


정동영의 학생 운동권 기록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너무 오래된 일들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본인의 말대로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우했던 시대의 피해자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최소한 시대가 부여하는 사명에 대해 등 돌리고 외면했던 비겁자는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 줄 필요가 있다.


 


 


방송인 정동영


 


물: 그런 경험을 다 겪으셨고, 졸업 후에는 방송일을 하신 거죠?


 


정: 저는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죠.(웃음) 제대했는데 제 학적이 유지되고 있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


 


물: 제적됐는데.


 


정: 구속됐다가 바로 군대로 끌려갔기 때문에, 당시에 학적이 살아있어서 복학해서 취직을 할 수 있었지요. 70년대 말, 80년대에, 우리 운동했던 친구들 중에 취직한 사람이 몇 안 돼요. 그래서 늘 부채의식이 있었죠.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그런...


 


물: 어떤 건지 알겠습니다.


 


정: 그리고 또 광주 취재를 갔었거든요. 5.18 광주에. 그때 막 신입기자 때인데 광주 취재에 대한 부담. 한 줄도 보도하지 못했잖아요.


 


물: 취재만 했을 뿐.


 


정: 그렇죠. 역시 또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에 대한 부끄러움... 이런 게 제 젊은 시절의 그늘이죠. 그늘. ‘내 청춘 돌리도’ 그런 심정이 가끔 들어요. 20대 10년의 기억은 온통 그렇게 어둠의 터널 속에 있는 기억입니다.


 


물: 알겠습니다. 그렇게 방송계 일을 쭉 하시다가 정치를 처음 시작하시게 됐는데, 정치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를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정: MBC 노조운동이에요. 제가 MBC 노조를 창립한 사람 중의 하나에요.


 


물: 노조 창립 멤버로서?


 



 


정: 87년 12월 13일인가 그런데. 방송사 노조로는 대한민국 최초, 언론사 전체 노조로는 한국일보에 이어서 MBC 노조가 두 번째로 창립됐고. 그때 마흔 세 명 기자들이 모여서 MBC 노조를 만들었는데, 밤 12시에 지하식당에 스며들어서. 그때 제가 10년차 됐던 최고참 기자였고. 이른바 운동권 출신 기자로서, 그런 시대를 겪고 나서 생업으로서 80년대 전두환 정권 밑에서 기자를 한 거란 말이죠. 그런 부끄러움이 있었죠.


 


물: 하지만 그건 본인의 선택은 아니잖습니까?


 


정: 그 시대에 의해 강제된 거지만, 시대상황에 의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늘 가슴 속에 사표를 품고 다녔어요. 내가 다닐 직장은 아니다. 그런데 노조를 만들면서, 그래, 세상을 바꿔보자.


 


물: 이것이 할 일이다?


 


정: 그랬는데, 역시 언론 노조운동만으로는 기자를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는 한계를 절감했죠. MBC 노조가 사장을 두 명, 세 명 몰아내기도 했고,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고, 저는 투쟁의 선봉에 서지는 못했습니다만, 늘 노조의 배후로 몰리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수평적 정권교체 없이 언론의 자유 없다’라는 생각이, 김대중 총재가 정계복귀 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 만들었을 때 참여 제안을 받았던 것이 정계 입문의 배경이지요.

 


물: 잘 알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에 비해서 굉장히 다양한 투쟁 경험을 갖고 계시는 걸로 보입니다.


 


정: 제 나름대로는 철들고부터, 그러니까 20대 청년시절부터, 늘 저항해 왔죠. 그런데 그 저항이 투사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늘 적극적 저항이든 소극적 저항이든...


 


물: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저항은 다 해봤다?


 


정: 내가 스스로에게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서 걸어왔고, 그 다음에 벽에 부딪히거나 눈보라가 몰아칠 때는, 내가 서 있을지언정 등을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시대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하는 자존심을 갖고 있죠.


 


물: 잘 알겠습니다.


 


유신 반대 투쟁으로 구치소 생활도 하고, 강제 징집되어 고문까지 당하던 운동권 학생 정동영은 방송계에 들어와 방송인의 꽃이라는 앵커까지 하게 되면서도, 언제나 저항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다들 잘 아는 정동영의 역사는 바로 MBC의 앵커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최초로 방송사 노조를 설립한 저항하는 정동영이 있었다.


또한 뉴스를 진행하던 잘생긴 얼굴의 방송인 정동영. 이 정동영을 정치로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김대중이다. 한국 정치사의 거인 김대중, 그의 그늘은 이렇게도 넓고 크다.


 


 


열린우리당 초대 당의장


 


물: 정계활동을 쭉 하시다가 하나의 전기가 됐던 게, 최초로 노무현을 선택하셨었죠?


 


정: 그거는 천정배 의원이었고. 경선에서 경쟁했던 후보들 중에는 제가 끝까지 도왔죠.


 


물: 그때 어떤 관점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시게 된 건가요?


 


정: 그건 당연한 거죠. 같이 경쟁했는데, 우선 경쟁 과정에서 다들 도중하차해서 경선이 무산될 뻔 했잖아요?


 


물: 예.


 


정: 그런데 이 경선이라는 게 지금은 일반화되었지만, 그때가 한국 정당사에서 최초였거든요.


 


물: 모험이었죠.


 


정: 그래서 국민경선을 완성해야 한다. 기록으로도 완성해야만 한다는 책무감, 왜냐면 제가 국민경선을 제안했던 사람이니까, 국민경선의 제안자로서, 어쨌든 경선을 제안했던 사람으로서 이것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끝까지 경선지킴이 역할을 했던 것이고, 졌으니까 당연히 돕는 거고요. 당연한 것입니다.


 



 


미세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아주 중요한 정동영의 주장이 담겨 있다.


정동영은 2002년 노무현의 당선이라는 신화가 쓰여지는 과정에서 노무현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지속적으로 노무현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던 사람이다. 이 인터뷰에서도 그 얘기는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노무현을 만들어냈던 노사모 역시, 거칠게 표현하자면 정동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동영을 미워하는 사람들로 나뉘기까지 한다.


 


경선과정에서부터 (천정배 의원에 이어) 노무현과 함께했던 정동영이면서도, 왜 그랬냐는 질문에 “경선이라는 최초의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기 위해”라는 답변을 “자신이 일찌감치 노무현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에”라는 이유보다 앞세워 대답을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정동영 후보가 섣부르게 노무현의 가치를 칭송하는 발언을 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일찌감치부터 알아본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다면, 자신을 미워하는 친노세력들을 의식해서 하는 정치적 수사라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동영은 그 이전에 경선이라는 시대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고 답변을 한다.


일관된 면이 있다.


 


정 : 그리고 그 다음에 경선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 이른바 쇄신정풍운동이 있는 겁니다.


 


물: 그렇죠. 그게 시작됐기 때문에 나온 것이죠.


 


정: 2000년에. 우리가 97년 말에 집권했는데, 집권하면 정말 새로운 세상이 올 걸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잖아요?


 


물: 누구나 기대했죠.


 


정: 그런데 새로운 세상은 도래하지 않았거든요. 거기에 대한 낙심과 실망이 있었죠. 그래서 정권 중반기로 접어들면서 각종 게이트와 부패와 이른바 수구세력에 포위되어서, 그 속에서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쇄신과 정풍이었고,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거였어요. 2000년 12월 2일인데, 청와대 최고회의에서 동교동계 퇴진을 요구하고, 당과 정부의 일대 쇄신과 정풍을 요구했지요.


 


물: 당시에는 동교동계 쇄신을 요구하는 작업이 누구나 다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도 못 하던 상황에서 가장 먼저 얘기를 꺼내신 거네요?


 


정: 고양이 목에 방울 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는 사실 제가 정치를 안 해도 좋다는 배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정치를 한 목적이, 정권을 바꾸는 것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했고, 실제로 정권이 바뀌었잖아요. 참여하자마자 2년 만에 바뀌었으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셨을 때 정치참여의 제 1차 목표는 달성됐다 이거죠. 그 다음은 이제 내 정치인데, 내 개인적인 정치적 계획은 그때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을 때 정말 원도 한도 없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면 좋겠다, 하는 열망으로 이 정권을 봤는데,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는데, 이 기대가 실망으로 절망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이거를 내가 막지 않으면, 내가 일어서서 외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밤새 기도하고 행동했습니다.


 


물: 종교는?


 


정: 천주교, 카톨릭.


 




 


밤새 기도했다는 말에 신경이 쓰여 물어본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다행히도 소망교회 같은 대형교회의 신도는 아니었다.


 


기억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긴 하지만, 사실 김대중 정권 말기의 민주당은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지속된 수구언론의 공격속에서 대통령 가족들의 문제가 연일 전국에 울려 퍼지고 있었고, 당에서는 또 동교동계 가신그룹의 전횡이 문제점으로 떠오르고 있던 시점이다. 이 상황에서, 뒤늦게 영입된 방송인 출신 정동영이 동교동계에 맞서 당의 쇄신을 요구하면서 정풍운동을 주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정치생명이 걸린 돌출행동이 된다. 만약 2002년 대선을 앞둔 경선과정에서 동교동계 후보가 다시 대권에 도전하게 되고, 당권이 동교동계의 손에 계속 남아 있게 되었더라면, 즉 정풍운동이 실패하게 되었다면 정동영의 정치생명, 이 정풍운동을 주도한 쇄신파들의 정치생명은 모두 다 끝장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는 전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광주는 영남출신 노무현의 손을 들어줬고, 그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이회창을 누르며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민주당에서는 쇄신파와 구민주계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머리끄뎅이 사건, 난닝구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쇄신파들은 탈당해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쇄신파의 선두 정동영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고, 그는 열린우리당의 초대 당의장을 역임하게 된다.


 


물: 알겠습니다. 결국 넘어가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고 미약하게 시작했다가 2004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는 거겠죠?


 


정: 열린우리당도 46명 의원...


 


물: 처음엔 그랬죠.


 


정: 46명 의원이 탈당해서 만들었는데, 감히 말씀드리면, 정동영이가 탈당을 안 했으면 아무도 탈당 안 합니다. 10명의 결사대가 있었어요. 마지막에 정치개혁을 위한 신당으로 가자는 사람들이 10명이었어요. 천정배, 신기남을 포함해서.


 


물: 그때 천신정이라고 했죠.


 


정: 그 10명이 지금은 결국, 여기서 정치 그만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졌는데, 몇 달이 되도록 (지지율) 한 자리 수를 헤맸다고요.


 


물: 지지부진했죠.


 


정: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새 당을 간선제로 운영하려고 했어요. 대표를 추대해서 뽑는 식으로.


 


물: 너무 작으니까 그랬겠죠?


 


정: 저는 그걸 거부했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하고 등을 지게 됩니다. 이거는 직선으로 가야 된다, 경선으로 탄생한 정권이고, 노무현 대통령이고, 새로운 정치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나온 새 당인데, 새 당이 경선을, 직선을 회피하는 것은 원칙과 상식에 반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제가 초대 직선 당의장이 됩니다. 아마 그때 정치적으로 많이 적이 생겼을 거예요.


 


물: 그 상황에서?


 


정: 그 상황에서. 자기의 입신영달을 위해서 뭐...


 


물: 쉽게 얘기해서 자기가 당의장 해먹으려고 그런 거 아닌가?


 


정: 그런 거죠. 그런데 그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뭐 당대표에 목을 맬 이유는 없었죠.


 


물: 정풍에서부터 우리당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정치를 그만해도 된다는 각오로 했으니까...


 


정: 제 나름대로는 대한민국의 정치혁신을 위해서 내가 선봉에 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겁니다. 어찌 됐건, 파란도 많고 곡절은 있었지만, 5.16 쿠데타 이후에 몇 년이야... 40여 년 만에 민주세력, 개혁세력이 과반수를 이룬 게 열린우리당이지 않습니까?


 


물: 처음이죠.


 


정: 거기까지는 성공이었죠.


 


 


노인 폄하 발언


 


물: 그 과정에서 나쁜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그때 노인 폄훼 발언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 지금 생각해 보면 좀 더 당당하게 대응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귀도 못 알아먹는가, 뭐 이런 식으로 조중동과 정면으로 붙었어야 했는데, 그냥 내 책임이다 하고 덮어쓰고 내가 모든 공직, 당직을 다 사퇴하고 의원배지를 뗐죠. 의원직 사퇴. 사실 최근 정치에서 어떤 문제와 관련해서 의원직을 던진 사람은 없습니다.


 


물: 말만 하죠. 다들. 말만 하고 실제 행동은 안 하죠.


 


정: 제가 비례대표 당선됐었거든요.


 


물: 예. 사실 그때도 레토릭이 원래 원문을 보면 그렇게 나쁜 뜻이 아닌데. 정확하게 얘기하면 다른 의미였던...


 


정: 그게 대구에서 대학생 기자들하고 만나서 인터뷰하면서, ‘청년들이여 투표하라’는 게 메시지였어요. 왜 대학생들이 투표하지 않는가? 어른들 봐라, 어르신들은 다 투표하지 않느냐, 어른들은 투표하지 않아도 좋다, 당신들이 투표해라. 그 말이 어떻게 둔갑하냐면 몇 살 이상은 투표하지 말라는...


 


물: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서...


 



 


정: 예. 마타도어와 정략에 휘말린 거죠. 대중은 선거 시기에는 선동에 휩싸일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걸 타개하기 위해서 제가 모든 걸 던진 거고.


며칠 전에 김종훈 후보가 또 그 문제를 제기했어요. 그래서 그건 젊은이들 투표하라는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거두절미하면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십 년 동안 울궈 먹었으면 됐다, 그만 해라. 그만 해. (웃음)


 


물: 알겠습니다.


 


정: 요즘은 그래서 그런지 알 만한 사람들은 그런 말 안 해요.


 


이 부분은 원래 기사에 포함시키지 않으려고 계획했던 부분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또 총선 정국에서 불필요한 공격꺼리를 제공하게 될지도 모르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동영 후보의 해명은 매우 적절했고, 독자들에게 그 해명을 들려주고 싶었다.


원래 정동영의 발언은 그다지 문제의 소지가 없는 내용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2004년 총선 정국의 막바지에 이 발언은 왜곡되어 조중동 군소언론들의 정치적 공세에 매우 유효하게 이용되었으며, 해명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너무 없었다.


원론적으로 정동영의 잘못은 없었지만, “정치적인 실수”라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걸로 인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너무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충분히 책임을 졌고, 이제 와서 이 문제를 다시 공격의 소재로 삼는 것은 비열한 행동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얘기해 두자.


 


 


참여정부의 통일부장관


 


물: 참여정부 시절에 장관도 하시고 여러 가지 하셨는데 그때를 짧게 소회하신다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정: 복지부 장관을 노 대통령이 제안했어요. 입각을 제의했을 때 노 대통령이 복지부 장관을 권한 이유는 양극화의 폐해 속에 복지예산을 뭉텅 잘라서 복지를 대폭 추진해가려면 힘 있는 장관이 필요하다. 아마 노 대통령은 저에게 부채... 빚을 졌다, 많이 도움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요. 측근들한테 얘기한 거 들으면 결국 이 다음 후보는 정동영 밖에 없지 않냐는 그런 말씀도 하고. 저를 복지부 장관에 갖다 놓고 힘 있는 복지정책을 밀고 싶어 했는데, 아쉽게도 그 당시에 저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물: 그렇군요.


 


정: 저는 남북문제에 대해서 열정과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집을 했죠.


 


물: 복지부 업무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돼있다고 스스로를 판단하신 거네요?


 


정: 시대정신을 잘못 읽은 거예요. 사실은 복지였어요. 남북문제도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에요.


 


물: 굉장히 중요하죠.


 


정: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들에게 보면 당장 내가 먹고 사는 문제, 나의 삶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이 선거로 보면, 즉 정권 재창출의 관점에서 보면, 복지였죠. 남북문제가 아니라.


 


물: 그렇군요.

 


정 : 당시 관심의 과녁이 남북문제에 있었고, 이걸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서 그랬어요. 뭐 여한은 없어요. 왜냐면 통일부 장관 일 년 반, 제가 2004년 7월 1일에 취임하고, 2005년 12월 31일에 그만뒀는데, 그 기간 동안에 노무현 대통령이 100% 뒷받침해줬어요. 외교, 안보, 남북문제에 관해서. NSC위원장으로서 거기서 결정된 사안을 100% 뒷받침해줬어요. NSC는 사실상 저의 리더십으로 운영했습니다. 국정원, 국방부, 외교부, 통일부, 총리실, 저 국무조정실, 외교안보수석으로 구성이 되는데, 그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확실히 밀어준 거죠. 노 대통령의 철학과 제 철학이 일치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또...


 


물: 남북문제에 관해서 일치했다?


 


정: 일치했어요. 그래서 소신을 갖고 할 수 있었고, 그 결과가 개성공단과 9.19 공동성명으로 나타난 거죠. 지난 시기, 어쨌든 지금, 오늘 남북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두 개의 발자국, 뭐랄까요...


 


물: 성취?


 


정: 깃대, 깃발이 있다면, 오늘 현재 두 개의 깃발이 있다면 하나는 개성공단이고 다른 하나는 9.19입니다. 개성공단은 지금 하나를 열 개 스무 개로 확장을 해 나가야 하는 거고, 9.19는 실천해야 하는 과제, 이 두 개를 제가 장관을 하면서 해냈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책도 한 권 있죠.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이라는 당시의 일을 정리한 책을 하나 냈는데...


 



 


이 부분에서 정동영 후보는 박자 맞추듯이 책상을 두드려 가며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특히나, 개성공단 문제와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 IAEA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한 9.19 공동성명에 관한 얘기를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물론 남북 문제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마련된 것들이다. 참여정부의 남북 정책은 앞선 정부의 남북 정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므로 그 성과의 폭이 김대중 정부의 그것을 넘어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관점에서, 또 실무적인 차원에서 그 구체성을 증가시킨 공로가 있는 것이고, 그 주역이 정동영이었다는 점은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직책은 통일부장관이었지만 그는 장관을 넘어선 NSC위원장으로서, 남북문제를 총괄 지휘했던 것이다. 이 점은 확실한 정동영의 공로로 기억해 두자.


거기에 덧붙여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중요한 부분이 한가지 더 있다. 정동영이 담당했던 참여정부의 공식 임무는 결코 일개 장관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실무적으로도 그렇고, 정동영은 한 때, 정권의 2인자 위치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전국에 무려 246개나 깔려 있는 지역구지만, 정동영은 그저 원 오브 뎀에 불과한 지역구 출마자로 간주하기에는 정치적 비중이 너무 큰 사람이다. 또한 그만큼 그에게 요구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는 정치의 기대수준이 높아 지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지켜봐 주기를 권하고 싶다.


 


정: 우리가 이번에 민주진보정부로 바꾸면 남북문제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로부터 풀어가야 합니다. 개성공단으로부터 풀어가야 되고 9.19로부터 풀어가야 돼요. 9.19로부터 풀어가는 것은 한반도의 비핵화고, 개성공단으로부터 풀어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평화통일입니다.


 


물: 그렇죠.


 


정: 평화통일로 가는 전 단계는 개성공단을 열 개, 스무 개로 확장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거고, 경제공동체와 동시에 국가연합단계가 되는 거고, 국가연합단계 그 다음이 바로 평화통일인 거고. 이정표가 있는 거니까요. 9.19라는 건 우선 북한의 핵 포기, 비핵화와 4대국의 교차승인이 이루어지는 거죠. 미국은 아직도 북한을 승인하지 않았잖아요.


 


물: 예.


 


정: 그리고 비핵화와 교차승인에 이어서 동북아의 집단안전보장체제.


 


물: 그렇죠. 9.19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그거죠.


 


정: 그러니까 12월에 정권 바꿔서 뭘 해야 하냐? 개성공단의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9.19의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그거를 2005년에 해냈다는 것.


 


물: 이미 그때 했다?


 


정: 노무현 대통령의 100% 지지를 받고, 지원을 받고, 내가 앞장서서 그걸 해냈다는 것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거죠. 미래비전이 유효하다는 점이 내가 통일부장관을 잘 했다, 그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복지를 선택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있지 않으신가요?


 


정: 음... 정봉주 의원 말로 ‘깔때기’에 속하는 얘기지만, (웃음) 저는 뭔가 잡으면 뭔가는 해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고를 치죠. 제가 복지부장관을 했으면 뭔가는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 양극화를 막기 위한?


 


정: 예.


 


물: 역사에는 가정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으니까.


 



 


만약 정동영이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수락했더라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패라고 할 수 있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상황, 좀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양극화를 가속시켰던 그 실패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을까?


돌아가신 김근태님이나 유시민이 맡았던 보건복지부를 정동영이 맡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역사적 가정을 얘기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무의미하다고 말해 놓고서 또 딴소리다.) 지금의 내 판단으로는 “당시의 정동영”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지금의 정동영“이라면 어땠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계속 알아보자. 당시의 정동영과 지금의 정동영은 과연 다른 지부터 말이다.


 


 


정서적인 문제


 


물: 약간 정서적인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결과적으로 참여정부가 끝나가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감성적으로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분들의 지지나 사랑을 받지 못하셨어요.


 


정: 예.


 


물: 그분들의 미움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그런 정서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정: 하나는 열린우리당을 민주당과 합친 겁니다.


 


물: 그렇죠.


 


정: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진 것도 제가 앞장서지 않았으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 저는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정: 예. 또 하나 제가 민주당과 합치는 데 앞장서지 않았다면 합쳐지지 않았을 거예요.


 


물: 그렇게 보시는군요.


 


정: 그렇기 때문에 노 대통령이 저를 열린우리당에 머무르도록 요구하고 설득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섭섭하고, 그런 거죠. 열린우리당 문제 하나가 있고.


 


백 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던 열린우리당,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개최된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몽골기병 같은 개혁을 이루어 내겠다고 외치면서 당의장에 당선된 바로 그 정동영은 몇 년 뒤 열린우리당을 포기하고 다시 민주당과 합당을 하는 과정을 주도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동영에 대한 실망을 넘어 증오를 표출하던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는 이 부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 : 또 하나는 5년 간 참여정부에 대한, 제가 성과, 저... 뭐죠, 성공과 실패, 빛과 그림자, 성과와 한계, 둘 다를 계승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게 섭섭했던 겁니다. 한계, 실수, 그림자, 어떤 정권이나 빛만 있고 성공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게 지지자들에게 섭섭하게 느껴졌을 텐데...


 


물: 제가 보기에 그것은 정치적이고 정책적인 얘기들이고, 그 지지자들의 심리는 논리적인 입장보다는 사랑하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그런 심리가 크거든요.


 


정: 그렇죠.


 


물: 그런 걸 이해를 정확히 해주셔야 풀리지 않겠느냐, 감성이 껴 있기 때문에 풀기 진짜 힘든 문제인데, 이런 의도로 질문을 드렸던 겁니다.


 


정: 참여정부 5년 노선을 계승하는 것에는 저는 반대했습니다. 그걸 넘어서야 된다고 봤기 때문에.


 


물: 그렇죠. 그건 정치적으로 옳은 말씀이시고요.


 


정: 당시 노무현 대통령 주변 참모들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의 계승을 요구하는 것이지, 참여정부를 딛고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물: 그런 부분이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배신으로 비쳐졌다는 거죠.


 


정: 아주 미묘한 차이인데요. 거기다가 이제 정권까지 빼앗겼으니까 거기에 대한 미움과 이런 게 있겠죠.


 


물: 그런 걸로 인해 감정이 중첩되면서 증폭된 거겠죠. 그런 감성적인 문제를 풀기 위한, 화해를 하기 위한 것으로 어떤 방법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행동이죠. 행동과 실천이죠. 노 대통령 지지하는 친노가 저에 대해서 지지를 보였던 것은 노 대통령 당선 과정에서 제가 보여드린 말이 아닌 행동에 대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그렇죠.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 직후, 또 열린우리당 창당 초기의 시점에서 정동영은 거의 모든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사람들 중에서 일부는 정동영을 따라 정계에 유입되면서 정동영의 지지그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일부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갈라지게 된 것이 그간의 과정이 된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도 많고, 정동영 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사모의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이견이나, 노사모의 해체 논란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정동영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나 높아졌고, 정동영은 그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상당수의 친노들에게 미움을 사기 시작했으며, 그 미움의 파도는 대선의 실패에서 최고점을 찍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정동영이 택한 정치적 선택은 그다지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다. 2007년 대선은 시대적 흐름상 역부족인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정동영은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다가 실패한 것뿐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지지자였어야 할 사람들 다수가 쏟아내는 미움과 증오인 것이다.


인터뷰에서 직접적으로 질문한 대로, 이런 미움과 증오는 다분히 배신당한 연인의 증오와 유사한 점이 있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 그 결별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들이 떠나간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런 감성적인 문제에 대해 정동영은 앞으로 “말이 아닌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해결하겠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척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꽤 오랜 시간동안 옳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그가 노무현을 “계승”하는 것만이 아니라 “넘어서야” 한다고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 행동 자체는 노무현이 마지막 순간까지 붙잡고 있던 “진보의 미래”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는 그 미움과 증오를 털어버리고 냉정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물: 대선에서 패배하신 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여쭤볼 수 있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후보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논지 중에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가, 후보님을 돕고 있는 스탭들의 구태적인 정치기법, 대선 과정에서 박스떼기 같은 걸로 나타났던, 정치적으로 약간 안 좋은 기법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걸 후보님의 스탭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딱지 붙이기입니다. 왜냐면요 구태정치의 핵심은 돈이거든요.


 


물: 그렇죠. 돈 문제입니다.


 


정 : 최근에도 돈봉투 사건이 여야 가리지 않고 있었지만, 정동영 정치의 핵심은 돈과 상관이 없습니다.


 


물: 자신하십니까?


 


정: 그렇습니다. 재벌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동영은 그동안 크고 작은 선거를 열 번 이상 했지만, 돈과 관련해서는 가장 가난한 후보였습니다. 어떻게 돈이 빠진 구태정치가 가능합니까? 돈이 없는 구태정치가 가능해요? 딱지 붙이기에요. 딱지를 붙인 그 사람들이 저보다 열 배는 더 썼습니다. 열 배는 부자였거든요.


 


물: 상대 후보들이요?


 


정: 어떤 후보든 간에. 열 배나 백 배쯤 돈을 더 썼을 거예요.


 


물: 그러면 관점을 달리해서, 후보님의 주변에는 진짜 후보님을 지지하고 열성적으로 따라다니는, 모시고 있는,


 


정: 지지하는.


 


물: 예, 지지하는 스탭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이 돈하고 관계없이 열정이 과도해서 반칙을 시도하거나 실행한 적은 없다고 보십니까?


 


정: 글쎄요. ... 여기 본인들이 있지만, 이상호나 장형철 전 청와대 행정관도 있지만, 열정으로 한 거지 그게 어떻게 구태입니까? 제가 차비를 한 번 줬어요, 밥을 샀어요? 십 년 넘게 형제고 동지니까 하는 것이지.


 


미묘한 부분이긴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둔 경선과정에서 정동영측 캠프에서는 문제적 행동이 많이 벌어진 것이 사실이다. 박스떼기 등으로 돌출된 문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정동영 지지자 그룹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해 정동영 본인이 직접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심지어 그런 문제를 인식하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부분은 전적으로 후보자 본인의 조직 장악력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또한 반대의 측면에서, 정동영에 대한 실망감이나 배신감이 그의 지지자그룹에 전이되어 정상보다 훨씬 더 가혹한 수준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가져봄직 하다. 양측 모두의 겸허한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정: 그리고 또 하나 저한테는 호남의 지지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호남을 구태라고 보는 시각, 저는 그거를...


 


물: 그런 시각이 있습니다.


 


정: 그거는 옳지 않아요.


 


물: 옳지 않죠.


 




 


정: 호남이 없이, 이 나라의 민족주의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이 나라의 민권과 인권이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그건 존경하고 존중받아야지, 상처받으면 안 돼요. 그걸 상처 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인터뷰어로서 실수를 저질렀다. 자연스럽게 당의 명령을 거부하고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 당선된 뒤 별다른 처벌 없이 복귀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질문을 했어야 하고, 하려고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촉박했고, 주변 환경은 너무나 혼잡했다. 태블릿 피씨 화면에 질문 목록이 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그 질문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지 못하게 된 독자분들에게도 사과를 드리고, 답변할 수 있던 기회를 놓쳐 버린 정동영 후보측에게도 사과를 드리는 바이다.


무엇보다도 딴지일보의 뽕빨 정신을 지키지 못하게 된 점이 가장 아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 과거 얘기는 이제 마무리 하기로 하죠. 제가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들의 정서적인 서운함을 풀어주시는 게 굉장히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 여기다 한 가지 덧붙이면, 그런 정서적 서운함, 배신감을 이해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리가 아니라 행동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는 거고, 또 하나는 어쨌든 그분들이 그러한 배신감을 갖게 된 데 대해서 저의 부족함이죠. 저의 덕이 부족한 거죠. 덕스러움이 부족한 거죠.


 


물: 이(理)나 지(知)가 아니라 덕(德)이 부족한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SNS공간의 스타


 


물: 최근 들어 SNS 공간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셨고 가장 인정받는 정치인이 되셨습니다.


 


정: 고맙습니다. 하하.


 


물: 그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나 선언으로 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행동으로 보여주신 거거든요. 행동이라는 게 사실, 말은 쉽죠, 모든 집회 현장에 다 출석을 하고, 모든 험한 곳에 다 나타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다 쫓아가고, 왜 이렇게 하신 겁니까?


 


정: 글쎄요... 뭐...


 


물: 용산이 원인이었습니까?


 


이번 선거를 맞이하여 대한민국 자식연합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선거용 인터뷰에서는 용산이 그 시작이었다는 얘기가 포함되어 있다.


 



 


정: 기본적으로 제 생각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0년 전에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나, 20대 청년시절에 옳다고 생각했던 거나,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같습니다. 하지만 전에는 발이 현실에서 떠있었던 거고, 생각은 그렇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건데, 이제 그 발을 땅에 디딘 겁니다. 발을 땅에 디딘 것은 좋은 참모들이 있었죠. 좋은 보좌관들이라든지.


 


물: 땅을 딛자?


 


정: 바닥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이 진정성을 획득하는 거지. 그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변신했다고 하지만, 제가 저를 알지요. 제 생각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물: 생각은 그대로다?


 


정: 전에는 현실 따로, 정동영 따로가 있었다면, 지금은 현실 속에 정동영이 있는 것이지요.


 


물: 막상 해보니까 굉장히 힘드시죠?


 


정: 힘들기도 하지만 거기서 배우죠. 내가 그냥 머리로 생각한 거와 피부로 느끼는 거와 발을 땅에 딛고 온몸, 뼈와 살로 느끼는 게, 현장에서 배우고 또 현장에 답이 있고. 아, 이걸 몰랐구나.


 


물: 그렇게 현장에서 배우신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어떤 걸 배우신 겁니까?


 


정: 이대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이대로 가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고, 진로를 틀어야 된다는 확신을 갖는 거죠.


 


물: 사회 전반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정: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물: 추상적인 게 아니라.


 


정: 발을 딛고 보니까, 예를 들어 쌍용이든 용산이든 한진이든, 거기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춥고, 절망하고, 우울증에 걸려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물: 그렇죠.


 


정: 그것과 상관없는 국가, 그것과 상관없는 정치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물: 발을 땅에 딛고 내려가고 있다 보니까 그게 정확하게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하신 거네요.


 


정: 배우고, 답을 얻고, 그리고 신념으로 굳어지고.


 


물: 발을 땅에 디뎌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경험이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확대된 거다.


 


정: 그렇죠. 현장에 가면 갈수록,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전에 안 보였던 게 보이게 되고, 또 그러면 그 방향으로 행동하게 되고, 그런 거죠.


 



 


스스로 변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청년 정동영이나 10년 전의 정동영이 생각했던 것과 지금의 정동영이 다르지 않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다르다. 누가 봐도 다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주요 정치인 중에서 정동영만큼 현장에서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하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대표정도일까.


아무리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표현대로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생각과, 땅에 발을 딛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과 고통을 나누고, 그들과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새롭게 다져지는 생각들은 기존에 추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차원이 다른 강한 생각이며 옳은 생각이 된다. 정동영은 그 강하고 옳은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동안 그런 행동을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본 기자,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정동영의 내부에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마


 


물: 그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총선에 임하시게 됐는데, 경선 과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정: 지난 건데요 뭘. 과정은 차치하고, 옆으로 비껴두고. 그 바람에 강남과 정동영이 주목받게 된 효과도 있어요.


 


물: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정: 네.


 


물: 경선과정에서 오히려 전국적인 인지도가 올라가는 측면이 있었다는 거군요.


 


정: 인지도라기보다. 사실 전주 포기, 부산 거기도 뭐 선회, 강남 경선 오케이 그것도 수용, 요구하는 것은 다 받아들인 거죠.


 


이 대목에서 전현희 의원측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기자의 질문이 있었고, 바로 그 부분이 상당히 아쉬웠다는 답변이 있었다.


사실 이 경선의 과정에서 전현희 의원은 지나치게 많은 비난을 받은 측면이 분명히 있었고, 전후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전현희 의원측과도 인터뷰를 수행했었다는 점을 밝혀야 겠다. 가능하다면, 언젠가는 그 인터뷰 내용도 기사화 할 기회가 있게 되길 바란다. 그 과정에서 전현희 의원이라는 한 정치인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분께서도 좌절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어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가꾸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은 꼭 남기고 싶다.


 


물: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그런 관점에서 전주도 포기하고 부산도 포기하고 했을 때 강남 을에 전현희 씨가 있다면 강남 갑을 택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은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정: 강남이 무슨 좋은 선거구라고 서로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포기했던 지역에서 뭔가 제가 강남에서 얘기했던 게 그거죠, 30년 만에 이거를 깨뜨려야겠는데, 얼음덩어리가 망치로는 깨도 안 된다. 바늘로 찔러야 깨지는데, 바늘로 찌르는 데가 강남 을이다. 전현희 후보를 대단히 높게 생각하지만, 전현희 후보로 조각이 나겠는가?


 


물: 그걸로는 부족하다. 좀 더 튼튼한 바늘로 찔러야 한다?


 


정: 아... 어쨌든 강남에 어떤 균열이 생겨야, 강남 을이 균열점이라고 본 거죠. 강남의 중심이고 여기서 균열이 생겨야 이른바 강남 3구에 작은 조각이 떨어질 게 큰 조각으로.


 


물: 지금 그 말씀은, 일반적으로 부산을 선택하고 강남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정동영이라는 한 정치인이 현실에 발을 딛고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불가능한 미션에 도전한다. 쉽게 얘기해서 죽으러 간다, 부산이나 강남에,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건 결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강남을 바꾸기 위해서 온 거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정: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거지요. 당선에 집착하는 건 아닌데...


 


물: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죠.


 


정: 어쨌든 부산 전선, 낙동강 전선을 통해서 부산을 그 아성을 깨뜨려 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 그렇죠.


 


정: 강남전선을 통해서 강남을 깨뜨려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산은 저와 연고가 없는데 영도라는, 한진이라는 고리가 있었고. 강남은, 제 표현이 아니라 우석훈 교수나 여러 지식인들이 강남 을이 균열이 생겨야 강남전선이 무너진다고 했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 그렇죠.


 


정: 그리고 어디나 후보가 있어요. 강남 갑도 후보가 있어요. 유명이든 무명이든 간에. 그러면 비어 있는 곳을 찾으면 아무 데도 가면 안 되죠. 강남 을에 누가 있으면 다른 데로, 그쪽엔 사람 없나요?


 


물: 알겠습니다.


 


 


지역구 현황


 


물: 현재 지역구 상황은 어떻습니까?


 


정: 해 볼만 해요. 여기도 세대 전쟁이에요.


 


물: 세대라는 건 연령대 별로?


 


정: 2,3,40대의 투표율이 좌우하지요. 지난번에 2008년에 46%인가 총선 투표율이?


 


물: 예.


 


정: 강남도 비슷했겠죠. 탄핵 2004년 열린우리당 과반수 할 때 60%인가 그랬을 거예요. 60% 투표율이 되면 아마 강남도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이겁니다.


 


물: 관건은 투표율이다?


 


정: 투표율.


 


역시 문제는 투표율이다.


 


물: 그럼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어떤 전략을 채택하고 계신가요?


 



 


정: 그렇죠. 주로 SNS를 통해서, 오늘 강금실 장관도 와서 지원해 주지만, 그동안 함세웅 신부님, 명진 스님, 내일 또 조정래 선생님, 이외수 작가가 후원회장, 조국 교수, 공지영 작가, 또 정지영 감독, 그 다음에 우석훈, 선대인, 이해영, 한홍구, 서해성, 유종일, 이동걸 등등 이 시대의 양심과 지식인 이런 분들이 와서 계속해서 ‘강남을 뒤집어야 한다’ 라는 메시지를 주시고 있어요.


저는 또 고맙게도 전선을 딱 만들어줬잖아요. 김종훈이라는. 가령 다른 후보였으면 이런 전선은 안 생기죠. (웃음) 원래는 저 사람들이 뉴라이트 이 모 후보를 세웠잖아요. 이것도 아주 재미있는 구도가 될 뻔 했죠. 그런데 이거 폐기하고 김종훈 후보를 갖고 FTA전선을 만들었는데, 이게 단순히 FTA전선이 아니라 가치의 전선 아니에요? 가치전선.


 


물: 그렇죠. 가치에 대한 싸움이죠.


 


정: 그런데 생각보다는 외교관 출신인데 김종훈 후보가 굉장히 수구에요. 그러니까 맥이 같아, 이영조인가 하는 그 사람하고 맥락이 같은 사람.


 


물: 전문 관료이면서도 정치적 스탠스가 그런가요?


 


정: 관료적으로는... 어떻게 노무현 정부에서 이렇게 출세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운. 음? 본인이 계속 얘기하는 게 종북좌빨, 좌파 빨갱이, 이거 가지고 선거운동 하거든요. 뉴라이트쪽 사람 같으면 그거 하려고 왔겠지. 그런데 이 사람은 외교관 아닙니까? 외교관의 기본은 균형 잡힌 사고거든요. 외교의 기본 철칙 일번은 신중함이거든요. Prudence(신중함, 사려깊음). 신중하려면 말이 중립적이고 균형감이 있고 그래서, 가령 애도표시 할 때도 안타깝다, 애석하다, 애도의 뜻을, 이게 단계별로 다 다르거든요. 그런데 이건 무슨 선동가도 아닌데, 종북이다 좌파다 반미다, 완전히 데마고그(Demagogue, 변설로 대중을 기만하는 선동가)에요. 데마고그..


그래서 역으로 강남의 20대 40대가 선뜻 투표하기가 힘든 후보다. 그러니까 강남 수준에 안 맞는 거예요. 외교관의 장점은 뭐에요? 세련됨, 말의 절제, 균형감 이런 것일 텐데, 이분은 FTA 하나 달랑 들고 와서 이거 반대하는 사람은 다 반미다 좌파다 종북이다.


 


물: 어떻게 보면 오히려 선거가 쉬워지고 있네요. (웃음)


 


정: SNS에서 보면 대한민국 낙선후보 1위 김종훈 후보 같은데. 사실 대한민국 낙선후보 1위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하면 무슨 창피한 일이겠어요?(웃음)


 


물: 강남이니까 문제죠. (웃음)


현장에서 만나는 분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정: 지하철 인사 같은 경우에 며칠 전에는 ‘당신은 안 돼’, ‘빨갱이 같으니라고’ ‘여기가 어딘데’ 그게 그 말 한 마디에 다 들어있는 거거든요. 그런가 하면, 선거 시작하면서 지하철에서 서너 명 중에 하나씩은, 특히 젊은 사람들이, ‘꼭 이겨야 됩니다’ 라고 손을 굳게 잡아요. 저는 선거 여러 번 해봤지만 이런 반응을 느낀 게 처음이에요. 오히려 저보다도 더 간절합니다. ‘꼭 이겨주세요’, ‘꼭 이겨야 합니다’


그게 나는 바람의 불씨라고 생각합니다. 불씨가 불이 붙어서 타면, 주민들한테 이렇게 말하죠. 밭을 갈지 않고 두면 딱딱하게 되고 묵정밭이 됩니다. 밭은 갈아 엎어야합니다.


 


물: 그렇죠. 매년 갈아줘야.


 


정: 밭은 갈아야 옥토가 된다. 강남을 정치 1번지 옥토로 만들려면 갈아주십시오.


 


물: 캠프 분위기가 좋아 보입니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고.


 


정: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와요. 여기저기서. 자원봉사자분들께, 어떤 역할을 드리는가 하는 게 더 중요하고 어려워요.


 


물: 자원봉사자 배치가 잘 안 된다?


 



 


정: 그래서 우리가 뭘 시키기보다 뭘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했더니, 예를 들면 대모산에서 인사하는 걸 우리가 해드리겠습니다. 대모산 담당. 그리고 목욕탕, 아침에 두 명, 오후에 두 명, 저녁에 두 명 해서, 목욕탕에 앉아서 계속 해주겠다, 목욕탕 담당 팀, 선거 비밀인데 알려드립니다.


 


물: (웃음)


 


이 때쯤 되어서 보좌관들의 재촉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캠페인을 돕기 위해 와서 기다리던 강금실 전 장관의 일정도 있었고, 야권연대에 참여한 통합진보당의 후보도 선거를 돕기 위해 대기하던 중이었다.


캠프의 분위기는 활발했으며, 최소한 지려고 마음 먹은 캠프는 아니었다. 상황은 어렵지만, 이들은 이기는 싸움을 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래


 


물: 선거에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고 보고요. 앞으로의 정치 인생의 계획은 어떻게 가지고 계십니까? 질적인 면에서, 그러니까 정치를 어떻게 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추상적인 가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를 여쭙고 싶은데요.


 


정: 제가 태어난 게 휴전협정일에 태어났어요.


 


물: 예.


 


정: 그래서 제가 정치를 하는 동안에 통일되는 걸 좀 봤으면 좋겠어요.


 


물: 아까와 같은 선택이신데, 아까도 남북문제와 복지에서 통일문제, 북한문제를 선택하셨잖아요. 당면과제로는 복지가 더 급할 수도 있잖아요.


 


정: 그렇죠. 그래서 바깥으로는 평화체제를 통한 통일이고, 안으로는 복지국가를 통한 인간화입니다.


 


물: 그걸 만들어가는 방법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 방법론이 노선이지요. 노선이라는 게 방법론이고. 그 점에서는 일정 부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통합당을 진보 쪽으로 노선을 바꿔놨다, 감히 정동영이가 바꿔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을 이렇게 바꿨다 라고 할 정도의 사람이 달리 없는 것 같아요.


 


물: 당 전체의 포지션을 진보 쪽으로 가지고 왔다는 말씀이시죠?


 


정: 우리 당은 그동안 중도 개혁주의 노선이었어요. 지금은 진보적인 민주당의 길을 택했잖아요. 그 과정에 역할을 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방법론을 물어보니까 노선, 노선은 강령에 담겨 있잖아요?


 


물: 그렇죠.


 


정: 강령 1조가 경제민주화, 2조가 사람중심 경제, 3조가 노동의 가치, 4조가 보편적 복지국가 실현, 5조가 평화체제인데, 1, 2, 3, 4, 5조가 제가 꿈꾸는 나라의 비전과 일치하는 것이고, 그것을 당의 강령 1조, 2조, 3조, 4조, 5조에 넣었는데 제 나름대로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봐요. 당의 보수적 흐름, 의원 전체로 보면 3분의 2가 중도거나 보수거나 하는 흐름 속에서도 당을 견인하고 했던 바로 그 점에 대해서 보람을 찾고 있습니다.


 


물: 그것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작업은...


 


정: 그래서 정권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정권획득 이후의 성공이 목표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는 진단이었고, 저는 그걸 거침없이 말해왔어요. 그래서 진보정당과의 통합을 얘기한 것이고, 공동정부 노선으로 가야한다.


 


물: 공동정부 노선으로 간다?


 


정: 민주-진보 공동정부를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지, 민주통합당만으로 집권해서는 노선의 불충분성, 신념의 체화가 덜 됐어요. 예를 들면 원전의 전면 재검토가 강령에 18조에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당내 구성원은 압도적 다수가 ‘원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한단 말예요.


 


원전에 관한 사항은 18조가 아니라, 17조에 들어있는 것으로 이동현님에 의해 확인이 되었다. 단순한 실수인 듯.


실제로 민주당의 구성원들 중 다수는 정동영 후보의 행보나 정치적 입장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인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민주통합당의 강령에 담겨있는 당의 정체성에 비해서도 구성원들은 보수적이다.


이 괴리를 정확하게 잘 알고 있으며, 그 괴리를 메꾸기 위해서라도 진보정당과의 연대가 필수적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물: 그렇죠. 괴리가 있는 거죠.


 


정: 강령은 지나치게 진보적으로 가 있는 거예요.


 


물: 강령은 이만큼 가 있는데 사람들이 못 따라오고 있지 않습니까?


 


정: 강령은 가 있는데 강령을 만드는데 정동영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고,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물: 잘 알겠습니다. 진짜 마지막 질문입니다.


후보님이 그동안 보여준 행보를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보아왔고 저희 딴지 내부의 필진들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저 사람이 변했다, 아니 안 변했다. 그때 기억에 남는 얘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없다면 우리의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 페니레인(필진)”


이 짧은 말을 잊지 말아 주시라는 부탁을 드리면서, 마지막으로 딴지일보 독자들에게 짧게 한 말씀 부탁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정: 딴지일보 독자들은 다른 어떤 분들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딴지일보 독자분들의 그 에너지로 세상을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물: 바쁘신 와중에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시간을 많이 빼앗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 시간 활용한 거에 10배, 100배 표를 좀 주십시오.


 


물: (웃음) 노력하겠습니다.


 


정: (죽지않는 돌고래 기자를 향하여) 사진이.. 너무 인상 쓰지 않았나요?

 


돌고래: 잘 나왔습니다. (웃음)


 




 


이것으로 힘들었던 인터뷰는 끝이 났다.


 


유달리 힘이 들었던 시간이었고, 유달리 신경이 쓰이는 인터뷰였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주변은 시끄러웠고 분위기는 산만했으며, 끊임없이 사람들이 찾아와 후보와 인사하고 한마디씩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맥은 자꾸 끊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런 산만함은 오히려 캠프의 활발함을 나타내주는 징후였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형세였지만, 추격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 캠프는 강남을 지역구에서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 캠프가 될 지 궁금해졌다.


 


정동영 후보가 실제로 업그레이드 되었는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겠다. 하지만 그 판단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이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의 의미는 굉장히 크다.


 


부디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기를 빌어보며 마친다.


 


장시간 읽느라 수고 많으셨다. 졸라 땡큐!


 


정치부장 물뚝심송

twitter: @murutuk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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