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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30. 금요일

리베르

 

 

 

 

우리는 지난번 총선 특집으로 ‘숨어있는 블루칩 후보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참조 기사: [2012 총선 특집] 숨은 블루칩 후보를 찾아서(1) : 최정식)

 

 

 

 

 

그 첫빠따 후보로, 국제사무노련 한국 사무총장 최정식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후보를 추천했지만, 보기좋게 탈락했다; 대딴지일보가 밀었던 후보가 탈락되니 ‘개판 공천’이라며 민주통합당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다시 한 번 우리의 혜안을 확인 받은 순간이었다고, 자위를 해본다.

 

 

 

 

 

 

 

 

 

 

이번에 우리가 숨은 블루칩으로 추천할 총선 후보는 진보신당의 김한주 후보다. 진보신당 소속 후보는 기본적으로 당 이름에서 나왔듯이 정치적 스탠스는 기본적으로 ‘진보’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보들 중에 김한주 후보를 ‘콕’ 찝은 것은 그가 진보신당의 유일한 야권단일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당선 여부는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가 탈당한 진보신당의 존립 자체와 직접 관계가 있기도 하다. 이 진보신당이 존립할 가치가 있는지의 여부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몇몇 이상주의자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이 축복일 수도 있겠다’라는 고종석 선생의 생각에 동의한다. (‘진보신당을 위하여’ [시사인 235호], 고종석)

 

 

 

 

 

그러나 거제에 내려가서 본, 진보신당 후보는 ‘이상주의자’라기 보다는 ‘의리의 돌쇠’의 심성을 지닌 ‘현실주의적’인 변호사였다. 아래의 이너뷰를 보면서 확인하시라.

 

 

 

 

 

* 아울러, ‘숨어있는 블루칩’을 찾아서라는 기획은 이것으로 마친다. 사실, 인터뷰 마치고 편집까지 끝냈던 일부 후보들이 예선에서 떨어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숨어있는 블루칩’이 떠오르기엔 현실 정치판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리고 지역구 후보들의 경우엔 너무 바빠서 도저히 인터뷰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이 점 양해바란다.

 

 

 

 

 


 

 

 

 

 

# 전과 2범으로 학생운동을 졸업

 

 

 

 

 

리: 반갑습니다. 우선 축하 인사드려야 하겠네요. 진보신당에서 전국 유일하게 야권단일 후보가 되셨네요.

 

 

 

 

 

김: 하하... 고맙습니다.

 

 

 

 

 

리: 인터뷰 취지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이번 총선에 아주 노골적으로 후보를 ‘빨아’드릴려고 인터뷰를 자청했습니다.

 

 

 

 

 

김: 영광입니다.

 

 

 

 

 

리: 그렇다고 해서, 가카를 빨아주듯이 노골적으로 하는 거는 저희가 해본 적도 없고, 체질도 안 맞고 그러니까...그냥 평소 인터뷰하듯이 하겠습니다.

 

 

 

 

 

김: 네, 하하. 저희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릴 거니까요.

 

 

 

 

 

리: 음, 우선 지역신문을 제외하고는 몇 차례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어서 아무래도 인지도가 낮아서 김 후보님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소개를 겸해서 신상에 관한 질문부터 드려야겠네요. 기록을 보니까 대학에서 사회부장도 역임하고 그러셨던데...

 

 

 

 

 

김: 네, 85년도에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입학했으니까, 전형적인 386 운동권 세대라고 할수 있고요. 그 당시 뭐 운동권 활동이야 워낙 흔한 이력이라, 내세울 것도 없죠.

 

 

 

 

 

리: 당시 대학 총학생회에서 사회부장이라 하면, 시위 전투부장 아닙니까?

 

 

 

 

 

김: 하하... 맞아요. 주로 시위 조직하고 싸우고 머... 그런 거...

 

 

 

 

 

리: 그러니까 이론이나 문건을 쓰고 그런 배후세력이 아니라...

 

 

 

 

 

김: 그냥 몸빵이죠. 몸빵. 돌격대장 같은... 하하.

 

 

 

 

 

리: 네, 그 당시 고대 총학생회라면 NL 세력이 매우 강하고 전투적인 분위기인걸로 기억하는데...

 

 

 

 

 

김: 뭐, 이른바 NL 이라는 세력은 뭐...대부분 대학에서 다수였고요. 그리고 제가 한참 운동권 할때는 NL-PD 그런 게...확연히 분화되기 전이었고...

 

 

 

 

 

리: 그럼 학생 운동 졸업할 시점에서는 정파가 뭐였습니까?

 

 

 

 

 

김: 뭐, 제가 나오기 직전 무렵에는 NL이 주된 세력이었고 뭐 주체사상도 공부하고 그랬습니다만, 그때 제가 볼 때도 주체사상은 좀 말이 안 된다고 봤어요. 그래서 NL쪽 운동하고는 이별했고요. 굳이 말하자면 PD적이었다고 볼 수 있겠죠.

 

 

 

 

 

리: 지난 번 노무현대통령 장례식때 가카에게 호통치던 백원우 의원하고 당시에 친한 친구였죠?

 

 

 

 

 

김: 그렇죠. 그때 뭐 같은 동기였고, 동고동락하다시피 했으니까요. 당시 전대협 의장하던 오영식과도 친한 동기고 그랬죠.

 

 

 

 

 

리: 근데, 그런 친구들과 나중에는 정파를 달리한 셈이군요.

 

 

 

 

 

김: 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뭐 인간적으로 멀어지고 그런 건 아니고요...

 

 

 

 

 

리: 구속도 두 차례나 되셨어요?

 

 

 

 

 

김: 네, 첫 번째 구속은 옛날에 86년 건국대 사건.

 

 

 

 

 

리: 2학년 때였겠네요?

 

 

 

 

 

김: 그때는 잘 몰랐고 선배들이 가라고 하니까.(웃음) 그때가 2학기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그날 전공필수 시험이 있었어요. 학생운동하고 그러면 공부 안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 후배가 ‘형, 내가 시험 대신 치러줄 테니까 건대 갔다 와’라고. 그래서 겸사겸사해서 잘 됐다고.

 

 

 

 

 

리: 후배가 대리시험 쳐주는 대신에 집회에?

 

 

 

 

 

김: 네. 그래서 후배들 두어 명 데리고 건대에 가보니 느낌이 딱 오더라고요. 그 전에 연합집회를 굉장히 많이 했었거든요. 그 전에 외대, 경희대에서 연합집회 할 때는 거의 다 학교를 막고, 봉쇄를 했어요. 그런데 건대는 텅 비어 있고 봉쇄를 안 하는 거예요. 아, 속된 말로 후리가리(일제소탕, 싹쓸이)를 하려나...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리: 그때가 사상 최대의 구속자가 나왔죠? 천 명?

 

 

 

 

 

김: 천이백 명 넘게 구속됐죠.

 

 

 

 

 

리: 기소되고 할 때는 많이 풀어줬지만 사상 최대의 구속자가 나온 검거였죠. 그러면 그 뒤로?

 

 

 

 

 

김: 그 뒤로 다음 해가 87년 유월항쟁(6.10 민주화운동) 있었죠. 그걸 거쳐서 87년 대통령선거가 있었거든요. 그때 두 번째 구속됐을 때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죠.

 

 

그때 KBS 별관, 별관에 예능국이 있어요. 당시에 여의도에 탱크가 있을 정도였으니, 본관을 점거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고, 별관이 좀 만만했죠.

 

 

 

 

 

리: 부정선거 규탄하고 그럴 때?

 

 

 

 

 

김: 네. 부정선거 규탄하고 또 공정방송. 그래서 들어갔는데, 그때 당시에 처음으로 자동으로 셔터가 내려오는 걸 봤어요. 당시에는 셔터맨이라고 해가지고 사람 손으로 내렸는데... KBS 별관에서 가요무대 녹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어르신들도 많은데 참 답답하더라고요. 우리가 점거했으니 나가라고 말도 못하고. 그렇게 어찌어찌 해가지고 내보내고 바리케이트 치고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뭘 처음 봤는가 하면, 그게 통유리였어요. 그냥 통유리도 아니고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는데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그 당시에 그런 유리를 본 적이 없어요. 안에서 구호를 외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쳐다보지를 않는 거예요. 왜 이러지?

 

 

 

 

 

리: 하하하...

 

 

 

 

 

<이너뷰를 듣기 위해 난입한 고양이>

 

 

 

김: 그리고 이 유리가 방탄유리 비슷해서 깨지지가 않는 거예요. 깨도 구멍이 나지 전체가 깨지지를 않더라고. 그래서 했는데... 뒤에 보니까 그 유리 한 장이 일억 구천만 원이더라고요.

 

 

 

 

 

리: 지금같았으면 집안 전체를 말아먹을 짓을 한 거겠군요. 하하.

 

 

 

 

 

김: 제가 법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어마어마한 죄들이 많더라고요. 특수공무집행방해에 특수재물손괴에 집시법에. 특수재물손괴는 피해액을 명시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걸 보니까 일억 구천만 원 상당의 대형유리를 손괴하고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일억 구천만 원이나 하는 거였구나...(웃음)

 

 

 

 

 

리: 그때는 기억을 해보면, 물론 탄압도 많았지만 상대적으로 관대했어요.

 

 

 

 

 

김: 예. 맞습니다.

 

 

 

 

 

리: 요즘에는 얄짤 없죠. 그때는 그렇게 해도 또 넘어가요.

 

 

 

 

 

김: 대통령 바뀌면 특사로, 특별사면 되고.

 

 

 

 

 

리: 손해배상 같은 것도 없던 일로 되고요. 요즘은 끝까지 가압류니 압류니 해가지고 다 살잖아요.

 

 

 

 

 

김: 맞습니다.

 

 

 

 

 

리: 그때가 더 운동권 천국인 시절이죠.

 

 

 

 

 

김: 네. 천국이죠. 저도 기억나는 것 중에 하나가, 건대 사건을 거치고 나와서 학교에 와보니까 무기정학이 돼 있더라고요. 2학기 중간고사를 안 치고 갔단 말이에요. 그래서 같이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무기정학은 그렇다 치고, 수업도 안 듣고 학점도 안 받았으니까 등록금을 이월시켜 달라고 했어요. 학교에서 거부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도화선이 돼 가지고, 처음 요구는 등록금 이월해 달라 이거였는데, 결과가 소위 민주장학금이라는 게 생겨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고대에서 구속기소 돼서 집행유예 이상을 받으면 등록금 전액을 면제시켜 줬어요. 왜 그렇게 됐는지는 이해가 안 되는데...

 

 

 

 

 

리: 하하하

 

 

 

 

 

김: 그래서 제가 2학년 2학기부터 졸업할 때까지 전액 장학생으로 다녔다니까요. (웃음) 제가 85학번인데 군대도 징역 때문에 면제가 됐고, 그 뒤에도 거의 학교를 안 갔으니까 졸업을 못했죠. 90년에는 아예 학교를 안 가고 거제로 내려왔어요.

 

 

그러다 정식으로 91년에 졸업을 했어요. 그것도 교무처에서 계속 전화가 오는 거예요. 빨리 졸업 좀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그때 지역언론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못 간다고 그랬더니, 한 번만 올라와서 시험 치면 졸업을 시켜줄 텐데 왜 졸업을 안 하냐고 그래서, 곡절 끝에 졸업을 했죠.

 

 

 

 

 

리: 운동권에 대해서 관대하고 혜택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지금 학생들은 격세지감이 엄청납니다.

 

 

 

 

 

김: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는... 당시에는 집회에서 과격한 일도 많았습니다만, 요즘이 그런 쪽은 더 위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저렇게 싸워서 새로운 세상이라고 만들어보자고 했는데, 후배들이 이렇게 스펙에 목매고 안팎으로 엄청난 경쟁에 치여 살게 만든 그런 책임이랄까. 선배 세대로서 후배들을 보면 참 미안함 마음이 듭니다.

 

 

 

 

 

리: 그렇죠. 민주주주의하자며 싸웠는데 오히려 우리 때보다 후배들이 캠퍼스 안에서 더 위축된 생활을 하게 된 결과가 되어버렸는데요. 이 얘기하자면 길어지니까 다음 기회에 좀 더 해보기로 하고, 다시 김 후보님 얘기로 돌아가서요, 90년도에 고향 거제에 오셨는데, 한참 운동을 하다가 낙향을 하신 무슨 계기가 있어서입니까?

 

 

 

 

 

 

 

 

# 노동운동을 하러 고향에 내려 오다.

 

 

 

 

 

김: 낙향이라고 표현하기가 좀 그런 게, 당시 노동운동이 대공장 위주로 막 엄청 발달하고 있었을 때 아닙니까? 노동가요에서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라는 대목이 있는데요, 그 옥포의 조선소가 있는 곳이죠. 87년도에 최루탄 이한열 열사만 기억하시는 분들 많은데, 대우에서 시위하다가 8월에 노동자 이석규 열사도 사망하기도 하고. 분신도 있고, 아무튼 노동운동이 아주 활발하게 일어났던 울산과 더불어 굉장히 앞선 곳이었죠. 대우조선 백순환 노조위원장님도 유명하신 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당시 좀 막연하게나마 노동운동에 복무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왔죠.

 

 

 

 

 

리: 그런데 지방 언론사를 함께 차리고 그랬어요?

 

 

 

 

 

김: 그렇죠. 지역신문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방편이고. 그래야 노동조합에도 자유롭게 들어가고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리: 노동운동을 배우거나 지원하거나 그쪽 방면에서 같이 활동을 하는 그런 차원에서. 고향이 마침 또 여기고.

 

 

 

 

 

김: 예예. 실제 또 지금 현재 조선 노동운동 쭉 해왔던 분들 중에 제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좀 있죠. 학습서클 만들고. 기자생활도 하고 밤에는 학습서클도 하고.

 

 

 

 

 

리: 그때 학습서클에서 맑스주의 책도 읽고 빨갱이 교육을...

 

 

 

 

 

김: 하하하하

 

 

 

 

 

리: 그러고 다음 해 91년도에 결혼을 하셨는데...

 

 

 

 

 

김: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와이프가 배가 불러오니까. (웃음) 혼인신고부터 하고. 그래서 결혼식이 3월 2일인데 우리 딸애 생일은 7월이에요. (웃음) 그래서 여기서 살게 된 거죠.

 

 

거제에 능포라고 바닷가 쪽인데, 신문사도 가난해 놓으니까, 신문사 수준이 거의 이런 수준이죠.(인터뷰를 진행한 선거사무소 한 구석의 어수선한 현장을 가리키며) 거기에 버스터미널, 터미널이라고 해봤자 흙밭에 버스 세워놓는 거예요. 거기에 반지하집, 보증금 20만 원에 달세 4만 원. 그랬다가 지금은 없어진 집인데, 구릉지라고 뻘밭에다 세워서 기울어진 연립주택이 있었어요. 그래서 물을 흘리면 한쪽에 고여서 이 밑에만 닦으면 돼요. (웃음) 그런 집에 있었는데. 반지하에 살다가 이사를 갔어요. 연립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아파트 비슷한 구조잖아요. 그래 이사를 하는데 둘이 리어카로 두 세번 왔다갔다 하니까 되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거제도에서 쭉 있었죠. 그러다 신문사가 망하니까, 또 먹고 사는 고민을 하게 되는 거라.

 

 

 

 

 

리: 아이는 자꾸 자라고...

 

 

 

 

 

김: 네. 아장아장 걸을 때였죠. 그래서 바닷가에 거의 육 개월을 낚시하러 다녔어요. 딸내미 손잡고.

 

 

 

 

 

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거?

 

 

 

 

 

 

 

 

 

 

김: 막막하죠. 전과는 두 개나 있지. 취직은 안 되지. 집에 무슨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는 낳아 놓고... 그래서 낚싯대 들고 가면, - 사실 낚시도 잘 못해요. (웃음) - 그래도 집사람이 싸준 김밥 이래서 들고 가면, 석양이 질 때 맨날 불렀던 노래가,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그 노래 있잖아요. 지금도 목이 메네요. 참 많이 울었죠.

 

 

 

 

 

리: 그때 부인께서는?

 

 

 

 

 

김: 박리다매식 과외.(웃음)

 

 

 

 

 

리: 후보님도 학벌이 좋으시니까 학원 강사라도 하실 수 있지 않으셨나요?

 

 

 

 

 

김: 지역에서는 학원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그렇게 잘 되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더 그랬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는 또 싫었어요.

 

 

심지어는 당시 대우조선 노동조합 같은 곳에 우리 쪽에서 많이 위원장을 차지했죠. 그쪽하고 가까우니까 그런 적도 있었어요. 대우조선에서 회사 측 인사담당 부장이라든지 상무 이런 사람들이 고대 선배들이 많았어요. 자기가 보기에도 아깝거든. 그러니까 홍보팀에 오는 게 어떻겠나 그런 제안도 있었어요. 그런데 노동조합하고 상반되는 게 홍보팀인데,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살아온 길이 있고...' 그렇게 거절했던 적도 있고.

 

 

 

 

 

리: 그 분들은 어려운 형편의 후배에게 순수한 호의로 제안을 했던 건데.

 

 

 

 

 

김: 맞습니다.

 

 

 

 

 

리: 그런 일을 하다보면 노동조합을 지원했던 역할과 반대의 일을 해야 하니까 딜레마 때문에 거절을 했다?

 

 

 

 

 

김: 네.

 

 

 

 

 

리: 그때 부인께서는?

 

 

 

 

 

김: 당연히 거절을 하라는 거죠. (웃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리: 부인의 신념도 상당히 강하시네요. (웃음)

 

 

 

 

 

김: 그렇죠. 제 처랑 같은 학교 동기였는데 민중당 지역 여성위원장인가...아무튼 당시 당성은 대단했죠. 하하.

 

 

 

 

 

리: 참, 반지하에 아이를 키우며 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열성이 대단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김: 네. 뭐, 저희보다 더 대단한 분들도 많았지만. 아무튼 그땐 그런 시절이었죠.

 

 

 

 

 

 

 

 

# ‘1차도 합격못한 놈이 무슨 불만불평!’

 

 

 

 

 

리: 그렇게 암담한 시간을 보내시다가, 사법고시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 하셨습니까?

 

 

 

 

 

김: 6개월 동안 낮에는 낚시를 하다가 저녁 되면 고향 친구들하고 술 마시고 이렇게 살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곰곰히 생각한 게, 내가 남보다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남만큼 할 수 있는 거는 책을 보는 것 밖에 없겠구나. 처음에 그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갈 줄도 몰랐고. (웃음)

 

 

 

 

 

리: 하하하 몇 년 걸리셨습니까?

 

 

 

 

 

김: 6년 걸렸어요. 진짜 힘들었죠. 처가나 우리집이나 보태줄 형편도 안됐고. 작은딸이 큰애랑 삼 년 터울인데 둘 키우면서 집사람이 저녁에 과외 해가지고 뒷바라지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그리고 저는 법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그때 법서를 처음 보고 무슨 한자가 이렇게 많은지.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 민법이다 그러면 그걸 한자로 오지리라고 써요. 물가 오(墺)에 땅 지(地)자에 이로울 이(利) 해가지고. 처음에 오지리 민법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스위스는 서서(瑞士)라고 서 자를 두 자를 쓰더라고요. 그런 것까지 한자로 써서 책을 만들어서...

 

 

 

 

 

리: 대학 때 공부 별로 안 하다가 하려니 힘드셨겠어요?

 

 

 

 

 

김: 그렇죠. 그런 게 힘들었고. 또 운동 출신들이 마찬가지겠지만, 기자일 하다 보니까,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어요. 그리고 사람을 안 만나고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게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리: 고립된 상황에서...

 

 

 

 

 

김: 그래서 만 육 년 한 것 같아요.

 

 

 

 

 

리: 1차는 얼마 만에 합격했습니까?

 

 

 

 

 

김: 1차가 안 됐어요. 나이 들어서 그런가? 5년 동안 1차가 안 되는 거예요.

 

 

 

 

 

리: 좌절감이 어마어마했겠네요.

 

 

 

 

 

김: 그래서 4~5년 하다가 처음엔 그만뒀죠. 그만두고 뭘 했는가 하면, 00700인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그런 저렴한 국제 전화 통신 상품 파는 영업일을 했었죠. 제 처가 다 잊고 돈 벌어오라는 것인지, 양복 한 벌 사주더군요.(웃음)

 

 

 

 

 

리: 다시 시험을 친 거 보면 영업을 잘 못하셨나봐요? 하하

 

 

 

 

 

김: 아유, 영업도 안 되더라고. 무역회사에서 돈 아끼려고 그런 상품을 쓰고 그럴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될 리가 없죠. 그러던 차에 사장하고 전무하던 친구하고 고생한다고 술을 한 잔 사주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 친구가 YS정권에 대한 미화를 굉장히 하는 거예요.

 

 

듣다듣다 안 되겠어서, 제가 좀 갈궜어요. 갈궜는데 이 친구가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넌 사법고시 1차도 한 번 합격을 못 한 놈이 뭐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나’ 그러는데 미치겠더라고. 그래서 맥주병을 집어던져버리고서 그만뒀죠. 그게 9월인가 그랬는데 그 다음에 3월달에 1차를 합격했으니까. 지금도 그 친구 생각하면, 그런 오기를 갖게 해줘서 고맙더라고요.(웃음)

 

 

글솜씨가 있어서 그런가 오히려 2차는 바로 합격했어요. 남들은 2차가 어렵다고 그러는데 저는 1차가 어렵더라고.

 

 

 

 

 

리: 그래서 6년 만에 합격을 하셨군요. 운동권으로 징역살이 몇차례하고, 백수 아빠로 수 년 동안 하고 갖은 마음 고생끝에 사법시험 합격하면서 집에서는 잔치가 났겠네요.

 

 

 

 

 

김: (웃음) 그랬죠.

 

 

 

 

 

리: 전도유망했던 상황에서 그 물을 타고 올라간 것도 아니고, 추락한 상황에서 딱 돼버리니까, 그때가 생애에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겠군요.

 

 

 

 

 

 

 

 

 

 

김: 그랬죠. 그때 기억에 나는 게 처음 합격자 발표 나왔는데, 집사람이 과외를 나갈 때라 버스타고 가는데, 신림1동 골짜기 달동네에 살았거든요. 그 소식을 전화로 전하니까...목이 메어서 그런지 말을 못하더라고요.

 

 

 

 

 

리: 그때는 사법고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서울로 왔었나요?

 

 

 

 

 

김: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까 주로 지리산 고시원을 전전했어요. 거기 가면 거의 고시공부를 포기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집에서 내놓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거의 4,50대, 갈 데는 없고 싸니까.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림동 학원에서 배우지 않으면 합격하기 힘들어요.

 

 

 

 

 

리: 정보가 많이 나오니까?

 

 

 

 

 

김: 네. 끊임없이 모의고사 치고 계속 석차 순위 매기고.

 

 

 

 

 

리: 대학 입시랑 똑같네요.

 

 

 

 

 

김: 네. 신림동에 오지 않고서는 합격하기가 사실상 힘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제가 그걸 가서 보니까 세월만 죽인 거예요. 법대도 아니고 정보도 없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애는 하나는 처가집 광주에 갖다놓고 하니까 하나는 다른 데 갖다놓고 하니까 가정이 안 되겠더라고. 이럴 바에는, 해서 신림동 고시촌 위로 아예 이사를 해버렸죠.

 

 

 

 

 

리: 효과가 있던가요?

 

 

 

 

 

김: 그렇죠. 진짜 고시공부를 하다보면 노하우가 있는데 하루에 열 시간 막 하고 다음날 자고 이런 사람 떨어집니다. 저도 딱 일 년 간, 합격을 할 때 보면, 애가 초등학교를 가니까 아침에 같이 나가는 거야. 오전에 한 3시간, 오후에 3시간, 저녁에 집사람이 과외를 나가니까 애들 밥 먹이고 씻겨놓고 또 2시간. 일하는 것만큼 여덟 시간만 하면 돼요. 토요일은 4시간, 토요일 저녁에는 같이 스터디하는 애들하고 술 한 잔 하고, 일요일은 좀 쉬고, 일요일 저녁에는 내일 모의고사 준비하고. 이걸 규칙적으로 도니까 합격하는 거예요.

 

 

 

 

 

리: 보통 사람 직장 다니듯이?

 

 

 

 

 

김: 네네. 일하는 만큼만 공부하면 된다는 거예요.

 

 

 

 

 

리: 부인하고 결혼한지 13년만에? 고생에 대한 보답은 하고 계시나요? 하하.

 

 

 

 

 

김: 글쎄요... 뭐, 제 처가 어떻게 들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의 모든 재산이랄게 집 한 채 있는 건데, 제 처 명의로 사고, 제 개인 명의 재산은 재산신고 할 때 마이너스 1억 얼마 있습니다.

 

 

 

 

 

 

 

 

# 노동운동하는 변호사

 

 

 

 

 

리: 사법연수원 하실 때가 그럼 2001~2년도 맞죠?

 

 

 

 

 

김: 네.

 

 

 

 

 

리: 그때 민노당이 창당했을 때였는데 당원이셨나요?

 

 

 

 

 

김: 안 되죠. 공무원이니까, 국가에서 월급을 받으니까.

 

 

 

 

 

리: 그러면 연수원이 끝나고 민노당에 입당하신 건가요?

 

 

 

 

 

김: 그렇죠. 그런데 연수원에서도 재미있는 게, 우리 때 운동권 출신들이 엄청나게 들어왔어요. 몇백 명 들어왔어요. 안에 동아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PD계열은 노동법연구회, 저쪽 NL 애들은 통일법연구회, 딱 나눠져 있어요. 그 안에서도 치열합니다.

 

 

 

 

 

리: 그 뿌리는 어디를 가나...

 

 

 

 

 

김: 그 당시에 우리가 2년 차에 실습을 나가는데, 노동법연구회 애들은 안산 외국인노동자의 집, 민주노총, 금속연맹 이런 데서 실습하고, 저쪽은 그쪽 나름대로. (웃음) 그때 노동법학회 회장을 했죠.

 

 

 

리: 만학도였기 때문에?

 

 

 

 

 

김: 네. 나이도 많고. 뭐 판검사 임용될 생각도 없고. 특히 검찰조직은 35세 되면 안 받거든요. 조직이 그런 게 있기 때문에.

 

 

 

 

 

리: 상명하복.

 

 

 

 

 

김: 네. 공부를 잘 해도 갈 수도 없는 거거든요.

 

 

 

 

 

리: 그러면 보통 서울 법조타운 그쪽으로 개업을 많이 하잖아요?

 

 

 

 

 

김: 네. 연수원 동기들 여섯 명 하고 합동법률사무소를 했다가 육 개월 하고 내려왔죠. 여기서 노동조합이나 이쪽에서 계속 요구도 있고.

 

 

 

 

 

리: 연수원 때 노동법학회 학회장 하면서 노동법을 연구했고, 노동운동 쪽으로 와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또 거제가 고향이기도 했고.

 

 

 

 

 

김: 네. 그렇죠.

 

 

 

 

 

리: 그렇다면 대학 마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고 돌아왔을 때랑 비슷한 결심이었나요?

 

 

 

 

 

김: 물론이죠. 사법시험 합격했다고 그 신념이 어디가나요? 하하.

 

 

 

 

 

리: 다시 거제에 내려오면서 어떤 전망으로 다시 시작을 하셨습니까?

 

 

 

 

 

김: 처음에는 이쪽 노동조합에서 지자체 선거에 출마를 해달라는 거예요. 연수원 2년차인데, 졸업도 안 했는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웃음) 나도 돈도 좀 벌고 가족들 하고도 일단 기반을 좀 다져놓고 시작해야 되는 건데.(웃음)

 

 

 

 

 

리: 그래서 시작했어요?

 

 

 

 

 

김: 그땐 연수원생 신분인데 어떻게 그래요. 일단 법적으로 될 수는 없었죠. 사법연수원 마치고 변호사 개업하고 그러자마자 입당하고 뭐 선거 지원도 좀 하고 그랬죠.

 

 

 

 

 

리: 그때 선거운동원으로 막 활동도 하고 그랬나요?

 

 

 

 

 

김: 네. 그렇죠.

 

 

 

 

 

리: 민노당 시절 총선 때인가요? 당 내부 경선에서 후보로 나와달라는 얘기를 듣고 나갔었죠?

 

 

 

 

 

김: 네. 사실 그냥 당 내부 세력으로 볼때 제가 당 내부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제로였었죠. 근데 총선 흥행 차원에서라도 나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민하다가 나갔죠. 사실 당 내부 경선이라도 그거 준비할려면 시간과 노력은 물론 비용도 사실 적은건 아니거든요. 그런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지만 뭐 당을 위한 것이라니까 그런 차원으로 나선것이죠.

 

 

 

 

 

리: 근데 그 경선에서 떨어졌는데 상대 후보 선거운동을 많이 도와주셨다고 심상정 의원이 칭찬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김: 뭐, 그거야 상대 후보라 하더라도 우리 당 후보니까 그건 당연한거죠.

 

 

 

 

 

리: 근데, 뭐 바깥에서 선거운동 하면서 춤도 추고 막 그런다고, 변호사가 자기 선거도 아니면서. 그것도 도의원 선거운동 도와주면서 말이죠.

 

 

 

 

 

김: 뭐 변호사가 별난 건가요. 그냥 넥타이맨 자영업자죠. 뭐 당원이니까 당 후보를 돕는 거는 당연한 거죠. 다른 당원들도 다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나이 40 넘은 중년 남자가 밖에서 그런건 좀 창피하긴 했죠. 그때 제 딸이 “아빠가 길거리에서 이러는 것 창피해. 안 하면 안 돼?” 라고 해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있습니다. 하하하..

 

 

 

 

 

리: 거제도 울산 못지 않은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볼수도 있는데 진보정치의 희망은 있습니까?

 

 

 

 

 

김: 지금까지 거제에서는 성과가 좋았죠. 지금도 경상남도 도의원이 세 명인데 한 사람은 진보신당, 한 사람은 민주노동당, 지금 통합진보당, 한 사람 한나라당 이렇게 돼 있으니까. 그리고 시의원도 열 명이면 서너 명은 진보 쪽이고.

 

 

 

 

 

리: 거제도 울산 못지 않군요.

 

 

 

 

 

김: 예. 단지 시장이나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 거죠.

 

 

 

 

 

리: 변호사로 본격적인 활동은 거제에서 시작하신 건데, 시골 변호사를 닉네임처럼 사용하시던데, 그런 시골변호사가 거대자본 삼성과 김앤장을 상대로 이겼다고 몇년전 오마이뉴스에서 크게 보도가 되었어요.

 

 

 

 

 

 

 



 

 

 

김: 하하. 사실은 완전히 승소를 한 거는 아니고요. 100을 청구를 했으면 한 50 정도. 그런데 그 소송 액수 이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소송이 우리 민변 노동위에서 굉장히 중점을 기울여서 해왔던 기획소송이었거든요.

 

 

 

 

 

리: 기획소송이라면, 어떤 판례라든가 이런걸 바꿔보겠다는 의도로...

 

 

 

 

 

김: 그렇죠. 그 사건에만 국한되기 보다는 전체 노동자의 퇴직금 정산의 문제거든요.

 

 

 

 

 

리: 그렇다면 일종의 공익적 목적이었군요. 근데 퇴직금 정산에 어떤 문제가 있길래 판례를 바꾼다는 거죠?

 

 

 

 

 

김: 우리가 퇴직금을 받을 때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어요. 평균임금이라고 하는데 평균임금에 포함되는 수당이 무엇인가? 회사에서는 자기네들 나름대로 계산을 한 거예요. 대체로 기본급 언저리에서 결정되죠.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더 포함이 돼야 하는 항목, 예를 들어서 '가족수당, 근속수당, 휴가비, 이런 것도 임금이지 의례적으로 주는 게 아니다.' 이런 맥락이죠.

 

 

 

 

 

리: 한마디로 소송 내용은 퇴직금에 들어가는 평균임금의 항목을 무엇으로 산정하느냐 이 문제였군요. 회사에서는 축소하려고 하고.

 

 

 

 

 

김: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이러 이러한 항목을 다시 넣어서 계산을 해서 퇴직금을 달라고 청구를 했는데, 열 개를 넣었는데 다섯 개만 인정이 되고 나머지는 아니다.

 

 

 

 

 

리: 지금까지는 관행적으로 회사에서 정해준 대로 받았는데.

 

 

 

 

 

김: 그렇죠.

 

 

 

 

 

리: 그렇다면, 정말 전체 노동자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판례가 되겠고, 자본의 입장에서... 다시 말해 삼성과 김앤장에서도 각 개별 사업장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겠군요. 그렇다면 그쪽도 상당히 중하게 재판에 임해야 되었겠군요.

 

 

 

 

 

김: 그렇죠. 거의 동시에 각 공장들이 동시에 소송이 많이 진행이 됐어요. 그래서 어디까지를 연금으로 볼 것인가? 노동법학회에서도 교과서가 바뀌는 판례들이거든요.

 

 

삼성하고 소송하면서 대우조선하고 거의 같이 들어갔는데, 대우조선은 3년에 끝났는데 삼성은 몇년이야...두 배 정도 시간을 질질 끄는 지연 작전을 썼죠.

 

 

 

 

 

리: 시효가 없나요? 어떻게 재판을 지연시키는지?

 

 

 

 

 

김: 김앤장에서 재판 연기 신청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임금 시효가 3년이거든요. 3년이 지나가니까 다시 또 소송을 걸어줘야 되고 이런 양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빨리 끝내 주면 뒤에 부분들은 단체협약이나 이런 걸 통해서 정리를 해버리면 되는데.

 

 

저뿐만 아니라 변호사들이 삼성하고 소송을 해가지고 보통 기업의 두 배는 걸릴 거다. 진짜 그렇게 걸릴 거다. 나중에는 법정에서 에피소드가, 저쪽에서도 할 게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판사님 그냥 판결 좀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판사도 웃는 거지. 그렇게 10월부터 끌다가 다음해 3월에 판사가 인사이동 되어서 가 버린 거예요. 다시 새로 온 판사가 재판을 하면 6월쯤 시작하지, 10월부터 6월까지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리: 아주 전략적으로 소송지연을 하는군요.

 

 

 

 

 

김: 제가 볼 때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리: 그렇죠. 결국에는 몇 년 끌다가 판결이 나왔나요?

 

 

 

 

 

김: 7년.

 

 

 

 

 

리: 대법원까지 갔나요?

 

 

 

 

 

김: 그렇죠.

 

 

 

 

 

리: 그래도 절반만 이겼다고 하더라도, 제로에서 본다면 50%는 진보된 거군요.

 

 

 

 

 

김: 그렇습니다. 중요한 판결이었죠.

 

 

 

 

 

리: 그거 외에 변호사 활동하면서 공익 소송을 한 것도 있나요?

 

 

 

 

 

김: 2003년도 추석 때 태풍 매미가 왔어요. 그 소송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져서 제가 그때 손석희의 시선집중에도 나오고 그랬는데. 거제는 통영에서 다리로 전기가 넘어오니까 유일한 거예요. 저쪽에서 끊어져버리면 이쪽 전체가 정전사태가 벌어져 버립니다. 거제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있는 송전탑 두 개가 붕괴가 된 거에요. 그런데 그게 5일 동안 복구가 안 됐어요.

 

 

제가 볼 때는 송전탑 자체가 노후되었고 교체시기를 놓쳤다는 부분하고, 늑장대응을 했다는 부분, 그래서 피해가 아주 컸어요. 조선소가 서버리는 거예요. 일반 가정에서는 추석음식이나 이런 걸 다 버리는 거고. 그런 상황에서 한전을 상대로 소송인단을 모집했죠. 원고요건이 여기 거주하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주민등록등본을 떼온나, 그때 7300 가구에서 왔어요. 그래서 소송비용만 제 돈으로 한 2000만 원 들어갔죠.

 

 

 

 

 

리: 변호사님이 자부담으로 그냥 2000만 원을 낸 거네요?

 

 

 

 

 

<바보 변호사다냥>

 

 

 

김: 그렇죠. 시민들한테 돈을 부담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한전에 약관이 있어요. 배나 비행기처럼, 우리가 잘 안 봐서 그렇지. (웃음) 한전도 전기요금 약관이 있거든요. 거기 보면 한전이 손해배상 책임을 지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고의적으로 정전을 시켰을 경우, 이런 경우는 없잖아요? 그 다음에 중과실, 이거는 법률용어로는 어떻게 풀이 하냐면, 고의에 준할 정도의 과실, 아주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서도 안 했을텐데 정전을 일으킨 경우. 근데 그렇게 하면 거의 면책되어 버리거든요.

 

 

 

 

 

리: 그렇죠.

 

 

 

 

 

김: 우리가 일반 개인 대 개인의 교통사고라든지 이런 데서 말하는 과실은, 그냥 주의 의무, 전방주시의 의무를 잘못해서 사고를 냈다든지 하는 건데, 중과실은 그게 아닌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약관이 생겼는가 하면 일차적으로 한전이 국가기업이잖아요. 일반과실로 배상을 하면 예산이 물어줘야 할 게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소송을 못하게 만든 거지. 그 약관을 깨 보려고 했어요.

 

 

 

 

 

리: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김: 패소했죠. 하하.

 

 

 

 

 

리: 아직까지 그 약관은 그대로 있고?

 

 

 

 

 

김: 네.

 

 

 

 

 

리: 소송비하고 시간만 날렸네요?

 

 

 

 

 

김: 머 그거야 어쩔수 없죠.

 

 

 

 

 

 

 

 

# 덤핑 변호사로 낙인찍히다.

 

 

 

 

 

리: 변호사 일을 하시면서 애환도 있을 텐데, 노동전문 변호사 한다고 해서 다 노동문제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김: 그렇죠. 일반적인 사건들도 많아요. 거제가 전국적으로 가장 통계가 많이 잡히는 게 교통사고하고 이혼이었어요. 판사들도 오면 ‘무슨 이혼이 이렇게 많습니까?’ 할 정도로.

 

 

 

 

 

리: 기록을 보면 싸구려 시골 변호사로 덤핑 치지 말라고 그랬다고?

 

 

 

 

 

김: 예에.

 

 

 

 

 

리: 호의로 하시다가?

 

 

 

 

 

김: 호의가 아니고요. 지역에 있다 보면, 제가 여기서 중학교 고등학교 다 나오다 보니까, 변호사 사무실 찾아오면 이런 거지. ‘사람이 구속됐는데, 어이, 후배님, 동상아, 형님, 와~ 우리 친구 구속됐는데, 빨리 해 주이소, 경찰서 면회 함 가 주이소.’ 그러면 원래 변호사가 착수금을 받아요. 착수금을 외상을 하는 변호사는 없어요. 착수금이 안 들어오면 착수를 안 해요.

 

 

그런데 시골에서는 그럴 수가 없는 거지. 야박하다 하지. ‘얼마고?’ 그래서 ‘삼백만 원인데요.’ 그러면 지갑 뒤져가지고 ‘야, 갖고 온 게 오십만 원 밖에 없는데 일단 이거 받고.’ 그 다음에 계속 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결과가 좋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렇지가 않잖아요.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돈도 못 받고 욕은 욕대로 먹고 이렇게 되는 거죠.

 

 

 

 

 

리: 욕은 왜 먹죠?

 

 

 

 

 

김: 돈을 적게 줘서 이 새끼가 제대로 안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게 아닌데. 그러니까 사람 잃고 돈도 못 받고 이렇게 되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이 년 하니까 성공사례금 이런 거 말고 순수하게 착수금만 못 받은 게 한 일억 되더라고요. 일 해주고 못 받는 거야. (웃음) 바보 되는 거지.

 

 

 

 

 

리: 그리고 대필해주거나 상담 이런 것들도, 동네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지내는 그냥 선배 후배 이런 식으로, 그렇게 또 한 다리 건너서 오기도 하고.

 

 

 

 

 

김: 아버지 친구다 이러면 머리 아픈 거예요. (웃음) 그래서 변호사들이 룰이 있어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소송을 맡지 마라.

 

 

 

 

 

리: 그런 거를 지켰습니까?

 

 

 

 

 

김: 잘 못하죠.

 

 

 

 

 

리: 서운해 하니까?

 

 

 

 

 

 

 

 

 

 

김: 그렇게 해서 좋은 결과가 있는 경우가 드물죠. 또 가까운 사람들의 치부를 다 보게 된다고. 그래서 가능하면 안 하려고 하죠.

 

 

 

 

 

 

 

 

# 거제의 문제, 노동운동의 문제.

 

 

 

 

 

리: 대우조선하고 삼성중공업이 거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사업장이죠?

 

 

 

 

 

김: 네.

 

 

 

 

 

리: 대우조선 같은 경우 채권은행이 산업은행이고요?

 

 

 

 

 

김: 예.

 

 

 

 

 

리: 산업은행에서 대우 조선을 매각하려고 하는 데, 쌍용차처럼 외국자본에 매각하고 정리해고, 그런 방식으로 매각한다면 여기서도 엄청난 노사분규의 회오리가 칠 텐데요...

 

 

 

 

 

김: 그렇죠. 그런 방식으로 매각해서는 절대 안 되죠.

 

 

 

 

 

리: 그런데, 매각과 관련해서는 이 지역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나 진보정당 후보나 뭐 대동소이하더라고요.

 

 

 

 

 

김: 맞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새누리당이든 노동조합의 의견을 많이 받고 있죠. 그리고 그건 이 지역 사람들의 생계가 직접적으로 걸려있는 문제라 아무리 보수적인 후보들이라도 자본 위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얘기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과거에도 한화그룹에 매각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고요. 그때도 범시민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가지고 재벌에 대해서 반대를 많이 했어요.

 

 

 

 

 

리: 지금 현대도 잘 나가지 않습니까, 삼성도 잘 나가고, 그런데 대우는 왜 그렇게 재벌한테 넘어가는 걸 적극 반대할까요?

 

 

 

 

 

김: 사실 대우도 잘 못나가는 거 아니에요. 조선이 큰 불황이 없었어요. 여기서 문제는 재벌이나 오너가 있어서 운영을 하는 것보다는, 우리나라 재벌 순환구조의 모순이야 잘 아실 거고, (웃음) 대우가 어차피 공적자금,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 있는 회사죠. 그래서 지분도 산업은행하고 자산관리공사가 나누어서 가지고 있는데, 일반 매각을 해서 론스타처럼 외국계 투자자본이나 국내 재벌에서 일괄적으로 입찰해서 받는 것은 좋은 방식이 아니다. 특히 포스코가 한 번 거론이 됐어요. 그런데 포스코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이 반대를 했죠. 연관산업으로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거기가 무노조운동 그런 게 있어서 반감이 상당히 있었죠.

 

 

또 실제 우량기업입니다. 일조 삼천 가까운 순이익을 내는 기업입니다. 또 국민기업이고 향토기업이고. 그렇다면 매각을 하더라도 최대 소유지분에 대한 제한조치는 있어야겠다. 예를 들어 3% 이상을 누구도 사지 못하게끔 한다든지. 그래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낫고. 노동조합이나 우리사주나 지역 이쪽에서도 대거 경영참여의 일환으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것도 있을 수 있는데...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하더라도, 적어도 소유지분의 문제, 지분구조에 있어서는 외국계 투기자본이나 재벌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다른 후보들이 거론을 잘 안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산관리공사에서 갖고 있는 지분이 19.11%에요. 11월 22일로 매각 기한이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바꾸면 됩니다. 공적자금위원회에서 바꾸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올해가 총선하고 대선이 걸려있으니까, 차기 정부에 결정을 맡겨야 되죠. 너무 서둘러서 입찰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리: 대우조선의 매각방식이 KT하고 KT&G 이런 공기업 매각방식과 같은 지배구조를 원하는 겁니까? KT하고 KT&G가 50%는 국민주 방식으로 매각을 했는데, 오히려 지배구조가 없다 보니까 외국 투기자본 입김이 더 세져가지고, 투자는 없고 주가만 올리는 데 신경을 쓰고 그렇게.

 

 

 

 

 

김: 그렇죠. 투기자본이라는 거 자체가 초기에 입찰에 참여 안 한다고 해서 접근을 못 하는 건 아니니까. 치고 빠지는 행동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리: 그러니까, 재벌 지배 구조를 개혁한다고 해서, 소유분산을 했더니만, 오히려 적은 지분의 투기자본의 입김이 더욱 세지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해고가 더 어마어마하게 자행되기도 하고 말이죠. KT 같은 경우에는 절반의 노동자들이 해고가 될 정도였어요. 그래서 지배구조 개선, 소유 분산 이런 운동 열심히 한 경실련, 참여연대 그런 쪽에서의 경제민주화 운동이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김: 사실 한계는 어느 방식으로 하더라도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매각의 방식하고 매각 이후에 자본이 어떻게 재편되는가는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그런데 지금 현재로서는 매각 이후까지 넣고 판단하기가 쉽지가 않은 거죠. 또, 그건 주주자본주의라고 하는,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문제와도 직결되는데 그러면 굉장히 큰 이야기가 되니까, 개별 기업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좀 한계가 있습니다.

 

 

 

 

 

리: 차라리 공기업화 시켜버리면 어떨까요?

 

 

 

 

 

김: 사실 그게 현재로선 가장 정답일 수 있어요. 근데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 정권으로선 있는 공기업도 내다 팔 궁리만 하고 있고 그런 건데, 쉽지 않은 일이죠.

 

 

 

 

 

리: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시는데, 비정규직 문제, 사내하청 하도급 문제 등을 현장에서 가장 많이 느끼셨을 텐데요.

 

 

 

 

 

김: 네. 이번에 현대자동차 사건(사내하청 2년 정규직 직접 고용 판결) 나기 전에 사실은 제가 먼저 고등법원까지 가고 대법원까지 갔더랬습니다.

 

 

 

 

 

 

 

 

 

 

리: 사내하청의 정규직화 문제 말이죠?

 

 

 

 

 

김: 예. 그것도 민변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사건인데요. 대우조선 자회사인 대일서비스란 데가 있었어요. 대우조선 사람들의 출퇴근버스를 전담하는 회사에요. 이 회사에서 사내 도급을 받아 하청 근로를 시켰거든요. 실제 내용은 뭐, 원청 소속 노동자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건데요. 즉, 경영이나, 인사가 실질적으로 본사의 지휘 아래 있느냐 하는 것과 하도급 받은 업무가 본사하고만 관계되어 있느냐 하는 두 가지 사항을 기준으로 본사 직접 고용을 해야 하느냐, 간접 고용이 용인 되느냐 하는 문제로 갈립니다.

 

 

 

 

 

리: 그럼 대우 조선 사내 하청 문제는 패소하신 건가요?

 

 

 

 

 

김: 네. 1심에서는 이겼지만 2심과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했죠. 아주 애매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그 기준이 그런 건데. 예컨대 물량의 90%는 여기서 받는데 자체적으로 다른 사업을 한다든지 그러면 안 걸리는 거예요. 그런 식이라 사내 하청 하도급 문제는 좀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될 게 많죠.

 

 

 

 

 

리: 하청 노동자와 원청 노동자 사이, 즉 본사 직영과 하청업체 노동자 사이에 근로조건이라든가 이런 게 차이가 많은가요?

 

 

 

 

 

김: 심각하죠. 우리 조선도 자동차보다 더 사내하도급이 빈번합니다. 소위 ‘물량떼기’라고 그러거든요. 물량 치고 도급계약을 해지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다 나가요. 이게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차별받을 수밖에 없는데, 굉장히 험한 일은 협력업체 사람들이 다 하는데 단가는 낮고. 본청에서, 대우조선해양에서 단가를 아예 정해줍니다. 여기 맞춰라. 그러면 여기에 맞추다 보니까 도급받은 회사의 사주도 챙겨야 하고, 노동자는 무리한 일을 하게 되고, 임금은 적게 되고. 그래서 산재가 났다 하면 거의 다 하도급 업체에요.

 

 

경남 변호사 중에서 제가 산재소송을 가장 많이 맡아서, 산재전문 변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재소송은 법원이 통영이 아니라 창원지법에서 하는데, 산재소송 있는 날이면 법원에서 아예 제 사건 열댓 건을 한 데 같은 시간에 모아줘요. 오기 번거롭다고. (웃음) 그런데 대부분이 사내하청 사건들이고 힘들죠.

 

 

 

 

 

리: 사실 비정규직 문제,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 등,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도 적고, 고용도 불안정하고, 근로조건도 훨씬 열악하고 그래서 직영 정규직과의 갈등도 있고, 소위 노-노 갈등이란 것이 이런 게 원인 아니겠습니까?

 

 

 

 

 

김: 물론이죠. 사실 정규직에 비해 임금도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고, 또 정규직 자체도 기본급 자체는 많지 않습니다. 150만 원 정도밖에 안돼요. 각종 수당, 상여금, 특근 등 포함해서 대략 400~500 가는 건데, 이에 비해서도 절반 수준밖에 안된다면 비정규직이나 하청 노동자의 상황은 참 암울한 거죠. 그리고 정규직 자체 인원도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대우조선이 직영 노동자가 예전 3만 명에서 지금은 7천 명 선으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가다보니, 전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사실상 엄청 줄어들었다고 봐야죠.

 

 

 

 

 







 
 

고용노동부가 2010년 300명 이상 사업장 1939곳을 조사한 결과 41.2%의 기업들이 사내하청 근로자를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국내 기업의 사내하청 근로자 수는 정확히 집계할 수 없지만 32만 6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근로자의 24.6%에 해당하는 규모다.

 

사내하청 근로자 비율은 조선업종이 61.3%로 가장 높고 철강 32.7%, 자동차 16.3% 순이다.

 

(중략)

 

정규직 대비 사내하청 근로자 비율은 한진중공업 289%, 삼성중공업 270%, 현대삼호중공업 255%, SLS조선 246%, 대우조선해양 213%, 현대미포조선 206%, 현대중공업 81% 순이다.

 

조선업종 사내하청 근로자들은 정규직 근로자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동차업종의 경우 사내하청 근로자들에게 통상 정규직의 60∼70%의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 주휴일과 공직선거일 등 법정 공휴일 혜택을 못 받는 근로자들도 많다.

 

 

 

 

 

리: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될 거 같은데.

 

 

 

 

 

김: 그렇죠. 원칙적으로 보면 동일노동-동일임금 식으로,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아야 되죠. 그럴려면 임금 교섭은 개별 사업장이 아니라, 스웨덴이나 그런 유럽국가들처럼 산별 노조 교섭이 이루어져야 하고요. 이른바 연대 임금제인데, 그러나 유럽처럼 노조 조직률이 높지 않은 현실에선 이루어지긴 힘드니까, 우선적으로 최저임금이라도 평균임금의 절반 수준으로 올려서 일단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향상시키면서 임금 격차 수준을 좁혀 나가자는 게 진보신당의 정책입니다.

 

 

 

 

 

리: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어떤 한계 같은 걸 많이 느꼈습니까?

 

 

 

 

 

 

 

 

 

 

김: 매번 느끼죠. 사실 변호사라는 게, 아니 판사라든가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정의감이 넘치고 그런다 하더라도, 일단 주어진 법률과 제도의 범위 안에서의 다툼에 불과하거든요. 기껏해야 쉰들러처럼 살릴 수 있는 사람 몇 명만을 살릴 뿐이지, 전체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다보니 법적 한계가 있을 땐 속수무책일 뿐이죠. 그래서 법을 만드는 국회의 권능이 훨씬 중요한 겁니다.

 

 

 

 

 

리: 자연스럽게 국회의원이 되어야 할 이유가 도출되는군요. 하하. 근데 그런 제도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좀 현실성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김: 네, 그 현실성이란 게 말이죠.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때 비정규직 문제를 ‘현실적’으로 개선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2년 이후 정규직을 만들어놓았지만 1년 11개월 사용하고 계약해지하는 편법이 판치잖아요. 그건 그 제도를 만들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것이구요. 그러니까, ‘현실성’만을 고려한다면 고쳐지는 건 거의 없죠. 그러나 우리가 20~30년 전에서 보면 지금의 현실성이 없어 보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나요.

 

 

 

 

 

리: 네. 잘 알겠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하자면 오늘 밤 날 샐수 있으니까 선거로 좀 화제를 돌려볼까요.

 

 

 

 

 

 

 

 

# 거제에서의 선거운동

 

 

 

 

 

리: 보통 선거운동 끝나면 몇 시쯤 됩니까?

 

 

 

 

 

김: 때가 없습니다. 식당에서 술 한 잔 얻어먹고 아홉 시, 열 시 되면 들어가서 자야 돼요. (웃음)

 

 

 

 

 

리: 그럼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세요?

 

 

 

 

 

김: 다섯 시.

 

 

 

 

 

리: 일찍 일어나시네요.

 

 

 

 

 

김: 여기는 다른 지역하고 다르게 선거운동 시작이 대우조선, 삼성중공업 통근버스 시간입니다. 첫 차가 보통 다섯 시 오십 분에서 여섯 시에 출발하거든요. 그러니까 다섯 시에는 일어나야 각 출발지에 가죠.

 

 

 

 

 

리: 거제시장선거 때도 출마하시고, 이번 총선에도 출마하셨는데, 정치적 야심이 있나요?

 

 

 

 

 

김: 거제시장 선거에서도 똑같은 이유였는데, 제가 속해 있는 진보신당 사정 아시잖아요. 하하. 한 명이라도 더 선거에 나가야지, 당의 존립과도 관계 있으니까. 이번 같은 경우에는 가뜩이나 어려운 당의 사정에서, 노,심,조 이 세분이 당을 나갔잖아요. 당의 존폐가 걸린 문제가 더 걸렸죠. 저 개인적으로는 출마를 안 하려고 했어요. 시장선거 끝난 지가 2년 밖에 안 됐거든요. 정신적, 재정적 타격이 큽니다.

 

 

 

 

 

리: 당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아니고.

 

 

 

 

 

김: 우리 당은 돈 내고 해야 해요. (웃음) 그러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못하겠더라고요. 그랬는데, 제가 마음을 움직였던 이유가 그래도 우리 진보신당이 4년 정도 생활정치, 생활진보 해왔는데, 제가 나가지 않아서 당이 없어지는 일을 스스로 만든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당이 2% 이하를 받으면 정당법상 해산되거든요.

 

 

 

 

 

리: 더 큰 대의로 본다면, 거제는 노동자의 도시니까 노조위원장이나 노동자의 대표가 시장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게 맞는거 아닌가요? 물론 진보신당이긴 하지만 변호사님이 노동자의 대표가 될 수 있습니까?

 

 

 

 

 

김: 원론적으론 기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근데 구체적인 현실에 비추어 보면 좀 복잡한 저간의 사정이 있어요. 거제를 받치는 두 개의 기업, 즉 대우하고 삼성이 있는데요. 완전히 다릅니다. 대우조선은 오랜 노동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열사들도 많이 나셨고요. 그러나, 삼성은 그런 전통이 별로 없죠. 그래서 대우 출신 노동자라고 해서 삼성 노동자가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요. 뭐 그런 사정이 있어요.

 

 

 

 

 

리: 노동자의 연대 정신이랄까 그런 것보다는, 기업 소속 의식이 더 강한 거로군요.

 

 

 

 

 

김: 아무래도 좀 그런 면이 강하죠. 그래서 여기는 표심이 어떠냐면 경기도 수도권이에요. 절대강자가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핵심은 농어촌지역에서 새누리당에 몰표를 주는 거예요. 여기는 이겨봤자 별 차이가 없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특히 민노당하고 진보신당이 나눠졌을 때 한나라당이 대략 3만 2천9백 표로 당선이 됐는데, 저하고 민노당 후보가 받은 게 거의 그것과 비슷해요. 3만 2천 표 정도.

 

 

 

 

 

리: 선거운동하시면서 대우조선이 있는 동네와 삼성중공업이 있는 지역하고 분위기는 많이 다르겠네요?

 

 

 

 

 

김: 어휴~ 물론이죠. 그러니까 선거운동을 가려고 해도 대우조선은 선거운동원들이 가려고 하는데 삼성은 안 가려고 해요. 대우 사람들은 아주 살갑게 대하고 오랫동안 유인물이나 이런 걸 보는 게 습관이 되어있어요. 명함을 하나 드려도 굉장히 잘 보고 잘 받아요.

 

 

삼성중공업 가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정치나 이런 부분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어요. 나를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명함 자체를 안 받아요. 그러니까 선거운동원들이 꺼려하죠. 너무 푸대접을 받으니까. 하하. 그래도 선거 말미에 가면 좀 분위기는 어느 정도 좋아집니다. 아무튼 투쟁 속에서 의식이 발전한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봐도 맞는 말인거 같아요. 하하

 

 

 

 

 

리: 지난 2008년 종북주의 문제, 패권주의 문제로 민노당 분당 할 당시 진보신당에 합류하셨는데 작년 진보신당의 주류였던 이른바 노심조(노회찬,심상정,조승수) 쪽에서 다시 통합진보당으로 재결합했습니다. 노심조 그 분들과 친분관계도 있고, 그 분들도 김후보님에게 권유도 많이 하고 심적 갈등도 겪었을 텐데 진보신당에 계속 남아있습니다. 원칙 때문입니까?

 

 

 

 

 

김: 진보정치가 발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적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통합을 하려면 누구나 공감할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요. 기자님이 지적하신 대로 분당되었을 때의 그런 종북 문제, 패권 문제 이런 게 그대로 남아 있는데 어떻게 없었던 일처럼 다시 합치게 되는지, 제가 순진해서 그런지 고집스러워서 그런건지 잘 납득할 수 없더라고요.

 

 

물론 현실 정치에서 의석을 가져야 어떤 의미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그 분들의 정치적 판단이랄까? 그런 고육지책은 이해는 되요.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제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리: 그러나 진보신당에 대한 이미지가 - 특히 노심조가 탈당하면서 - 고집 불통 원칙주의자들, 또는 운동권 정당 이런 이미지가 있는거 같아요. 진보신당은 3% 소금정당, 혹은 등대정당입니까? 아니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입니까?

 

 

 

 

 

김: 당연히 집권을 목표로 하죠. 우리가 자기 만족을 위해 정당활동 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런데 지금 계속 진보신당에 계신 분들, 그 분들이 좀 전에 말씀드린 저와 같은 소박한 정서 때문에 있는 것이지 특별한 어떤 고집 때문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당 정책과 공약을 보면 제가 법률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뭐, 굉장히 급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이거나 그런 건 별로 없어요. 유럽국가에서 실시되는 정책들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그보다 못한 것들도 많아요. 근데 소수 정당이다 보니 막연히 그렇게 느껴지는 게 좀 억울하죠.

 

 

 

 

 

리: 그래도 진보신당 홈페이지 보면 좀 사람들이 완고하다라는 느낌이 살짝 들던데.

 

 

 

 

 

김: 물론, 그런 고집불통과 같은 운동권적인 정서를 갖는 그런 당원들도 좀 남아 있습니다. 그건 인정하고요. 고쳐나가야죠. 예전에 이른바 지못미 촛불당원들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우리 당의 일부 당원들이 그 분들과 좀 정서적 차이를 많이 보이고 어떤 갈등이 있더라는 얘기를 듣긴 했었는데 좀 개선해야 된다고 봅니다.

 

 

 

 

 

리: 국회에 입성하신다면, 가카가 4대강 파는 것처럼 앞뒤 안 가리고 만들고 싶은 정책이나 법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김: 당연히 노동법 개정이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법입니다. 파견법과 같은 잘못된 법들을 폐지하고 고용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어야죠. 정말 그것만큼은 한 우물 파겠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양극화가 심화되는데 핵심이 되는 문제들이죠.

 

 

 

 

 

리: 네, 정말 바쁘실 텐데 오랫동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어유~ 이 먼 곳까지 오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앞으로 잘 지켜봐 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상이다.

 

 

 

 

 

 

 

 

 

 

비록 두 시간에 불과한 이너뷰 시간이었지만 그의 일면을 알기엔 그리 부족하진 않았다. 그는 변한 것이 없었다. 20여 년 전 학생운동을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며 돌아갔던 90년도의 그 마음은, 변호사가 되면서 변한 것이 아니라 더 철두철미해졌다. 그는 시골변호사 김한주로 불리우지만 그를 규정하는 것은 1차적으로 당원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그 다음의 차원이다. 지금은 위상이 전과는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변호사라는 가오잡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의원을 위해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당의 필요에 의해 출마하고, 당을 지키기 위해 또 출마한다.

 

 

 

 

 

그것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의리를 외면 못하는 시골 촌놈이라는 정체성일 것이다. 인정 속에 개인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분량상 인터뷰에선 생략했지만, 억울한 사람의 국선변호인이 되어 자기 일처럼 뛰어다닌 일이 허다했다.

 

 

 

 

 

그는 지역 현안과 양극화 문제의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를 현실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진보신당의 후보들이 ‘이상주의자’라는 막연한 인상비평적인 우리의 생각에 허를 찔린 셈이다. 그는 혁명을 꿈꾸지도 않는다. 모든 게 바뀌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그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경구와 같은 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좀 더 진보신당과 그 후보들을 알게 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혼자 2천만 원을 걸고 주민을 위해 한전에 딴지를 거는 저돌성. 삼성과 김앤장을 상대로 7년 간을 사투를 벌이는 치열함. 이웃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인정많은 촌사람.

 

 

 

 

 

국회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덕목을 그는 두루 갖추었다. 딴지가 빤스벗고 추천하는 바이다.

 

 

 

 

 

이너뷰어 : 리베르

사진 및 녹취 :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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