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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6. 월요일

블루칼라


 



 




 


데브리(Debris)


 


4장 에드 러셀


 


내가 브라질로 이주한 것은 열 살 때였다. 그 전에는 그리스와 스페인, 그리고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살았던 희미한 기억도 있지만 내 유년의 기억 대부분은 남미 대륙에서 시작된다. 콜롬비아를 거쳐 브라질로 이주하고 나서야,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곳에 5년 이상을 머물렀다.


 


확실히 우리 가족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주, 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장거리의 이사를 반복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이유가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심리학을 전공한 카운슬러였는데 그런 일은 사실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경력을 쌓는 것이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상담을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무척이나 많은 배려와 정성을 쏟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지는 않는 듯했다. 어느 정도 방문객이 늘어날 즈음이면 아버지는 떠날 준비를 했다. 우리 가족은 늘 여행을 했으며 짧게는 두어 달, 길어도 반 년을 넘기지 않고 이삿짐을 꾸렸다.


 


그렇다고 내 아버지가 은둔 생활을 즐기는 폐쇄적인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매일 조깅을 즐겼으며 해가 질 때까지 같이 축구공을 차면서 놀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요리하는 다양한 나라의 음식에 맞춰 거기에 어울리는 소스를 만드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낚시 바늘에 미끼를 끼우는 방법과 캠핑에서 라이터 없이 불을 피우는 법을 알려주었고 밤하늘의 별자리에 얽힌 신화를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셨는데 그것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지만 자신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파는 것을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끔 취미 삼아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것은 특정한 나라의 언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중국어와 일본어까지, 나는 어머니가 모르는 언어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이웃에 살던 정통파 유대인 가정의 아이와 이디쉬어(Yiddish language. 동부 유럽의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이주하면서 확산된 언어. 현재는 극단적 정통파 유대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편이지만 전 세계에 가장 폭넓게 퍼져있는 언어이며 지금도 수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유대인 아이는 자기 민족만이 사용하는 언어를 내 어머니가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놀란 듯 했다.


 


“아주머니는 헤브라이어도 할 줄 아세요?”


 


“그래, 너희 민족이 중요하게 여기는 헤브라이어, 아람어, 이디쉬어 모두 할 줄 안단다.”


 


“우리 아버지는 헤브라이어가 고이(헤브라이어 גוי. 이방인이라는 뜻)에겐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헤브라이어는 성경과 기도문을 읽을 때만 사용되는 신성한 언어거든요.”


 



 


어머니는 그 아이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것이 너희 민족이 가진 자부심이지. 하지만 어쩌겠니, 이 아줌마는 너희 민족의 언어를 배워버린 걸.”


 


아이는 투덜거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아이가 어머니와 이디쉬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 아이는 부모들에게서 불경스러운 이방인과 대화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하여간 어머니는 내가 이름만 알고 있는 나라들의 언어라도 모르는 법이 없었고 그것들을 나에게 가르쳐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출퇴근을 하는 직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분들과 함께 보냈다.


 


옆집 유대인 아이는 우리 가족을 ‘다른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 가족은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금기였다. 부모님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모든 자유를 허락했지만 신(神)만큼은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브라질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일요일이 되면 내 주위 친구들과 이웃들은 모두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갔지만 우리 가족은 그들과 달랐다. 우리는 어머니가 준비한 소박한 도시락을 가지고 나들이를 가거나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보고 또 책을 읽으며 휴일을 보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매주 일요일마다 신이 명령한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온전한 쉼’은 주변 이웃들과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다. 이민자 신분으로 부모님은 그렇잖아도 이웃들과 왕래가 적었는데 종교 모임마저도 참석하지 않으니 더더욱 이웃들과 교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옆집에 살던 가린샤는 내가 성당에 나가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불만이었다.


 


“에드. 네가 진짜 내 친구라면 이번 주엔 꼭 성당에 나와 줬으면 좋겠어. 우리 아빠는 미사를 드리지 않는 아이들과는 같이 놀아서는 안 된대. 그리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셨어. 넌 나와 진짜 친구가 되고 싶지 않니?”


 


10살 짜리 소년에게 귀여운 동갑내기 소녀의 애원만큼 견디기 힘든 것은 없었다. 그 주의 일요일, 나는 부모님께 친구들과 축구를 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가린샤가 다닌다는 성당을 찾아갔다.


 


처음 신의 집을 방문한 소감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나 근사한 경험이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고풍스런 성당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했고 나를 내려다보는 성모 마리아 상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어려 있었으며 젊은 신부님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감미로웠다. 천성적으로 떠들썩한 브라질 사람들도 성당 안에서만큼은 엄숙한 침묵을 지켰다. 수다스럽고 걸걸한 욕쟁이로 소문난 정육점 마르타 아줌마조차도 미사포를 쓰고 기도하는 모습에선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또래 아이들과 함께 성가대석에 앉아 새처럼 노래하던 가린샤의 미소였다. 그녀는 구석 자리에 앉은 나를 발견한 후로는 미사 시간 내내 나를 향해 기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 미소를 매주 볼 수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이상한 남자를 믿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아버지와 어머니를 속여야 했다. 나는 부모님을 실망시킨다는 것이 두려웠다. 가린샤를 따라 성당에 나간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나는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옆에서 야채를 씻으며 말했다.


 


“엄마, 우리 가족은 왜 성당에 나가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미소를 띤 채 모께까(Moqueca. 브라질의 생선 요리 중 하나) 요리에 쓸 마늘을 다지며 말했다.


 


“에드. 엄마는 일요일에 답답한 건물 안에 꼼짝도 앉고 한 시간씩 앉아있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너랑 네 아빠와 함께 산책을 하는 게 더 즐겁단다. 넌 그렇지 않니?”


 


“물론 즐거워. 난 일요일에 엄마 아빠랑 산책하고 돌아오면서 먹는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는걸.”


 


사실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가린샤의 미소와 아이스크림 사이에서 매 번 갈등을 했다. 그러나 내가 그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포기한 건 가린샤의 미소만큼이나 신부님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신부님이 그러는데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래.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이 정해주신 멋진 계획이 있는데 성당에 안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죽게 된다지 뭐야.”


 


어머니는 마늘 다지던 손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내가 그동안 성당에 다녔던 것을 얼떨결에 고백해버린 셈이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에드. 넌 엄마가 네 하루 일과를 정해주고 그것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 말만 들으면서 살면 즐겁겠니?”


 


“아니, 그건 좀 싫은데. 그리고 엄마는 나한테 그렇게 잔소리하지 않잖아?”


 


“음..... 예를 들어 엄마는 축구보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친구들과 하루 종일 공을 차는 걸 싫어하지 않아. 내가 음악을 좋아한다고 해서 너한테 엄마를 위해서만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되어달라고 억지로 떠밀고 싶진 않거든. 에드 너의 꿈을 내가 대신 결정지어줄 수는 없는 거잖니.”


 


어머니는 마늘을 다듬던 손을 물로 씻고는 내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 앉고는 내 뺨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이 정해준 대로 살면 재미가 없잖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건 없단다. 에드, 엄마는 네가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 당시의 나는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내 뺨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손길이 너무나 따뜻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이런, 엄마 손에 아직 마늘이 남아 있었니? 눈이 매웠어? 미안해 우리 아들! 대신 오늘 저녁엔 진짜 맛있는 모께까 요리를 해줄게!”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나는 멈추지 않는 눈물이 부끄러워 괜히 투정을 부렸다.


 


“아~ 눈 매워! 나 세수하고 올래!”


 


성가대석에서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가린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지만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나는 신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 침대 맡에 앉아 내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성당에 나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세례를 받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일요일마다 아이스크림으로 너를 유혹할 거고 네가 하느님이 아닌 우리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길 바랄 거야.”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동안 내 마음을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렇듯 내가 자라면서도 부모님이 나를 이끄는 방법은 거의 언제나 신뢰와 자유였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정말 자유가 필요했을 때 나를 막은 것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가린샤와는 사이가 멀어졌지만 난 정말로 축구를 좋아하게 됐다. 브라질의 모든 아이들처럼 나 역시 축구광이 되었고 해가 질 때까지 동네 친구들과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잔디밭이 아닌 맨바닥에서 공을 차다보니 다리가 까지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정강이가 부러진 것도 여러 차례였지만 부모님은 내가 축구에 열중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을 차고 먼지투성이가 된 나를 어머니는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 시절, 나의 하루는 온전히 나의 것이었고 미래에도 그런 삶이 계속될 것이라는 데에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발재간이 조금씩 학교 밖으로까지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셨지만 내가 학교 대표로 지역 우승을 차지하고 왔을 때 어머니가 보였던 미소는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 나이 열다섯 살. 프로 축구팀의 유스팀(Youth Team) 코치가 스카우트 제의를 위해 집에까지 찾아온 날 어머니는 결국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코치가 떠난 뒤에도 어머니는 나를 앞에 앉혀두고 한참이나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가 조금 진정되었을 때 내가 물었다.


 


“......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셨어요?”


 


내 질문에 다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결국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설명해주마.”


 


“어린 시절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자주 이사를 다녀야했던 건 누군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나요?”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누군데요? 누가 우리 가족을 쫓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다만 분명한 건, 네가 유명해지게 된다면 우린 그들의 눈에 띄게 될 거란 거야.”


 


열다섯은 어린 나이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난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누군가를 피해서 도망 다녀야하는 신세라니. 설마 내가 아는 가장 상냥하고 사랑에 넘치는 가족이 범죄를 저지르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엄마, 그래서 내가 대회에 나가 우승할 때마다 그렇게 슬프게 미소지었던 거예요?”


 


어머니는 어렸을 때처럼 나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왜냐고 지금은 묻지 말아주렴. 언젠가 때가 되면 꼭 너에게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할게. 그때까진... 정말 미안하지만 부디 네가 평범하게 우리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위로가 필요한 건 어머니 쪽이었다. 나에게 축구는 옆집의 가린샤와 같은 존재였다. 좋아하긴 했지만 그것만이 나에게 유일한 기쁨은 아니었다. 나에겐 가린샤보다, 그리고 축구보다 더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었다. 꿈이 꺾인 아들보다 아들의 꿈을 꺾을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플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었다.


 


5년 넘게 브라질에 머물렀던 우리 가족은 다시 여행을 떠났다. 다시 1년에 한 번씩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다녔고 내가 스무 살이 되어서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반 년에 한 번씩, 미리 약속해둔 날짜와 장소에서만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2012년, 부모님은 다시 브라질로 이주했고 나는 그 때 중동의 사막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10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브라질에 입국했는데 그것이 그들을 본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경찰들의 조사 결과는 부부 싸움 끝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한 뒤 자살을 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 가족을 뒤쫓고 있는 자들이 누군지는 묻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은 대답해주셨으면 해요. 다시 그 순간이 온다고 해도 두 분은 같은 선택을 하실 건가요?”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으며 대답하셨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평생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다시 그 결정을 내린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린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너의 꿈을 펼치도록 도와주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그 때의 선택 때문에 나와 네 엄마는 너를 만날 수 있었어. 어떻게 그걸 후회할 수 있겠니.”


 


그 말을 마친 뒤 서로를 바라보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빛을 나는 기억한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고 또한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나에게는 문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였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예약 문자로 보낸 것이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매일 나에게 보낼 메시지를 예약해 두었다가 다음 날 문자를 취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셨다. 그리고 결국 자신들의 죽음으로 취소하지 못한 마지막 메시지를 내가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받은 메시지는 얼핏 보기에 무의미한 숫자와 알파벳 문자의 조합이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어머니와 내가 정해둔 하나의 암호였는데 어머니가 좋아하던 프랑스 철학자 장 그르니에의 섬(Les ILes)이란 책의 특정 페이지 몇째 줄 몇 번째의 문자인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낸 메시지를 받자마자 내가 갖고 있던 책에서 암호가 가리키는 문자들을 찾았다.


 


하지만 내가 풀어낸 암호는 우리 가족의 과거를 비춰주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죽인 자들의 눈을 피해 어머니가 인도하는 곳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겐 추격자의 눈을 피할 새로운 여권이 필요했다.

 

 


=다음 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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