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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3. 26. 월요일

사회부장 산하


 



 


엘살바도르는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동시에 중남미에 위치한 한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수도 이름인 산살바도르는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의 스페인어다.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 성당에서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말기 암 환자들이 미사의 주요 참여자들이었고 집전하는 이는 대주교였다. 미사 도중 총소리가 울렸고 놀라움과 공포가 짜내는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주교는 그 사제복을 피로 물들이며 쓰러지고 말았다.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의 최후였다.


 


죽기 하루 전날, 그는 군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도 우리와 같은 민중입니다. 그대들은 그대들 형제인 농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은 양심을 되찾아, 죄악으로 가득찬 명령보다는 양심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들의 아픔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군부에게는 "명령합니다. 나를 쏘아 주시오!" 쯤으로 들렸을 도발적인 선언이었다.


 



 


14 가문의 사람들이 전체 경작지의 60%를 소유한 나라, 대지주들이 서로 서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나라의 행정-입법-사법과 군대와 경찰까지 장악한 나라. 소작인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던 나라. 보다못한 가톨릭 신부들이 헤롯보다 사악한 지배층의 압제에 저항하던 나라가 엘살바도르였다. 하지만 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래 로메로 대주교는 그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로메로는 본래 보수적인 인사였다. 1942년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온 이후 착실하게 경력을 쌓았고 1977년 산살바도르 대주교가 되기까지 삐딱한 행동 한 번 한 적 없는 하느님만 아는 사제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에서 밝힌 개혁적 사목방침에도 눈쌀을 찌푸리는 전통주의자였으며, 1968년에 열린 메데인 주교회의의 '민중의 교회로 가자'는 슬로건에도 반대하고, 해방신학을 '증오에 가득찬 그리스도론'이라고 공박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산살바도르 대주교로 전격 발탁되었을 때, 엘살바도르의 대지주와 군부, 상류층은 자신들에게 반항할 리 없는 대주교의 출현에 환호했고, 농민들은 암담한 눈길로 로메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로메로가 대주교가 된 2주 후 절친한 친구였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영화 <로메로> 중에서도 그란데 신부는 등장한다. 로메로는 친구인 그란데 신부에게 말한다. “챠베 주교님은 신부님이 과격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란데. “신부님은요?” 로메로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대답한다. “저야 신부님의 용기와 이상을 늘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파괴적이고, 선동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란데 신부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런 말을 들을 분은 주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 속에 계시지 않아요. 왕국을 건설하며 우리와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 눈 앞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한다, 그의 장례식 미사를 집전한 로메로 대주교는 그날 이후 변한다. 빛을 본 사울처럼, 예수를 만난 삭개오처럼. 보수파들의 환영을 받으며 해방신학을 증오로 뭉쳐진 것이라 폄하하던 대주교는 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피살된 이들의 이름을 미사 시간에 부르짖고, ‘실종자 어머니 모임'를 만들고, ‘엘살바도르 시민 인권위원회'를 설립해 민중을 억압하는 폭력사건들을 기록하며 신자들과 사제들에게 “여러분은 성령께서 기름 부어 뽑아 세우신 예언자로서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일을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난 선한 일들을 자랑하고 성심을 다해 악을 고발해야 합니다.”라고 선언하는 '골수 운동권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 잡는 것을 파리 잡는 정도의 수고로움과 동일시하던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은 이 난데없는 변화에 경악했다. 아마 이들도 “대주교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교회 일에나 충실하셔야지 응?” 하는 권유와 “차라리 사제복을 벗고 정치하시지?”하는 비아냥과 “이러다간 정말 재미없을걸” 같은 협박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어느 나라의 당국처럼 말이다. 하지만 로메로는 굴함이 없었고, “폭력이 숨쉬기처럼 일반화되어 있는 나라”의 불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 맹랑한 대주교가 미국에 더 이상 엘살바도르에 무기를 제공하지 말라는 요청까지 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군부는 로메로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로메로는 순교한다. 1980년 3월 24일이었다.


 



 


그 역사의 오랜 기간, 힘 쥔 자, 가진 자, 탐욕스런 권세자들을 위한 종교였으되, 그 태동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과, 가난한 자, 핍박 받는 자, 화평케 하는 자들을 위한 가르침으로 시작했던 기독교는 그 창시자가 태어난 1980년 뒤 또 하나의 순교자를 추가한다. 로메로의 친구였던 그란데의 말, “예수님은 구름 속에 계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왕국을 건설하고 계시다.”는 말에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그대로 녹아 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기도문 그대로 하느님의 뜻은 결코 죽어서 천국에 이르기 위해 애쓰라는 것만이 아니요, 그 뜻을 땅에서 펼치고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라는 것일 게다. 우리 가톨릭의 사제들이 노동자를 돕고, 농민들과 어깨 걸고, 철거민들의 터전을 제공했던 자랑스런 역사처럼.


 


로메로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강론으로써 그는 마치 예수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깎아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죽었다고 신자들에게 전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확신을 갖기만을 바랍니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부장 산하

twitter: @sanha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