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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3. 13. 화요일

Samuel Seong


 


Tijuana. 띠후아나, 이제는 바하 칼리포니아 최대의 도시가 된 곳. 그러나 1979년부터 그 곳에서 한동안 살았던 본 기자에겐 아주 작은 시골 읍내같은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그리고 공수부대에 진압당하는 광주 민중들에 대한 뉴스를 미국 TV를 통해 봤다. 나름 아련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이 곳의 이미지는 너무 단순해졌다.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에 수출하는 "최대 부가가치상품""마약"이 넘어가는 도시, 한 달 500달러라는 턱도 없는 월급을 받는, 그것도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는 마켈라도라, 그리고 엉망인 치안으로 하루 몇 명이 죽는지도 파악이 안 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을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계셨다. 통상본부장이었던 김현종씨. 이것도 좀 기가 찰 판인데, 노무현 대통령은 이 농담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나꼽살의 우띨 선생께선 이를 두고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살바도르 달리의 추상화가 연상된다는 이야길 하기도 했다. 이정우, 정태인 등의 개혁 성향 인물들이 제거되고 나서 거기까지 굴러갔던 것이다.

   


수첩공주마마는 이를 두고 한미FTA는 노통의 유산이라는 드립을 치는데, 본인이 제사장인 박통교의 교리를 다시 한 번 따져보면 FTA찬성론자들보다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장하준 교수가 더 정통에 가깝다는 점에서 심각한 버그가 있다.

 


정주영 회장이 독자모델을 생산하는 자동차 회사를 만들겠다고 발벗고 뛰어다녔을 때, 미국 대사가 독자모델 생산을 포기하면 자동차 공장을 세워주겠다고 했을 때, 정 회장은 그걸 거부했다. 이 제안, 한국에만 왔던 게 아니다. 멕시코는 자체 브랜드의, 자체 모델 공장을 세우는 것보다는 미국의 OEM공장을 세우는 데 만족했고, 그 결과가 GDP의 역전이다.


   


본 기자가 멕시코에 살았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멕시코가 우리보다 잘 살았다고. 그런데 어느 틈엔가 우리가 멕시코를 한참 앞서버렸다. CIA factbook은 2011년 기준의 멕시코 구매력 기준 GDP를 15,100USD라고 해놨는데 우리의 같은 기간 구매력 기준 GDP는 31,700USD다. GDP성장을 경제 정책의 근간으로 잡았던 정부가 1인당 GDP가 절반 정도 되는 국가를 '모델'로 삼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기가 찬다. 그치? 근데 이건 노통이 바보라서 그랬던 게 아니다. 경제학의 기초가 안 되어 있는 분들이 경제정책을 주물럭거리면서도 책임 안 지는 구조가 공고화되면서 이렇게 된 거다. 나꼽살의 선띨 선생이 달리 모피아들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목청을 높이는 것 같은가?    


 


그런데, 한미FTA가 국회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난 이 자리에 있었다.



   



 


본인이 뭘 통과시켰는지도 모르는 분들이(수첩공주의 비대위가 내놓고 있는 "서민정책"을 뜯어보면 여기에 어긋나는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헌정 역사상 국제조약을 처음으로 날치기 시킨 분들에게 항의한다고 세금으로 밥 얻어먹고 있는 분들이 그 추운 날, 물 대포 쏘고 있었다. 이런 말하면 자기들도 갑근세 낸다고 목에 힘주는데, 당신들은 국가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에 월급을 받는 거지, 당신들이 먹는 것은 생산자들이 만들어서 "잉여"로 넘기는 거다.


   


여튼...


   


그날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굳게 굳게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 난 인도다.


   


지난 3월 1일, 난 바라나시에 있었다.


   




   


인도의 일곱 군데 성지 중의 하나. 인류가 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 무엇보다 이 곳에서 죽어 화장을 하면 윤회의 업을 끊을 수 있다고 해서 죽기 전에 와서 기다리기도 하는 곳.


   




   


화장을 위해 쌓아놓은 나무들, 그리고 화장 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도시. 이 곳에 왔다.


   




   


11월 24일자 경향신문 1면을 들고서.


   


마니까르니까 가트는 화장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곳은 화장터 바로 옆의 아주 작은 가트다. 바로 이곳.


 




 


  






이 곳, 아무나 올 수 없다. 가트는 모두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인도파들과 이런저런 인연이 좀 많이 닿는 본 기자, 여기서 151명이 목셔(윤회의 업을 끊는 것)할 수 있도록 브라만 사제에게 요청을 했고, 사정을 이해한 사제, 뿌자(의식)를 거행해 주셨다. 다음 사진들은 이 기록 되겠다. 이 포인트에서 독자 여러분들은 혹시 아는 얼굴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쌩까주시면 되겠다.


   


먼저 단을 준비했다.


   




   


띠까를 뿌리면서 뿌자를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바신을 부르기에 앞서 가네쉬 신을 소환해야 하는 관계로 돈이 좀 올라갔다. 사실은 저거 보다 많이 올라갔는데 저 좁은 공간에서 각도가 안 나와 저것만 찍혔다.


 


 



   



  


향을 붙이고,


   


정화를 위한 불을 붙이기 위해 신성한 가축인 소로부터 나온 버터를 바른다.


 




 


  



   



단에 불이 붙었다. 시바신을 본격 소환.

 




 


   




   



수아화(정화되어라!)를 계속 외친다.

 




 



그리고 151명의 이름을 모두 부르고 가져간 신문에 불을 붙였다.

 




 


재는 갠지스와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의식은 끝났다. 부디 윤회의 업을 끊었기를.


   


 


PS. 새누리당과 그 언저리의 비슷한 분들은 이렇게 해드렸으나, 요즘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행태도 만만찮다. 애정이 전혀 없는 151분은 한꺼번에 식을 치뤄드렸으나 너님들은 시바신 탄생지에서 한 명씩 따로 이름 태우는 수도 있으니 유의해주시기 바란다.


   


   


정권교체 안 되면 귀국이 가능할지 살짝 걱정되는, 딴지 국제부 Samuel Seong


Twitter: @ravenclaw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