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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0.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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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독촉 시간


 

은행 업무마감 시간인 오후 4시가 되기까지 채권추심원은 그 날의 입금액을 다시 확인한다. 하루가 끝나기 전에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입금을 하겠다고 약속한 채무자를 중심으로 전화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채무 상환을 독촉하고 입금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고객님. 오늘 몇 시까지 입금 가능하십니까?”

 

실적이 좋지 않은 날에는 약속 시간이 되기 전에 먼저 돈을 보내는 채무자도 달갑지 않았다. 사장이 과장에게, 과장이 사원에게 수시로 물었기 때문에 과장보다 먼저 입금된 내역을 파악하고 있다가 보고를 해야만 면이 서기 때문이었다. 실적이 괜찮은 날에는 언제 들어와도 들어올 돈이라고 생각하고 여유를 부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추심원이 가장 좋아하는 채무자는 ‘돈을 쥐고 연락하는’ 채무자였다. 은행 CD기 앞에 도착해서, 또는 금융기관 홈페이지에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한 직후에 전화를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웠다.

 

돈을 받아내는 입장도 답답했지만 돈을 끌어다가 갚아내는 입장도 다르지 않았다.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추어 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은행 업무가 마감되고 나면 그 날 입금을 한 사람과 입금하기로 약속한 사람을 추려서 과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실시간으로 계좌를 조회하면서 입금액을 확인하다 보면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피가 마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추심2과장 박치훈이 채권추심원 김철수에게 입금 예정액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김철수, 오늘 얼마 남았냐?”

 

“150정도 있습니다.”

 

“오늘 얼마나 했어?”

 

“910만 원 했습니다.”

 

“그래. 수고해.”

 


오늘 철수의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하루 천만 원 정도를 회수한다면 월급도둑놈이라 욕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과장에게 보고한 예정액을 채워넣기만 하면 오늘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치훈 과장이 장재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장재완이는 얼마 남았어?”

 

“없습니다.”

 

“없어? 오늘 얼마 했는데?”

 

“얼마 못했습니다. 1800 조금 넘겼습니다.”

 

“1800이 뭐냐. 시팔 재수 없게. 오늘 2000 채워라.”

 


말은 재수 없다고 하면서도 박치훈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장재완의 실적이 워낙 좋아서 과 달성은 매번 무리가 없었다. 오늘도 남들의 두 배를 해냈다. 사실 장재완이 오늘 받아낸 돈의 대부분은 철수가 대신 받아준 캔디와 미미의 통상교섭액이었다. 장재완은 과장의 칭찬 아닌 칭찬에 기분 좋게 웃으며 철수에게 찡긋 눈인사를 했다.

 

채권추심원의 업무 능력은 팔 할이 운에 달려 있었다. 철수가 오늘 회수한 돈의 대부분은 강오복이 자진해서 가져온 것이고, 장재완이 받아낸 돈 역시 다방 주인이 먼저 전화를 걸어와 통째로 갚은 것이었다. 하루 종일 전화를 돌려도 이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 추심원도 있었다. 과장이 고개를 돌려 이민호에게 물었다.

 


“이민호, 얼마 남았어?”

 

“저는… 아직… 확실한 게 없습니다.”

 

“오늘 얼마 했어?”

 

“… 30만 원 했습니다.”

 


이민호가 어렵게 꺼낸 대답을 듣자마자 박치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민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박치훈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민호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혀를 차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민호는 차라리 과장이 욕을 하거나 화를 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과장은 과 전체의 실적이 나쁘지 않았고 또 월초이기도 했으므로 더 이상 심하게 말하지 않았다.

 

그 날 입금을 약속한 채무자와 연락이 두절되면 추심원들 사이에서는 ‘깨졌다’고 표현했다. 채무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입금을 미루는 경우는 ‘야부리’라고 했다. 예상하지 않았던 채무자가 입금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새로 잡은’ 채무자가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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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독촉 시간에는 추심원의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채무자가 상환액을 교섭하기 위해서 긴 통화를 하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부 사정을 알 리 없는 채무자에게 내일 다시 이야기 하자며 교섭을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좋지 않은 때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이민호는 15분이 넘도록 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오늘 넣어주시면 이자 다 감면 해 드리고, 원금만 받을게요.”

 

“그럼 얼마나 되죠?”

 

“240만원만 넣어주시면 됩니다.”

 

“돈이 조금 모자란데…”

 


이민호는 마음이 급했다. 그의 입에서는 녹음해둔 것 같이 언제나 반복하는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고객님, 삼 년 동안 저희 돈 빌려 쓰시고 지금까지 몇 번 입금하셨어요? 딱 한 번 넣으셨잖아요. 그렇죠? 좀 생각해보세요. 저희가 이자 받으려고 장사하는 건데 그동안 서류꾸미고 등기 보내고 전화하고 그 비용도 어마어마하죠. 그랬는데 그 돈을 이자도 한 푼 안 받고 원금에 끝내드리겠다는데, 나 같으면 어떻게든 구해서 갚겠네.”

 

“조금 더 안 되나요?”

 

“지금 얼마 있으신데요?”

 

“글쎄… 좀 더 알아보고서…”

 

“그러니까 지금 주머니에 있는 돈이 얼마에요?”

 

“150정도…”

 


이민호는 왼손에 수화기를 옮겨 쥐고 오른손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와이캐피탈의 내규에 따르면 일괄상환 시 추심원이 재량에 따라 감면할 수 있는 범위는 보통 원금의 30%, 최대로 잡아도 원금의 50% 선이었다. 연체일수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이 채무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할인액은 최대 30%였다. 계산 결과는 168만 원, 이민호는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채무자를 독촉했다.

 


“아유, 150까지는 안 되고요. 지금 바로 입금하시면 170만 원까지 해 드릴게요.”

 

“지금 150 밖에 없는데…”

 

“오늘 6시까지는 입금 가능하세요?”

 

“150도 빌린 건데… 이제 더 빌릴 데도 없고…”

 

“이렇게 안 된다 안 된다 하지 마시고 도와줄 때 구해 보세요. 그리고 혹시 못 구하셔도 전화 피하지 마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채무자는 전화를 끊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이민호가 오늘 하루 종일 거두어들인 돈은 10만 원, 20만 원, 분납채무자 둘이 전부였다. 앞으로 입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170만 원짜리 채무자 한 명 뿐이었다. 초조하게 채권 목록을 뒤적여 보아도 돈 나올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이민호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까의 채무자였다. 여러 대부 업체에 연락을 해 보았던 모양이다.

 

 

“제가 알아보니까 엘엠대부에서는 원금 50% 빼준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여기부터 갚아야겠네요.”

 


이민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대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였다. 다른 업체와 교섭을 해보고 이쪽에서도 감액이 되는지 가늠해보려고 이런 말을 던졌으리라. 이민호는 화를 누르며 친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엘엠대부요? 그렇죠. 거기는 한 번에 납부하면 70%까지 해준다고 하던데요.”

 

“원금에서 70%까지 빼준다고요?”

 

“네. 그게 업체 상황에 따라서 달라요. 저도 거기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어쩌다 들은 이야긴데, 엘엠이 저희보다 규모가 작거든요. 고객님도 좀 더 알아보시고 싸게 싸게 잘 처리하세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민호는 상냥하게 상담해 주는 듯 통화를 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원금의 50% 아래까지 채무를 감면해주는 회사는 드물었다. 이자감면에 원금반액이라는 조건은 국민행복기금 제도시행 이후부터 시작된 파격적인 상환 조건이었다. 이보다 나은 조건으로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이민호의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업계에서는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을 원금의 5% 미만으로 할인해 매각했다. 신용정보회사에 매각되는 부실채권 중에는 1% 수준으로 거래되는 것도 많았다. 이런 부실채권을 취급하는 군소업체에서 일하는 추심원은 보통 일종의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원금의 20~30% 정도를 회사에 납입하고 그 이상은 자기 수입으로 챙기는 식이었다. 이런 경우 이민호가 말한 것처럼 할인율이 높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엠대부는 와이캐피탈에 준하는 규모의 추심업체였으니 이런 식으로 대폭 감액을 해주지는 않을 터였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채무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추심원을 괴롭힐 것이다. 이민호는 자기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해 채무자를 유혹한 엘엠대부의 담당자를 물 먹이기 위해서 자기 채권의 추심을 보류하기로 했다.

 

장기연체 채권의 경우 다중채무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추심업체 사이에는 이런 식의 경쟁이 있었다. 하지만 채권추심업체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때로는 업체 사이에 담합이라 불러도 좋을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철수가 이런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오예스대부인데요. 주민번호 810301-11***** 김필승이, 거기도 채무 있죠? 우리가 이자감면에 원금 불렀는데 다 낼 거 같거든요. 거기도 원금 밑으로는 받지 마세요.”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필승의 전화가 왔다. 와이캐피탈의 채무에 대해서도 원금만 상환하라고 했더니 그는 순순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추심원 입장에서는 교섭과정에서 노력을 하지 않고도 충분한 금액을 회수하는 꽃놀이패 뒷거래였다. 이런 식으로 추심업체 사이에서 채무자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는 명백히 불법이었다. 하지만 업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채무자가 알 수는 없었다. 금융감독원에서도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이민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맞은편의 철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철수와 눈이 마주치자 이민호가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세워 제 입술에 가져갔다. 철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책상서랍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들었다. 은행 업무 시간이 지나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짬이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민호는 오진성과 동갑내기 고향친구이며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기이기도 했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취업원서를 들이밀던 차에 먼저 이 회사에 입사한 오진성의 소개로 뒤따라 들어왔다. 그는 철수보다 입사가 조금 빨랐지만 나이가 한 살 많은 철수에게 말을 낮추지 않았다. 철수도 언제나 이민호에게 깍듯하게 대했고 선배라고 불렀다. 철수로서는 이 회사에서 동료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유일한 상대였다. 그리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데면데면 멀지도 않은 딱 좋은 동료였다.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꺼내기도 전에 이민호는 씨근대며 내뱉었다.

 

 

“엘엠대부 이 새끼들 지난주부터 자꾸 이래요. 정신 나간 놈들 같이 반액할인 막 치네요.”

 

“선배님도 그냥 빼주시면 안됩니까?”

 

“아니, 받을 돈을 받아야지. 참 나, 더러워서… 저 그만 두려고요. 이번 7월까지만 일하고 그만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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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는 이민호가 연초에도 회사를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다. 와이캐피탈에서는 매년 1월, 7월에 기본급에 해당하는 보너스가 나왔다. 보너스와 퇴직금을 합하면 제법 큰 돈이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전후로 퇴사하는 직원들이 종종 있었다. 워낙 이직률이 높은 직종이었다. 누군가 퇴사를 결심했을 때 주위에서 만류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서 어느 정도 감정이 소모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는 해낼 수 없는 일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항공사 승무원과 같은 서비스 업종 노동자가 친절함을 연기하듯, 채권추심원은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를 고수해야만 했다. 친절과 위압은 전혀 다른 가면이었지만 감정노동의 강도는 다르지 않았다. 요즘의 채권추심원이 하는 일은 예전의 해결사가 일관되게 위협적인 말투와 몸짓을 사용했던 것과도 달랐다. 고객님을 찾으며 존댓말을 사용하는 사이에 은근하게 위압감을 심어주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강남대로 안쪽 골목에는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직장인이 여럿 있었다. 쓴 연기를 들이키며 회사를 그만두리라 결심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철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오전에 조황진이 빌딩 입구 게시판에 붙여 놓은 채용공고가 눈에 띄었다.

 

 

채권관리 업무 신입사원 모집

 

 

철수는 게시판으로 손을 뻗어 종이를 잡아 뜯었다.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게 손이 가고 말았다. 채용공고가 인쇄된 종이를 움켜쥐고 나서야 비로소 당혹감이 밀려왔다. 철수가 주변을 살피며 황급히 종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민호는 철수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철수의 몸짓은 마치 이민호의 퇴사를 만류하는 듯 보였다. 신입사원 따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회사에 미련이 없을 지라도 떠난 뒤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민호가 애틋한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보다가 두 개비 째의 담배를 물었다. 철수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란 개념은 미국의 맑시스트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에 의해 대두되었습니다. 그녀는 1983년 발표한 책 <감정노동>에서 항공승무원과 채권추심원의 노동을 주요 사례로 들어 감정노동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는 개인의 감정이 도구화되고 상품화되는 과정을 추적한 저술입니다. 혹실드는 감정노동은 ‘표정과 몸의 표현을 공공에게 보여지도록 만들도록 감정을 통제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사무실에서는 고현지가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주임님. 현지는 복합기가 멈춘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요. 문서가 안 나오길래 A4 용지가 걸렸나 싶어서 그 안에 열어 봤어요. 뭐 걸린 건 없는 것 같아서 토너가 없나 해서 시험인쇄 페이지도 눌러봤는데요. 글쎄 알고 보니까 종이가 다 떨어진 거 있죠. 헤헤. A4 용지 한 상자만 꺼내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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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문장만 말해도 충분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테지만 현지는 그동안의 상황을 조잘조잘 설명했다. 복합기에 인쇄용지가 다 떨어져서 새 용지를 채워 넣어야 한다는데 마치 대단히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라도 일어난 듯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철수는 현지가 단숨에 그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고 나면 지쳐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으나 현지는 여전히 생기 있고 발랄했다. 현지가 앞장서서 창고로 향했다.

 

인쇄용지는 복합기가 설치된 창고의 안쪽 수납장 위에 쌓아 두었는데 제법 높이가 있어서 현지가 혼자 꺼내기는 어려웠다. 철수라고 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철수의 키는 현지에 비해 반 뼘 정도 컸을 뿐이었다. 철수는 구두를 벗고 의자 위에 올라서서 가장 위에 쌓여 있는 복사용지 박스를 꺼냈다. 조심해서 상자를 들고 의자를 내려와 신발을 도로 신고 바닥에 발을 딛고는 의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철수는 커터칼로 상자를 죄고 있는 플라스틱 끈을 자르고 복사 용지 한 묶음을 꺼냈다. 종이 묶음을 현지에게 건네주려다 말고 제 손으로 복합기 용지함을 열어 종이를 채워 넣었다. 복합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다시 인쇄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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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는 이 모습이 흥미로운 듯 가까이 다가왔다. 복합기에 몸을 바짝 기댄 모습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투였다. 철수와 눈이 마주치자 현지가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약속은 없는데…”

 

“현지랑 아웃백 가실래요? 저 1인 식사권 있어요.”

 

“저녁은 좀…”

 

“무슨 일 있어요?”

 

“제가 할 일이 좀 있어요.”

 

“무슨 일인데요? 현지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에요?”

 

“설명하기가 좀 복잡해서.”

 

 

현지의 얼굴에 실망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입술이 오리 같이 쭉 튀어나오고 눈매가 일그러지면서 미간과 이마에는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현지는 언제나 자신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마는 것은 어린 여자의 특권일까, 철수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수아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수아는 스무 살이었던 때에도 감정을 스스럼없이 노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철수와 함께 살기 시작한 뒤로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철수는 수아가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얼굴이 정말 맨 얼굴이었는지 아니면 민낯처럼 보이는 가면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내면을 노출해도 다치지 않을 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내부세계와 외부세계가 충돌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없다면 아무리 얼굴 가죽이 얇은 사람이라도 쉽게 감정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태어나 자랐던 세계에서 환영받았던 사람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철수는 현지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을 관찰하다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자 현지가 철수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현지의 눈꺼풀과 눈빛과 눈썹이, 입술과 치아와 잇몸이, 콧구멍과 인중과 그 아래의 솜털이 모두 함께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서 온기가 나오는 듯 주변이 따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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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작가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