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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02.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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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캔디와 영희 그리고 제삼의 남자


오전 10 30, 채권추심원 김철수는 우체국에서 업무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다른 추심원들은 모두 채권회수를 독촉하기 위해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장재완 대리가 외근을 나간 터였다. 그 외에 달리 철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철수도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곧장 제 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출력해 놓은 채무자 명단을 살펴보며 어디까지 전화를 돌렸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철수는 장재완의 전화를 당겨 받았다.

 


여보시오.”

 


나이가 적어도 60대 이상일 것 같은 탁한 저음의 남자 목소리였다. 철수는 볼펜과 메모지를 찾으며 답했다.

 


와이캐피탈입니다.”

 

내가 말이오, 빚을 갚을라고 하는데 말이오.”

 


채무자가 먼저 연락을 해서 부채를 정리하겠다고 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으나 그 경우는 대부분 20~30대의 젊은 채무자들이었다. 빚을 청산하지 않고 신용이 무너진 채로 앞으로의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추심원 입장에서 상환금액을 교섭할 때에도 젊은 남자들에게는 채무를 변제해주는 비율이 훨씬 낮았다. 아쉬운 쪽은 채무자이니 말이다.

 

반면 60대 이상의 채무자는 새로 경제활동을 시작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그냥 빚을 끌어안고 살다 가겠다고 택하기가 쉬웠다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는 아무리 심한 말을 해서 감정을 자극을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추심원은 노인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아주 드물게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채무자가 죽기 전에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연락을 해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철수는 이 늙은 남자가 시한부 판정이라도 받았을까 싶어 가장 친절한 목소리로 응대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객님 성함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남자는 가래가 끓는 걸걸한 목소리로 수화기 저편에서 더 멀리를 향해 외쳤다.

 


캔디야, 캔디야, 야 이년아! 너 생일이 언제냐? 으응? 뭐라고? 아니다, 주민증 갖고 와. 일루 빨랑 오라구.”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랐다. 철수를 상대할 때에는 사뭇 점잖은 말투를 썼지만, 캔디라는 여자를 부를 때는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어디 보자. 캔디 너, 원래 이름이 김영희였냐? 클클클... 영희가 뭐냐 영희가? 늬 오빠는 그러면 철수냐?”

 


김철수는 김영희라는 여자에게 형제애를 느꼈다. 철수도 자라면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수차례 들어왔다. ‘이름이 김철수야여동생은 영희야? 너희집 개는 바둑이겠네?’ 철수는 바둑이든 검둥이든 개를 키워본 적이 없었고 여동생 역시 없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놀려대며 찾았던 영희의 존재를 확인하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비록 추심원과 채무자의 관계일지라도, 결코 오누이가 될 수 없을지라도, 김철수와 김영희가 서로를 알게 되다니 애틋한 일이었다.

 

철수는 영희를 대신해서 전화를 걸어온 늙은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철수면 어떻고 영희는 또 어떻단 말인가? 그리고 김영희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캔디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늙은 남자는 철수의 이름을 몰랐고 속마음은 더군다나 알 리가 없었다. 남자는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영희에 대해 말했다.

 


이름은 김영희고, 주민번호 910909-20*****이오.”

 


철수는 채무자 관리 프로그램에서 남자가 불러준 주민번호를 조회했다. 김영희의 채권은 장재완이 담당하고 있었다. 자기가 담당하는 채권이 아닐지라도 동료가 외근 중이거나 다른 통화를 하고 있어 바쁘다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철수가 바쁘게 눈을 깜빡이며 김영희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전화를 걸어온 남자는 탁한 기침을 쿨럭쿨럭 토해내다가 재촉하듯 물었다.

 


빚이 얼마요?”

 

현재 원금이 223 5701, 이자가 591 7337, 합계잔액은 815 3038원입니다.”

 

다 해서 815만... 얼마라고?”

 

“815만 원만 넣어주시면 됩니다.”

 

그래 우수리 떼고! 그쪽 사장님 계좌번호는 어떻게 되시나?”

 

국민은행 370103-121-9****입니다. 예금주는...

 


와이캐피탈입니다 라고 끝까지 말하기 전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성질도 급하네. 철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와이어넷 관리프로그램에 교섭이력을 적기 시작했다. 언제든 통화를 마치면 채무자와의 대화내용을 간추려서 교섭이력 항목에 기록해야 했다. 그런데 노년 남자의 전화까지 타이핑을 하고 손을 멈췄다. 캔디라고 불리던 여자, 김영희와 직접 통화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채무자 본인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 제삼자에게 채무 사실에 대해 고지하는 일은 심각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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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심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철수가 담당하게 된 채권에 이자 전액감면, 원금 50% 감면, 채무자가 상환을 원할 때 연락하기로 했음 이란 내용의 교섭이력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자와 원금 감면은 보통 부채를 일괄상환할 때 제시되는 조건이었다. 철수는 채무자가 원할 때 상환하기로 했다는 기록에 숨겨진 의미를 몰랐다. 어쨌든 이 파격적인 제안을 알리고자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몇 번 지나가자 채무자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와이캐피탈 김...

 


철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무자가 냅다 호통을 쳤다.

 


이 사람이 어디다 전화질이야!”

 


채무자가 추심원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일은 처음이었다. 전화를 잘못 걸었나? 아니면 전화번호가 바뀐 걸까? 철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철수와 통화하는 상대는 분명 채무자였다. 그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거세게 항의했다.

 


다시 또 전화하면 바로 금감원에 신고한다.”

 


금감원이라는 말을 듣자 철수의 말문이 막혔다. 금융감독원에 신고하겠다는 이야기는 추심원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말이었다허나 철수가 욕설을 한 것도 아니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무자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철수를 몰아세웠다.

 


알았어, 몰랐어?”

 


철수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어물대는 도중에 전화가 끊어졌다. 철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장재완 대리가 철수를 돌아보며 무슨 일인지를 물어보았다. 철수가 상황을 설명하자 장재완이 입을 쩝쩝 다시다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새끼 작업에 우리 한과장님이 말렸어.”

 


추심원이 채무 사실을 당사자 외의 사람에게 알리는 일은 채권추심법에 의해 금지된 불법추심 행위였다. 채무자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이나 동료에게 행방을 물을 때 조심해야 했다. 밀봉되지 않은 엽서 같은 우편물을 발송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채무 사실이 알려질 수 있으므로 금지되었다. 또한 결혼식이나 장례식장 같은 곳에 찾아가서 채무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행위 역시 불법추심에 해당되었다. 정식 인가를 받은 추심업체라면 채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지켜야만 했다.

 

그런데 이 법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 전화를 걸어서 빚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을 때 추심원이 채무자 본인이십니까?’라고 확인하는 질문을 놓치는 때도 있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면서 삼자고지를 유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대리변제 요청서를 받아두는 편이 가장 안전했지만 당장 돈을 갚겠다는 사람에게 문서 작성 절차를 들이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속이려고 작정한 채무자가 거짓말을 하면 아주 노련한 추심원일지라도 깜빡 속아 넘어가는 상황이 있었다.

 

장재완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별 생각 없이 삼자고지 했다가 당한 거야. 그렇게 드러운 새끼들이 가끔 있어. 몇 푼 되지도 않는데 마누라가 몰래 쓴 돈 지가 대신 갚아 준다고 구라를 치는 놈들도 있고, 지가 애비라고 야부리를 까면서 자식새끼 빚이 얼마냐고 캐묻는 놈들도 있고. 개중에는 진짜도 있지만 슬슬 간보다가 작업 들어오는 잡것들도 많어. 철수 너도 조심해라. 삼자고지 잘못 걸리면 2개월 100% 감봉, 심하면 파면이야. 한과장은 이 새끼 때문에 강등됐다.”

 


추심원이 본인 확인을 하지 않고 제삼자에게 채무 사실을 알렸다는 증거를 확보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통화 내용을 녹음해서 금감원에 삼자고지로 신고해 버리면 추심원은 꼼짝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채무자가 불법추심행위를 신고한다고 해서 그의 부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추심회사 입장에서는 신고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채권추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캐피탈에서는 채무상환을 무기한 미뤄주었고 이런 채무자는 채권 소멸시효가 지나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이 규정하는 불법추심행위를 악용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금감원은 이미 채무 내용을 알고 있는 제삼자가 대리변제를 원하거나 채무자의 연락이 두절되었을 경우 변제절차를 안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채무자의 사전 동의 없이 구체적인 채무 사실을 제삼자에게 고지하는 행위는 여전히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철수는 제삼의 남자에게 정확한 상환 금액을 알려주면서도 채무 당사자인 김영희와 직접 통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남자가 수화기 너머로 캔디라고 불렸던 여자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여동생 같은 이름을 가진 김영희가 반가운 나머지 언제나 반복했던 본인 확인절차를 깜빡 잊고 말았다. 만약 늙은 남자와 김영희가 미리 작정을 하고 이런 상황을 꾸며낸 것이라면 아마도 이 통화 내용을 녹음했을 것이었다. 철수가 추심원으로 일한 지 일 년이 넘어가도록 한 번도 삼자고지를 했던 적은 없었다. 자기의 채권도 아니고 장재완 대리가 담당하는 채권을 대신 처리하면서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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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와이어넷의 교섭이력 항목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철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거짓으로 교섭이력을 달아 놓았다. ‘노년 남자의 전화, 본인 확인 후 통상금액 고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수화기 너머로 여자의 말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분명 그 자리에는 김영희,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잘 참아내는 캔디가 함께 있었을 것이다. 철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 때 다시 장재완 자리의 전화벨이 울렸다. 철수가 빠르게 전화를 당겨 받자 아까의 걸죽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시오, 나요.”

 


철수는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작업에 걸려든 모양이었다.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가 섞인 늙은 남자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팔랑팔랑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철수가 긴장한 채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전화를 다시 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말이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체념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철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남자를 상대했다.

 


고객님. 말씀하십시오.”

 

이번에는 이지혜라는 아가씨 빚 때문에 전화를 했소.”

 

?”

 

이 아가씨도 여기서 돈을 빌린 게 있다는구만. 얘는 주민번호가 900330-20*****. 갚을 돈이 얼마요?”

 


철수는 황급히 와이어넷에 남자가 불러주는 번호를 입력했다. 남자가 묻는 대로 이지혜의 부채액을 알려주기 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전에 이지혜 고객님과 통화 가능하겠습니까?”

 


잠시 수화기가 달그닥거리고 앳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여.”

 

이지혜 고객님이십니까?”

 

네에.”

 

확실히 본인이시죠?”

 

예에. 제가 이지혜에여.”

 


여자는 코맹맹이 소리로 재차 대답했다. 철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삼자고지를 유도하는 악질적인 경우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절차를 따라 질문을 했다.

 


고객님의 채무 사실을 먼저 통화한 어르신께 고지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 으음, 뭐라구여?”

 

아까 그 분한테 고객님 빚이 얼만지 이야기해도 되냐고요.”

 

네에 그럼여. 우리 사장님이 갚아주실 거에여.”

 


여자가 아까의 남자에게 다시 전화기를 넘겼다. 철수는 남자에게 여자가 상환해야 하는 금액을 알려준 뒤 상황을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이지혜씨와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내가 다방을 몇 개 경영하고 있는데 우리 직원들이오.”

 


늙은 남자가 자기 옆에 있는 아가씨들에게 잘 들리도록 분명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 미미 거랑 아까 캔디 거랑 내가 오늘 중으로 잊지 않고 넣어줄 테니까 이제 전화 고만 하고, 요걸로 시마이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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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완이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철수는 김영희와 이지혜의 전화가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장재완은 철수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면서 교섭이력을 확인했다. 이 교섭에 별 기대를 하지 않는 투였다. 원금과 이자를 모두 합한 통상금액을 물어본 뒤 상환금액을 감면해달라고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을 때는 빚을 갚을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본인도 아니고 제삼자가 부채 사실을 확인하고 말았을 뿐이니 정황 상 회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통장을 조회해보자 정말로 원금과 이자를 합한 금액이 만 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입금되어 있었다. 입금 사실을 확인한 장재완이 날카로운 눈꼬리를 뭉그러뜨리며 웃었다.

 


, 철수 덕분에 통으로 받았네. 그렇지. 추심원은 통상이지!”

 


오전 내내 실적이 좋았던 장재완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철수는 겸손하게 장재완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와이캐피탈에 남아있던 김영희와 이지혜의 부채가 청산된 대신 다방에서 일하는 미미와 캔디의 빚이 새로 생긴 것이다두 아가씨의 빚을 대신 납부해 준 늙은 사장이 갑자기 자선사업가가 되겠노라 마음먹지 않는 이상, 아가씨들이 나이를 먹고 다른 업소로 넘어갈 때까지 그 빚은 점점 불어나 미미와 캔디를 따라다닐 것이다.







이작가


편집 : 꾸물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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