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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10. 목요일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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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일기 #3 - 그녀들과 나와의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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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저링.jpg


얼마 전에 극장에서 <컨저링>이라는 영화를 봤다. ‘무서운 장면 없는 공포영화!’라고 홍보를 해대서 뭔가 싶어 봤는데, 무서운 장면 꽤 많더라. 지금 낚시 하냐? 굳이 따지자면 ‘잔인한 장면 없는’이라고 했어야 정확한 표현 아니었나 싶다.


인형.jpg

왼쪽의 인형을 오른쪽 사진처럼 바꿔놓은 것부터가 ‘무섭게 하려고’ 한 거잖아 이 자식들아...

어디서 약을 팔아...


아무튼 영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아쉬운 부분도 많지만 오랜만에 극장에서 가슴 제법 졸이며 본 공포영화였다. 개봉 첫 주라 상영관이 가득 찼는데도 불구하고 상영 내내 관객들이 숨죽이고 조용히 관람하는 분위기는 오히려 낯설기까지 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문득 ‘컨저링’이라는 제목의 뜻이 궁금하더라.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con·jur·ing [|kʌndƷərɪŋ]

명사: 마술


그렇다. ‘마술’이란다. 매직Magic 말이다. 본인은 마술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나만 몰랐나? 아무튼 뜻을 알고 나니 왠지 허무해졌다. 난 ‘컨저링’이 뭔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뜻이 있는 단어인 줄 알았거든.


숙어로는


a conjuring formula

주문

a conjuring trick

마술 묘기


등으로 쓰인다고 한다. 음. 아무래도 ‘마술’보다는 ‘주문’이라는 숙어가 영화의 내용과 좀 더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뜻을 알고 나니 제목이 좀 시시하게 느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영어 필수 시대에 영단어 하나라도 더 배웠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감정이 더 크게 다가온다. 내친 김에 여태까지 그냥 알쏭달쏭 궁금했지만 귀찮아서 찾아보지 않았던 영화 제목들의 뜻을 검색해 보기로 했다.


제임스 완 감독의 또 다른 호러 영화인 <인시디어스>는 그렇다면 무슨 뜻이 있을까?


인시디어스.jpg

아따, 포스터 한 번 무섭다.

 

‘insidious’는 형용사로, ‘서서히[은밀히] 퍼지는’ 뜻의 단어라고 한다. 한 가족에게 서서히 닥쳐오는 공포라는 영화 속 이야기와 제법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쏘우>도 그렇고, 생각해 보면 제임스 완 감독은 뭔가 한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국내에 개봉하는 영화 중 아무래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외국영화,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 영화다. 원산지가 미국이다 보니 제목은 영어일 수 밖에 없다. 그중에는 <사랑과 영혼>처럼 우리말에 어울리게 번안이 된 제목들도 있지만, 영어 제목을 독음 그대로 한글로 옮겨서 개봉하는 경우가 더 많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jpg


최근 개봉한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The Place Beyond the Pines)>같은 경우엔 ‘소나무 숲 너머에’ 같은 식으로 제목을 번안하는 게 더 낫지 않았냐는 관객들의 의견도 많았다. 언뜻 한글 제목만 읽어선 당최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뿐더러 세 단어 이상이나 영어로 된, 그것도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단어로 이루어진 제목을 그대로 옮긴 게 다소 무성의하다는 지적이었다. 만약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영문 독음 그대로 <곤 위드 더 윈즈>라고 개봉했더라면 영화가 주는 감동이 지금과 같았을까.


사랑과 영혼.jpg

 좋은 번안 제목의 예


올 여름 개봉해 좀비영화로선 이례적으로 국내에서 흥행했던 브래드 피트 주연의 <월드워 Z>는 어떤가. 이미 <세계대전 Z>라는 제목으로 원작 소설이 출간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문 독음을 차용해서 논란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가 역사 수업을 받을 때 ‘2차 세계대전’이라고 배웠지, ‘월드워 2’라고 배우지 않았건만, 밑도 끝도 없이 ‘월드워’가 웬 말이냐 이거다.


뭥미.png


허나 제목을 번안하지 않는 것이 비판 받을 일만은 아니다. <컨저링>의 제목을 ‘마술’ 혹은 ‘주문’으로, <인시디어스>의 제목을 ‘서서히’, 또는 ‘시나브로’로 번안해서 개봉했다고 해서 영화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수많은 번안 제목의 실패 사례를 되새겨 본다면, 무조건 제목을 번역/번안 하는 것이 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아가리.jpg

제목 번역의 나쁜 예...


번안 제목 중에서 영화 팬들에게 욕을 먹는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소피아 코폴라 감독, 빌 머레이, 스칼렛 요한슨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이라는 제목을 삼류 로맨스 영화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고, 역시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했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라는 두 주인공이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동안 겪는 갈등과 로맨스를 담은 원제를 마치 에로 영화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제목으로 바꿔 빈축을 샀다. 심지어 이건 거장 우디 알렌 감독의 작품이었단 말이다!


분노.JPG


최근엔 아예 원제와는 상관없이 <우리, 사랑일까요?>, <우리도 사랑일까>, <우리, 사랑해도 될까요?>등 전혀 다른 영화들에 비슷한 제목을 붙여 시리즈물이라도 되는 양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우리도1.jpg우리도2.jpg우리도3.jpg

너네, 대체 무슨 사이니?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컨저링> 말고도 어감은 그럴싸한데 의미는 잘 몰랐던 영어 제목은 꽤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톰 크루즈, 제이미 폭스가 주연했던 마이클 만 감독의 <콜래트럴>이라는 영화 기억나는가?



movie_image.jpg


그래, 이 영화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 <콜래트럴>이란 제목의 의미가 궁금했던 사람은 손들어보시라. 벌써 개봉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영화고 참 뜬금없지만, 뒤늦게나마 그 의미를 한 번 찾아보았다.


col·lat·eral

명사: (금융) 담보물

형용사: (격식) 부수[부차]적인, 이차적인


아니, 이렇게 깊은 뜻이?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빈센트(톰 크루즈)에게 있어 택시 기사 맥스(제이미 폭스)는 담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뭐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막연하게 ‘콜래트럴’이라는 제목만 알고 있다가 단어의 뜻을 알게 되니 영화가 내포하고 있던 의미도 왠지 모르게 좀 더 잘 이해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적 느낌이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몰라.jpg

 몰라 그게 뭐야


또한 별로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놀드 슈워제네거 영감님의 주연 작품인 <콜래트럴 데미지>의 의미는 ‘부수적인 피해’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호, 참으로 유익하도다!


문득 초등학생 시절 <에이리언>을 처음 보며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난다. Alien이란 단어가 ‘외계인’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것보다 몇 년 후였을 것이다. 요즘에야 유치원 때부터 영어 교육 받느라 에이리언이 외계인이라는 것쯤은 초등학생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일지 모르겠지만, 중학교나 진학해야 영어를 배웠던 시절, 초딩인 내게 ‘에이리언’이라는 단어는 곧


에이리언.PNG


이걸 뜻했다.


그리고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프레데터>시리즈의 제목 ‘Predator’는 알고 보니 ‘포식자’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해봐라, 여태까지 ‘프레데터’가 그냥 고유 명사인 줄 알고 계셨던 독자들도 꽤 있으리라. 왜냐하면 나도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아, 아니라고? 너만 그런 거라고? 그 정도는 다들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퍽이나.gif


반대의 경우로, 번역된 제목 덕분에 영어 단어를 알게 되는 경우도 꽤 많다. 로버트 드니로와 다코타 패닝이 출연했던 <숨바꼭질>은 비록 <식스센스>이후 양산된 아류작 중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숨바꼭질’이 미국에선 ‘Hide and seek’이라 한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숨기 그리고 찾기’라니, 이 얼마나 심플한가.


92년 당시 선풍적인 화제를 몰고 왔던 샤론 스톤 누님의 그 영화, <원초적 본능>. 미성년자라는 구차한 인간계의 신분 때문에 당시 영화를 볼 수 없었던 나는, 그 대신 ‘본능’이란 단어가 영어로 ‘instinct’라는 것을 배웠다. 금기에 대한 욕망을 극복하다 못해 심지어 공부로 승화시킨 것이다. 어떤가, 본인이 이렇게나 학구적인 사람이다. 응?


본능.jpg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는 마음껏 이 영화를 즐겨주었다...으흠흠.


또 다른 경우가 있다. 번안된 제목만 봐서는 도대체 원제가 무슨 말이었는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를테면


불가사리포스터.JPG


바로 이 작품이다.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하기도 전 본인이 어렸던 시절, 땅 속을 뚫고 다니며 사람들을 습격해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해 주었던 추억의 영화, <불가사리>. 그런데 어쩌다가 이 영화에 <불가사리>라는 제목이 붙었을까? 제목의 ‘불가사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생물인


스타피쉬.jpg


이게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말이다. 혹시 원제가 <Starfish> 냐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영화 속 괴물은 누가 봐도 바다생물 불가사리와는 다른


괴물.jpg


요렇게 생겨먹은 놈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설마 엄앵란, 최무룡 주연의 60년대 한국 괴수영화 <불가사리>와 연관성을 지으려고 붙인 제목은 아니겠지?


불가사리.jpg


혹시라도 이 사연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 분들은 댓글로 제보 부탁드리는 바이다. 아무튼 간에 영화 <불가사리>의 원제가 뭔고 하니, 바로 <Tremors>다. 트레...모? 그게 뭔 뜻이냐고? 자자, 지금부터 검색 들어간다.


Tremor


명사

1.미진(微震)

an earth tremor

대지의 미진


2.(약간의) 떨림

 

그렇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영화 속 괴물은 땅 속에서 두더지처럼 돌아다니면서 지상의 사람들이 내는 각종 진동을 감지하여 먹잇감을 찾아내는 기형 생물이다. 그런 괴물을 ‘미진’을 뜻하는 ‘Tremor’라는 단어에 복수형 ‘s’를 붙임으로써 상징적으로 괴물을 표현함과 동시에 영화의 이미지를 구축해낸, 매우 영리한 제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걸 도무지 번역 제목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으니, 우리는 그저 영문(英文)도 모른 채 이 영화를 ‘불가사리’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던 것이었다... 존나 슬프지? 응?


<불가사리>와 마찬가지로 케빈 베이컨이 주연했던 80년대의 수작 영화 <자유의 댄스>. 언뜻 생각하면 원제가 <Dance of freedom>라도 되나 싶겠지만 세상사 그렇게 쉽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자유의 댄스.JPG


<자유의 댄스>의 원제는 <Footloose>. 풋루즈? 발이 헐렁하다고? 발이 헐거워서 춤을 잘 춘단 얘긴가? 이게 대체 뭔 뜻인지 한번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foot·loose

형용사: (사람?책임 등에) 매인 데 없는


그렇다. ‘매인 데 없는’, 말 그대로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은’이란 의미를 가진 단어다. 그러나 당시에 ‘풋루즈’라고 독음 그대로 제목을 붙이기에는 여러 가지로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번안 제목인 <자유의 댄스>는 footloose의 ‘자유’라는 의미와 영화의 주소재인 ‘춤’이란 요소를 잘 드러나게끔 지은 제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수입사에서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 번안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 전 리메이크된 버전은 국내 개봉은 하지 않았지만, 포털 사이트 정보에는 원제 그대로 <풋루즈>라고 기재돼있다. footloose는 요즘 관객들에게도 낯선 단어인 거 같긴 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자, 오늘은 이렇게 얄팍하게나마 영화의 원제와 번안 제목과의 상관 관계를 살펴보면서, 영화도 보고 영단어도 공부하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그런 시간을 함께 가져보았다. 전국의 영어 공부하는 청년들도 스트레스 받아가며 단어 외우기만 하지 말고, 가끔 영화도 보면서 제목의 의미도 알아보면 자연스레 공부도 되고 영화를 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해외 영화 수입사 관계자 분들께서는 앞으로도 좋은 번안 제목 만들기에 힘써주십사 하는, 뭐 그런 잉여스러운 생각. 끗.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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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