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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 떡밥이 흥하길래, 딴게 잉여인 나도 빠질 수가 없어 한 숟갈 담가본다.



1. 제일 중요한 게 뭐냐?


영어공부는 기본적으로 RPG 게임의 성격을 띤다. 열심히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을 올리고, 듣기, 말하기, 쓰기 등의 숙련도를 두루 올려야한다는 측면에서 육성 RPG 게임과 유사하다.


그리고 거의 모든 RPG 게임에는 효율적인 렙업 방법과 덜 효율적인 방법이 존재한다. 난이도 대비 경험치를 많이 주는 던전을 찾아다니는 게 전자라면, 후자는 마당 앞에서 다람쥐만 졸라 잡아서 렙을 올리는 방식이다.


동일한 유저가 같은 시간을 그 게임에 투자했다면? 당연히 맞춤 육성법을 택한 유저의 렙이 높을것이다. 하지만 RPG 게임에서 제일 중요한 건 노가다, 즉 반복이다. 적어도 쪼렙 혹은 초반에는, 게임의 룰을 이해하지 않고 무식하게 앞마당의 다람쥐만 잡는다고 해도, 아주 열심히만 잡으면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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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에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소통이 가능한 수준에서, 보다 효율적인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아주 혹독한 트레이닝과 교정이 필요하지만,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단순 반복만으로도 달성할 수 있다 (상위 레벨로 갈수록 오히려 반복량은 늘어나지만, 좀 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영어 공부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무슨 방법이든지, 사용자가 이걸 졸라게 반복을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2. 왜 공부가 안 되나.


왜 새삼스럽게 언어습득에 있어 제일 중요한 반복문제를 언급하냐면, 나는 영어공부 실패에 가장 큰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초중고 때 썼던 교과서들, 내용만 놓고 보면, 사실 나쁘지 않다. 특히 요즘 나오는 책들은 회화위주로 잘 구성되어 있는 편이다 (가끔 손발이 오그라드는 숙어 몇 개가 있단 점만 제외하면).


그런데, 이걸로 공부해서 영어실력이 별로 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반복이 부족해서이다. 교과서 사면 딸려오는 영어테잎을 각잡고 반복해서 들으면서, 정확하게 받아쓰기를 하고 이걸 다시 소리내어 발음을 교정하면, 영어실력이 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럼 학생들이 왜 이렇게 공부를 하지않는가? 일단 내신 혹은 수능과 무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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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영어는 영어로 된 문제들을 가지고, 애들을 줄 세우기 위한 시험이다. 이 시험이 변별력을 가지려면, 어쩔 수 없이 함정을 파고 문장을 비틀어서 오답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이런 입시 시험에서 고득점을 올리려면? 최대한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을 풀어서, 오답을 피해 답을 찾는 훈련을 해야한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외고에서는, 한 학기 내내 영어시간에 (정확히는 영어 문법이었던 것 같다) 수능 기출문제집 혹은 EBS문제집을 풀었던 적도있다.


수능 영어에 나온 지문이 후지다(너무 아카데믹한 지문이 나오거나, 온갖 함정으로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란 얘기는 차치하더라도, 문재해결 능력이 너무 중요시된 나머지 영어공부의 대전제인 반복이 소외되고 있다.


물론, 수능이 교과서 지문 복붙으로 나온다면, 그 나름대로의 폐단이 있을 것이다. 지나친 암기 강요로 인해, 너무 많은 아이들이 영어에 대한 흥미를 일찍 잃어버릴 수도 있고, 암기만 우선시한 나머지 그 지문에 뜻과 발음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수능 만점 받는 암기천재들을 양산할 수도 있다.


이건 그러니까 수능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점수로 등급을 매겨야만 하는 입시교육의 한계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비슷한 이유로, 토익시험 역시도 영어 실력 자체를 나타내는 지표가 아닌, 영어로 된 문제를 잘 푸는 시험이 되버렸다.


(2000년대 초반, 나는 중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안산 모 학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중3들을 모아놓고 여름내내 토익공부만 시킨 적이 있다 -나는 거기 낄 레벨이 아닌데, 유일하게 해외에 나가본 적이 있단 이유만으로 들어갔다- 그 결과 외국 한 번도 못 나가 본 애들의 점수가 세 달만에 400점대에서, 900점대가 되었다. 애들의 영어실력 자체도 꽤 늘긴했지만, 애초에 Invoice란 걸 본 적이 없는 애들이 비즈니스 영어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3. 좋은 공부법을 위한 팁


영어를 정확하게 반복해서 청취하고, 이를 받아쓰고, 원래 발음에 가깝게 소리내어 읽는 과정이 반복되기만 하면, 뭘 공부하냐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람쥐를 잡든, 퀘스트를 깨든 쪼렙 땐 레벨이 잘 올라간다.


가장 영어를 빠르게 배우는 방법은, 영미권 국가로 직접 가는 것이다. 단순히 여행을 가는 것보단, 어학연수가 낫고, 어학연수보다는 정식 학위를 따는 게 나으며, 그냥 학교에만 있는 것보다는 스타벅스에서 알바라도 하면서 일을 해보는 게 낫다. 그 이유는 뒤로 갈수록, 영어를 좀 더 다양한 환경에서 자주 써 볼 기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 있는 것 자체가, 생활하면서 영어를 자동으로 반복학습을 시켜주는 셈이니, 겜으로 치면 오토 매크로를 돌리는 것과 다름없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이 방법은 나중으로 갈수록 효율이 떨어진다).


이 방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뒤로 갈수록, 졸라 비싸고, 복잡하며,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는 점이다. 내 영어 실력의 8할은 나 개인의 노력이라기보단, 대학 유학을 허락해주신 부모님과 H1-b 비자추첨 당첨이라는 행운에 기인한단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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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변의 경험과, 영어 강사생활을 떠올려서 조언을 해보자면, 영어를 몰입해서 반복적으로 학습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습관을 만드는 행위는 대단히 중요하다.


당연히 반복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영어를 잘한다 해도 생각보다 토익성적 같은 게 크게 나아지진 않는다 (어느정도 상관은 있겠지만, 만점 가까이 받으려면, 별도의 트레이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노력에 상응하는 충분한 목적의식과 보상을 갖기가 어렵다.


영어가 생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영어공부를 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이다. 사실 영어란 게 생각보다 일상에선 쓸모가 없다.


그래도 영어를 한번 집중적으로 잘 닦아두면 좋은 점이 있다. 일단, 비영어권 국가를 갈 때도, 그나라 언어 다음으로 잘 통하는 게 대게 영어다. 공용어라는 건 확실히 메리트가 있다.


개인적으로 영어를 배우면 가장 좋은 점은, 영어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막대한 정보량이다. 예를 들어, 스탠포드 대학의 철학 백과사이트 (링크)에 가면, 수천년부터 이어져 온 철학적인 떡밥들이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MIT는 아예 과제부터 동영상강의까지 무료로 개방시켜놨다. 대학 뿐 아니라, 칸아카데미 같은 웹사이트에서는 초등학교 산수부터 코딩까지 강좌로 무료로 올려놨다. 생각보다 영어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


그 외에도 수 많은 전문적인 논문, 저서, 신문기사들이 영어로 작성되고, 영어가 좀 되면 이 모든 자료들을 중간상인 (외신기자, 번역가)등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찾아 읽을 수 있다. 얼마든지 시간과 의지만 있으면, 영어를 매개체로 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과외를 할 때, 학생이 관심을 가질 만한 신문기사나 토막글을 가지고 하루 공부를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아빠 학생한테는 https://fivethirtyeight.com 에 네이트 실버가 쓴 세이브 매트릭스 관련 글을 가져갔다. 노는 시간에 영어로 된 사이트에 들어가 보길 원했고, 영어를 잘하면 자신의 취미질이 좀 더 원활해질 수 있단 걸 알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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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공부를 결심하는 분들께 해드릴 첫 번째 조언은, 자신이 앞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영어 공부를 해야 할,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 보시란 것이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조언은, 무엇을 공부하냐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무엇이 됐든, 정확하게 듣고, 쓰고, 말하는 훈련만 반복하면 영어를 어느 수준까지 올리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반복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본인이 좀 더 관심 있을 만한 컨텐츠를 가지고 반복을 하시라.


본인이 좋아하는 미드도 좋고 (대화없이 거친 숨소리만 나오는 성인물이나, 대사 절반이 오크어나 좀비어로 된 것은 조금 곤란하다), 토익 듣기책도 좋다. 대신 한 번 정했으면 지겹도록 반복하시라. 미드 시즌 하나를 정주행하는 것보다, 같은 회차를 반복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모든 대사를 정확하게 받아 적고, 연기자들처럼 억양과 톤까지 정확히 따라해 보시라. 가볍게 미드를 볼 때는 단순히 소비될 뿐이던 문장들이, 반복해서 학습을 하면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조언은, 반복을 늘리기 위한 습관을 만드시라. 대부분은 직장, 가정 혹은 학업이 있는 상태에서 공부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 모두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빼먹거나 잠시 접어두는 일이 벌어진다.


이 뺑끼(cheating)의 빈도를 줄이려면, 일상생활 중에 억지로 영어공부를 끼워 넣는 습관 만들기가 필요하다. 내 경우, 화장실에 똥 싸러갈 때 보는 책, 아침에 일어났을 때 5분 동안 보는 책, 지하철에서 보는 책을 나눠서 공부를 했다. 정말 2년 동안 똥쌀 때 책에 나오는 예문을 외웠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5분 동안은 다른 책에 나오는 연설문을 외웠다. 지하철은 이동시간이 불규칙적이라서 주로 소설책을 봤다.


이렇게 책을 굳이 나눈 이유는,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엔 늘 같은 책이 놓여 있었기 때문에 (좋은 생각 읽는 거랑 비슷하게), 디폴트 값으로 그 책을 읽었다. 이렇게 습관을 만들면, 최소한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공부가 되는 효과가 있고, 결정적으로 습관을 어겼을 때 큰 위화감, 혹은 죄책감이 든다. 똥 쌀 때 그 책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 책을 안 읽으면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억지로 한 시간을 내어 책상에 앉는 것보다, 똥 싸면서 본 한 시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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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아무도 알고싶지 않을 내 사생활을 공개한 것 같아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지만, 어쨋거나 평소 영어공부에 대해 하고싶은 얘기는 거진 다 한 것 같다.


그렇다고 진짜 전자제품 설명서로 영어를 공부하는 거랑 (생각보다 모르는 단어도 많이 나오고, 어려울 때도 있다), 좋은 영어 교재로 공부하는 거랑 차이가 아예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앞마당 다람쥐를 잡는 것과, 퀘스트를 깨는 것 같은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정확히는, 문체라는 것 때문이다. 또, 핵심 떡밥 중 하나인 문법의 중요성은 아예 건드리질 않았다. 개인적으로 문법을 매우 중요시 여기지만 이 글에선 일부러 언급을 뺐다. 반복이 어느 정도 전제가 된 다음에, 말과 글을 교정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다음편으로 뺐다.


일단 이번 글로 간을 좀 보다가, 괜찮겠다 싶으면 후속으로 중수편을 연재하겠다. 어떤 교재가 이상적인지, 어떤 의식적인 노력과 교정이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를 좀 더 다룰 생각인다. 참고로 내가 고수가 아니라 고수편은 없다;;







씻퐈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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