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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3. 09. 월요일

김현진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칼 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레더맨’이라는 브랜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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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온 잭나이프로 사람 살에다 대고 조금 힘을 주면 목욕탕에서 며칠 퉁퉁 분 다이알비누 가르듯 쓱, 하고 들어간다. 칼이 절반이나 들어갔을 때 놀라서 꺼내고 팔을 수건으로 꽉꽉 동여맸다. 방바닥에 떨어뜨린 잭나이프의 칼날은 피로 젖어 번들거렸는데, 그 피 묻은 날의 무표정함을 보면서 수건을 꽉 누르고 있자니 비로소 무기란 원래 뉴트럴한 것이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 살은 다행히 남이 아니고 내 살이다. 십대 때니 벌써 십 년도 훨씬 전이고. 기억하기에 그 잭나이프는 남자한테 받은 건데 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나한테 줬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도대체 여자애한테 그런 걸 왜 줬는지 참. 


그때 나는 부모처럼 길러 주셨던 외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다음해 바로 외할아버지를 잃은 후였다. 성경에 자식에게 매를 아끼면 애를 망친다는 말이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말을 잘 지키는 분들이었다. 이제 내가 부모가 되고도 남을 나이니 부모에게 원망 같은 건 없지만 혹시라도 애는 좀 패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이 말씀 하나만 간곡하게 드리고 싶다. 


그렇게 큰 애는 자기 자신을 아끼는 법을 잘 모르게 된다고. 나아가서 누가 나를 막 대하는 것에 대단히 익숙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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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매를 대도 위엄 있게 대는 방법이 있긴 하다. 네가 뭘 잘못했으니 이러이러하게 맞자, 하고 간단한 훈계를 듣고 몇 대 얻어맞고 너를 미워해서 때린 게 아니라 잘 되라고 때린 거다, 하고 꼭 끌어안아 주던 아버지도 기억한다. 그 때는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눈물을 닦곤 했는데 그런 일은 아쉽게도 다시 없었다. 고종석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하도 맞아서 집에 와서 자려고 누우면 잠이 안 오는 날이 있었는데 그런 날은 영락없이 아무한테도 안 맞고 넘어간 날이었다고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처럼 혹은 군대에서 죽도록 맞아 본 남자분들은 나보다 훨씬 더 잘 아시겠지만, 폭력의 공포감이 가장 극대화되는 순간은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언제 맞을지 모를 때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까지 부모한테 맞은 이야기를 회고하자니 창피해진다. 하지만 왜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지 않니, 라는 질문을 몇 년째 받고 있는 나라서, 또 최근 꼴같지도 않은 인간들에게 두어 번 하찮은 취급을 받고도 그냥 멍하니 있는 나라서, 왜 이러는지 스스로를 파들어가다 보니 마음 속 깊이 이런 체념이 있는 걸 알았다. 


어차피 언제 맞을지 모른다, 


내지는 나는 분명히 맞을 것이다.


몇 년 전 잘못을 저지른 후 약을 잔뜩 털어 먹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았고 살아났더니 '자살드립'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제대로 갔어야 드립 소리를 안 듣는 거였는데, 나도 참 근성 없기는. 위세척과 바륨 용액 처치 같은 건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모든 게 진실은 아니었다는 데에 충격 받기도 했고 일이 결정적으로 꼬이게 만든 비열한 짓을 당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해봤자 다 변명 같을 테니 그냥 닥치고 있는 게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런 침묵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무시 혹은 도피로 보일 수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때는 묵묵히 근신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후 <동물원>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 김창기 선생께 치료를 받았는데 엄청나게 현실적이고 냉정한 말을 퍼부은 다음 집 나와서 자기 병원의 빈 방에 공짜로 살라고 하는 친절이 교차하는 신기한 분이었다, 어쨌거나 그 분의 진단으로는 애착관계 형성 문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에게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요. 그렇게 생각했던 건 당신 혼자뿐이지."


아니, 이렇게 빙산처럼 차가운 사람이 책을 접어 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쓴다 어쩐다 하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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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레더맨 나이프 사건 이후 진찰을 받았던 서울대병원 교수님은 온갖 검사를 다 해 보더니 선천적인 세로토닌 부족증과 좌뇌, 우뇌의 불균형 발달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병원도 죄다 내 발로 간 거였다. 교수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여담이지만 이 교수님, 이후 영화배우 이은주의 담당 의사가 되시더니 이은주 사후 텔레비전에서 침통한 얼굴로 인터뷰 하시는 걸 우연히 보게 되기도 했다.)


"보통 십대에는 격렬한 조울증을 곁들인 우울증이 있기 마련인데 이 학생은 50대 갱년기같은 축 처진 침울함이군요." 


그렇게 잠깐의 입원을 경험했다. 그 때 한 방을 쓰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언제부터 편찮으셨어요,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이구, 나는 전두환 때부터 이날 입때까지 아퍼..." 


라고 대답했던 분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아니, 지금은 김대중 정권인데!' 순식간에 십몇 년 전의 병원 풍경이 떠올랐다. 밤 9시가 되면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시계를 가리던 정신과 병동, 폐쇄병동에서 툭하면 들려오던 괴성, 쇠창살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모든 창문, 자기는 조울증이 아니라면서 3초마다 울고 웃던 서울대에 차석으로 들어갔다 이내 휴학한 여학생, 자기는 이씨이므로 조선왕조가 오래 갔으면 분명히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거라며 나에게 '사회에 있을 때 뭐했어요?' 하고 묻던 아저씨, 자기는 절대로 우울증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다가 번번이 와락 울곤 하던 아가씨. 그렇게 많은 사람을 기억하게 되어서일까. 며칠 되지 않았던 입원기간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서 오랫동안 서울대병원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이소선 선생님의 장례가 이곳에서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아직도 멀리하고 있었을 듯 하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나는 그런 병동에 앉아 <씨네21>에 연재하던 코너에 제정신이 아닌 글을 볼펜에서 종이에 꾹꾹 눌러 써서 면회 온 친구에게 건네면 그 친구가 컴퓨터로 쳐서 편집부에 송고해 주곤 했다. 하루에 한 번 진찰을 온 교수님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불행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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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문제는 기억력이었다. 안면인식장애가 있어 사람 얼굴은 못 외우지만 영혼의 하드디스크랄까 그런 게 용량이 커서 싫어도 각인되고야 마는 순간순간들. 내 생애 첫 기억은 두 살 때 살던 집의 리놀륨 바닥 무늬다. 갈색에 겨자색이 섞인 격자무늬. 뺨을 대면 맨들거리고 차가웠던 마룻바닥. 


외동딸이 맞아 봤자 얼마나 맞았겠어, 라지만 아들 없는 집 장녀 겸 외동딸은 어딘가 아들같이 크는 구석이 있다. 내가 그랬다. 우연히 프로레슬러와 <김남훈의 과이언맨>방송을 하고 있긴 하지만 집안에서 프로레슬링 기술 같은 걸 당하면서 자라는 게 일상이었다. 물론 저먼스플렉스 같은 건 아니고 의자를 휘두른다던가 머리채를 잡고 창문 유리창에 안면을 충돌시켜 깬다던가(그런 식으로 유리를 두 번 갈았다, 얼굴에 흉이 없는 게 기적이다) 달군 다리미를 얼굴에 천천히 갖다댄다던가 별안간 따귀를 맞는다던가. 물론 정식으로 맞는 건 다 따로 하고 변칙으로 맞는 거. 나는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믿지 않지만 게임 <진삼국무쌍>의 무쌍연타처럼 연발로 맞고 있을 때는 육체와 영혼이 분명히 갈라지는 걸 느꼈다. 진짜 나, 혹은 내 혼 같은 게 몸을 빠져나와 천장 같은 데로 올라가서 맞고 있는 나를 무심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진짜 나는 그 몸 안에 없었다. 그러면 아프지 않았다. 그게 자기보호인지, 도피인지는 모르겠다. 21살 때까지 맞았으니 꽤 오래 맞은 셈이다. 다행히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거나 하는 광경은 보지 않고 자랐지만 대신 어머니가 뒤에서 내 팔을 붙잡고, 아버지가 이단옆차기를 날리거나 하는 부부화합의 광경을 보았다. 


보았다, 라고 쓰는 건 그 때도 진짜 나는 어디론가 날아가서 멍하니 내 몸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그랬다. 저기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지긋지긋한 내 몸, 아무나 함부로 하는 내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돌아갈 곳이 저기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 내 몸을 남처럼 바라보면서. 싫은 섹스를 강요당하거나 남자친구라는 인간에게 걷어차여 갈비뼈에 금이 가거나 귀가 찢어지거나, 그럴 때도 늘 나는 내 몸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지루한 영화관에서 다리를 떨면서 몰래 스마트폰을 켜 보는 관객처럼 언제 끝나지? 하는 생각만 하면서.


간혹 누가 나를 아껴 주면 나는 부러 매를 벌었다. 너무 이상해서. 너부리(딴지일보 편집장님을 말하는 게 아니고)에게 언제 때릴 거야? 하고 물어 보는 다람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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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잘해 주면 일부러 술을 더 마시고 꼬장을 부렸다. 이래도 잘해줄 거야? 빨리 나를 막 대하란 말이야. 사실은 서글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이래도 나를 사랑할 건가요. 물론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당신이 나를 때릴 사람인지 나는 알지 못했으니까. 현명한 남자들은 재빨리 도망쳤고 고집이 있거나 미련한 남자들은 달래 보려고 참다참다 화를 내거나 결국 폭발했다. 늘 나는 잔해 속에 혼자 남아 안심했다. 그래, 이렇게 되는 거야. 그렇게 참화 후 혼자 남고서야 비로소 내 영혼은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 때서야 통증이 온다. 그게 둔중해지도록 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마셨다. 


재미있게도 나와 헤어진 남자들은 다 출세하는 징크스가 있다. 사법고시에 붙는다거나 장가를 잘 간다거나 유명인이 된다거나 음반을 낸다거나. 내가 근성을 길러 줘서 그런 거 아니겠니, 하고 피식피식 웃다가 문득 막막해지는 건 도대체 내 몸과 혼의 불화는 언제 화해할지가 남북통일보다 요원해 보여서 그렇다. 이제 아무도 때리지 않는데도. 하긴 몇 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는 운동화를 벗어서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때리는 시늉을 하다 멈추는 짓을 계속하며 야비하게 웃긴 했다. '봐라? 나 너 분명히 안 때렸다? 나 안 때렸어? 그치?' 이러면서. 차라리 때리지.


어쨌든 그것도 지난 일이고 이제는 언제 맞을지 모르는 시절이 지났고 아무도 안 때리는데 결국 몸이란 건, 익숙한 상태가 제일 쾌적해져서 누가 막 대하고 함부로 하면 '아, 이거 내가 잘 아는 건데?' 하고 편해지는 모양이다. 한시라도 빨리 깃털이불 같은 데서 호강을 하는 수밖에 없다. 왜 나는 제일 예쁜 시절을 이렇게 살았을까. 왜 한순간이라도 나를 아껴 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을까. 


나를 스쳐간 착한 당신들. 정말로 미안했다. 다만 당신은 이제 나와 상종 안 할 수 있지만 본인이라 평생 상종해야만 하는 내 처지가 약간의 깨소금이라도 되시기를. 내가 제일 나빴다. 부모님 탓도 아니고 남자들 탓도 아니다. 안 된다고 말할 줄 알았어야 했다. 적응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열이 40도로 올라서 끙끙 앓고 있을 때도 섹스하자고 강요했던 그런 놈한테는 오른손 뒀다 뭐하냐, 왼손으로 하면 남이 해주는 것 같대, 하고 쏘아붙였어야 하는데. '난 여자 때려 본 적 네가 처음이야, 나 그런 놈 아닌데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그딴 소리 들었을 때 솔깃하게 '그런가? 내가 미친년인가?' 하고 넘어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자식을 때리는 부모의 마음은 백 배나 아프니 부모로 하여금 자식을 때리게 만드는 너는 더욱 불효자식'이라는 말에 미안하고 슬퍼져서 울지 말고 그냥 폭력이라는 건 맞는 쪽과 때리는 쪽을 모두 중독시킨다는 걸 알았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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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야 할 때 화낼 줄 모르고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모르는 불균형한 어른이 되면서 내 영혼은 몸에서 달아나는 법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모멸과 슬픔에 맞서 싸우지 않고 천장쯤 어딘가에서 남처럼 몸을 쳐다보면서, 저기 가서 좋은 일이 없었다면서. 잊고 싶은 기억이 불로 지지듯 들고 일어나 어제 일처럼 쿠킹호일 구기듯 마음을 구겨 버리면 술을 찾아 사고를 저지르고 후회한 게 지난 십 년이었다. 누구 탓도 할 수 없고 이제 나를 때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다.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그런데 내 영혼이라는 년은, 천장 어디쯤에 붙어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저기 가서 좋은 일이 없었어, 이러면서. 여전히 내 몸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겁쟁이. 빨리 내려와. 너한테 나말고 누가 있는 줄 알아? 아무도 안 구해줘. 우리뿐이야. 이 격렬한 외로움과 슬픔도 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 때문이란 걸 왜 너만 모르니. 그 사이에 누구를 끼워서 화친을 도모해 봤자 번번이 실패했잖아. 전에는 영혼이 빠져나가서 무표정하게 이 모든 게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던 내 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젠 내 몸이 아직도 무서워서 내려오질 못하고 저만치 둥둥 떠다니는 나를 올려다본다. 표정이 없던 육체와 달리 거기엔 표정이 있다. 아무것도 생에 기대하지 않고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절대 믿지 않으며 크고 작은 불행이 생활화되어 상처입고 실망해야 비로소 안심하는 얼굴. 무표정보다 한층 나쁘다. 저걸 어쩌나, 싶다가 나는 그냥 지금도 걔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나는 앞으로도 분명히 다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울 것이다. 그렇지만 헐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같은 해피 엔딩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생은 누구에게나 고된 것이라는 걸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아무런 나쁜 일도 없는 곳은 공동묘지뿐이고 어차피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단 하나의 진실을 진실로 새기게 된다면, 비로소 나는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내가 원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행복보다 고요, 편안이 아니고 평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도 아니고 아직도 제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저 한심한 여인에게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들을 인용하며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 생에 '두 번은 없다'고. 그러니 어서 돌아오라고. 그리고,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고... 그러니 제발 돌아오길, 이 남루하고 구질구질한 삶으로. 모라토리엄은 이제 끝내고 두 번은 없으니 사는 것처럼 좀 살아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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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