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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세포후기] 3일간의 소중한 경험

2002.12.12.목요일
딴지 미국세포 은비사랑

나는 현재 대학생으로 98년도에 미국 필라델피아로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 중이다. 하필 딴지 일보가 창간된 거시 98년도니깐 나는 딴지일보를 미국에서 처음 접했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생각이 안나지만 1회때부터 지금까지 기사하나 안 빼고 다 보는 열혈독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있다는 지리적인 약점 때문에 딴지의 이런저런 행사, 또는 직접 한국에서 뭘 할 기회가 너무 없었다. 물론 딴지빠 지엔도 무진장 가고 싶지.. 평소 딴지일보라면 해외에 특파원도 많이 보내고..또 외국에 있는 독자들의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지난달 유럽총국의 개설을보고 혼자 안타까워했다. 아- 난 미국에 먼저 세워질 줄 알았는데.. 하구. 그러나 어쩌랴. 다 내 팔자지.

 

각설하고 지난주 일요일이었다 원래 딴지 업데가 월요일날 되는거라서 주말에는 잘 안들어가는데 그날따라 무언가에 홀리듯이 딴지를 클릭했는데 메인화면에 긴급 공지가 하나 떴더랬다. 다름아닌 미국현지세포 급구!

 

아! 난 이 글귀를 보자마자 필이 딱 꽂혔다. 분명 미동부 쪽이겠구나 하고... 아니나 다를까 워싱턴 근교에 서식하는 세포들은 빨리 연락처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지 재밌는 거라고..

 

참고 : 여기 등장하는 공지사항은 12월 2일 월요일 딱 하루동안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기록을 위해 여기 기사 링크를 남겨둔다.
[긴급공지] 미국 현지 세포 급구!!

 

평소 딴지일보에 충성심을 보여주고 싶었던 나는 아싸~ 하면서 메일을 보냈다.. 그리구.. 몇 시간 후 무지무지 존경하던 편집장님과 메신저도 하게 되고.. 구국의 곱창 프로젝트에 대해 하나하나 정보를 받게 되었다.

 

지난번 오노테러기를 잘 보았던 나는 너무나 흥분했다. 내가 이런 영광을 누릴줄이야.. 두군데의 목적지 - 뉴욕과 워싱턴 - 나는 그 중간에 필라델피아.. 나는 무슨일이든 열시히 하겠다고 맹세하고 워싱턴에 계시는 또다른 세포(박홍수님)와 연락을 하였다. 그때는 우리의 곱창들 - 김구라와 황봉알이 이미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였다.

 

그런데 하나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범대위의 일정이었다. 곱창들은 화요일날 워싱턴테러를 할려고 했는데 범대위가 오기도 전에 우리끼리 가서 난리치면 혹 정작 본대가 왔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지령에 따라 일정을 긴급 변경, 뉴욕에서 범대위와 같이 길거리 시위를 하기로 했다.

 

2002년 12월 2일 오후 3시. 이시간은 우리의 곱창들 -김구라와 황봉알- 이 워싱턴에 도착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은 월요일 저녁 워싱턴 모처에 모여서 작전회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4시쯤 출발하면 7시쯤 도착할 예정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워싱턴에 도착해서 그쪽 세포와 접선을 하고 김구라 황봉알 형님들을 기다렸으나.... 8시.... 9시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CIA 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납치해 간 것이 아닐까 심히 걱정도 되었으나....

 

인터넷 검색을 해 본 결과 디트로이트에서 폭설로 인해 비행기가 DELAY 된 것이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중 세포님과 나는 근처 한국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뉴스를 보는데, 한국에서 범대위가 출발했다는 뉴스였다. 공항에서 찍은 화면 같았다.

 

어느새 시간은 1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포(박홍수님)와 나는 원래 공항에서 픽업 하기로 되어있던 김구라 황봉알의 팬클럽 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우리가 달려 갔다.

 

이제 용사들이 모두 모였다. 김구라, 황봉알, 나, 세포1(박홍수님), 세포2(윤명규님) 그리고 명규님 동생까지 6명. 명규님의 아파트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김구라 형님은 키가 무척 크고 훤칠하게 생겼으며 깨끗한 이미지였다. 황봉알 형님은 역시 살아온 인생역정이 얼굴에 쓰여져 있을 만큼 반항아적인 이미지와 개구쟁이 이미지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약간 빠진 머리숯과 함께 멋진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평소 딴지방송국 시사대담의 팬이며 <아티스트 문희준 편>을 듣고 눈물까지 흘린 나는 처음으로 직접 만나는 연예인(?)이라 좀 떨렸으나 두분 형님들이 친절하게 해 주고 자주 웃겨 줘서 금방 친해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시간은 어느새 12시를 향해 달려가고... 모두들 작전회의를 하려고 폼을 잡고 앉았으나...

 

술부터 마시고 잡담만 해댔다 -_-

 

나랑 박홍수님은 시간이 늦은 관계로 집에 가려 했으나..그냥 자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이 잤다. 다음날에 뉴욕에 가야하니깐.

 
 

12월 3일 아침 7시. 모두들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뉴욕까지 이동시간은 4시간. 내가 운전하는 이동방법. 멤버는 박홍수님 그리고 두 곱창 형님들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나는 평소에 운전하는 거 좋아한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 집을 나섰다. 중간에 맥도날드 들러서 아침도 때우고... 카메라 테이프도 사고..여차저차해서 뉴욕에 입성!

 

근데 역시 미국놈들이 생화학무기를 몰래 살포한건지.... 이때부터 황봉알 형님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한다. 불길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했다.

 

도착하니 1시쯤 되었다. 주차할 장소를 찾고 유엔빌딩으로 뛰어갔으나 범대위의 기자회견은 이미 끝났고 길거리 시위를 준비중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황봉알 김구라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유엔빌딩앞에서 5분간 대화하는 것을 찍고난 뒤 범대위 분들과 합세했다. 이때가 오후 2시쯤. 내가 하는 일은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 찍는 일과 범대위측에서 가져온 전단지 뿌리기! 유엔빌딩 뒷편에서부터 타임스퀘어까지의 행군이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날씨가 정말정말 욕나올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그곳에서 춥다고 땡깡 부릴 수도 없고 시위는 시작되었다!

 

어느새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하나씩 모여들더니 카메라 든 사람만 수십명이 되었다. 김구라 황봉알 형님들도 피켓을 들고 같이 시위를 했다(한겨레 신문 1면에 나왔고 딴지에 기사화도 되었다).

 

나도 전단지를 수백장 들고서 추운 바람 맞아가면서 뉴욕 시민들에게 이거 읽어 보라고 한장씩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시위고 슬픈 시위인데... 왜 뉴욕에있는 교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지....?

 

정말 그랬다. 한국에서 간 범대위는 7명. 플러스 김구라 황봉알. 거기다가 몇명 더해서..피켓맨은 열댓명이 고작이었다. 수십만 뉴욕 교민들에게 홍보가 안 된건지 일 때문에 못 오는 건지 몰라도 괜히 열받고 괜히 슬퍼지고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단지를 돌리는데 한 50% 정도는 받고 나머지는 안 받는다고 했다. 손은 이미 느낌이 없을 정도로 거의 얼어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열심히 뛰면서 전단지 돌리기를 했다. 한발자국씩 걸을수록.. 피켓에 붙어있는 효순이 미선이의 사진을 볼수록 가슴속에 무언가 뜨거운 게 느껴졌다.

 

지나가던 시민들도 하나씩 쳐다보고.. 캠코더 있는사람들은 즉석에서 우리를 찍기도 하고.. 그렇게 타임스퀘어까지 걸어갔다.

 

그 중앙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피켓을 들고있는 모습.. 가슴이 찡했다. 방송3사와 외신기자들까지 보이고.. 이런 조그마한 시위하나로 모든게 바꿔지고 부시가 넙죽 사과하는 건 아닐 테지만 이런 현장에 내가 있다는 게 뿌듯했고 한편으론 이래야 되는 현실이 서글펐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 뉴욕시민들에게도 짜증이 좀 났고..

 

시위가 거의 끝나갈 때쯤 범대위의 대표..였을거다 아마 그 분이. 목사님으로 기억되는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시는거다. 뚝.뚝...

 

그걸 보면서 우리는 좀 더 숙연해지고... 그렇게 뉴욕에서의 시위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때가 4시쯤.

 

우리는 그분들과 떨어져서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배도 채우고 황봉알 형님 약도 살 겸 약국 들리고.. 근처 설렁탕집으로 가서 밥을 먹고.. 9.11 테러 현장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10분쯤가서 내려보니 바로 쌍동이 빌딩이 있던 자리가 나왔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었고 이런저런 공사가 한창이었다. 구라,봉알 형님은 그곳을 배경으로 5분간 대담을 했고, 그렇게 뉴욕에서의 일정은 거의 끝나갔다.

 

그러나... 나에게는 끝이 아니었다-_- 그렇다 다시 워싱턴으로 가야했던것이다! 그것도 운전을 해서... 뉴욕의 교통을 아시는 분이라면 뉴욕 빠져 나가는 게 얼마나 짜증나는지 알 거다. 링컨터널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또 4시간..ㅠ.ㅠ 우리형님들은 피곤해서 계속 자고... 그러다보니까 노래도 크게 못 틀고..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ㅠ.ㅠ

 

그렇게 해서 워싱턴에 도착하니 11시. 나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내일 또 보자고~ 헤어졌다. 그곳에서 자고 가라 하셨지만 다음날 아침에 수업이 있는 관계로 필라델피아로 와야 했다.

 

또다시 2시간의 운전. 태어나서 하루에 운전 12시간 한 적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집에 파김치가 돼서 오자마자 골아 떨어지고...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려 했으나... 가긴 어딜가-_-  결국 수업도 못가고 워싱턴으로 향해야 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그냥 어제 거기서 잘걸 ㅠ.ㅠ

 

 

 
 

 

 

12월 4일. 그날은 우리끼리만 행동을 하는 날이라서 기대를 무지무지하였다.

 

너무 재미있을것만 같았다! 그날의 행동요원은.. 나, 명규님, 구라형 봉알형. 이렇게 4명이었다. 제일먼저 간곳은 우리나라의 국익과 교민들을 대변해 준다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주미 한국대사관!

 

약속도 안 하고 가긴 했지만.. 그 시간에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우리는 담당자를 좀 만났으면 했지만... 없으시댄다. 그쪽에서 없다는데 믿어야지 뭐. 그래서 대사관앞에서 5분 대담하는걸 찍고 링컨기념관으로 향했다.

 

다들 아실거다. 마크 월버그가 주연한 영화 혹성탈출 맨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거기가 바로 링컨 기념관이다. 상자곽 같이 생긴 건물안에 거대한 링컨이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 그곳에서 한 10분간을 찍었다. 태극기들고 선언문을 낭독하고.. 링컨향해서 욕지거리도 해주고.. 너의 후손들이 하는짓을 잘봐라 이새끼야 이런식으루..

 

그리고 마지막엔 봉알형님이 너무 아픈데도 불구하고 젖먹던 힘을 다해 이 개새끼야~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너무 크게 질러서 쩌렁쩌렁 울리고 사람들 다 놀래서 막 쳐다보고 놀라고 그랬다 ㅎㅎㅎ

 

봉알형님 아픈데 진짜 수고하는 거 같았고, 압권은 우리가 그렇게 욕하고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돌아나오는데 어떤 한국 여자분이 수고하시네요 하면서 지나간 일이었다. ㅋㅋ

 

다음 목적지 백악관! 난 백악관을 제일 기대했었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 원래 계획은 야이새끼야 똥이나 쳐먹어~ 하면서 윤봉길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듯 멋지게~ 인분을 백악관을 향해 뿌리는 거였는데 경비가.. 그놈의 짭새들이 꽤 눈치를 주는 거였다.

 

그래서 똥뿌리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정면에 서서 부시에게 낭독문을 읽고.. 얼레리 꼴레리 노래를 개사해 불러제꼈다. 후후. 이게 웃긴 부분 인데 동영상 보시라! 지나가던 할머니는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따라하고 ㅎㅎ 같이 있던 나도 쪽팔렸는데 노래를 부른 구라 봉알 형님들은 오죽했으랴.

 

그런데 이때부터 경비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셋이서 모여서 얘기하는 척 하면서 계속 우리를 주시하는데... 정말 섬짓섬짓 했다. 똥 뿌리려고 포즈만 취하면 바로 스나이퍼가 우리를 쏘아 죽일 그런 분위기였다. 그래서 일단 작전상후퇴.

 

어디로 했냐고? 바로 백악관 뒷편으로 살살 기어갔다.. 그리고 형님들이 난간에 앉고..

 

조용히...아주 조용히...인분을...백악관에다 쏟아 부었다.

 

후후. 약간 비굴하긴 했지만 일단 똥을 뿌렸으니 어느정도 성공! 정말 긴장되는 순간순간이었다.

 

근데 봉알형님이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아파한다. 그래서 잠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마지막 목적지인 국회의사당을 향해 출발하였다.

 

이번 테러기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몇분간 카메라 앞에서 대담을 하던 두분... 국회의사당을 향해 후장을 살포시 보여 주면서 흔들던 모습...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옆에있던 중국인 아저씨는 그 광경을 보고선 입을 딱 벌리더니 움직이질 않는다. ㅎㅎㅎ 떼놈들은 저럴 용기도 없지 아마? 다행이 경비에게 걸리지는 않아 풍기문란죄로 잡혀가진 않았다.

 

이렇게 다하고 나니까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런데 봉알형님이 죽으려고 그러는거다. 그래서 일단 한약방으로 가서 약을 지어드리고.. 봉알형님은 바로 깊이 잠들었다. 그리고 우리와 구라 형님은 미주 한국일보 지사로 가서 인터뷰를 하고.. 공식적인 일정은 그렇게 끝을 향해 갔다.

 

그런데 이때부터 전화가 여기저기서 오는 것이다. 팬들한테서!!

 

밥을 사주고 싶어하신 여자분! 그리구..워싱턴 근처 사시는 또다른 남자분! 구라형님 봉알 형님을 그렇게 보고싶어 하셔서 다같이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봉알형님은 너무 몸이 아프고 깊이 잠들어서 못 나갔지만.

 

근처 식당에서 다같이 모여서.. 술 한잔을 하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구라형님의 입담으로 인해 너무 재밌었고 나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다음날 학교에 가야 되기 때문에..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날 폭설로 학교가 쉬었다 -_- 제길 술이나 더 마실걸 -_-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구라형님과 봉일형님도 폭설로 비행기가 하루 연기되었다고 했다. TV 녹화도 빵꾸내고 왔다고 하던데 잘 해결되었기를 빈다.

 

이렇게 3일간의 숨가빴던 날들은 끝이 났다. 이 모든일의 뒷편에는, 가깝게는 효순이 미선이의 희생이 있었고, 멀리엔 아마 우리가 알지조차 못했던 미국에 대한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의 문제가 있었음이라..

 

나도 비록 미국에 살고 있지만.. 예전부터 미국이 해오고 있는 힘의 외교..또는 정의라는 이름아래 수없이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 정말 슬픈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항상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미국 아이들에게 꿀리지 않기 위해 나를 훈련시키며 살고 있고 효순이 미선이의 억울한 희생을 보며 열받어 하고..답답해 하고.. 그런 평범한 학생이다.

 

아마 내가 한국에있었으면 나도 촛불시위에 참여했을 것이다. 한국을 우방으로 보지 않고 속국으로 보이게 하는 미국의 태도는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요즘 불고있는 반미의 분위기는 분명 예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부끄럽지 않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국이 아니라 미국 할아버지 일지라도 누가뭐래도 나한테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피에쓰: 엄마! 나 엠비쒸 뉴스에도 나왔어!!!

 

 

미국 현지세포
은비사랑 (vvtaijivv@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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