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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한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

2018년 7월 23일, 또 다른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

2020년 4월 그 두 남자와 매우 친했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한 남자는 어용 지식인이 되어 대통령과 대통령의 개혁을 지지하겠다는 자신의 선언을 거두고 정치 평론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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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알고 있겠지만 세 남자의 이름은 노무현, 노회찬, 유시민이다.

나에게는 몇 가지 물음이 있었다. 왜 보수 진영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되는’ 아무렇지 않은 일들이 이들에게는 목숨을 던져야 할 만큼, 자신이 정말 하려고 했던 일을 포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을까? 왜 진보 진영 사람들은 그래야 할까?

노무현은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다’는 말을 남겼다. 노회찬은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고 했다. 유시민은 자신이 99가지를 잘했더라도 한 가지를 잘못해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그만둘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세 사람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 심지어 존재로 인해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했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받는 것-민폐-를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염치라고 부른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염치–가 있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 좋은 사람이고 염치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염치없는 사람이다. 염치가 있는 사람이 염치없는 사람들보다 더 대접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치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뻔뻔스러운 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스스로 저지른 실수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사람들이 몰염치한 자들의 고의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만 염치 있는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현상은 그 고의나 실수를 바라보는 타인들뿐만 아니라 고의나 실수를 저지른 당사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대체 왜 이런 걸까?



낙차의 문제 – 타인의 문제

충격량은 떨어진 높이에 따라 달라진다. 100미터 높이에서 50미터로 떨어지면 크게 다치지만 5미터 높이에서 3미터로 떨어지면 그닥 다치지 않는다. 충격량은 시작 높이가 아닌 낙차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은 인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의 4대강이나 자원외교, 방산 비리에는 놀라지 않는 사람들도 노무현의 시계에는 큰 충격을 받는다. 누군가한테는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하고 넘어갈 일이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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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에 출두하며 보인 대조되는 두 전직 대통령의 모습 >

 

부인이 받은 명품시계 때문에 노무현은 목숨을 버렸지만, 이명박은 뉴욕제과 사장한테 받은 돈만 3억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다르지 않냐고 이명박이 그래도 노무현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물론 노무현과 이명박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법은 노무현이라고 잘해주고 이명박이라고 못 해주고 그런 거 없다. 오히려 사람들의 이런 인식이 노무현의 작은 잘못은 엄청난 것으로 이명박의 어마어마한 잘못은 으레 그런 것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노무현이건 이명박이건 똑같은 인간이다. 노무현이라고 해서 잘못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아니고 이명박이라고 해서 잘못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잘못의 크기만큼 등가로 비판받고 등가로 처벌받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에 대해 기대가 컸고 이명박에게 아무 기대가 없었던 사람들의 실망과 배신감, 이명박과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누군가 서러워 목숨을 끊는 일이 없는 세상이 자신에게 손해를 안겨준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정념이 만나서 노무현에게는 엄격한 개작두를 내밀고, 이명박에게는 구멍 뚫린 그물을 선물로 줬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은 큰 문제가 되지만 사람들이 무관심하면 작은 일이 된다. 보수진영 인사의 들보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진보 진영 인사들의 티끌에는 눈에 불을 켠다. 사람들의 관심과 언론의 프레임이 만나 보수 진영 사람들과 진보 진영 사람들의 운명은 매번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김성태의 딸과 조국의 딸을 어떻게 다뤘는지 봤다. 사람들의 잘못된(그렇다. 잘못된 것이다.) 인식이 이런 엇갈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염치의 문제 – 당사자의 문제

앞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 인사의 문제를 다루는 인식의 엇갈림은 타인만이 아니라 당사자에게도 해당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것은 보수냐 진보냐 하는 진영의 문제는 아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개인들이 가진 염치의 문제다.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친일파들이 득세한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보수 진영에 속한다는 것은 몰염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됐다. 힘의 우위 외에는 어떤 정당성도 없는 집단에서 큰소리를 친다는 것은 어지간히 몰염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쁜 짓 해도 되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수진영에 속한 사람이 전부 염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듯 진보 진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전부 염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파렴치한 인간들도 꽤 있다.

하지만 염치없는 사람이 진보진영에서 대표자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굉장히 드물뿐더러 염치없는 사람이 별로 생기는 것도 없는 진보진영에 머무를 이유가 별로 없다.

때문에 대체로 보수 진영(우리나라에서 ‘보수’라 불리는 세력을 의미한다)에 속한 이들은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진보 진영에 속한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 자신이 끼친 민폐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고 친구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집단에 작은 민폐라도 끼칠 경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곤 한다. 심지어 생명까지.

진보 진영 인사들이 이런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아는 보수 진영 정치인이나 진보, 보수할 것 없이 극악무도한 언론들은 이를 이용해 ‘너는 다르잖아’, ‘너는 그러면 안 되잖아’라고 말하며 염치 있는 사람들에게 손해를 강요하고 ‘쟤는 원래 저러니까’, ‘쟤는 그런 사람이니까’라고 말하며 몰염치한 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또 으레 그런 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 진영 인사에겐 ‘너’라고 부르던 그들이 보수 진영 인사는 ‘쟤’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진보 진영 사람들에게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 정치권과 보수 언론계는 이런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차도 살인, 진보 진영의 칼을 빌어 진보 진영 사람을 쳐내는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 온갖 난리를 쳐도 끄떡하지 않던 씩씩한 노무현도 경향신문 이대근의 <굿바이 노무현>과 한겨레 김종구의 <비굴이냐 고통이냐>는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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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근 (좌) / 김종구 (우) >

 

나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내가 나를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던 튼튼한 유시민도 이근형 위원장과 일부 민주당 인사들의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자신이 듣보잡이라 부르던 변희재에게 토론에서 처참하게 발리고 사과하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척척석사로 불리며 진보 진영 까는 데만 열 올리는 진중권 씨가 요새 하는 짓도 이전에도 진보 진영에 속했던 다른 이들에 의해 수없이 벌어졌던 일이다.

왜 보수 진영 정치인들과 언론들은 진보 진영의 약점을 파고들어 잔인할 정도로 몰아붙이는데 진보 진영 정치인들은 왜 그러지 못하는가? 왜 진보 진영 언론들은 진보 진영의 편이 돼주기는커녕 오히려 같이 손가락질하는 것도 모자라 난도질에 앞장설까?

가치관의 차이다. 만원 버스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을 보고 불편하지만 좁혀서 다 같이 타고 가자는 사람들과 저 사람이 늦게 온건 저 사람의 책임이니 그냥 떠나자고 말하는 사람들의 가치관 차이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차이를 우리는 세계관이라 부른다.



보수적 세계관과 진보적 세계관의 차이

세계관이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이고 이곳에 있는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

보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구조에는 큰 문제가 없으며, 대부분의 문제는 각 주체들의 개별적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의 문제들은 세상의 구조적인 결함 때문에 생긴 문제로 개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조를 변화시켜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개의 의자가 있고 거기에 앉으려는 사람이 12명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2명은 절대로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10명이 자리에 앉았는데 넌 대체 뭐 했냐고 자리에 앉지 못한 2명의 개인적인 노력 부족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보수적인 세계관이라면 애초에 12명이 있는데 10자리 밖에 없으면 2명은 절대로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 아니냐며 2자리를 늘려야만 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시절에 ‘노오오오오오오오오력’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이나 저 유명한(유명한가?) 김무성의 ‘방법이 없다’는 말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세계관이나 김무성 씨가 가진 세계관에 기반해 나온 말들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나 절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은 없다. 사안에 따라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기도 하고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개인의 문제라고 봐야 하는 문제들이 있고 구조적 문제들로 봐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n번방의 조주빈이나 고유정 같은 살인마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인간들은 자신이 피해자라도 되는 양 구조 탓을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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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오마이뉴스 >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어간 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없다. 배로만 수학여행을 하게 한 정책 입안자들, 안전 규정을 느슨하게 만든 이명박 정부, 구조에는 무관심했고, 오로지 청와대만 바라봤던 해경,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박근혜 청와대가 합작해 만들어낸 구조적인 문제다. 배에서 죽어간 아이들에게는 어떤 문제도 없다.

물론 어이없게도 세월호 사건(사고가 아니다)을 어떻게든 개인의 책임으로 만들어보려고 시도한 유사 보수주의자들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쓰레기다.

명확히 책임을 나눌 수 있는 문제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도 개인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 문제의 원인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세계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선택은 일반적으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진보 진영 사람들이 도덕적 결벽성을 띠거나 요구받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런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바라봐주는 대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뉴스공장에 나온 게스트들은 다른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와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 그것은 김어준이라는 캐릭터에 기인한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우리의 톤 앤 매너를 결정한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대부분의 문제를 개개인의 문제로 인식하지만, 진보적인 사람은 구조적, 전체적인 문제로 인식한다고 했다.

우리는 보수적인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그 사람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보적인 사람을 대할 때는 진보 진영 전체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이 인식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볼 때는 이 흐름이 명확하다.

이명박의 비리로 인해 보수 진영 전체의 도덕성이 무너졌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노무현의 비리가 진보 진영 전체의 도덕성을 땅바닥으로 끌어 내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진영을 불문하고 수두룩 빽빽이다. 심지어 당사자 자신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결벽증은 힘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나 ‘대통령 한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라는 구태의연한 말을 들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의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이승만의 반민 특위 해체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 뿌리내리고 헤게모니를 장악해왔다. 70년이다. 무려 70년.

그렇게 긴 세월이었다고 말하고 친일파들은 해방이 올지 몰랐다고 말하던 길고 긴 그 일제 강점기의 두 배가 넘는 세월이다. (일제 강점기는는 36년이 아니라 정확히는 34년 11개월 18일이다. 뭐 좋은 거라고 이런 걸 부풀렸는지 잘 이해는 안 간다)

이 긴 세월 동안 이 나라의 보수들은 사람과 시스템을 심어왔다. 힘의 차이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졌다. 이게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될 일도 아니고 국회의원 180명이 생겼다고 단숨에 되는 일도 아니다.

당장 검찰이나 기획재정부만 봐도 알 일이다. 그들은 임명직 공무원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명령권자를 거스른다.

언론들은 법무부의 외청에 불과한 검찰총장(이 호칭도 마땅히 바꿔야 한다. 산림총장이라거나 소방총장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이 법무부 장관의 지휘를 거스르는 것을 충돌이라 표현하고, 기획재정부가 총리의 지시를 거스르다 마지못해 따르게 되는 상황을 백기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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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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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

 

보수 정권일 때는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무얼 의미할까?

진보 정권 더 정확히는 민주당 정권을 자신들의 명령권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성 소대장이 임관했을 때 개기는 하사관이나 사병이라고 보면 될까? 마땅히 따라야 할 지시에 따르면서도 자신이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이 행동한다.

이것은 둘 사이에 지위 관계와 사회적 힘의 우열이 상충할 때나 벌어지는 현상이다. 민주당 정권은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고 180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여전히 마이너리티인 것이다.

마이너리티는 본인이 속한 집단을 과대하게 대표하게 된다. 우리나라 어떤 남자가 강간을 저질렀다고 하자. 이 범죄를 두고 한국 남자는 다 강간범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저 그 남자가 강간범일 뿐이다. 하지만 예멘 난민이 강간을 저질렀을 때, 사람들은 난민들이 전부 강간범인 것처럼, 이슬람교도들이 전부 강간범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민주당을 여전히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당과 관련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진보 진영 전체의 잘못으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민주당 당직자도 아니고 당원조차 아닌 유시민 씨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의석 예측(심지어 예측도 아니고 희망인 것처럼 표현했다)을 한 것도 마치 민주당 전체가 오만방자하게 “우리는 180석을 먹을 거야 우하하하”라고 말한 것처럼 왜곡해도 먹혀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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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연합뉴스 >

 

제일 우스운 건 범진보 진영이 아니라 민주당 단독으로 180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유시민의 예측은 오만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했던 거라는 점이다. 유시민 씨의 180석 발언과 그에 따른 논란은 민주당이 여전히 우리나라의 마이너리티인 면모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볼 수 있다.

마이너리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마이너리티를 바라보는 타인만 아니라 진보 진영 당사자들이 자신을 인식하는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시민 180석 논쟁이 벌어졌을 때 민주당에서는 ‘유시민 씨는 당직자도 아니고 당원도 아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건 민주당과는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의석수 예측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한마디 했으면 끝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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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news1 >

 

하지만 민주당에서는 그 발언이 이해찬 대표의 발언이라도 되는 양 허둥지둥하며 변명하기 바빴다.

‘겸손해야 한다’는 말은 이 슬픈 코미디의 절정에 해당한다. 왜 유시민이 겸손해야 하나? 유시민이 민주당 대표인가? 아니면 민주당 후보인가? 신중하고 센스 있게 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낙연 전 총리 또한 “밖에 있는 분이 섣불리 예측한다”는 말을 했다.

당 내부 인사도 아닌데 의석수 예측 좀 하면 안 되는 건가? 이낙연이 무슨 권한으로 유시민에게 예측해라 말아라 하는 건가? 그 예측이 맞건 틀리건 유시민에게는 예측할 자유와 그 예측을 말할 자유가 있다. 이 모습 또한 민주당 사람들이 자신들을 마이너리티로, 한 덩어리로 인식하기 때문에 벌어진 슬픈 모습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미통당, 미한당 인사들은 ‘샤이보수’나 ‘과반’을 비롯해 온갖 말도 안 되는, 결과적으로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예측’을 쏟아냈지만, 그 발언 중 문제된 것은 없다. 그들의 발언 중 문제 된 것은 차명진 씨 세월호 발언 같은 패륜적인 발언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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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국민일보 >

 

선거가 끝난 후에도 민주당 인사들의 유시민 씨와 관련된 발언을 들어보면 유시민이 잘못했다는 것을 깔고 간다. 유시민 씨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니라든지 유시민 씨에게 고맙다든지 라는 말은 유시민의 180석 발언은 잘못된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가는 발언들이다.

대체 유시민이 잘못한 게 무엇인가? 의석수를 예측한 게? 그 예측을 말한 게? 그게 잘못이면 우리나라 정치 평론가들 다 짐 싸서 집에 가야 한다.

유시민을 민주당을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남들도 자신들도. 이것은 마이너리티에 대한 상호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대통령도 국회의 다수당도 진보 진영이다. 우리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 개인적으로 이근형 위원장의 발언은 다른 민주당 인사들의 발언과는 결이 좀 다르다고 본다. 선거 전이야 허둥지둥 대느라 그런 말을 했다 쳐도 선거가 끝난 다음에 의석수가 유시민 씨가 말한 대로 정확히 180석이 됐는데도 이근형 씨는 유시민 때문에 의석을 10석은 잃었다는 발언을 했다.

이것은 유시민 씨에 대한 이 위원장의 개인적인 감정 혹은 이해관계가 반영된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180석이라고 예측했고 180석이 됐는데 10석을 잃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선거 전이야 몸조심하느라 그랬다고 양해한다 해도  선거가 끝났는데 그 말을 굳이 해서 유시민을 비난하는 의도는 무엇일까? 이 위원장의 발언 매우 문제 있다고 본다. >



우리는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예전에 우리 어른들은 미제는 다르다. 일본의 시민의식이 높다며 엽전은 안 된다, 국산은 못 쓴다. 방화(한국 영화)는 재미없다는 소리를 했다.

이제 기생충이 미국 로컬 영화제에서 감독상 작품상을 받고 전 세계에서 진단키트를 구하기 위해 대한민국으로 앞다퉈 찾아오는 세상이 됐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나라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여당도 국회 다수당도 전부 진보 진영이다. 전부 바뀐 것은 아니어도 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바꿀 수 있다. 더 이상 진보 진영 정치인은 소수자, 약자가 아니다.

우리의 인식도 이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도덕만을 무기로 삼던 소수 진보 세력이 아니란 말이다.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뻔뻔스러워지는 일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마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잎새에 이는 바람이다.

뻔뻔스러워지라는 것이 정직을 가훈으로 삼았다는 이명박이나 자식의 입사를 청탁한 적이 없다는 김성태나 장을 지지겠다고 해놓고 입을 싹 닿는 이정현의 뻔뻔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이 대통령이고 민주당이 제1당 집권여당이며 민주당 지지자가 한국 사회의 주류다. 뭐가 걱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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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뉴시스 >

 

보수 진영 사람들의 문제는 진영의 문제도 보통 개인의 일탈로 취급되는 반면 진보 진영은 개인의 일탈도 진영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이 불공평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속한 진영이 어디건 누구 편이건 간에 개인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로, 진보 진영 전체의 문제는 진보 진영 전체의 문제로 구별해서 받아들이고 말해야 한다.

개인의 잘못을 집단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그거 촌스러운 집단주의다.

진보 진영에 몸담은 한 개인의 문제가 그가 진보 진영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진보 진영 전체의 문제로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와 같은 정치적 지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타인의 개인적 일탈을 대신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이것과 관련해 전설의 명작 ‘넘버 3’에서 배우 최민식 씨가 명대사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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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그 인간이 ㅈ같은 인간인 거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과 같은 정치적 지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신 부끄러워하는 것 좀 그만둬라.



망신 주기의 종말 – 다크나이트 조국

진보 진영 지지자들의 의식 세계는 조국 대전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뉠 것이다. 채널 A-검사장(이동재-한동훈) 결탁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봤듯이 보수 진영에서 진보 진영 스타들을 공략하는 방법은 한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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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 부산고검 차창 검사 (좌) / 이동재 채널A 기자 (우) >

 

온갖 권력 기관–국정원이든 검찰이든 경찰이든 국세청이든 선관위든–을 동원해 사소한 비리라도 털어내고 비리가 없다 싶으면 만들어 낸다. 그렇게 털어낸 혹은 만든 비리를 보수언론과 보수언론에 의해 던져진 떡밥을 냉큼 물어버리는 진보 언론들을 이용해 마구 뿌린다.

그러면 보통 물러난다. 그렇게 해도 물러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가족들을 털기 시작한다. 가족들을 털어서 안 되면 주변 사람들을 털기 시작한다.

자신이 털릴 때는 참던 사람도 가족이 털리기 시작하면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여태까지 맘에 들지 않는 수많은 정치인을 보내왔다. 그 방법이 먹히지 않은  최초의 정치인이 조국이다. 부인을 털고 딸을 털고 아들을 털었다.

아마 그들은 그 훨씬 전에 조국이 물러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개 교수였던 사람이니까. 여태까지 수많은 이들을 그렇게 물러나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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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문화저널21 >

 

하지만 조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을 못 차릴 상황에서 그는 의연했다.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나갔다. 부인이, 딸이, 아들이 궁지에 몰려도 그는 자신이 할 일들을 했다. 검찰은 당황했다.

당황한 검찰은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해버렸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드러내 보였다. 고등학생의 표창장이 위조임을 밝혀내기 위해 수십 군데를 압수수색했다. 그러고도 그 표창장이 위조인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자신들을 빨대라고 여기는 기자들을 이용해 사실이지만 진실이 아닌 것들, 한없이 거짓에 가까운 사실들, 부분적으로 진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새빨간 거짓인 것들, 그리고 애초부터 사실이 아닌 것들까지 수 없는 기사를 쏟아냈다. 
 
검사들은 보수언론 기자에게는 보수진영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진보언론 기자에게는 진보진영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검사들은 그렇게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국의 얼굴은 그들의 기대보다 훨씬 두꺼웠고, 2대 8이었던 여론이 5대5까지 갔다. 아마 이 일은 보수 진영 특히 검찰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도 왜 이렇게 됐을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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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오마이뉴스 >

 

앞으로도 검찰은 자신들을 거스르려는 정치인들을 망신주기식으로 보내버리려 할 테지만 조국 대전 이후에 정치인들은 이전과는 조금은 다를 것이다. 망신 주기만으로 누군가를 보내버리는 일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려워졌다. 


진보 진영에 속해 정치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조국 대전을 자세히 깊이 들여다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좀 뻔뻔스러워도 된다. 무시할 건 무시하고 부정할 건 부정해도 된다.

조국이 자신에게 부끄럽고 세상에 부끄럽고 가족에 민폐를 끼치기 싫었다면 그래서 물러섰다면 검찰 개혁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조국이 뻔뻔스럽게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다) 버텨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다.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은 되지 말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괴물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굳게 결심한다고 이명박처럼 4명이 식당에 가서 두 그릇만 시킬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런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라. 괴물하고 싸우기도 바쁜 사람들한테 그런 거까지 걱정시킬 시간 적어도 나에겐 없다.
 


한 가지 더, 같은 기준
 
진보 진영 지지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나 자신에게 엄격한 것과 우리에게 엄격한 것은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똥과 카레만큼이나 다르다. 나 자신에게 엄격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로 인해 내가 전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엄격한 것은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 민주당 정치인의 사소한 잘못에 핏대를 올리며 꾸짖고 미통당 정치인의 큰 범죄는 원래 저런 놈들이니까 하며 넘어가는 것에 어떤 유익한 점이 있는가?

지지하는 쪽이니까 편들어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잣대로 평가해야 될 것 아닌가? 그게 공정한 거 아닌가? 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것. 이게 진보 진영 지지자들이 여러 가지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진보 진영 정치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보 진영에 몸담았다는 것이 혹은 정치적으로 진보진영을 지지한다는 것이 일상에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쓰이도록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럼 누가 진보 정치인 하고 싶고 진보 진영 지지하고 싶겠나.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사람을 말릴 필요까진 없겠지만, 손해 볼 것을 강요해선 절대로 안 된다. 이제 그런 구시대적 진보관은 걷어치워야 한다.

 

 

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김어준의 일화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직후 시점인 2011년 11월 14일 중앙일보는 “김 씨가 사는 서울 성북동 집은 연면적 223m2(68평)의 2층 주택으로 본인 소유“라는 기사를 냈다.

등기부등본까지 떼어보고 뻗치기 끝에 김어준을 만나 확인하고 쓴 필치다. 이 주택의 소유자가 현재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점을 보수 독자에게 알려주는 이야는 뻔했다. 이 기사에 대한 김어준의 반응이었다.

“그럼 어때서?”

그는 부유한 삶을 동경한다. 그래서 성북동 집에 살고, 1990년대 초반에 나온 거지만 미제 지프를 타고 다니며 럭셔리한 패션을 추구한다.

현재 진보의 아이콘인 그의 외향, 성향이 이상한가? 이상함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나도 한마디 해주고 싶다.

“그럼 어때서?

 

 

마지막으로, 나도 유시민의 편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인 이태경 토지+자유연구소 부소장의 <유시민이 옳다>는 글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나는 참여정부 시기를 통과하면서 뼈아프게 깨달았다. 거시적 안목과 전략적 인내심이 없는 진보, 사안의 경중과 완급과 선후를 모르는 진보, 한 사회가 걸어온 경로의 무서움과 사회 세력 간의 힘의 우열이 가진 규정력을 인정하지 않는 진보, 한사코 흠과 한계를 찾아내 이를 폭로하는 것이 진보적 가치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는 진보는 무익할 뿐 아니라 유해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설사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도 정치 권력, 그중에서도 행정 권력이,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재벌, 극우 정당, 비대 언론, 사법 권력, 종교 권력, 매판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특권과 두 동맹은 새 정부의 개혁을 방해하고 새 정부를 좌초시키기 위한 연성쿠데타 혹은 저강도 탄핵을 끊임없이 획책하고 실행할 것이다.

새 정부와 자각한 시민들만으로는 특권과 두 동맹의 파상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에겐 거시적 안목과 총체적 사고와 전략적 인내심을 지닌 지식인,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시하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나는 개혁 정부에서 진보 어용 지식인 역할을 하겠다는 유시민의 선언을 그런 지식인이 되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나는 유시민의 진보 어용 지식인을 백 퍼센트 이해하고 백만 번 동의한다. 나는 유시민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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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유시민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