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8. 26. 월요일
편집부 홀짝
지질하다 : 보잘것 없고 변변하지 못하다.
위인: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
연재의 변(辯)
어린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이듯, 필자 또한 어린 시절 책꽂이에는 위인전이 수두룩하게 꽂혀 있었다. 그 때 우리 부모님이 위인전을 집에 들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수많은 위인들의 일생을 접하면서 자신의 자녀 또한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여느 부모님들과 같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참으로 불안한 세상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는지, 기업은 불안을 마케팅하여 장사를 하고 정치는 불안을 미끼로 표를 긁어 모은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낳고, 서로 다른 불안은 불안을 증폭시킨다. 바야흐로 불안의 시대가 도래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너무나 많은 주변 사람들의, 너무나 많은 소식들을 듣게 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자신의 소식 또한 수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간다. 세상이 좋아진
탓이라, 그걸 꼭 원망할 수 만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딱 그만큼 내
소식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만큼,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아간다.
<딱 저만큼의 시선을 신경쓰며 살아가는지도...>
불행히도,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99.9% 이상은 그럴 것이다. 때문에 수시로 스스로의 모순에 부딪힌다. 밑바닥을 발견한다.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누군가가 내 안의 밑바닥을 알아챌까 두렵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세상은
살아나가야 한다. 그것도 꽤 잘 살아야 한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출판 시장은 어렵다고 하는데, 자기계발서는 여전히 승승장구하며 순식간에 팔려
나간다. 힐링 열풍 또한 뜨겁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자기계발서는 아무리 읽어도 내가 진짜 ‘계발’되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토크쇼에 출연한 소위 말하는 '힐링 전도사'들의
이야기를 감동하며 들어도 그때뿐, 내일은 또다시 내일의 새로운 상처를 받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자기계발서의 강세와 힐링 열풍이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이쯤 되면 이런 것들이 일종의 자위행위가 아닌가 싶다. 전문용어로
‘대딸’. 내가 오늘 만족스런 섹스를 한다고 내일은 성욕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리고 다시 한 번 위인전을 생각한다. 내가 지금 나이에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을 다시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나도 그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막 솟아날까? 그럴 리 없잖아. 그 시절 위인전 속 주인공들은 나와 너무 다르잖아.
그들은 신화 속 영웅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태어나서부터 후광이
번쩍하고, 그를 만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장차 크게
될 아이’라는 희망적 예측을 서슴없이 해댄다. 성장환경에서부터
온갖 고초와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외부적 요인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그 자신은 언제나
굳은 의지와 올바른 신념, 그리고 기타 잡다한 좋은 의미의 수식어들을 몽땅 동원해도 부족할 만큼의 빛나는
모습으로 자신에게 닥친 모든 것들을 끝내 이겨내고야 만다. 마치 그가 겪었던 숱한 고난이 그의 위대함을
빛내기 위한 보조 장치였던 것처럼 말이다.
<무슨 원장? 혹시... 국정... 원장...?>
그런 위인전을 지금 다시 읽는다면? 필자라면 좌절하고 말 거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찌 저 사람과 나는 이토록 다를 수 있단 말이지? 위인이 겪었던 고난에 비하면 지금의 내 상황은 잘 닦인 아스팔트 위에 돌맹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스스로 초라해질 뿐이다. 이건
뭔가 불공평하잖아!
그래서 써 보기로 했다. 연재명 <찌질한 위인전>. 우리가 '위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찌질한 면모를 밝혀 보려고 한다. 다소 발칙하게 들리기는 하겠지만 단순히 위대한 그들을 평범한 아랫것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그들의 업적에 가려진, 한 편으로는 못나고 변변찮았던 그들의 이면을 통해 그들도 평범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 또한 각자의 찌질함을 안고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여 얼마나 잘 해나갈 지는 모르겠지만(월요일 연재에 대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
앞으로 다룰 위인들은 맨 앞에 정의된 위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각자 몸 담았던 분야에서 뛰어나고 훌륭했던 사람 말이다. 그리고 찌질함이란 말 그대로 그런 그들의 변변찮고 못난 모습이다. 평범한 우리가 봐도 혀를 찰만한 행동들. 우리 주변에서 ‘아무개가 어쨌다더라’ 하면 ‘어머, 왜 그랬대?’ 할만한 것을.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첫 번째 위인, 시인 김수영
김수영 시인은 앞서 말한 기준에서 볼 때 위인이 맞다. 시인으로서
뛰어나고 훌륭했으니까. 그의 시가 교과서에 수록되어서인지, 그래서
시험을 보기 위해 그의 시를 공부해야만 했기 때문인지 김수영은 대중적으로도 매우 잘 알려진 시인이다. 중고등학교를 별 탈 없이 졸업한 사람이라면 그가 「풀」이라는 시를 썼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까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을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이 있다.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이자 '참여시인', 그리고 끊임없이 '자유를 노래한 시인'이라는 평가다. 맞는 말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를 빗대어「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김수영의 업적을 모두 논하기에는 그것이 이 글의 주제와 맞지도 않을뿐더러
필자의 능력으로 모두 설명하기에도 벅차다. 또한 그러기에는 지면, 아니
화면(?)이 너무 협소하다.
한가지 확실한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 남긴 시인 김수영의 족적이 매우 굵직하다는 의견에는 대부분 이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제위들도 그가 위인이라는 필자의 견해에 수긍해 주시길. 그렇지 않다면 그의 ‘찌질함’에 대해 논할 이유가 없어지잖아...
이 글에서는 되도록이면 그의 시를 최소한도로만 인용하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자리는 시와 문학을 이야기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시에 한해서는 예외다. 시인은 시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찌질함
백 마디 말 보다 시 한 편으로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한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년에 발표된 이 시는 발표 5년
전인 1958년에 쓰여졌다 한다. 그리고 이 시는 김수영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다. 내용 그대로 김수영은 길 한복판에서 그의 부인을 우산으로 두들겨 팬 것이다. 그것도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부인 김현경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수영은 술에 만취할 때면 1년에 두세 번씩 아내에게 사정없이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김수영은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었던 것이다.
천천히 시를 살펴보자. 길 한복판에서 우산으로 자기 아내를 패는 것도
충분히 못났는데, 그 다음이 더 가관이다. 홧김에 아내를
패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 기껏 한다는 생각이,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나 후회가 아니라 사건 당시 아는
사람이 자신을 보았을까 하는 걱정이다. 두들겨 맞은 아내에 대한 생각에 앞서 자신의 체면이 먼저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아예 그보다 먼저 버리고 온 우산이 생각났다는 것이다.
김수영과 김현경,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
당시 마흔 여섯의 김수영, 그리고 김현경 여사의 현재
1921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수영은 그 시절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했듯,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모두 겪으며 살았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일제의 징집을 피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에 살기도 했다.
해방 후 아내 김현경과 결혼했으나 6.25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에 의해
강제로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며, 인민군의 후퇴 과정에서 탈출했지만 UN군에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포로 수용소에서 풀려난 김수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4.19혁명, 그리고 이어진 5.16군사 쿠데타를 겪었다.
김수영이 김현경을 처음 만난 것은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후였다. 선린상업학교
전수부(야간)를 졸업한 김수영은 같은 학교 선배인 이종구와
사이가 가까웠으며 이종구와 같은 집에서 동경 유학 생활을 함께했다. 이종구는 동경상대에 다니고 있었고
김수영은 미즈시나 연극 연구소에서 연극을 공부했는데, 당시 김수영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 김수영에게
충분한 돈을 보내지 못하는 처지여서 동경 생활의 상당 부분을 이종구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종구가 잘 아는 동생이었던 사람이 훗날 김수영의 아내가 되는 김현경이었던 것이다.
동경 유학 생활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 김현경을 알게 된 김수영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해방 후 김수영과 김현경은 부부가 되어 한 집에 살게 되었고, 김현경은 이들의 첫째 아이를 임신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6.25 전쟁은 비극이었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인에게도. 김수영 또한 그러한 개인 중 하나였다
서울에서 미처 이남으로 피난을 가지 못한 김수영과 그의 가족.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김수영은 다른 문인들과 함께 ‘의용군’이 되어 인민군에 끌려 가고 만다. 가족과 헤어진 김수영은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세가 뒤집어지자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쪽으로 행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수영은 행군 도중 전열을 이탈하여 탈출을 결행하고 온갖 죽을 고비를 넘는다(실제로 첫 번째 탈출 후 도망치다 북한 내무성 군인에게 붙잡혀 총살을 당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반 거지꼴이 되어 남하하던 김수영은 유엔군에 다시 붙잡혀 결국 거제도 포로수용소에까지 끌려간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가장 처절한 이념 대립이 있었던 그곳 말이다. 반공포로 신분의 김수영은 동료들이 친공포로에 붙잡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과, 반대로 반공포로가 친공포로를 집단 린치하는 장면을 모두 목격한다.
<가슴 팍의 'PW'는 Prisoner of War(전쟁 포로)의 약자. 김수영 또한 같은 글씨를 새겨넣고 있었다>
그 살벌한 지옥의 현장을 견딘 김수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난 후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아내 김현경의 소식을 듣는다. 그가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 인민군에 붙잡혔을 때는 자신이 의용군이라고 항변하며 살아남았고, 유엔군에 붙잡혔을 때는 거꾸로 자신이 인민군이 아니라고 주장해야만 했다. 그토록 그가 기어이 살아남아야만 했던 이유가 그의 아내와 아이였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추측일까?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는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김현경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산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수영은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한다.
김현경은 부산에서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下)편에 계속.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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