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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졸음운전으로, 또 멧돼지나 산짐승에게, 그래서 미리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있습니다. 이제 조금씩 정리할까 합니다. 기나긴 여행, 이제 올해를 끝으로 설화여행은 끝나겠네요. 인간설화편에서 남명조식과 몇 몇 현장사진. 그리고, 5편의 일명 굿판 사진을 추가하고 끝내렵니다.


1편, 연못설화 2편, 바위설화 3편, 인도, 불교설화부터 동물설화. 4편 인간설화 5편 서사무가 마지막 서사무가가 다시 연못설화와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같은 설화 여행입니다. 


먼 훗날, 조카 수아秀娥가 이 글을 보게 될 날을 기다리며. (발음상 이쁘기는 한데, 내가 네 엄마 아빠에게 네 이름 너무 쉽게 지은 것 아니냐 혼내기도 했단다)




설화


여행의 시작


2009년 5월 23일 한 남자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가난과 저학력자들의 성공신화이자 저의 페르소나와 같았던, 고 노무현 전대통령. 그의 죽음은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회는, 가난하고 대학을 나오지 못한 자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 그리도 싫었던가? 무엇이 그를 벼랑으로 몰았나? 이런 나라에서 내가 살아야 하나? 또 누군가를 이런 나라에서 살아가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낚시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 생각들을, 또 그를 제 마음에서 떼어 보내드려야 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앉아있다 해가 지면 집에 돌아가는 그런 날들을 보냈습니다. 물고기를 낚으려 다니지 않았기에, 빈 낚싯대 던져놓고 생각과 마음을 비우려 연못을 찾아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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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생가터 방향에서 바라본 마룡지>


그날 제가 찾아간 연못은 서동의 생가터가 있는 금마의 마룡지라 불리었던, 연동제라는 곳이었습니다. 원래는 두 개의 연못이었으나 하나로 합쳐졌다 합니다. 연이 많다 해서 연방죽이라 불리던 연못과 왕이 된 서동이 근처에 살던 연못, 그 두 개가 합쳐지기 전에는 연방죽과 서동못이라 따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연방죽과 서동못이 합쳐져 마룡지이자 연동제라고 불립니다. 지역 사람들은 마룡지로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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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샘. 과거에는 돌과 자갈로 사각형의 빨래터와 샘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샘의 흔적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연동제 근처에 서동이 그의 어머니와 태어나,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습니다. 생가터 근처에서 낚시를 하다 무왕의 어머니가 물을 기르고 빨래를 했다던 샘터를 보러 갔습니다. 그 샘을 마을사람들은 “용샘”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마신 샘물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용샘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생가터를 바라보며 1400년 전 한 여인과 한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물을 기르고, 밥을 해 먹이며 한 아이를 왕으로 만든 여인,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개구쟁이의 모습, 시간을 넘어, 삶을 넘어, 전해지는 어떤 짜릿한 느낌을 주더군요. 우리시대의 신화가 된 남자, 또 옛 신화의 남자.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이제 곧 추석이라 어머니께서 조카에게 먹일 송편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아이에게 먹일 송편을 만들고 있는 어머니의 주름지고 굳은살 박힌 손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굳은 살 박으며 이 땅에 살다간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에게 남겨준 유산 같은 것이라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게 해 준 것입니다. 전라도 놈이라 타 지역에 가면 긴장합니다. 혹시 빨갱이라 해서 경찰이 불러 세우지는 않을까? 사투리 때문에 금세 어디서 왔는지 들키면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을까? 소심하게 이런 생각을 갖고 좀체 외지로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창피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남원을 지나 경상도로 스스로 찾아가게 된 것이 노무현 당선 이후였습니다. 저에게 일종의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어디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인데요. 그땐 제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게 그가 준 자신감으로 무엇인가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설화를 찾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난한 제가 장비와 책들을 준비하는데 몇 해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행경비를 마련하게 되어 시작하게 되었을 즈음에도 몰랐습니다. 그저 몇 곳 다니고 그곳에 관련된 이야기 정도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전공자도 아니고, 관련해서 관심도 가져 본 적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수많은 설화들과 관련된 글을 읽어야 하고, 또 그 장소를 찾아 다녀야 하는 힘든 일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래도 해야 할 일. 그분을 위한 천도제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1.연못설화


서동설화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성장해, 공주와 결혼하고 왕이 되었다는 전형적인 성공신화입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신화적인 인물 서동에 관한 설화를 생각하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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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저수지의 용과 관계해 서동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말을 당시 사람들은 믿었을까? 한 개인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성공할 수밖에 없는, 태생부터 특출한 인물이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 나라를 세운 왕의 국조신화(國祖神話)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가 반대로 백제의 패망 직전의 왕에게 신화가 쓰여졌다는 점과, 왕이 되고 나서 그런 신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 왕이 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러 퍼트린 것인지도 궁금하더군요. 용과 관계된 인간이 왕이 된다는 당위가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 졌을까도 궁금했고요. 게다가 천상의 천제나 바다의 해신, 혹은 산이 많은 나라이니 산신과 관련되었다 하는 것이 더 권위 있을 법한데, 왜 작은 연못의 용과 관계했다고 했던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연못설화에 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익숙한 연못설화라 하면, 어릴 적 소풍날 늘 비가 오는 것이 저수지에 사는 용이 인간의 손에 꼬리가 잘려 하늘로 올라가면서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연못과 용이 관련된 것은 그리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연못설화를 찾아보니 서동설화가 아니라 “장자못설화”였습니다. 저에게는 생소한 장자못설화가 한국의 대표적인 연못설화라고 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살아오면서 한국의 설화에 참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화가 탄생된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연못설화, 제 긴 설화에 관련된 여행의 시작이 되게 한 설화입니다.


연못은 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니 천제도 해신도 산신도 아닌 용과 관계했다는 점에 관해서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은 지금도 중요하지만 당시에는 더 중요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水)


물은, 삶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상징성을 갖습니다. 인간은 물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재해라 불리는 홍수처럼 많은 양의 물은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물과 멀어져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됩니다. 문명 이전부터 물은 필요했고 문명 이후에는 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옆에는 물이 있어 왔습니다.


물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살던 수렵, 목축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전환은 물과 가까워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수렵과 목축을 위해 이동생활을 해야 했던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물에 의한 생존이었습니다. 정착생활인 농경사회로의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진 것은 이동생활에서 마주쳐야 하는 위협보다는 농경생활의 고단함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낯선 사람들과 마주쳐 이유 없는 폭력이 행사되어야 했고, 밤잠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습격,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약탈자들의 위협에 무리 지어 대항할 수 있는, 농경생활은 우연적이기 보다는 필연적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게 농경생활은 사람들을 물에 모여들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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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가까워질수록 맹수와 약탈자들의 위협은 줄어든 반면 홍수라는 위협은 커졌습니다. 그래서 홍수설화는 농경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생각됩니다. 대표적인 홍수설화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이야기는 생과 사, 구세계와 신세계를 구분 짓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물을 가까이 하게 되면서 만들어 지게 된 이야기. 홍수전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경문명사회로 진입한 곳에서는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홍수설화


고대국가 형성기이면서 수렵과 채취, 목축으로 살아가던 우리 선조들이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겪어야 했던 애환을 물에 녹여 냈던 이야기. 이 땅에 뿌리내려 살게 된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자 이 땅에 존재하는 연못을 통해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연못설화.


장자못설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홍수전설입니다. 장자못설화는 설화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구전으로 전해졌으며 화자와 지역에 따라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도 권선징악의 이야기 구조는 유지됩니다. 인간의 윤리의식 마저 정화를 시키는 물은 삶과 죽음을 넘어선 의미를 갖습니다. 그런 의미인 물에 지배층인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위해 신화에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백제의 옛 수도였다는 공주, 부여, 익산 지역에 전해지는 장자못설화가 그렇습니다. 공주 장자못부터 찾아가 보았습니다.



공주 장자못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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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군 우성면 개재리(현 옥성리)라는 마을에 장자못이라고 하는 못이 있습니다. 이 못이 있는 자리에는 옛날에는 큰 장자(壯者: 부자富者)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자는 지독하게 인색해 남에게 쌀 한 톨 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합니다.


하루는 탁발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달라고 했습니다. 장자는 다시는 자기 집에 찾아오지 않게 하려 노승의 바랑에 쇠똥을 담아 주었습니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쇠똥을 받고 갔습니다. 일하고 있던 며느리가 이 광경을 보고 시아버지 몰래 노승을 따라가 시아버지를 용서해 달라며 노승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노승은 쌀을 받으면서 며느리보고 저녁 때가 되면 뒷산으로 올라가라 했습니다. 올라 갈 때 어떤 소리가 나더라도 뒤 돌아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며느리는 갓난 애기를 업고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다 보니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폭우가 퍼부었습니다. 며느리는 노승이 해 준 말을 잊고 뒤를 돌아다 봤습니다. 돌아 보니 자기가 살던 집은 물에 잠겨 없어지고 사람과 짐승들이 비명을 지르며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그대로 아기를 업은 채 바위가 돼 버렸습니다. 장자가 살던 집터는 못이 되었고, 그 이후 사람들은 이 못을 장자못이라 부른다 합니다.


인색한 부자가 자연재해로 징벌을 받는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이야기에 며느리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전설이 더해진 장자못설화입니다. 공주의 장자못설화가 다른 연못 설화와 다른 점은 망부석 이야기가 합쳐졌다는 점입니다. 다른 지역의 연못설화에서는 며느리가 마을 노인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재해를 피하는 것으로 결론 짓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주의 장자못에 망부석전설이 결합해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래야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공주의 장자못으로 향했습니다.



공주(公州)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본래 백제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합니다. 백제 패망 이후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쳤고, 경덕왕(景德王)이 다시 웅주(熊州)로 고쳤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의 공주(公州)로 고쳤다고 합니다.



연못의 지리적 환경


연못은, 충남 공주시 우성면 옥성리 140번지의 금강변에 있습니다. 공주에서 금강을 따라 서쪽으로 산등성이가 금강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산등성이 아래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로부터 강과 가까운 곳에 있는 논까지 산간지역에서 볼 수 있는 계단식 논이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넓은 평야 지대는 아니었습니다. 금강이 바로 옆에 장자못은 농업용수로서 저수지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설령 가뭄이 들어 금강이 말라도 대량의 농업용수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농경지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지리적 여건을 감안해 보면 전설이 생성되던 시기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농업으로 살아가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또한 장자못은 장자의 집이 침수되었다고 하지만 연못의 크기는 집이 들어설 만한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연못이 길게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부잣집 집터로 보기에는 협소했습니다. 마당 없이 단칸방 여러 개 이어져 있을 수는 있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부잣집 집터로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언제 홍수 때문에 범람할지 모르는 금강변에 집을 지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장자가 실존했던 인물이라 하더라도 농지가 적어 농업을 기반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장자못 인근 지역은 백제의 수도 웅진과 가까워 배를 이용한 상업이 발달했었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장자가 상업에 종사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장사를 하러 떠나 돌아오지 않아 부인이 돌이 되었다는 전북 정읍의 망부석과 남편이 왕의 명령으로 바다를 건너 왜에서 돌아오지 않아 부인이 돌이 되었다는 경주 치술령 망부석을 통해서 생각해보면 장사든나 외교적인 일로 물을 건너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해안가와 강가의 포구였던 지역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점으로 생각했을 때, 금강변에 위치해 있는 장자못에 망부석설화가 더해진 것은 부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공주 장자못의 지리적 환경을 통해서 확인된 것은 홍수전설이 생성될 수 있는 지역이며 망부석 설화가 결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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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환경


공주 장자못의 지리적 특성을 통해서 망부석 설화가 홍수설화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이제는 망부석 설화를 통해서 어떤 시대적 환경 때문에 이야기가 만들어 졌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장자못설화에서는 남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짐작해 보면, 망부석 전설은 출어, 행상, 부역, 관리 등용의 이유로 남편의 부재와 기다리던 여인이 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해안가지역에서 망부석전설이 전해져 오고 공주 장자못이 왕궁 근처 금강변에 자리해 치술령 망부석처럼 국가관리인 남편일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며, 강변에서 어로 작업을 나간 남편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강변의 수로를 이용해 바닷가로 나가 상업에 종사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남편의 부재의 이유가 궁금해 집니다.


문헌상으로 전해지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망부석설화는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열이전(列異傳)입니다. 부역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 자식과 함께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망부석설화인 박제상설화도(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박제상전설) 마찬가지입니다. 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내물왕의 아들 미해를 탈출시키기 위해 홀로 남아있다 왜왕에게 붙잡혀 고문 끝에 죽은 박제상과 그의 아내의 이야기 역시 국가 부역의 이유였습니다. 문헌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점은 남편의 부재는 불안한 국가정세와 관련이 깊었을 것이다.


고구려와 왜에 왕자를 볼모로 보내야만 했던 신라 내물왕 시기에 망부석설화가 생성되었습니다. 공주 장자못설화가 만들어졌던 상황도 고구려 장수왕과의 전투에서 개로왕이 전사하자 웅진으로 천도해야 했던 백제 문주왕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라와 백제의 국력이 약해지던 시기에 망부석설화가 장자못설화에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 시기에는 남편의 부재 만이 아니라 남자의 부재가 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리적, 시대적 환경을 통해서 설화를 재구성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 두 요인만을 가지고 설화의 내용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의 재구성이 아니라 설화의 재구성이라는 점을 이해해줬으면 합니다.


이야기의 목적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해 웅진으로 천도해야 했던 문주왕 시절 왕궁 근처에서 살아가던 남자들은 새로운 수도 건설을 위해 징집되었을 것입니다. 남성의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시대에 남편의 부재는 가족의 삶에 위협이었겠죠. 남자들의 부재로 인해 삶은 피폐해졌고, 그 원망과 저항의식을 담아낸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색한 부자는 무능하고 탐욕스런 지배층을, 연못은 국가이자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며느리는 민중들의 저항의식을, 노승은 민중들의 기복신앙적인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징들이 엮어 이야기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선화공주가 세간에 떠도는 서동과의 염문 이야기 때문에 왕궁에서 쫓겨난 것처럼, 장자못설화의 목적도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직접적인 소통 수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민중들이 권력자에게 직접 말할 수도 없었던 시대에, 설화는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소통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탐욕스런 권력자들 때문에 민중들의 삶이 어려운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생각을 뒤로하고 지금도 천년 전처럼 장구하게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공주 장자못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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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링크


구린내 이야기


『장자못에서 낚시를 하는데 큰 고기가 물렸다. 크기가 너무 커 물고기를 그냥 끌어올릴 수 없어 잡아채 물고기를 멀리 날려 보냈는데 구름내라는 동네에 가서 떨어졌다. 고기가 너무 큰지라 마을 사람들은 영물이라 하여 누가 가져가 먹지 않았다. 그러다 물고기는 죽어 썩어가기 시작했다. 동네가 썩는 냄새로 가득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구린내(현재의 우성면)로 지었다고 한다』


1946년에 마을 청년들이 장자못설화를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 생각해서였는지 장자의 재산을 꺼낼 요량으로 물을 퍼냈답니다.  아무래도 다음의 이야기가 마을 청년들에게 호기심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집이 물에 잠긴 뒤, 천 삼백여 년이 지났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이면 물위에 헌 갓이 떠다니고 못 속에는 베 짜는 소리가 달가닥달가닥 들려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람 없는 날에 물속을 들여다보면 그때 부자 집에서 쓰던 살림살이 같은 것이 물속에 보인다고 합니다.』 [충청남도 공주시 향토문화자료]


그렇게 눈 앞에서 보이는 것 같고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장자의 재산. 하지만 장자의 재산은 찾지 못하고 연못에 살던 물고기들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썩어가는 물고기 악취가 고을 너머까지 퍼졌다해서 우성면을 전에 구린내마을이라 했다 합니다.


금강변을 따라 공주로 향하는 길에는 또 다른 전설이 깃든 연못이 있었다 합니다. 공주 소학 삼거리에 있었다던 “용못”입니다. 장자의 이야기에서 망부석의 이야기가 빠지고 용이 승천한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장자의 이야기만으로 완성되기에 충분할 텐데 갑자기 용은 왜 등장하는 것일까? 또 공주 뿐만 아니라 백제의 수도였다는 부여 마룡지와 익산의 연동제에서도 용의 승천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공주 소학삼거리 용못으로 향했습니다.






꼭그래야하나?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