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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김해 김씨라는 본관의 정체성(?)을 안 다음 들은 얘기 가운데 하나가 “너는 인천 이씨나 양천 허씨한테는 장가 못 간다.” 하는 농담반 진담반이었다. 까마득히 세월을 거슬러 올라 금관가야를 세운 김수로왕에게 인도에서 허씨 왕후가 찾아왔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에게는 김씨성을, 몇 몇 왕자에게는 허씨 성을 쓰게 했기에 성은 달라도 한 조상을 둔 동성동본이고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도 그렇다는 얘기였다. 김해김씨만 해도 수백만인데 다른 성씨도 있다 하니 김해 김씨에게 이 무슨 차별이냐 어린 마음에 비분강개했던 기억이 난다.


근 2천년 전의 국제 결혼 때문에 2천년 뒤의 수십 수백만에게 일가붙이의 테두리를 드리우고 멋모르고 짝을 지을 경우 ‘근친상간’이 되는 이 희한한 상황의 중심에는 역시 인도 사람이라는 허황옥, 즉 허왕후가 서 있다. 언젠가 허왕옥의 바닷길 루트를 더듬은 다큐멘터리도 보았고, 거기 등장하는 역사학자의 열변도 들었으며 허황옥의 오빠라는 장유화상이 세웠다는 절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지라 허황옥이 정말 인도에서 왔다고 확신은 못해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겠지 무심히 넘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작년 명망 높으신 법륜 스님의 역사 강의를 읽으며 아연실색, 나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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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원래부터 불교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이었거든요. 삼국 가운데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기보다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국명은 신라로 하기로 하되 신라가 가야를 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사실과 다르다. 일단 가야는 하나가 아니었다. ‘합의 통일’도 아니거니와 신라에 귀순한 것은 금관가야였고 대가야는 신라와의 전쟁 끝에 스러졌다. 국명을 신라로 하기로 하되 가야를 포용하기로 했다는 주장은 어느 사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누가 소설로도 쓴 적이 없는 스님의 창작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충만하실지 모르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많이 부족하신 듯 싶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분은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인 건 맞지 않냐? 삼국유사에도 나오고 말이야!” 라며 치고 들어오실지도 모르겠다. 맞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고 다 사실은 아니다. 그렇게 치자면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건너간 ‘움직이는 섬’이 지금도 동해 바다 어딘가에 떠 다니고 있어야 하고 수로왕과 탈해가 벌이는 서유기 닮은 둔갑술 겨루기도 실제 일어났던 기적으로 진지하게 연구돼야 하지 않겠는가. 삼국유사에는 그보다 더 황망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증왕의 거시기 이야기를 비롯하야...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런데 왜 유독 허황옥, 인도에서 온 허왕후 얘기는 큰 거부감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져 수백년을 이어왔고 20세기 한국 사람끼리도 김해 김씨와 양천 허씨는 한 가족이라는 기괴한 신화를 수용하게 만들었으며, 법륜 스님으로 하여금 저렇게 확신에 찬 허위 사실을 설파하시는 무리수를 두게 하였을까. 이 의문이 드시는 분들은 이광수 교수가 쓴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를 잡고 하루만 투자하시면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알아 왔고 믿어 왔고 수용해 왔던 사실들이 얼마나 거침없이 조작된 것이며 맹랑한 거짓말의 범벅이며, 쓸데없는 허장성세로부터 비롯된 허섭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한 ‘페이크 뉴스’가 팔만대장경이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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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김해 김씨들이었다. 금관가야의 왕손으로 김무력에서 김유신으로 이어지는 대활약으로 삼국 통일의 대공신이 됐지만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몇 번 역모에 휘말려 풍지박산이 난다. 미추왕릉에 김유신의 혼령이 찾아가 “내가 세운 공이 얼만데 내 후손들을 다 잡아죽이다니 신라를 떠나겠소이다.” 하며 울분을 토했다는 설화는 그 시국을 반영한다. 그렇게 몰락한 김해 김씨 가문들은 자신들의 시조를 드높여야 했고 그 와중에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나라 (정작 인도는 그랬던 적이 없으나) 인도에서 온 공주를 끼워 넣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허황옥의 조국이라는 ‘아유타’는 가야 시대의 인도에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후 창작(?)은 끊임없이 이뤄진다. 자기 절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스님들은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을 끌어댔고 허씨들은 멀쩡히 기록된 자신들의 시조 고려 개국공신 허선문을 허황옥의 30세손으로 바꿔 놓게 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 재임 시절 김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했고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도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대규모로 손을 보았다.


“허씨들은 수로를 허황후와 관련지어 허황후를 전설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상의 역사적 인물로 보고 수로를 치켜세움으로써 덩달아 허황후의 역사성도 더 부각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 중)


이 유서 깊은 소설들은 현대에 들어와 집대성되고 역사적 사실화의 코스를 순탄하게 밟는다. 그런데 그 효시는 매우 우스꽝스럽다. 시작은 자그마치 ‘아동문학가’ 이종기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쓴 ‘가락국 탐사’였다. 그런데 이걸 또 한 번 자그마치 역사학자들이 고스란히 그 뼈대를 받아안으면서 권위를 불어넣고 ‘학설’의 향기를 뿌려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놓았다.


어린 시절 수로왕릉에 소풍 가면 ‘쌍어문’, 즉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문양을 근거로 인도에도 똑같은 것이 있다 하여 허왕후의 인도인설을 설파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 역시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발로 뛰는’ 연구의 결과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현 파키스탄의 어떤 지역에서 지나가는 트럭에 그려진 쌍어문을 보고 허왕후의 도래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이러면 또 누군가는 이러실 것이다. “어쨌든 쌍어문이 공통적으로 있는 건 사실 아니냐?” 이리도 안타깝고도 가냘픈 항변을 이광수 교수는 싱긋 웃으며 즈려밟듯 진압해 버린다. 책 내용을 구어체로 바꿔 옮긴다.


“그 쌍어문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만들어진 게 기껏해 봐야 정조 때에요. 2백년 된 거란 말입니다. 수로왕릉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아무런 부속 건물이 없이 황량 그 자체였다니까. 그리고 그 쌍어문이라는 것이... 물고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쌍(雙)이 중요한 거요. 인도 가면 물고기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 별별 동물에다 꽃, 나무까지 서로 대칭해서 표현하는 문양이 옛날부터 지금까지 널려 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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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책에는 안 썼지만 이광수 교수는 이렇게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뭣이여. 쌍으로 노니까 인도풍 아니냐고? 확 광화문 앞에 해태 한 쌍도 인도 것이냐. 참말로. 뚫린 입이라고...”


어차피 우리가 아는 역사에는 수많은 허위와 창작과 조작과 거짓이 뒤섞여 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 중에 그 이전을 들여다본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어차피 남아 있는 재료를 가지고 인간의 판단과 상상이라는 솜씨를 부려 만들어낸 것이 역사라는 요리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춧가루에 톱밥을 쓰고 무게 늘리기 위해 생선 뱃속에 쇠구슬 넣는 작자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으며 그것이 진짜 우리 요리라고 뻗대며 2천년 전 극동에 식민지(?)를 개척했다고 믿는 인도판 ‘환빠’들과 짝자꿍을 하는 엉터리 요리사들에게 어찌 놀아날 수 있겠는가.


누대에 걸친 사람의 거짓말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어떤 경로로 그를 사실로 받아들이며, 그 결과 어떤 거짓의 신전이 생겨나는가를 목도하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보시기 바란다. 보다가 웃음이 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고 그 후에는 허탈해진다. 이 책은 역사서라기보다는 어떻게 거짓이 기억을 정복하는가에 대한 고발장이다. 읽다 보면 김해 김씨로서 수로왕 할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어진다. “거 마누라 하나 제대로 소개 못 해가지고 설랑!” 그러면 수로왕 할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실 게다. “이봐 내 마누라 가지고 장난친 건 내가 아니라고.”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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