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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차베스의 성공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국제원유가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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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2013년까지, 2008년 전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석유 수요가 줄었던 한 해를 제외하곤 국제원유가는 계속 올랐다. 여기에 한 가지. 석유거래는 기본적으로 장기계약이다. 유가는 항상 변한다. 하지만 이렇게 변하는 유가가 시장 가격에 바로 반영되어 기름값이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정유업계에선 말한다. 그래서 국제유가가 폭락해도 석유제품의 가격은 그렇게 크게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뭐 유조선으로 실어나르는 물류비용과 정유설비 비용이 워낙 높기 때문에 석유제품의 원가변화가 큰 의미가 없긴 하다).

하지만 산유국 입장에서 보자면 2002년부터 2013년까지는 최고의 황금기였음이 분명하다. 위의 차트가 보여주지 않는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원유가 가장 비쌌던 시기였음을.

그리고 이 당시의 사회지표들을 보면 차베스가 유가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사회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애썼다는 것은 분명히 볼 수 있다.

1. 영아사망률 감소: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000명이 태어나면 60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던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집권 기간 동안 계속 떨어져 20명 이하로 줄었다. 이는 미국의 금수조치로 석유를 구할 수 없었던 쿠바에 석유를 주고 그만큼 의사들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2. 빈곤률도 내려갔다. 한때 60%에 달하던 빈곤률은 보수적인 평가를 하는 기관들에서도 20% 중반대까지 내려갔다고 인정한다.

3. 석유 시추 이후 비석유부분이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가 넘었다. 차베스 정부는 석유에 의존하는 베네수엘라 경제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들이었다. 특히 농업. 전체 경작 가능경지의 70%를 전체 인구의 3%가 가진 나라였던 베네수엘라는 농업이 성잘할 수가 없었다. 토지개혁 없이 농업 생산성이 높아진 사례가 어디에 있는가?

4. UN 인간개발지수는 모든 지점에서 개선되었다.

헌법의 연임 제한 규정을 풀어가면서까지 연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지자자들이 원하는 것을 차베스가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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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차베스 개혁의 허실

차베스의 반대자들은 차베스가 강압적으로 자본가들의 사유물을 뺏아서 그의 지지자들에게 나눠줬던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과 거리가 있다. 이들이 개인의 사유물을 베네수엘라 정부가 갈취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차베스가 2001년에 추진했던 토지개혁이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토지를 1~50평방 킬로미터로 제한하고. 사용하지 않는 토지에는 세금을 물리며, 개인이 사용하지 않는 땅을 정부가 지대를 지불하고 수용, 땅이 없는 이들에게 배포한 이 토지개혁은 차베스의 많은 정책들이 그랬듯 작전명이 붙었다. 19세기 농부들의 지도자였던 에세키엘 자모라의 이름을 딴 미션 자모라.

차베스의 반대자들은 다른 나라의 토지개혁은 개인의 사유권을 훨씬 더 제한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감는다. 사실 우리만 하더라도 수확한 쌀의 30%를 5년간 지주에게 주면 그 땅의 소유권이 지주에서 농민에게 옮겨가도록 만들었잖는가. 그래서 남아시아에서 아직도 토지개혁이 안 된 국가들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치는 토지개혁의 형태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주들로부터 수용된 땅은 ‘유휴지’였다. 지주들 땅인데, 안 쓰는 땅. 지주들이 저항하기 보단 말만 오고간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몇 년간 경작을 하지 않은 땅을 농토로 쓰긴 힘들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는 한국의 풀처럼 나무가 자라는 지역 되겠다. 이런 땅에서 농사를 지을려면 트렉터가 아니라 벌목 장비부터 필요하다. 2007년부터 소작농에게 직접 분배했다는 땅들이 이 모양이었기 때문에 딱히 실효성은 없었다. 소작농이 그런 장비들을 갖고 있을리가 없잖는가?

경작하지 않고 있는 땅을 주는 것임에도 지주들의 반발은 상당했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지주들이 고용한 암살자들에 의해 130여명의 소작농이 목숨을 잃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2009년 1월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정부는 270만 핵타르의 유휴지를 소작농 18만에게 분배했다고 선전했지만 이 땅에서 실제로 작물들을 재배하는데 성공한 농부들은 많지 않았다.

아직도 차베스에 미련이 많은 한국의 좌파들은 우리가 보는 외신의 대부분이 미국 매체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중동 왕족들에게 눈의 가시나 다름 없는 알 자지라나 영국의 리버럴한 매체인 가디언은 미국의 시각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들 매체는 차베스 시절 1200개에 달하는 사기업을 국유화했기 때문에 정부 부채가 급증했고, 이 부채가 현재 베네수엘라 위기의 시발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매체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은, 그 1200개 회사들 중 상당수가 농업 관련 기업이었다는 점이다.


베네수엘라에서 생산하는 석유의 70%는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인들이 먹는 식량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사 왔다. 이거, 냉전 시절의 미국과 소련의 관계 비슷했던 셈이다. 석유는 소련에서 사오고 미국이 밀을 팔았던. 체제가 불안했던 소련은 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치다 환경재앙을 여러 곳에서 일으켰다. 차베스 역시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애썼지만 토지개혁을 사유재산에 대한 침탈이라고 주장하는 지주들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성공하진 못했다. 일부라도 확보할 수 있었던 농지에서 생산량을 증가시키기 위해 무리해서 농업 관련 기업들을 국유화 했지만, 이것 역시 성공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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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정치의 소멸

어느 국가든, 주기적으로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된다. 이 경제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잘 넘어서는 국가는 대부분 정치가 본연의 역할을 잘 하는 국가들이다. 이해관계의 조정과 같은 사회갈등 조절, 적절한 결론을 내리고 자국민을 이끄는 리더십과 같은 것이 잘 돌아가고 있으면,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된다.

푼토피호 조약이 맺어졌던 시점에선 나름 혁신적인 해결법이었지만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선 스스로가 적폐가 되고 있었다. 정책이 비슷비슷해지고, 인물도 그 인물이 그 인물이 되고, 서로가 적당하게 부패한 상태로 권력과 자원을 독점했다. 그렇게 적폐가 되어버렸으니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나선 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갔으면 뭔가 스스로 달라지기 시작했어야 하는데 끝까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겠다고 발버둥쳤다.

그 마지막 발버둥이 2002년 벌어졌던 48시간의 쿠테타였다. 상의 의장이 대통령에 지명되고, 그 대통령을 미국이 낼름 인준해줬던 것은 푼토피호 조약을 맺은 이들이 미국과 공동운명체임을 만천하에 폭로한 거나 다름 없었다. 스스로 적폐임을 자인해버린 정치조직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48시간의 쿠테타엔 이들도 개입되어 있었고, 정당이 헌정을 중단시키는 짓에 참여했으니 이들은 바로 외면 당했다. 이런 상태에 적절한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이 없으면 대체로 스스로 자멸하는 길을 밟는다. 이들은 2005년 12월 총선에 불참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푼토피호 조약을 맺었던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 사회기독당(COPEI Social Christian Party), 그리고 민주공화동맹(Unión Republicana Democrática URD)이 세 정당 중에서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만 남고 다른 두 정당은 소멸되었다. 2017년 현재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들 중에서 3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정당은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과 베네수엘라 공산당 뿐이다.

그렇다고 소멸된 두 정당에 있었던 정치인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12년 10월, 차베스가 마지막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뤘던 선거에서 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는 엔리케 카프릴레스 라돈스키(Henrique Capriles Radonski)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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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생으로 베네수엘라 바루타시의 시장이었으며 2008년부터 2012년까진 미란다주 주지사였다. 나름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는 이 분, 지금 정당은 정의제일당(Primero Justicia) 소속이다. 2000년부터. 그 전엔 푼포피호 동맹에서도 보수적인 정당이었던 사회기독당(COPEI Social Christian Party) 소속이었다. 2017년 AP통신은 그를 이렇게 평한 바 있다.

“Capriles is a scion of one of Venezuela's wealthiest families, but his sometimes vulgar talk and mannerisms echo the late Chavez's populist style and he has tried to reach out to Chavez supporters."

"베네수엘라의 가장 부유한 집안 후손인 카프리는 저속한 발언과 매너리즘으로 죽은 차베스를 모방해 차베스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관련기사 - 링크)

음... 어째 이 분 연상되지 않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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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이렇게 자멸각으로 달리는 동안, 차베스는 권력을 사유화하는데 사실상 앞장섰다. 그리고 차베스 지지자들은 열광적으로 차베스의 그런 행위를 응원했다. 이야기 했잖은가? 남미엔 군 출신의 강력한 지도자인 까우디요에게 로망이 있고, 차베스가 충실하게 따르려고 했던 것은 시몬 볼리바르라는 까우디요였다고.

문제는 원유 의존 경제를 탈피하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면 정치세력간에 일정한 합의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5년간 소출의 30%를 지주에게 주면 소작인이 땅을 가질 수 있었던 혁신적인 농지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은 농지개혁이 북한에서 먼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선진적인 형태가 도입되지 않으면 체제 자체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에선 이런 최소한의 합의조차 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바마형이 작년에도 말했잖는가.

“대부분의 문제들이 흑백으로 간단하게 나눠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100퍼센트 맞다 하더라도, 그 일을 이뤄내는 데는 타협이 필요합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출처 - 링크)

구체제가 자신들의 이권을 어느 정도 내놓고 체제 유지를 하는 데 실패했다. 그에 반발하는 대중의 요구에 힘 입은 새로운 이가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민주주의에는 그닥 관심없는 21세기의 시몬 볼리바르가 되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이 아수라장에서 한 나라가 거저 먹는 경제체제를 탈피하고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나선다는 건 쉬울리가 없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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