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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01.19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 농성 진압 완료

 

‘교토대 설립 이후 최고의 인재’라 불리는 학번이 있다. 69학번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69년도 도쿄대 입시 중지를 발표하며 당시 최상위권 수험생들이 대거 교토대로 발걸음을 옮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런 소문이 퍼졌을 정도니 당시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작년 한국의 ‘수능 연기’ 발표와는 차원이 다른 파장이었을 것이다. 사상초유의 도쿄대 입시중지 발표가 나온 것은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의 야스다 강당 점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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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세계 젊은이에게 격동의 한 해였다. 파리에서 시작된 68혁명의 바람은 샌프란시스코의 히피를 거쳐 서울의 통기타 세대에게까지 번졌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가 결성됐다. 우리로 따지자면 ‘전대협’이나 ‘한총련’쯤 될까. 물론 전적으로 68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1960년 미ㆍ일 안전보장협정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투쟁 이후 일본 좌익의 위상은 이미 치솟고 있었다. 공산당은 의회주의와 평화혁명주의를 내세우며 순조롭게 당세를 확장했다. ‘신좌익’을 표방한 전공투는 공산당을 보수정당이라 비판하며 폭력혁명과 가두투쟁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대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원생, 재수생, 고등학생까지 참여했다.

 

한편, 전공투 결성 직전 도쿄대 의대에서는 큰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학교 당국이 인턴제도 폐지 반대를 내걸고 무기한 파업을 벌이던 의대생 17명에게 제명 처분을 내리며 시작된 갈등이었다. 실랑이를 벌이다 학교 간부 몇 명을 감금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문제는 감금 현장에 없었음에도 제명 처분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밉보인 학생들을 이때다 싶어 정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학생들은 제명 철회를 요구하며 야스다 강당을 기습 점거했고, 이틀 뒤 총장의 요청으로 경찰 기동대가 투입돼 학생들을 끌어냈다. 그러나 학교 측의 강경책은 오히려 전공투 개입의 명분이 되었다.

 

7월 2일 신좌익 학생 250명이 야스다 강당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했고 뒤따라 ‘도쿄대 전공투’가 결성됐다. 전공투는 도쿄대를 ‘제국주의 망령이 배회하는 반동 대학’으로 지목하고 해체를 주장했다. 도쿄제국대학의 이름으로 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한 대가로 지금까지도 온갖 특권을 누리고 있는 ‘적폐(?)’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징계취소를 요구하는 교내 갈등에서 반(反)대학 투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시계탑과 총장실, 강당에는 학생들의 적기(赤旗)가 게양됐고 정문에는 마오쩌둥 초상화가 걸렸다. 10월 12일에는 1877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10개 학부 모두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갔다. 징계가 취소되고 총장이 사임했지만 전공투는 점거를 풀지 않았다. 학생 자치권 확대가 미흡하다는 이유였다. 야스다 강당 앞에서 학생 7천여 명이 모인 전국학생총궐기집회가 열리는가 하면, 급기야 단체 교섭을 시도하던 하야시 겐타로 문학부장이 전공투에 8일간 감금되기까지 했다.

 

마침내 1969년 1월 18일 경찰기동대 8,500명이 야스다 강당에 투입됐다. 공사장 안전모에 오함마로 무장한 학생들은 화염병과 벽돌, 독극물을 경찰에 퍼붓고 강당에 불을 질렀다. 경찰 또한 최루탄과 소방호스로 학생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는 한편 헬기를 띄워 최루가스를 살포했다. 중세시대 공성전을 방불케 하는 싸움이었다. 다음날 오후 5시 46분, 35시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야스다 강당이 ‘함락’됐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던 시계탑의 방송은 “우리의 방송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국의 학생, 시민, 노동자가 우리의 투쟁을 이어나가주십시오. 다시 해방 강당을 되찾는 그날까지 방송을 중지합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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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투 세대를 소재로 한 영화 <마이 백 페이지>는 진압이 끝난 뒤 텅 빈 야스다 강당에서 시작된다. 곧이어 보여주는 벽 한편엔 낙서가 가득하다. “연대를 구하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이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힘을 다하지 않고 꺾이는 것은 거부한다.” 그러나 그 ‘쓰러짐’의 결과는 ‘꺾임’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참담했다. 이틀간 학생 631명 전원이 연행됐고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법원은 재판소 앞마당에 천막을 친 채 재판을 강행했고, 112명에게 징역 3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했다. 진압 직후 일본 대학의 80%에서 활발한 투쟁이 벌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야스다 강당 사건은 일본 학생운동 과격화의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듬해 전공투보다도 더 과격한 성향의 적군파가 등장해 요도호를 북한으로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일본 학생운동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대를 구하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상 그들의 농성은 ‘고립’의 연속이었다. 자신만의 ‘정의’에 갇혀 상대를 반동으로 몰아세우며 내분을 조장하기 일쑤였다. 전 학교를 바리케이드로 봉쇄하려는 계획에 반대하는 공산당 청년조직인 민청을 적으로 돌린 것은 약과였다. 최고의 촌극은 농성 막바지에 펼쳐졌다. 중핵파와 사청동해방파 등은 경찰과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한 반면, 혁명적맑스주의자파는 조직보존을 이유로 빠져나갈 것을 결정한다. 서로를 배신자와 모험주의자로 핏대 세워 비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자신에 대한 확신을 동시에 담아낸 강당 벽의 낙서와 달리 그들은 후자에 훨씬 큰 방점을 찍었고, 어느새 야스다 강당은 그들만의 게토가 돼버린 지 오래였다.

 

극렬한 내분,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아집, 모험주의,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명분과 투쟁방식. 전공투의 몰락과정은 한국의 어느 자칭 ‘진보’ 정당의 마지막과 너무도 닮아있다. 그놈의 장군님 하나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진 어느 ‘봉건 극우’ 정당. 없어진 정당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시 시작하는 건 그들의 정치적 자유라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 지은 이름만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봉건적 유산과 확실히 손 떼고 오로지 ‘민중’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정당이 되기를 기원한다.

 

1969년 1월 19일, 6개월 간의 야스다 강당 농성은 끝났다. 야스다 강당에는 아직 불에 그슬린 흔적부터 깨진 유리창까지 그날의 자취가 남아있다고 한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직접 찾아가보셔서 눈으로 보고 느끼며 과연 어떤 것이 새로운 진보의 길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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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위 글은 독자토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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